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포탄은 20대를 쏘았다.>
"연평도 포탄은 20대를 쏘았다."
연평도 사건 이후
자칭 진보신문이라고 하는 한겨레신문의 제목이다.
그렇다.
십수 년 동안 전교조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20대의 친북/진보 세뇌교육이
북괴의 연평도 포탄으로 한 방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아래의 막대그래프를 보면 연평도 포탄으로 인한
20대의 변화가 얼마나 극적인지 알 수 있다.
누구도 전교조 교사들에게 세뇌당한 20대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을 것이다.
연평도 피폭 이후, 12월의 해병대 모집에
488명이 지원해 3.57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3월 26일의 천안함 사건 이후 4월의 지원 경쟁률이
1.8대 1 이었으니까 얼마나 엄청난 차이인지 알 것이다.
해병대 수색대.
해병 중의 해병이 바로 이 수색대이다.
빡세기로 유명한 해병 수색대에는 11명 모집에 231명이나 지원했다.
무려 20대 1이 넘다니...
심지어는 해병대 지원율이 서울대 지원율 보다 높다고도 한다.
연평도 도발로 인한 20대 젊은이들의 오기가 묻어나는 대목이다.
아래는 해병대 지원자들의 말.
‘북한의 연평도 도발이 나의 도전 정신을 자극했다. 피하고 싶지 않다’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로 나와 같은 동년배가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북한의 실체를 한번 더 생각하게 됐다’
‘민간인을 향해서도 도발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 어떻게든 내가 나라를 지키는 데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했다’(해병대 인사관계자)
“북한이 연평도를 공격한 뒤 부모님이 걱정했다.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봤는데 변함이 없었다. 나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에 불타는 사람은 아니다. 처음에는 군대에 편히 가고 싶어서 카투사를 지원했다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기왕에 해병대에 갈 거라면 힘들다고 소문난 수색병과에 지원하고 싶었다. 연평도 사건은 잠깐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지만 오히려 지원 의사는 확고해졌다.” - 최준식(19·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1년 / 중앙일보)
|
결국 연평도 포탄은 20대를 쏜 것이 아니라,
전교조의 세뇌교육을 쏘아 박살 내 버린 것이다.
아직 마지막 발악은 남았겠지만,
이제 이 땅의 친북세력은 서서히 자멸의 길을 걸을 것이다.
"살고 싶었다,
피하지 않았다,
지지 않았다"
해병 수기
“내 두 눈에 박혀있는 2010년 11월 23일은
계속 정지 한 채 두 눈에서 잠자고 있다...
우리는 지지 않았다.
그 때를 지우는 일은 내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해병대사령부가 지난달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담은 연평부대 장병들의
생생한 체험을 담은 수기(手記)내용을 공개했다.
전투에 참가한 장병들 가운데 우선 1차적으로 공개한
12명의 수기내용은 현재 초고 상태이지만,
당시 긴박했던 상황이 진솔한 언어로 꾸밈없이 담겨져 있다.
1차 수기는 즉각 대응사격에 임했던 포 7중대 장병들과
사상자 치료와 후송을 담당했던 의무실,
포탄이 집중적으로 낙하된 본부지역의 장병을 대상으로 종합했다.
적이 쏜 포의 파편에 귀옆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포반원들을 신속히 대피시키고,
자동사격이 불가능하자 수동으로 사격에 가담했던
3포반장 김영복 하사는
“맞고만 당할 수 없어 억울하고, 분노에 차올라서
신속히 포탄을 준비해 반자동임무로 사격에 가담했다”며
“솔직히 (당시 상황이)무섭기도 했지만 포반원을 살리고 싶었다”고
당시 심정을 기록했다.
K-9 대응사격을 지휘했던 7중대장 김정수 대위는
“적의 기습 포격으로 타격을 받은 중대가 목숨을 걸고 서로 챙기며
임무를 수행해 준 중대원들이 너무 고맙고 자랑스럽다.
적이 추가도발 한다면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의무실 주변에는
11발의 적 포탄이 떨어지는 절대적인 위기가 직면했다.
의무실의 이재선 하사는
“당시 의무실은 드라마에서 보던 처참한 전쟁 현장이었고,
부상당한 동료장병들의 환부를 찾아 군화를 벗겨보니
담겨있던 피가 쏟아졌다”고 참혹했던 상황을 적고 있다.
그는 2차 폭격으로 다시 대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대피하지 않고 환자의 손을 잡아주고 있던
한 해병의 모습도 잊지 않고 있다.
전입 3개월이던 의무병 강병욱 이병은
“적의 포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나도) 살고 싶었지만
환자를 살려야한다는 마음에 ’모두 대피하라’는
방송도 무시한 채 환자를 치료했다”며
“하얀 천으로 덮여 있는 故문광욱 일병을 구급차에 실을 때는
살리지 못한 죄책감 뿐이었다”고
참담했던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의무실에서 피로 얼룩진 부상자의 손을 잡고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하승원 대위(목사)와
포탄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군종목사와 함께
화재 진압에 몸을 던졌던 백종협 병장의
뜨거운 동료애의 사연들도 담겨있다.
민간인을 살리고, 후송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던 인사팀의
당시 모습은 인사과 안준오 중사의 수기에서 볼 수 있다.
연평어린이집의 유아들과 교사들을 대피시키고,
긴급물자를 대피소에 지급한 그들은
“우리는 포격의 순간에 최소한 자신의 안녕을 위해
자세를 숙이지는 않았다”며 “전투 현장에는 사기충천한
연평부대원이, 불타는 마을에는 인사팀이 있었다”고
당당했던 부대원들의 모습을 소개했다.
해병대사령부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의
전투상황을 기록한 수기집을 발간,
장병 교육용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 지난 11월 23일에 있었던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장병들이 수기를 기록했다.
사진 왼쪽 위부터 대위 김정수(7중대장), 대위 하승원(군종목사), 병장 백종협,
상병 박태민, 상사 한훈석, 이병 강병욱(의무병), 이병 윤성문(의무병),
중사 신용한, 중사 안준오, 하사 김영복, 하사 이재선.
나의 아들들아...
장하다!
자랑스럽다!
눈물나도록 고맙다!
너희들의 애국심이 있기에
아직도 대한민국은 건재하다.
너희들의 충정을
사고뭉치, 거지발싸개같은 싸가지없는 쓰레기 좀비들이
각종 포털에서 왜곡하고 폄하하더라도
다수의 애국 시민, 국민들은 너희들에게 박수를 보내노라!
장하다, 대한민국 해병대 만세다!
고(故)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
당신들의 희생은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구호 아래 훈련을 마치고
이 땅을 지키다 간 고인 앞에 삼가 조의를 표한다.
고(故)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명복을 빌며...
|
첫댓글 장한 아들들 너희가 있어 이나라는 든든하구나..이면 큰아들이 해병대 입대합니다,
담
그러시군요.. 아들만 둘 두셨다는 댓글을 보긴 했는데...
마음이 갈래갈래이시리라 생각이 들어요..
장한 아들 두셨습니다...
유계순님! 멋진아들 두셨습니다!!!!!
우리의 건아들 훌륭히 이나라를 지킴을 파이팅!!
우리 아들들의 굳은 각오에 감동 먹었답니다..파이팅~
장하다!
믿음직스럽다!
우리의 해병들!
역시 우리의 아들들은 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