[2009년] 오바마, 만화 ‘스파이더맨’에 등장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만화 '스파이더맨'에 등장했다.
마블의 만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583'은 보너스 스토리로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의 목숨을 구한 스파이더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9일 보도했다.
이 특별판에서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은 취임식 당일인 20일 자신과 똑같이 변장한 가짜 오바마의 등장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마침 취임식 사진을 찍다 이 상황을 목격한 스파이더맨의 분신 피터 파커는 "대통령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스파이더맨으로 변신해 액션을 취한다. 스파이더맨은 오바마가 좋아하는 스포츠인 농구를 이용해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고, 오바마 당선인을 도와준다.
오바마 당선인은 목숨을 구해준 스파이더맨에게 주먹을 마주치는 인사로 감사를 표한다. 대선 캠페인 당시 폭스뉴스의 앵커 E.D. 빌은 경선 승리를 축하하는 오바마 부부의 주먹인사를 두고 "테러리스트의 주먹질"이라고 비꼬았다가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마블의 편집장인 조 퀘사다는 "오바마 당선인이 어린 시절 '스파이더맨' 만화를 수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특별판을 만들기로 했다"며 "백악관에 괴짜 대통령을 갖게 돼 정말로 멋지다"고 말했다.
퀘사다 편집장은 과거에도 마블 만화에 많은 대통령이 등장했지만, 오바마 당선인처럼 비중있는 역할을 맡지 못하고 단역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오바마 당선인은 어린 시절 스파이더맨과 코난-바바리안 만화를 수집했었다고 고백했으며, 상원의원 시절 웹사이트에는 슈퍼맨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을 게시했었다.
(런던=연합뉴스) /한겨레 2009-01-09 오후 08:47:35
[1976년] 주은래 전 중국 총리 사망
← 주은래 前 중국 총리.
모택동에 이어 당 서열 2위였던 주은래 당 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가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57분 방광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78세였다. 중국 공산당 초창기부터 50년 이상이나 혁명동지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온 주은래의 사망 소식에 모택동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릴 뿐 그를 조문하지 않았다. 모택동 자신도 역시 폐와 심장 등에 이상이 있어 움직이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주은래의 죽음은 그날 발표되지 않고 이튿날 새벽에서야 내외에 공표됐다. 장례 차량이 팔보산 혁명묘지로 향하는 거리에는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북경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다.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노동 인민문화궁에서 거행된 일반인 조문에는 건국 이래 26년간 수상을 역임한 위대한 지도자와의 영원한 이별을 애도하는 인파가 줄을 이었다. 그 수가 자그만치 백만명에 달했다.
도쿄와 파리까지 유학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주은래는 자신의 계급을 뛰어넘어 일생을 중국혁명에 바쳤다. 대학 재학 중 5.4운동 참여로 시작된 그의 혁명역정은 중국 공산당 파리지부 창설, 상해 봉기 지도, 남창폭동 지도, 광주코뮌 조직, 대장정 참가, 항일연합전선 결성 등으로 이어졌고, 1949년 공산정권 수립뒤 사망할 때까지 총리로서 중국혁명의 완수와 현대 중국의 건설에 온 힘을 쏟았다.
[1963년] 프로레슬러 역도산 내한
← 한국 태생의 일본 프로레슬러 역도산. 그는 원래 스모선수였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프로 레슬러 역도산(力道山)이 1963년 1월8일, 30여 년 만에 처음 조국 땅을 밟았다. 300여 명의 환영객들은 트랩을 내려오는 역도산(180cmㆍ140kg)을 발견하고 달려가 서로 꽃다발을 전달하려고 북새통을 이뤘다.
역도산은 일본명 리키도상이고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이다. 함경도에서 태어나 16세 때인 1940년 일본에 건너가 스모선수로 컸으나, 일본인이 아니면 최고자리인 요코즈나가 될 수 없다는 스모계 규정에 반발, 1950년 9월 스모계를 떠나 프로레슬러의 길을 걷는다. 이후 1년간 미국에서 선진 프로레슬링 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와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발족시켰다.
