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안두희는 신의주에서 월남하였다. 남한에서 안두희를 처음 맞이한 것은 '쪼끄마한 부락'에서 월남민을 심문하던 서북청년단이었다. 안두희는 바로 이 서북청년단 대원들의 안내로 서울로 오게 되었다.
월남후 안두희가 처음 접촉한 단체는 서북청년단이었다. 안두희는 李範奭의 민족청년단 등 여러 청년단체를 찾아가 보았지만, 결국 서북청년단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당시 서북청년단 부위원장인 金聖柱와 문봉제 등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안두희는 서울에 온 지 석 달만에 서청에 가입하여, 서울 第一支部이며 본부 직속인 鍾路支部의 事務局長이 되었다.
당시 서북청년단은 좌익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차 반공전선에서 많은 활약을 하던 단체였으며, 경찰 및 군의 정보기관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경찰과 군부는 빨갱이와 싸우는데 청년단이 필요하였고, 서북청년단도 정부기관의 보증과 지원이 필요하였다. 당시 경무국장 趙炳玉 . 수도경찰청장 張澤相 등 경찰 수뇌부의 밀접한 지원 아래, 서북청년단은 경찰이 할 수 없는 성질의 대공투쟁을 담당하였다. 경찰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찬조금을 주거나, 소금 배급표를 몇 천장씩 주어 서북청년단과 그 간부들의 활동비를 보조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기반으로 안두희는 경찰의 수뇌부 및 중견 간부들과 알게 되었다. 안두희는 이러한 경찰과의 인연을 넘어 군의 정보기관, 특히 특무대(SIS)의 金昌龍과 연결되었다. 당시 김창룡은 대위계급의 1연대 정보장교였지만, 이승만 대통령, 채병덕 총참모장, 신성모 국방장관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던 정보계의 실권자였다. 김창룡은 소공동에 大陸公司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보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육군 중령 김일한이었다. 김일한은 안두희의 외가쪽 친척이자 고향 후배로서, 월남하여 인천 특무대 대장을 하고 있었다. 김일한은 안두희에게 대륙공사의 김창룡을 소개하였다. 안두희는 서북청년단에서 처외삼촌뻘이 되는 홍종만을 만나게 되었고, 홍종만은 김지웅을 안두희에게 소개했다. 김지웅은 안두희와 같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일찌기 만주 관동군의 헌병통역 출신이며 중국 汪兆銘 정권의 고문을 역임했다고 자칭하고 해방후 귀국해서는 汪金山장군을 자처하면서 고급정보 브로커 노릇을 하고 있던 과거 경력이 수상한 인물이었다. 홍종만 역시 김지웅의 지시를 받고 있는 정보에 밝은 사람이었다. 홍종만은 김지웅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 지내는 형편이었다. 김지웅은 안두희의 첫인상에 대해 '영웅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안두희는 김지웅과 홍종만의 영향을 받아 정보를 알게 되었고, 그 자신 스스로 정보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이후 김지웅 홍종만 안두희는 자주 회동하였다. 김지웅은 안두희에게 '안동지는 애국자'라고 치켜 세워 주었고, 이들을 후암동에 있는 자택으로 데리고 가서 안두희를 각별하게 대접하는 등 안두희에게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여 안두희의 환심을 샀다. 김지웅은 '빨갱이 정보'와 더불어 한독당의 수상한 활동에 관한 정보를 들었고 안두희가 노덕술 등 경찰간부, 김일한 등 특무대에 알아 본 결과 김지웅이 제공한 정보의 정확성에 크게 감명받았다. 이제 안두희는 김지웅을 존경하기 시작했다.
결국 안두희는 월남후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하였고, 이것을 기반으로 한편으로는 경찰 및 군 수뇌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뒷 날 백범 암살의 핵심 실무를 담당하는 김지웅, 홍종만 등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2) 암살계획의 실행
여러가지 정황과 증언을 고려할 때, 백범 암살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48년 말∼1949년 초라고 할 수 있다. 김학규의 증언({血淚의 告白})에 의하면 1948년 12월 20일경 만주 봉천에서 만나 알던 崔 某라는 청년이 '서북청년단내 김구선생 암살단이 생겼다'며 '주의하라'는 제보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말까지 경교장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김학규는 최모 청년의 실없음을 생각하여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불길한 예조였던 것만은 사실이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이후 전개된 백범 암살 계획은 안두희를 포함한 서북청년단의 일부가 한국독립당에 가입하면서 구체화된다. 이 때 김지웅은 안두희에게 백범 암살의 당위성을 세뇌시키기 시작하고 1949년 6월 세번에 걸쳐 암살계획을 실행하였다.
