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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암9:11-15)-2021.8.1
아모스 선지자는 남왕국 출신으로 북쪽 이스라엘을 위해 사역하던 선지자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짐을 진자’라는 뜻이지요. 그가 활동한 시기는 남 유다는 웃시야 왕이요,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던 시대입니다(1:1). 당시 남북 이스라엘은 비교적 안정과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였지요. 남왕국 웃시야의 시대는 블레셋과 에돔과 암몬을 정복하여 그 이름의 강성함이 애굽의 변방까지 퍼졌을 때입니다(대하26:8). 북왕국 여로보암 역시 지경을 회복하여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차지하고 있을 때였지요(왕하14:25). 그만큼 남북 이스라엘은 황금기를 누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번영은 영적으로는 극심한 피폐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에 외적인 번영과 부요로 인해 교만과 방종, 부정과 부패, 불법과 배교가 충만했습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서도 여전히 선민이기 때문에 망하지 않으리라는 거짓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말하면서 삶은 엉망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모스를 택하사 북 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물론 그 땅에도 거짓선지자는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마샤입니다(7:10). 아모스 선지자는 아마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북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사실 아모스는 선지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선지자적인 기질이나 자질,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목자로서 가축과 뽕나무를 재배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지요(7:14-16).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모스를 택하사 선지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아모스는 주로 이스라엘의 지도층 인사들을 대상으로 사역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나 부자, 권세자들과 유명인사, 제사장과 왕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한 것이에요. 그만큼 아모스의 사역이 막중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심판을 촉구하면서도 여전히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는 소망을 불어넣은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아모스서는 심판으로 시작하여 회복으로 끝이 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맺으신 언약을 근거로 하여 이스라엘을 반드시 회복하실 것이며,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날에 말입니다(11절). 모든 날이 여호와의 날이지만 특별히 그날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특별한 날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의 날은 양면성을 갖고 있지요. 어떤 이에게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요, 어떤 이에게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동일한 날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임하는 날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날이 각자에게 어떤 날이 될 것인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결국 죄인에게는 멸망의 날이 될 것이요,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물론 여호와의 날은 근시적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날들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도 여호와의 날을 수시로 경험하고 살았었지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주변에 있는 수많은 대적들을 물리쳐 주심을 통해 이스라엘은 수시로 여호와의 날을 체험하고 살았던 민족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구요. 다만 그날이 여호와의 날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뿐이지요.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운행해 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역사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지요. 한 사람도 예외없이 말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말하는 일상적인 날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로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지요. 종말론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말이에요. 이른바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할 때 주로 사용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을 강조할 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보편적인 날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염두해 두고 접근하라는 말이지요.
아모스서는 8가지 예언(1:1-2:16)과 3가지의 설교(3:1-6:14)와 5가지의 환상(7:1-9:10)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모스서의 대미를 장식하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입니다. 그날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다는 언약입니다. 아모스서는 처음부터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로 전개되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주 밝고 희망이 가득한 메시지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한마디로 1장부터 9장10절까지는 심판과 멸망이라는 절망적인 메시지였음에 반해, 마지막 5절에 불과한 11절부터 15절까지는 그날에 하나님이 행하실 기가 막힌 대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11절을 보십시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 날을 강조하고, 그 날에 있을 일을 예언하심으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반드시 회복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켜 세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시는 것은 다윗의 왕가를 회복해주시겠다는 약속이요, 이스라엘을 회복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성경의 위인들을 통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등 모든 하나님의 종들과 언약을 맺어오셨지요. 그리고 다윗에게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맺은 언약은 다윗의 왕가를 보존하사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왕가를 통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약속이지요. 얼마나 보배롭고 존귀한 언약입니까? 하나님은 친히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 언약을 공개하셨습니다. 다윗의 집과 다윗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주시겠다고 말입니다(삼하7:16, 대상17:14). 다윗의 왕가를 보존해주시겠다는 약속이지요.