1953년 2월19일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프로레슬링 국제시합이 도쿄에서 열리자 경기장 앞은 몰려든 인파들로 큰 혼란을 빚었다. 일본 대표로 역도산이 출전한데다 당시 한창 인기를 모으고 있던 세계태그챔피언 샤프형제가 출전했기 때문이었다. 역전광장 등 220여 곳에 설치된 옥외TV 앞에는 중계를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관중들은 역도산의 특기인 ‘가라데 촙(당수)’으로 거구의 서양인을 무너뜨리는 장면에 열광했다. 2차대전 패전국으로 절망에 몸부림치던 때였다. 프로레슬링 붐은 막 싹트고 있던 TV보급율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일본 전역을 들끓게 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일본 NTV가 프로레슬링 독점중계로 흑자로 돌아설 정도였다.
사업가로도 성공, 한때는 일본 100대 자산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지만 1963년 12월 뜻하지 않게 야쿠자간의 싸움에 휘말려 칼을 맞고 서른아홉의 나이로 숨졌다. 역도산이 이 해 연초 방한했을 때 약속했던 국내 스포츠센터 건립 지원도 그의 죽음에 따라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조선
[1935년] 프레슬리 Elvis (Aron) Presley 출생
← 프레슬리(1968)
1935년 1월 8일 태어남 / 1977년 8월 16일 죽음 "엘비스는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그는 음악·언어·의상 등 사회 전 분야에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새로운 사회 혁명과 다름없었으며, 1960년대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했다. "- 레너드 번스타인
프레슬리는 20세기 대중음악을 이끈 로큰롤의 제왕이다. 그는 흑인의 목소리를 가진 백인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흑인들의 음악인 리듬 앤드 블루스를 로큰롤에 접목시켰다. 그는 미시시피 주의 투펄로에서 태어나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서 자랐다. 처음에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트럭 운전사로 일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음반을 제작하러 갔다가 제작자의 눈에 띄어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리듬 앤드 블루스와 컨트리 앤드 웨스턴을 혼합한 그의 음악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1956년 발표한 <하트브레이크 호텔 Heartbreak Hotel>을 시작으로 수십 편의 앨범이 100만 장 넘게 팔렸으며 그의 인기는 컨트리, 팝, 리듬 앤드 블루스 청중들에게 확산되어갔다. 그는 또한 총 33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도 인기를 모았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의 음반은 사망 5일 만에 800만 장이 팔리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96년] 미테랑 프랑스 전대통령 사망
← 미테랑
1916. 10. 26 ~ 1996. 1. 8
프랑스의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이 1996년 1월 8일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미테랑은 파리대학 졸업후 언론인 겸 변호사로 활동하다 1981년 대통령선거에서 사상 최초의 사회당 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로 1986년 3월 국민의회선거에서 우파 연합이 과반수를 차지하자 우파 정당인 공화국연합의 J.시라크를 총리로 임명, 좌파 대통령과 우파 총리라는 '좌우동거체제'를 만들어냈다.
1990년 연두교서에서 유럽연방구상을 발표하고, 이어 1993년 유럽연합의 발족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93년 9월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한-불 정상회담을 갖고 한국과의 통상, 기술교류 확대를 논의하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가 약탈해간 규장각도서 반환문제에 합의하기도 했다. /조선
[1994년] 서울 제2기 지하철(6호-7호-8호선) 공사 착공
1989년 11월 3일에 제2기 지하철건설본부가 설립되어 5~8호선 건설이 추진되었다. 5호선은 1990년 6월 착공되어 1995년 11월 왕십리역~상일동역을 잇는 14개 역의 강동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1996년 12월 여의도역~왕십리역의 도심구간 13개 역이 개통됨으로써 52.3㎞의 51개 역이 모두 개통되었다. 6호선은 1994년 1월 착공되어 2000년 12월 응암역~봉화산역의 38개 역 35.1㎞의 구간이 완전 개통되었다.
7호선은 1990년 12월 착공되어 2000년 8월 1일 신풍역~건대입구역의 15개 역 17㎞ 구간이 개통됨으로써 장암역~온수역의 42개 역 46.9㎞ 구간이 완전 개통되었다.