서북청년단의 일부가 한국독립당에 가입을 주도한 것은 백윤호(홍종만의 고백에 나오는 白榮鎬와 동일인인지는 분명치 않다)와 홍종만이었다. 1949년 1월 백윤호는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를 찾아와 일주일간 머물면서 신세를 졌다. 백윤호는 김학규가 만주 봉천에서 韓人 부대인 長延民主自衛軍이라는 군대를 만들었을 때 그 군대의 대원이었다. 10여일 후 백윤호는 다시 김학규를 찾아와 당시 서북청년단 '태평로 시단장'이던 자신의 친구인 홍종만을 소개하면서 홍종만 등 서북청년단 청년들이 한국독립당에 가입하려고 한다며 이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학규는 서북청년단 태평로지부로 가서 이들 10여명의 입당식까지 거행해 주었다.
그후 김지웅과 홍종만은 안두희에게 한독당 가입을 권유했고, 홍종만이 안두희를 김학규에게 소개하면서 한독당 입당을 주선하였다. 그동안 홍종만과 안두희는 김학규를 불러내어 술대접을 하면서 김학규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으며 그 당시만 하더라도 김학규 앞에서 안두희는 백범을 위해서 생명까지 바칠 수 있다는 등 명령만 내리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김학규와 김구를 존경하는 척 했다. 결국 김학규는 안두희와 홍종만의 꽤임에 빠져 이들의 암살음모를 모른 채 김구선생에게 안두희를 소개하였고 안두희는 김구를 만나 속마음을 숨기면서 접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반면 김학규는 자신의 고백에서 밝혔듯이 자신이 걸어온 길은 양심에서 살고 의리에서 죽는 독립운동 뿐이었으며 꼬불꼬불한 권모술수, 잔재주 따위의 일은 모른다며 청교도와 같이 순진, 정직 뿐이라고 언급하였다. 또한 간악한 小人之輩들이 자신의 순진성을 기화로 온갓 농락을 베풀어 급기야는 자기가 가장 공경하고 우리 동포가 가장 숭배 신임하는 김구선생의 생명을 빼앗아가고 또 한국독립당을 때려부수기 위하여는 조직부장인 자신을 얼토당토 않는 구실을 꾸며 감옥에 쳐 넣었던 것이라고 {혈루의 고백}에서 밝히고 있다.
결국 안두희는 1949년 4월 14일자의 한국독립당 당원증을 발급받았다. 이 당원증은 나중의 군법회의 재판에 제출되어, 안두희가 문제의 '비밀당원'으로 인정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비밀당원의 결정적 증거는 당원증에 있는 문제의 '秘'字와 '군복을 입은 사진'이었다. 즉 재판에서 안두희와 홍종만은 군인이 정당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한독당은 비밀당원으로 특별히 관리하였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홍종만과 안두희는 김학규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김구와 한독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안두희 재판과정에서 홍종만이 제출했다고 하는 일기가 바로 이 활동을 보고한 정탐일기였던 것이다. 1949년 5월 중순 군산에서 열린 당원 단기강습회 개강식에 김구선생 이하 한독당 간부들이 참석했는데, 홍종만은 김학규로부터 이 정보를 입수하여 군산과 전주까지 가서 이들의 행동을 감시했으며, 며칠후 예산에서 거행된 윤봉길의사 비석 제막식에도 김구선생를 따라가 그 행적을 감시하였다. 5월 하순경 홍종만은 김학규를 찾아와 지리산으로 빨치산운동이나 하러 가자는 허위와 악의에 찬 제안까지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홍종만과 안두희는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김구선생과 한독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김지웅, 김태선 시경국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등에게 보고하였다. 백범 암살은 6월 말 세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1949년 6월 전후의 국내정세를 우선 간단히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국내의 정치정세는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어수선하였다. 5월 17∼18일 서울시경의 崔雲霞사찰과장이 주도하여 李龜洙 崔泰奎 李文源 의원 등이 검거되었다. 당시 국회프락치사건은 군경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는 헌병사령부에서 취급하고 있었는데, 노덕술, 최운하 등 친일경찰들이 헌병사령부에 파견되어 수사를 담당하였다. 6월 21일 金秉會 金沃周, 22일 朴允源 姜旭中, 黃潤鎬, 盧鎰煥 등이 검거되었다. 더욱이 6월 29일로 예정된 미군의 완전 철수와 북한의 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결성 시도로 정국은 '총비상'이었다.