대표적으로 이사야서11장을 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오는데 그 싹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이새의 줄기 곧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대신 이새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다윗 이전의 아비 이새의 미천한 신분으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것임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무너진 가문에서 미천하고 볼품없는 인간으로 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그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사53:2). 그런데 그분은 만민의 기호로 설 것입니다. 세상 만민이 그를 볼 것이고 그에게 관심을 갖고 그분을 경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거주하는 곳은 그 어디나 영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구원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말이에요.
또한 시편89편3절과 4절을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다윗의 위를 견고히 하여 대대에 세우셔서 그 왕가에서 메시아가 나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다윗을 택하사 신정왕국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대행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가문에서 오심으로 인하여 성취된 것입니다(눅1:32,33). 누가복음1장32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 언약은 사무엘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예언하셨던 것이지요. 사무엘하7장12절은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중적인 칭호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다윗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1장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예수님의 육신의 뿌리를 설명해주시는 것이지요. 또한 로마서 기자는 1장3절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친히 당신을 소개하기를 요한계시록22장 16절에서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언약은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에서 오심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사도행전13장22절과 23절에서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설교하기를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선포합니다. 한마디로 구약에서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하셨던 하나님이 다윗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셨는가를 선포한 것이지요.
(1) 무너진 다윗의 천막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왕입니다. 당연히 다윗의 왕가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법적 정통성을 가진 왕가이지요. 그리고 그 말씀대로 다윗의 왕가는 승승장구했습니다. 다윗왕의 시절이 이스라엘의 가장 번영했던 시기요, 전성기였지요. 그러나 아무리 다윗 왕국이 영화로운 왕가였을지라도 세상에 세워진 다윗의 왕가는 하나님이 보실 때 초라하고 볼품없는 천막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천막에 불과했던 거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천막은 약하고 찢어지기 쉽고 바람에 날아가기 쉬우며 오래되면 낡아서 사용할 수 없는 유한한 장막에 불과하지요. 안전성이 없는 임시장막이에요. 제아무리 견고한 천막이라 할지라도 그 수명이 얼마나 갈 수 있겠습니까? 천년만년 갈 수 없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세상역사를 보더라도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던 나라들의 수명이 얼마나 가던가요? 역사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화려한 다윗 왕가라고 할지라도 세상에 세워진 것은 천막에 불과할 뿐입니다. 언젠가는 수명이 다하여 찢어지고 없어질 천막에 불과하다는 말이지요.
역시 다윗의 천막은 그렇게 찢어졌습니다. 한때 다윗의 왕국이 위용을 자랑하며 영화와 번영과 권세를 자랑했었지만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의를 행하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천막이 찢어지고 말았던 거예요. 이른바 천막이 남북으로 찢어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결국 주변 나라들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BC721년에 멸망을 당하였고, 남유대는 BC58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적 나라로 삼으신 것을 포기하지 아니하신 것이지요.
북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해 열지파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남 유다의 두 지파를 통해 당신의 언약을 지키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를 통해 당신의 모든 소망을 걸었던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다수지파는 멸망을 당해 사라졌지만 남 유다의 소수 지파를 통해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이루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유다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를 70년이라는 유기징역에 처한 거예요. 진노 중에 긍휼을 잊지 아니하신 것이지요. 그들은 결국 바벨론에서 70년을 채우고 본토로 귀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아래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이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수리하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장막의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의 천막은 다른 왕조시대에 다른 왕들이 세운 천막과는 전혀 다른 천막입니다. 다윗의 천막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천막이지요. 하나님이 세우신 천막 안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다윗의 천막이 무너졌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다윗의 천막을 세우실 때 언약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일으켜 세우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신 것입니다. 물론 무너진 천막을 일으켜 세우신다는 근시안적인 의미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자기 백성들을 본토로 돌아오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감은 천막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포로에서 돌아옴은 무너진 천막을 일으켜 세움을 의미하지요.