8호선은 1990년 12월에 착공되어 1996년 11월 모란역~잠실역 구간이 개통되었고, 1999년 7월 암사역~잠실역의 4개 역이 개통됨으로써 암사역~모란역을 잇는 17개 역 17.7㎞ 구간이 완전 개통되었다. /naver
[1974년] 긴급조치 1호-2호 선포, 개헌운동과 관련보도 금지
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가 선포된 이후 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제9호가 해제될 때까지 2,159일간 소위 긴조 시대가 유지된 시기다. 74년 1월 8일 제1호 발동은 73년 12월 24일 YMCA회관 2층 회의실에서 종교계, 학계, 언론계 대표 30여명을 중심으로 개헌청원운동 전개를 위한 성명을 채택한 게 발동이었다.
당시 26일 김 전 총리가 라디오와 TV를 통해 유신체제에 대한 본질적인 차원에서 도전은 허용되는 자율의 한계 이탈 행위이며, 그 선동자는 처벌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 발언을 했다. 29일에는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하며 개헌운동중지를 강력하게 촉구하기도 했다고 진실위는 밝혔다.
상황이 긴박하게 움직이자 박 전 정권은 같은 날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하고, 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해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이때 긴급조치 제1호 위반자를 처벌하기 위해 비상 군법회의 설치를 위해 같은 날 긴급조치 제2호가 발동한 것이다.
진실위 보고서에 따르면 긴급조치 제1호의 첫 위반자는 개헌서명을 주도했던 장준하, 백기완씨다. 이들은 각각 15년의 징역형이 확정되었는데, 장준하는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지만, 백병원을 주거제한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1965년] 정부, 비전투병력 월남 파견 결정
한국정부는 1964년 9월, 이동외과병원(移動外科病院) 장병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10명을 처음으로 베트남에 파견하였다. 이어 1965년 1월 8일에는 각의(閣議) 결정에 의해 베트남에 비전투원 2,000명으로 구성된 군사원조단을 파견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파견결정은 베트남 정부와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고 있던 미국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 군사원조단은 전재복구를 위한 공병부대와 자체 경비병력으로 이루어졌으며, 부대 명칭은 '비둘기부대'였다. 비둘기부대는 그 해 1월 26일 국회에서 파병 동의안이 가결되고 2월 5일에 결단, 2월 25일에는 제1진이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에 도착하였다. /naver
[1942년] 영국 이론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Hawking, Stephen W.) 출생
← 호킹
옥스퍼드 출생. 1962년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대학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준비를 하고 있던 1963년, 몸속의 운동신경이 차례로 파괴되어 전신이 뒤틀리는 루게릭병(근위축증)에 걸렸다는 진단과 함께 1∼2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의 학문 인생은 이때부터 시작, 우주물리학에 몰두하여 1973년 ‘블랙홀은 검은 것이 아니라 빛보다 빠른 속도의 입자를 방출하며 뜨거운 물체처럼 빛을 발한다’는 학설을 내놓아, 블랙홀은 강한 중력을 지녀 주위의 모든 물체를 삼켜버린다는 종래의 학설을 뒤집었다.
1974년 영국왕립학회 회원이 되고, 1980년 뉴턴 ·디랙에 이어 케임브리지대학 제3대 루카시언 석좌교수(碩座敎授)가 되었다. 1985년 폐렴으로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아 가슴에 꽂은 파이프를 통해서 호흡을 하고 휠체어에 부착된 고성능 음성합성기를 통해서 대화를 하여야만 했다.
그는 이와 같은 삶의 연장과정에서 ‘특이점(特異點) 정리’ ‘블랙홀 증발’ ‘양자우주론(量子宇宙論)’ 등 현대물리학에 3개의 혁명적 이론을 제시하였고, 세계물리학계는 물리학의 계보를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 다음으로 그를 꼽게 되었다.