백범 암살의 첫 시도는 국회프락치 사건의 2차 검거가 진행중인 6월 23일이었다. 이날 홍종만 안두희 오병순 한경일 강창걸 독고녹성 정익태 한국상 이춘익 한봉수 등 모두 10명은 김약수 국회부의장이 김구선생의 거소인 경교장에 숨어 있다는 것을 핑계로 김약수를 체포하려는 명분으로 경교장을 습격하여 혼란의 와중에서 백범을 암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하였고, 김약수는 6월 25일 새벽 경교장이 아닌 종로구 운니동 金正業여인의 집에서 검거되었다.
당시 장은산은 암살을 지휘하기 위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김지웅, 안두희, 홍종만은 서울대학병원으로 가서 장은산을 만났다. 장은산은 6월 25일 김구선생과 공주에서 건국실천요원 양성소 모임에 참석하게 되어 있으니, 그 중간지점인 수원 병점고개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습격하여 살해하라는 지시를 하였으나, 출발당일 새벽 공주경찰서장이 경교장에 전화하여 행사 개최를 허가할 수 없다고 통보했지만, 이 통보를 미쳐 모르던 암살자들은 현장까지 가 있었으나, 김구선생일행이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그 계획은 실패하였다.
그날 저녁 장은산은 다시 안두희를 불렀다. 장은산은 안두희에게 단독 범행을 지시하였다. 장은산의 '쌀쌀한 명령'에 안두희는 '그저 하겠시다'고 답변하였다. 장은산은 입원실 문을 나서는 안두희의 손을 잡고 장개석 정부의 특별 테러단체인 藍衣社의 社則과 行動 慣例를 언급하면서, '만약 일이 실패하게 되면 너두 갈 수 있다'고 협박을 하였다. 안두희는 다음날 오전 10시에 집에서 나와 11시경 경교장 앞 자연장 다방에 들렀다. 다방에는 처음에는 조용하였지만 11시가 넘으면서 헌병들이 많이 들어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안두희는 백범 암살을 다짐하면서 아주 천연스러운 태도로 경교장으로 들어갔다.
경교장에서 안두희는 비서들의 환대속에서 권총을 찬 채로 이층으로 올라가 백범을 만나 암살을 결행했다. 안두희는 암살 후 총을 계단에 던지면서 '제가 주석 선생을 시해했어요'라고 외쳤고, 이어 비서들이 안두희를 구타하였다. 곧이어 경교장 주위에 포진해 있던 헌병들이 들어와 안두희를 헌병사령부로 압송했다.
3) 안두희 심문과 당국의 수사 및 재판
백범의 죽음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청년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백범의 유지를 계승하여, 통일독립에 더욱 매진하기로 결의하여, '남북통일' 등 통일염원을 담은 혈서들이 경교장으로 답지하였다. 또한 할복자살, 음독자살을 기도하는 사람, 지방에서 수일간 달려온 사람 등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문상객 중에는 신당동 해방촌에서 온 거지, 머리깍은 여승, 고구마팔던 할머니 등 문자 그대로 '걸객에서 장관'이 1분에 수십명씩 경교장에 출입하였다. 이러한 국민적 비통함 속에서 국민장으로 치루어진 7월 5일의 장례식은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없는, 진실한 의미에서 전국민적인 애도속에서 치루어졌다. 그러나 암살범 안두희에 대한 당국의 수사는 국민적 비통함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안두희는 사건 직후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었다. 당시 헌병 부사령관인 田鳳德은 당일 오후 2시 '범인이 의식을 되찾는 대로 그 배후를 엄중 조사하겠으나 단독범행인 것 같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다음날 오전 안두희는 특무대로 이송되었는데, 6월 27일 오전 국방부 보도과에서는 '진상은 목하 엄중 취조중'에 있으며 지금까지 판명된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고 발표하였다.