물론 보다 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복음1장 31절에서33절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그 예언은 말씀대로 성취되었습니다. 2천 년 전 우리 주 예수님이 다윗의 뿌리에서 이 땅으로 나신 것입니다. 자기 땅 이스라엘로 오신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백성들은 자기 땅에 세워진 다윗의 천막을 고의적으로 찢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자기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치 아니했습니다(요1:11).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지요. 한마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을 의도적으로 찢어 버린 거예요. 예수님은 죄인들의 손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무지와 로마 군병들의 포악함이 합작하여 다윗의 천막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거예요. 다윗의 천막은 완전히 찢어지고 말았지요. 물론 육신의 천막도 무너졌고, 영적인 장막도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물론 역사적으로도 다윗의 천막은 다 찢어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하나님이 일으켜 세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천막은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다시 일으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천막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서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무너졌던 다윗의 천막이 다시 일으키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천막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 천막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장막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고 말입니다. 감히 하나님이 세우신 기둥을 누가 뽑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천막을 누가 무엇으로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92편13절로 노래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3장12절은 말씀합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고 말입니다.
(2) 다윗의 천막을 수리하시는 하나님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실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신다는 말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는 말이 아니요, 물리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는 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는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신약의 교회를 일으켜 세우신다는 말이 옳을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은 신약성경 사도행전에서 그대로 인용됩니다. 사도행전15장16절 이하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연히 이방인들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율법주의자들이 그들을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고춧가루를 뿌린 거예요.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않는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지요. 결국 이 문제의 결론을 얻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총회에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 총회가 열린 것이지요.
예루살렘 총회에 사도와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당연히 바리새파의 율법주의자들도 참석하였지요. 그리고 총회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그동안 있었던 경과보고를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하나님이 바울과 바나바에게도 자기들과 같은 성령을 주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니 이방인들도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는다고 정리를 해줍니다. 한마디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지요. 복음의 결론을 내려준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총회의 의장격인 야고보가 일어나서 결론을 내려줍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15장16절과 17절의 내용입니다.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야고보의 창작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가 선포했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겠다는 말이요, 유다의 남은 자들과 주 이름을 일컫는 모든 이방인들도 주를 찾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이에요.
이른바 다윗의 장막 속으로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교회요, 확장시키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무너진 천막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함이 성경적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지요.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본문 12절에서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에돔 족속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에돔 족속은 하나님의 대적이요,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가장 가까운 관계이면서도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게 하는 족속들이었지요.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아버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과 사촌지간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히고 힘들게 한 가시 같은 족속이었지요. 때문에 하나님은 에돔 족속들을 가증히 여기시고 증오하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일에 비협조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족속들이었던 것이지요. 결국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도 에돔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1:11-12절).
그런데 에돔 족속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의 기업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에돔 사람이 아니라 에돔의 남은 자들만 하나님의 기업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항상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시거든요. 문제는 에돔에도 남은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어느 민족이나 종족에 상관없이 남은 자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사도행전13장 48절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할 때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고백하기를,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자는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지요.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에 대해 로마서1장16절은 말씀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입니다(롬1:16절). 그렇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상관없이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복음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요, 하나님의 기업에 참예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보편성입니다.
복음의 보편성은 이스라엘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기 백성들이라고 할지라도 무조건 단체로 구원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른바 단체 속에 묻어서 무조건 구원받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적당한 구원은 없는 것이지요. 반드시 우리가 복음을 위해 지불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세, 우리의 노력이나 공력이나 수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수용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지불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절대적으로 믿고 지지하고 신뢰하는 고백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지불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는 우리 주님께 신앙의 고백을 지불해야 합니다.
(3) 회복된 천막 안에서 사는 자의 복
그러면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하나님이 일으키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른바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회복하심과 이스라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추수의 결실과 안전한 보장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1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잇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결실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추수하는 사람의 뒤를 이어 곧장 다시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잇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땅이 쉴만한 시간이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결실을 보장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일거리가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심으로 인해 받게 되는 이스라엘의 축복입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땅에 농사가 잘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장차 성령의 시대가 오면 감당할 수 없는 영혼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영적 추수의 계절이 온다는 것이지요.