그는 계속 미시(微視)의 세계를 지배하는 양자역학(量子力學)과 거시(巨視)의 세계인 상대성이론을 하나로 통일하는 통합이론인 ‘양자중력론’ 연구에 몰두하였다. 1990년 9월 휠체어에 탄 채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대학 등에서 ‘블랙홀과 아기우주’라는 주제로 강연을 가졌다. /naver
[1941년] 독립운동가 서동성(徐東星) 사망
1897. 12. 13 경북 대구~1941. 1. 8.
일본 도쿄[東京]에서 1923년 4월 박열(朴烈)·정태성(鄭泰成)·김중한(金重漢)·가네코[金子文子] 등과 함께 직접행동을 목적으로 하는 무정부주의 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고, 기관지 〈불령선인 不逞鮮人〉을 발간하는 등 천황제를 타도하기 위한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박열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으나, 1924년 7월 면소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고향인 대구로 귀향한 뒤 노동친목회원 1,000여 명을 포섭하여 박열을 위한 의연금 모집활동을 했다. 1925년 10월 29일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방한상(方漢相)·정명준(鄭命俊)·하종진(河鍾璡)·서학이(徐學伊)·마명(馬鳴) 등과 함께 서로 우정을 돈독히 하고 무정부주의 사상을 연구·실천할 목적으로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했다. 진우연맹은 방한상을 일본으로 보내어 자아인사(自我人社)·자연아연맹(自然兒聯盟)·흑색청년연맹 등의 일본 무정부주의 단체들과 제휴했으며, 그를 비롯한 10여 명은 1926년 4월 12일 흑색청년연맹의 긴자[銀座] 상점 파괴를 모방하여 일제요인 암살 및 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파괴단을 결성했다. 그러나 1926년 7월 일본경찰에 진우연맹의 정체가 드러나자 검거되어 1927년 7월 6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32년] 이봉창 의사 도쿄 의거
← 한인애국단 선서식 직후의 이봉창 의사
'제 나이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저는 서른 한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이 봉창의사가 김구선생께 토로한 이 말은 우리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할 금언이라 할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營圈)'이란 미명(美名) 아래 동양평화를 유린하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는 한, 중 갈등을 야기하여 중국정부로 하여금 상하이에 있던 우리나라 임시정부활동에 제약을 가해왔다. 이로 인하여 침체에 빠져있던 우리 임시정부는 1932년 1월 8일 일본육군관병식(日本陸軍觀兵式)에 참석하러 가던 히로히토 일본왕의 무리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사의 의거로 새로운 활력소를 얻게 되었으며 전 세계에 한민족의 용기 있는 민족적 역량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에 있었던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와 더불어 어려울 때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바친 선열들의 숭고한 회생정신은, 오늘날 일부 사회계층에 만연되어있는 개인주의와 집단이기주의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추진되고 있는 블록경제체제의 구축에 따른 총체적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혀주고 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감행했다. 이봉창은 1919년 3·1운동을 목격하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고, 1924년 적을 알기 위해서는 적지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대사를 도모한다는 것이 역부족임을 깨닫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단을 내려 1931년 1월 중국 상하이로 갔다. 당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수뇌부의 암살을 포함하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결의했다. 그결과 비밀독립운동단체 한인애국단이 결성되었다.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에 참여하면서 일본 천황 암살을 결심했다. 이봉창의 의거는 실패했지만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윤봉길 등의 의거를 촉발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봉창은 1932년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했다./브리태니커
[1921년] 소설가 김광식(金光植) 출생
1921. 1. 8 평북 용천~2002. 12. 3 서울.
주로 서민의 가난한 생활을 주제로 한 소설을 썼다. 호는 청암(靑巖). 1943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문과를 졸업했다. 1947~58년 서울고등학교 교사를 지낸 뒤 경기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4년 〈사상계〉에 단편 〈환상곡〉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이후, 단편 40여 편과 장편 10여 편을 발표했다. 고도로 문명화되고 기계화된 현대문명 속에서 무능력자로 전락하고 극도의 소외감을 느끼는 인간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인쇄직공의 소외의식을 다룬 단편 〈213호 주택〉(문학예술, 1956. 6)은 그의 대표작이다. 일제강점기에 학병을 피해 만주로 돌아다니는 주인공의 역정(歷程)을 통해 민족수난을 보여준 장편 〈식민지〉(1963) 외 〈아름다운 오해〉(1958)·〈비정의 향연〉(1959)·〈고독한 양지〉(1979) 등을 단행본으로 펴냈다. 저서로 〈문학적 인생론〉(1981)·〈문학개론〉(1982) 등이 있다. 1956년 현대문학상, 1991년 한국소설문학상을 받았고, 1986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6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05년] 아동문학가·수필가 마해송(馬海松) 출생
1905. 1. 8 경기 개성~1966. 11. 6 서울.
