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글과 인연. 216
[문단 20년, 참 스승]
내가 등단했을 때만해도 한국문인협회 가입 조건은 까다롭다면 까다로웠다. 월간지 등단과
격월간지, 계간지 등단은 입회 자격을 논하는 근거이기도 했으니, 가입을 하려면 등단 후 몇
년의 문단 활동 경력이 확인되고, 지역 문인협회의 추천과 문인협회 회원의 추천이 있어야 서
류 접수가 가능했으며, 그 활동 경력의 기간도 격월간, 계간 순으로 차이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 생각은 내 문학 실력(?)으로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라는 명패를 내 이름 앞에 둔다는 것
은 차마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내 생각에 한국에서는 세 부분의 직함을 소유하는 분들은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실력으로나 존중 받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하나가 종
교지도자이며, 또 하나가 법조인들이며 그리고 또 하나가 문인이어야 한다는 판단이었으니,(지
금은 거기에 정치인도 포함시켰다.) 그런 면에서 나는 문인협회 회원으로서의 작품성이나, 도덕
적이나, 인격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오히려 나로 인해 협회의 명예가 실추 되
어서는 안 되며, 적어도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한국문인협회 문인이라면 그만한 존중을 받아야 하
는 존재이여야 한다는 고집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후 한국문인협회의 가입에 관한 부분이 많이 완화된 줄로 알고 있는데, 이제는 그런 부분에서
라도 차마 가입을 거절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 것은, 명패의 가치가 그만큼 허물어졌기 때문이라면
나의 잘못된 판단일지도 모르겠지만, 흔히 말하는 ‘도나 개나’ 라거나 시장에서 ‘0사장님’ 하면 거
의 대부분 고개를 돌린다는 우스개말처럼 되어 있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내가 아는 어느 시인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확신을 하게 해 준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다.
어쨌든 내가 지금도 오산문인협회를 문단의 고향으로 인정하는 것 중 하나가 문학기행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다. 그 해 오산문협은 청산도로 일박 여행을 하게 되었고, 그 날 저녁 식사 후 회원
들의 시낭송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나도 나의 시 한편을 낭송하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한 여류 시
인이 내게 한 말 “시인님의 시는 너무 도덕 적이에요.” 그 말이 내게 충격이 되었고, 집에 와서 내
모든 작품을 살펴보니 대부분이 도덕적이며 훈계 성으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내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고, 할 수 있는 대로 도덕적이거나
훈계 성을 드러내지 않고 순수한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으니. 나름 여러 창작 교실에서
강의도 들었고 배우면서 애를 썼지만(그 중에 이미 고인이 되신 정진규시인님의 강의는 내게 유익
한 강의였다. 나는 6권의 작품집을 내는 동안 딱 한 번 2번째 시집인 “꼴값”에만 그분의 서평을 담
았다.) 그 날 그 여류 시인의 그 한 마디 말이 내게는 가장 큰 교훈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여류 시인을 나의 스승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분은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문단의
선배인데, 그 한 마디가 다른 몇 천 마디의 가르침보다 내게는 더 큰 울림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 나는 어떤 분의 글을 대하더라도 그 작품성을 보기 전에 그분이 그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수고를 했을까? 를 생각하며, 그 작품 속에서 내가 배울 것이 있을까? 를 살펴보곤 하며, 누가 내게
창작을 알려 달라 하면 나는 함께 공부하는 것이라면 좋겠으나 내가 가르치지는 않는다. 라는 생각
으로 문단의 지인들을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