또한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13절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이름대로 약속의 땅은 풍성한 포도주를 생산할 것입니다. 산 전체가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를 흘러내리게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는 말씀은 산에서 기르는 양이나 염소 등 가축으로부터 많은 양의 젖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풍요와 번영의 복을 받게 된다는 말이에요.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일으키시면 이스라엘은 생육과 번성, 충만한 복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축복은 이미 타락 전의 인간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지요(창1:27).
그래서 요엘 선지자도 비슷한 내용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노래했습니다. 요엘서3장18절을 보면,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고 말입니다. 또한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저주가 회복되는 복을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땅에서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운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들은 사로잡힘에서 풀려나게 될 것이고 성읍을 건축하고 거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포도원을 심고 그곳에서 나오는 포도주를 마실 것이며, 과원을 만들고 그곳에서 나오는 과실을 먹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헛된 수고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에요. 이것은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결코 누릴 수 없는 복들이지요. 하나님이 자연환경을 통해 복을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적당한 일조량을 주셔야 하고 적당한 비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히 내려주지 아니하면 자기들의 수고한 것을 거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복을 주시겠다는 말이에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자연환경을 통해 복을 주실지라도 외부로부터 지켜주지 아니하면 수고한 것을 내가 거둘 수 없습니다. 주변에서 대적하는 자들을 막아주셔야 하지요. 힘들게 수고한 것을 외부 세력으로부터 빼앗기지 아니하고 내가 거둘 수 있는 것은 복중에 복입니다. 자기가 수고한 것을 자기가 거두지 못하는 것은 분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사람은 마땅히 각자에게 주어진 분복을 누려야 하거든요. 그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다시 일으키심으로 인하여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가장 안전한 복으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다시는 뽑히는 일이 없이 견고하게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이지요. 이것은 영원한 안전을 보장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 주시겠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2, 15절하). 여호와는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서 23장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은 당신이 말씀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습니다. 그 약속은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일으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윗왕국을 일으켜서 메시아의 왕국을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이지요. 여기서 다윗왕국은 메시아의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 하는 모형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핵심은 다윗의 줄기에서 그리스도가 나신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언약이지요.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회복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이지요. 메시아의 왕국을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보호하사 끝까지 안전하게 보장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무엇보다 이 약속을 믿는 자는 반드시 이런 복을 받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아직까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언약을 믿음으로 수용하지 못했다면 다윗의 천막 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요, 또한 다윗의 천막 안으로 들어왔을지라도 혹시 천막이 무너져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으킴을 받고 세워지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보이지 않는 틈은 없습니까? 자세히 보지 못하면 틈은 발견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작은 틈을 막지 못하면 큰 붕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벌어진 틈은 없는 지 수시로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틈이 보인다면 반드시 찾아서 막아야 합니다. 가볍게 치부하다가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태산같이 크고 높은 댐이라 할지라도 작은 틈으로 말미암아 붕괴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믿음의 틈이 생겼다면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지금 막지 않으면 대형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천막이 무너진 것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전조현상이 있습니다. 그 전조현상을 보여주는 시그널이 틈입니다. 틈이 다윗의 천막을 무너뜨리는 전조현상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왕조는 어떤 왕조보다 견고했고, 든든했고 화려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의 왕조가 서서히 붕괴될 조짐이 보였습니다. 틈이 보인 거지요. 결국 다윗과 솔로몬을 이은 통일 왕국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찢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미련한 사람들의 말을 더 청종하고 경청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요. 결국 그것이 다윗왕국을 무너뜨린 틈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가장 무서운 틈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잘 몰라요. 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버리거든요. 그런데 그 작은 틈이 서서히 커집니다. 그러면 틈이 구멍이 되어 둑이 무너지고 댐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작은 틈이 퇴락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퇴락은 쇠퇴하여 허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틈을 막지 못해서 다윗의 천막이 무너진 거예요. 그러므로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일으켜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우리의 영원한 장막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감사함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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