본관은 목천. 본명은 상규(湘圭). 아버지 응휘(應輝)의 7남매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고한승·진장섭 등과 〈여광 麗光〉 동인으로 활동했으나 다음해 동맹휴학사건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과에서 공부했다. 1921년 도쿄 유학생들이 만든 '동우회' 회원이 되어 여름방학을 이용해 국내를 순회공연했다. 이때 여장(女裝) 배우로서의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1922년 공진항·김영보·진장섭 등과 함께 문학단체인 녹파회(綠波會)를 조직했고, 1924년 '색동회'에 가입한 뒤 가극단을 도와 지방순회를 하면서 자작동화를 구연했다. 1930년 일본에서 펴내는 교양잡지 〈문예춘추〉의 초대 편집장을 거쳐, 잡지 〈모던 일본〉을 펴내다가 8·15해방이 되어 귀국했다. 1950년 국방부 한국문화연구소장을 역임했고, 6·25전쟁 때는 종군작가로 참여했다. 전쟁터에서의 체험을 수필집 〈전진(戰陣)과 인생〉(1953)에 담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어린이 문화운동을 시작했으며, 1957년 대한민국어린이헌장 초안을 썼다. 1958년에는 대구에 한국 최초로 어린이헌장비를 세웠다. 마을문고보급회장, 대한소년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23년 한국 최초의 창작동화인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24년 계모의 모진 학대를 받는 어린이를 그린 동화 〈어머니의 선물〉을 발표했고, 1947년에는 일본의 침략을 토끼에 대한 원숭이의 횡포에 빗대어 그린 〈토끼와 원숭이〉를 단행본으로 펴냈다. 그의 작품은 성격상 전래동화·민담·설화 등을 동화로 꾸민 것과 현실을 풍자한 것, 그리고 어른들의 올바른 태도를 그린 것으로 나누어진다. 동화집으로 〈해송 동화집〉(1934)·〈멍멍 나그네〉(1961)·〈마해송 아동문학독본〉(1962) 등을 펴냈고, 수필집으로 〈편편상 片片想〉(1948)·〈요설록 饒舌錄〉(1958) 등과 1965년 회갑 기념으로 〈마해송 할아버지〉를 펴냈다. 1958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4년 한국문학상을 받았고, 1964년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추대되었다. 1967년 새싹회에서 '해송 동화상'을 제정했으나 제2회로 중단되었다.
[1898년] 독립운동가·목사 정태희(鄭泰熙) 출생
1898. 1. 8 충북 중원 ~ 1952. 3. 19.
