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 파란 불꽃
“원장 선생님, 어떻게든 1월 안에 퇴원할 수 없을까요?”
해마다 12월이 되면 입원 환자들의 이런 호소를 으레 몇 차례씩 듣게 마련이었다.
오늘도 세 명의 환자에게서 그런 하소연을 듣고 보니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게이조는 지쳐 버렸다. 일이 끝났는데도 곧장 집으로 돌아갈 기분이 나지 않아 담배를 손에 들고 원장실에 멍하니 앉아 있엇다.
‘피곤한 이유는 단순히 입원 환자 때문만은 아니야.’
게이조는 어젯밤에 한잠도 자지 못하는 것 같던 나쓰에의 시무룩한 얼굴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요코를 사랑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쓰에가 요코의 출생에 대해 알게 된 것을 게이조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게이조는 요코가 말없이 혼자 다쓰코의 집에 간 것은 나쓰에한테 크게 야단을 맞아서인 줄 알고 있었다.
“저 오늘 요코를 좀 심하게 꾸짖었어요. 저한테 그렇게 심한 꾸지람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많이 야속했을지도 몰라요.”
나쓰에는 게이조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게이조는 요코가 다쓰코의 집에서 잔다고 하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도오루가,
“요코는 얻어 온 아이에요?”
하고 아버지인 자기를 책망이라도 하듯 말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오루와 요코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진짜 남매로 통해야 해.’
게이조는 새삼스럽게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었다. 그리고 도오루에게 의심을 살 만한 태도를 버리고 좀더 요코의 아버지답게 행동해야겠다고 이불 속에서 몇 번이나 되뇌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게이조는 도오루의 날카로운 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나쓰에가 요코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 돌아온 요코가 나쓰에에게 매달리고 두 사람이 눈물을 보이며 얼싸안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게이조는,
‘정말 친자식 같군. 나쓰에는 저토록 요코를 사랑하고 있다. 만일 요코가 사이시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하고 생각했다. 이미 어제 나쓰에가 알아 버린 것을 게이조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게이조는 간밤에 뜬눈으로 지샌 나쓰에를 생각하자, 사이시의 자식을 키우게 한 자신의 잔인함을 힐책 당하는 느낌이었다. 피곤한 이유가 병원 일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게이조는 점점 집에 돌아가기가 싫어졌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삿포로의 다카기 씨에게서 전화예요.”
하고 교환원이 말했다.
“아, 쓰지구친가?”
여전히 힘찬 다카기의 목소리였다.
“아, 잘 있었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응, 별로 달갑지 않은 말투로군. 용무 없는 싱거운 전화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나?”
호탕한 다카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게이조도 전염이라도 된듯이 미소를 지었다.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잘 있었나?”
다카기가 물었다.
“응.”
“하지만 역시 자네는 생기가 넘치는 목소리가 아니잖은가? 병원 일은 어때?”
“응, 덕택에 지나치게 잘 되는 편이야.”
“덕택이라니 고맙군. 의사나 중이 잘 돼 나간다는 건 아무래도 언짢은 일이지만 말이야.”
“………”
“하긴 잘돼 봤자 의료 보험 환자로는 창고 하나 짓기도 어려울걸.”
“응, 거의 중노동이야. 오늘은 내과의 외래 환자만도 4백 명에 가까웠어.”
다카기는 지금까지 삿포로에서 전화를 걸어 온 적이 없었다. 게이조는 무슨 용건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4백 명? 일곱 시간에 4백 명이라니 한 시간당 60명에 가깝잖아. 1분에 한 사람 꼴인가?”
한 통화가 끝난 신호음이 들려왔다.
“아냐, 내과의 외래 환자는 둘이서 맡고 있어. 주사 맞고 약만 받아 가는 환자도 있으니 한 사람당 1분꼴의 진찰이라고야 할 수는 없겠지.”
게이조의 고지식한 대답에 다카기는 껄껄 웃고 나서,
“여전하군. 그건 그렇고, 어때? 안과의 진료 도구는 어디 팔아 버렸나?”
게이조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그대로 있어.”
“그럴 줄 알았어. 실은 그 때문에 전화 한 거야.”
용무 없는 전화라는 말을 다카기는 벌써 잊어버린 듯한 어조였다.
“무라이 녀석이 봄에는 퇴원을 할 모양이야. 녀석은 지금 삿포로에 와 있다네. 개업하기엔 아직 이르겠지? 이 몸은 어쨌든 돈이 없네. 다른 데 의논해 볼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선 절차상 쓰지구치 자네한테 의논해 보려는 눈치야. 자네도 지금 다시 안과를 개설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테니까 말이네.”
당장은 답변하기 어려운 얘기였다.
“벌써 그렇게 좋아졌나?”
“그런가봐. 가을에 자연기흉을 일으켜 하마터면 죽을 뻔하지 않았나? 재미있는 건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대. 마이신으로 작아졌던 공동이 짜부라진 모양이야.”
“음, 가끔 그런 경우가 있지.”
