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젬병"의 비밀
입으로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막상 쓰려고 하면 망설여지는 말들이 꽤 있다.
무언가 형편없다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젬병'도 그 중 하나다.
우리말 같기는 한데 첫 글자가 '젬'이 문제다.
단언컨데 '젬'으로 시작되는 우리말 단어는 이것이 유일하다.
평안도 말에서 '젬벽'이 바람벽을 뜻하기는 하지만 방언이니 논외로 해도 된다.
다른 말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소리가 포함되어 있는데다가 그 어원도 명확하지가 않다.
왠지 쓰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준비'를 여러 번 발음해 보면 표기와는 달리〔줌비〕라고 발음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표준어로는 '덤비다'인데 '뎀비다'로 말하는 사람도 꽤 많다.
'ㄴ'이 'ㅂ'앞에서 'ㅁ'이 되는 것이고, '어'가 뒤의 '이' 때문에 'ㅔ'가 되는 것이다.
'젬병'은 이러한 두 현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다.
본래 '전병'인데 'ㄴ'과'ㅂ'이 만났고, '여'는 '이어'를 빨리 발음하는 것과 같으므로 '어'가 '이' 앞에서 '에'로 바뀐다.
이렇게 해서 발음이 '젬'이 된 것인데 그것이 표기에까지 반영되어 우리말에서는 극히 드문 단어가 된 것이다.
◈ 젠병의 변신은 무죄
전병은 달이거나 지진다는 뜻의 전(달일 전煎)과 떡을 뜻하는 떡(떡 병餠)'이 합쳐진 한자어이다.
곡물을 멀겋게 반죽한 후 잘 달구어진 넓은 판에 기름을 두른 후 얇게 부쳐낸 음식이 전병이다.
이렇게 부쳐 낸 것을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만드는 과정에 각종 소를 넣으면 더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어딘가에 눌러 붙은 것을 떼어내다 보면 뭉치고 찢어져 형편업는 모양이 되니 '전병 이다'란 말이 볼품이나 솜씨가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고 본다.
전, 저냐, 부침개 등 기름을 둘러 지져낸 음식 치고 맛없는 것이 없는데 전병이 이런 뜻으로 쓰이니 전병으로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그러나 전병은 동양의 음식 역사에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양의 빵은 밀가루 반죽을 부풀린 후 화덕에 구워서 만든다.
반죽 안에 다른 재료를 넣어서 구워내는 일은 드물고 만든 후 무엇인가 발라서 먹든가 빵 사이에 다른 재료를 넣어 먹는다.
그런데 일본으로 전파된 빵이 전병에서 흰트를 얻은 사람에 의해 변화를 겪는다.
전병에 소를 넣듯이 밀가루 반죽 안에 단팥으로 만든 소를 넣어 구워낸 것이다.
빵의 대명사가 된 단팥빵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뿐이 아니다.
얇고 바삭한 일본식 과자 '센베이' 또한 '전병'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쯤 되면 '전병'은 결코 '젬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기름의 명과 암
기름의 발견은 인류의 요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로는 찌고, 데치고, 삶는 요리를 할 수 있다.
물을 끓여 김을 올리거나 끓는 물속에 재료를 넣어 익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익히는 데는 효가적이지만 특별한 풍미를 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달구어진 판에 기름을 살짝 둘려 부쳐내면 기름 고유의 풍미가 더해진다.
기름을 자작자작하게 두어 지져 내거나 끓는 기름에 재료를 풍덩 넣어 튀겨내기도 한다.
비오는 날 생각하는 빈대떡이나 국민야식으로 등극한 '치킨'의 숨은 공로자가 기름인 것이다.
이처럼 요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기름인데 이 말에 대한 요즘은 대접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기름지다'가 땅에 쓰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뜻이고 '기름진' 음식 또한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름이 지방 혹은 비계와 동일시되고 비만이 질병으로 인식되고 난 이후에 상황이 달라졌다.
기름기가 많은 것은 피해야 할 음식이 되었고, 포화지방이니 트랜스지방이니 하는 나쁜 기름들이 적시되기 시작했다.
기름은 본디 식물에서 채취한 것을 가리켰는데 어느새 동물의 지방과 같은 취급되게 되었고 급기야 건강의 적으로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 메밀전병과 수수꾸미의 가르침
전병이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고, 그것을 응용하거나 변형시킨 음식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전병은 역시 메밀전병이다.
메밀가루를 욹게 반죽해서 채소나 고기 등의 소를 넣고 말아서 지진 것이다.
메밀이 많이 나는 강원도의 대표음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총떡, 메밀전, 빙떡 등으로도 불리면서 우리 땅 곳곳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다.
메밀전병을 만들 때 기름을 너무 많이 드르면 얇고 둥글게 부쳐지지 않는다.
속이 꽉 찬 만두처럼 소를 많이 넣어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적당한 기름기의 메밀전과 적당량의 매콤하고 짭조름한 소가 소박하게 어우러져야 메밀전병답다.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은 음식인 부꾸미도 마찬가지다.
수수가루를 반죽해 지진 후 사이에 팥소를 넣어 완성해 내는 것이 부꾸미다.
만들어 놓고 나면 보라색 혹은 갈색이 도는 소박한 음식 부꾸미는 반죽과 소가 적당히 어우러져야 부꾸미답다.
기름에 살짝 지져진 곡물의 쫀득한 맛과 단맛이 도는 붉은 색 팥의 맛이 과하지 않게 느껴져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음식의 생명은 조화다.
재료와 조리법 어는 것 하나 넘치지 않게 적당히 어울려야 비로소 맛깔스런 음식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전병'이 '젬병'이 되지 않게 하는 버, 나아가 '기름'이 '개기름'이 되지 않게 하는 법 또한 그렇다.
과하거나 균형이 깨지면 젬병이 되고 개기름으로 흐른다.
한성우 /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