호는 계운(桂雲)·백양(白洋).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0월 2일 평양에서 각도 대표 박인관(朴寅寬)·정덕생(鄭德生)·박승명(朴承明)·고진한(高鎭翰)·송병조(宋秉祚)·양석진(梁錫鎭)·채필근(蔡弼根)·김길창(金吉昌) 등과 대한국민총회를 조직하고 평의원에 선출되어 임시정부 지원활동에 힘썼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상하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그해 12월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1921년 7월 재무부 참사에 임명되고, 같은 해 10월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外交後援會) 제6회 간사회에서 장덕로(張德櫓)의 후임으로 간사에 보선되어 활약했다. 1923년 5월 임시의정원 제1분과 상임위원장으로 임시헌법개정안을 심의, 통과시켜 본회의에 제출하는 등 임시정부 강화·육성에 힘썼다. 1924년 6월 다시 재무부 참사에 임명되었다. 1927년 1월 임시의 정원 제27차 회의에서 약헌기초위원(約憲起草委員)에 선임되고, 1928년 8월에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축소위원, 9월에는 위원장이 되었다. 1929년 1월 한국유일당상해촉성회 집행위원회에서 상무위원에 피선되어 여러 단체가 난립, 파쟁과 의견충돌이 끊이지 않아 독립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함을 통탄하고, 통일적 대독립당을 조직하고 군소단체를 해소하여 의견의 대립과 마찰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1929년 8월 15일 상해교민단 총무에 취임하고,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운영 및 교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일하던 중, 1932년 8월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34년 6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642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i, Galileo) 사망
← 갈릴레오, J. Sustermans가 그린 유화(1637경), 피렌체에 있는 Uffizi 소장
1564. 2. 15 ~ 1642. 1. 8
'현대 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42년 1월 8일 78년에 걸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확인했고, 물체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주장으로 고전역학의 틀을 마련한 위대한 과학자였다.
무엇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교회와의 갈등이었다. 천체의 움직임을 분석한 '대화'(1632)가 종교재판에서 성경의 신성함을 훼손하는 '이단으로 심히 의심'을 받아, 그후 200년 동안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10명의 재판관 중 7명이 서명했던 교회의 역사적 오류는 360년이나 지난 1993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비극적인 상호 몰이해'가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함으로써 마침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재정적으로 넉넉지 않았던 갈릴레오는 '출세'에 관심이 많았다. 사교술이 뛰어났던 그는 박봉의 교수직을 벗어나 '궁정학자'로 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끝에 토스카나 대공의 아들을 가르칠 기회를 얻었고, 그 아들이 대공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면서 그는 마침내 1610년 대공의 '수석 수학자 및 철학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동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교회와의 충돌만은 피해보려 노력했으나 성경의 독선적 해석에 집착했던 신부들의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교황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됐다. 연금상태와 딸의 죽음에 따른 고통으로 시력까지 상실했던 그는 마지막 저서 '두개의 새로운 과학'(1638)을 교회의 눈을 피해 네덜란드에서 발간하고, 이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조선
[1587년]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파브리시위스(Fabricius, Johannes) 출생
1587. 1. 8 네덜란드 레스터하페 ~ 1651(?).
처음으로 태양의 흑점(黑點)을 관측한(1610~11) 사람으로 여겨지며, 그 관측결과에 대한 정보를 〈태양 흑점 관측과 태양과 함께 자전하는 흑점의 겉보기 운동에 대한 설명 Narratio de maculis in sole observatis et apparente earum cum sole conversione〉(1611)으로 출판했다. 천문학자 다비드 파브리시위스의 아들인 그는 태양연구에 망원경뿐만 아니라 사진기도 이용했다.
[1438년] 페라라-피렌체 공의회 개최
1438년 1월 8일 교황 유게니우스 4세가 페라라에서 공의회를 개최했다. 1439년에는 페라라에 전염병이 돌아 공의회가 피렌체에서 열리게 되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은 AD 1세기에 시작되어 1054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로마 교황이 서로를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분열은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일어났다.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 이후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정치적 라이벌인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이 두 지역에서 교회의 권위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이 동시에 발전했고, 여기서 신학적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두 교단은 연옥과 성부, 성령 등에 대한 해석에서 첨예하게 맞섰다. 교황의 권위에 대한 입장도 명확히 갈렸다. 페라라-피렌체 공의회는 교리상의 대립을 해소하고 교황의 전권에 대한 일정한 합의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브리태니커
[1324년]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Polo, Marco) 사망
←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초판(1477)의 표지