“최근 2년 동안은 균도 없어지고 살도 쪘어. 그래서 퇴원 얘기가 몇 번이나 나왔을 정도야. 자연기흉 덕분에 깨끗이 치유가 된 모양이야. 액운에 강한 녀석이야, 무라이는.”
“……….”
“아무튼 생각해 보게, 지금 당장 대답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응, 사무장과 의논해 보지.”
수화기를 내려놓자 게이조는 이상하게 적막감을 느꼈다. 밖은 캄캄햇다. 불빛이 비치는 데만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눈은 어둠 속에서 춤추듯이 난무하고 있었다.
‘다카기답지 않아.’
게이조는 그것이 씁쓸했다. 조금 전 전화에는 다카기다운 솔직함이 없었다. 용건이 없는 전화라고 서두를 꺼내는 바람에 묘하게 이야기에 말려들어간 듯하여 뒷맛이 씁쓸했다.
마치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게이조는 큰일일수록 입밖에 내어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엇다. 그래서 호탕한 가슴속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듯한 다카기의 솔직함에 끌리고 있었다.
그런 다카기가 오늘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내지 않은 데 약간 실망했다. 무라이의 일인 만큼 게이조에게는 더욱 씁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은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한 가지 일을 말할 때에도 언제나 망설이면서 애를 태우는 게이조였다. 그런 게이조 입장에서 볼 때 언제나 생각한 것을 시원시원하게 말하고 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는 다카기에게도 때로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니 자신과 다카기의 인간됨의 차이가 줄어든 것 같아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다카기는 솔직하게 무라이를 다시 써 달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무라이와 나쓰에의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 일을 알고도 무라이를 복직시켜 주기를 바랄 사람이라고는 생가되지 않았다.
게이조는 코트를 걸치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부딪칠 만큼 가까운 곳에 사무원 마쓰사키 유카코가 서 있었다.
“웬일이죠?”
유카코의 조그맣고 동그란 눈이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무라이 선생 같은 분은 돌아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이 아가씨가 어떻게 무라이의 동정을 알고 있을까?’
“무라이한테서 편지라도 왔나요?”
언제나 한 곳만 바라보는 듯한 유카코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흐려졌다. 게이조는 말없이 유카코와 함께 다시 원장실로 들어왔다.
“편지 같은 건 받지 않았어요. 조금 전에 교환실에 놀러 갔더니 그곳의 하루코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서 저더러 대신 좀 앉아 있어 달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앉아 있는데……”
“그때 다카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나요?”
“네.”
“그래서 도청한 거요?”
“네.”
유카코의 얼굴에서는 잘못했다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못써요, 그런 짓 하면……”
‘이 아가씨는 무라이의 애인일까?’
게이조는 선 채로 유카코를 내려다보았다.
“원장님, 무라이 선생은 돌아오지 않겠지요?”
“글쎄, 어떻게 될지…..”
유카코는 게이조를 쳐다보면서 한 발자국 다가왔다.
“원장님, 원장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세요?”
“아무것도 모르다니 대체 뭘 말이오?”
유카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가엾을 정도로 작은 입술이었다. 전등빛에 유카코의 길다란 머리의 한 부분이 금발처럼 빛나고 잇었다.
“원장님, 모르고 계세요? 무라이 선생은 원장님의 사모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그래서요?”
게이조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라뇨? 원장님은 아무렇지 않으세요?”
게이조는 말없이 버너에 불을 붙였다. 파란 불꽃이 조용히 흔들렸다.
“커피 좀 마시지 그래요.”
“커피 같은 건 마시고 싶지 않아요.”
유카코는 화난 듯이 말했다.
“유카코 양은 무리아 씨를 좋아했었나요?”
유카코는 게이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윽고 쓰러지듯이 의자에 앉더니 어깨를 들썩이면서 울기 시작했다.
“웬일이오?”
게이조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어리벙벙했다.
“야단났군.”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게이조는 불안한 듯 말했다.
“울 것 없어요.”
조금 거친 어조로 말하자 유카코는 뜻밖에도 순순히,
“네.”
하고 얼굴을 들었다.
‘언젠가 출근길에서도 이 아가씨는 운 적이 있었다. 이 아가씨는 울보인가? 대체 무엇 때문에 울었을까?’
게이조는 버너의 불을 껐다. 유카코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손수건을 눈가에 대고 있었다.
“또 우는 거요?”
“아녜요.”
유카코는 손수건을 무릎 위에 놓고 게이조를 쳐다보았다. 젖은 눈이 웃고 있었다. 순진하고 귀여워 보였다.
‘이 아가씨는 지금 몇 살일까? 스물여섯이나 일곱쯤 되었을 테지.’
“뭣 때문에 운 거요? 이러면 곤란하잖소?”
유카코는 어린애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무라이 선생을 좋아했었느냐고 물으시다뇨.”
“……….”
‘무라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운 것일까, 싫어서 운 것일까?’
게이조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무튼 돌아가요. 울게 해서 미안해요.”
게이조는 부드럽게 말했다.
“네.”
유카코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다가 말했다.
“무라이 선생을 돌아오지 못하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무라이는 오게 될지도 몰라.’
반사적으로 무라이의 복직이 게이조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은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