1254. 9. 15 ~ 1324. 1. 8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1324년 1월 8일 사망했다. 1254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마르코 폴로는 1266년 아버지 니콜로 폴로와 삼촌을 따라 몽골제국의 수도 대도(大都)로 향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직전에 동생 마페오와 함께 동방무역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킵차크 칸국에 갔다가 전쟁으로 귀향길이 막히자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원나라에까지 다녀온 사람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1271년 소아르메니아의 라이아스를 출발, 터키 동부를 지나 이란을 경유하여 페르시아만 입구의 호르무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동북방 육로로 향한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지방과 카슈미르를 거쳐 파미르를 넘은 뒤, 중국 서부의 신강과 감숙 지방을 지나 마침내 1274년 쿠빌라이의 여름 수도인 상도(上都)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마르코 폴로는 몽골 제국 지배하의 중국에서 17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쿠빌라이로부터 여러 임무를 부여받아 때로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고, 3년간 양주라는 도시를 통치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중국측의 기록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주장에는 상당한 과장이 섞여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향한 것은 1290년이나 1291년이다. 그로부터 몇년 전 칸국의 군주인 아르군(1284~88)의 부인이 사망하자 그녀를 대신할 또다른 왕녀를 원나라에서 이란까지 호송하는 임무가 그들에게 부여된 것이다. 폴로 일가와 왕녀 일행을 태운 열네 척의 선단은 중국 동남해안의 천주항을 출발하여 26개월 만인 1293년에 일 칸국의 수도인 타브리즈에 도착했다. 왕녀를 인도해준 뒤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베네치아로 귀향한 것이 1295년의 일이었다. /조선
선덕여왕 [善德女王, ?~647]
← 선덕왕릉, 사적 제182호, 경북 경주시 보문동
신라 제27대 왕(재위 632∼647). 성 김(金), 휘(諱) 덕만(德曼), 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시호는 선덕이다. 진평왕(眞平王)의 맏딸.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 진평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들의 옹립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634년(선덕여왕 3)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 63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책봉되었다.
638년 10월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오자 11월에 이를 격퇴하였으며, 642년에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아 나당(羅唐)의 통로를 끊어버리자 여왕은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으며 이어서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3년에 다시 고구려 ·백제의 침입을 당나라에 호소하고 원군을 간청하였으며 이듬해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645년에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으며, 647년에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하였으나 곧 진압했지만 이 해에 여왕은 신병으로 죽어, 유언에 의해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으며, 첨성대(瞻星臺)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naver
그 밖에
2009년 이스라엘-레바논 국경서 포격전
2009년 프랑스 제과업계 대부 가스통 르노트르 별세
2001년 서울지법, 건설업체 한양에 파산 선고
2001년 서도 명창 오복녀 여사 타계
1997년 통계청, 1월 1일 현재 우리나라 인구 4천5백75만7천명으로 발표
1996년 러시아제 안토노프32기 자이레 수도 킨샤사 시장 추락. 300여명 사망
1994년 남산1호 쌍둥이터널 개통
1993년 국립교육평가원, 독학사 147명 첫 배출
1985년 이라크 공군, 이란 영해서 한림해운 소속 마리너호에 미사일 공격
1981년 사회보호법 시행령 공포
1975년 장기영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남북간의 우편물교환 제의
1971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민주당의 해산을 공고
1969년 주택채권 증권지상에 첫 상장
1966년 한독당 내란음모사건 발생
1966년 도미니카 군부반란 수습
1965년 유엔무역개발회의(WNCTAD) 가입
1964년 파나마 분쟁사건 발생(반미 폭동)
1961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알제리 민족자결정책 승인
1961년 혁신당 결성(대표위원 장택상)
1959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
1952년 국회, 대통령직선제 및 국회양원제 개헌안 부결
1951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군대확장 강조
1949년 영국, 대한민국 승인
1948년 유엔한국위원단 내한
1947년 제1회 종합예술제 개막(-19일)
1946년 조선국군준비대에 해체명령
1942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 군사동맹
1935년 연희전문대학교 농구단 전일본남자농구선수권대회 우승
1918년 윌슨 민족자결주의 선언
1902년 미국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 출생
1896년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 사망
1823년 영국의 박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윌리스 출생
1786년 미국의 금융업자 니콜라스 비들 출생
881년 황소의 난을 일으킨 황소, 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 입성
첫댓글 구름님~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좋은날 보내신거죠~^^
미역국도 못 먹었다우~ㅠㅠ 그렇지만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생일케익을 나누었답니다.^^ 기본앨범란에 사진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