① 안두희는 한독당원으로 김구씨의 가장 측근자라는 것 ② 안두희는 누누히 김구씨와 상봉하여 직접 지도를 받던 자인 것 ③ 당일은 인사차 김구씨를 만나러 갔다가 언론 쟁투가 되어 격분한 결과 순간적으로 살의가 발생한 것
이러한 발표의 골자는 '안두희가 한독당 당내 분쟁으로 우발적으로 저지른 단독범행'이라는 것이다. 다음날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은 담화를 발표하여 '조사 결과 이번 범행이 하등 군내에는 관련성이 없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발표의 가장 큰 문제는 안두희가 본격적으로 취조받기 이전의 것이라는 점이다. 안두희는 26일 헌병사령부에서도, 27일 군특무대에서도 본격적인 취조는 받지 않았고 치료만 받았을 뿐이다. 6월 27일 특무대로 이송된 후에도 환대를 받았으며, 곧 김창룡이 찾아왔다. 김창룡과의 만남은 취조관하구 피의자의 입장이 아닌 '커피 마시면서 아주 화기애애한 기분으로 경어를 쓰는 반가운 회동'이었다. 이처럼 안두희에 대한 심문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정부당국의 발표 내용은 6월 27일 헌병사령부 및 국방부의 발표를 '한 입으로 말하는 것(如出一口)'처럼 반복하였다. 다만 상부 인사로 올라 갈 수록 '우려와 협박'이 추가되었을 따름이다. 이범석 총리는 6월 27일 호남 순찰중 목포에서 암살 사건 소식을 듣고 백범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일반 국민은 臆測과 夭言을 엄금하기 바란다'는 묘한 성명을 발표하였고, 대통령 이승만은 6월 30일 더욱 묘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암살사건을 한국독립당 당내 분쟁의 결과로 강조하면서도, 암살 동기를 밝히지 않는 것이 김구를 위한 것이란 회괴한 어법을구사하였다.
7월 1일에는 전봉덕 헌병사령관과 김태선 시경국장이 공동으로 布告文을 통해 '군경의 건재함에 신뢰를 갖고 항간에 유포되는 造言非語와, 사실을 왜곡 모략 선동함에 부화뇌동하여 경거망동하지 말며 군경에 절대적인 협조를 바란다'고 발표하였다.
이처럼 군대와 경찰은 국민들에게 엄중 조사할 테니 신뢰하라고 성명하였지만, 안두희는 특무대 김창룡의 특별 배려 아래 구금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창룡은 안두희를 위해 숙직실을 개조하여 '호텔과 같은 특별 감방'을 제공하였다. 안두희는 좋은 음식을 먹고 목욕까지 하고 신문도 보면서 편안하게 보냈다. 또한 부인 동생 등 가족은 물론 김창룡 . 포병사령부의 장교 등이 면회왔으며, 김지웅은 돈까지 주고 갔다. 이러한 과분한 대접은 안두희가 생각해봐도 '기가 막히는 모순'이었다. 그러나 특무대장 김창룡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김창룡의 이러한 보호로 안두희에 대한 취조는 다만 형식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다. 김창룡은 취조관으로 노엽대위와 이진용중위 두 사람을 안두희에게 소개하였고, 이들은 '안소위님'이란 경어를 쓰면서 담배를 권하고, '하기 싫은 말은 안해두 된다'고 권유하였다. 또한 홍종만, 김지웅, 장은산 등 세사람에 대하여 안두희가 진술까지 했으나, 수사관들이 안두희 상부는 더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수사를 의도적으로 축소하였다. 즉, 안두희의 진술이 윗선으로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고, 송치할 때까지 조서를 보여주지도 않고 서명 날인하게 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시 수사관 노엽중령이 몇년 전 TV에 나와 수사 당시 김지웅이가 안두희를 면회올 때 자기가 외삼촌이라고 하면서 면회한 사실이 있고, 김지웅의 태도가 너무 건방져서 이진용 수사관과 함께 "저 새끼 구속해버릴까" 하고 상의까지 하였으나, 상부의 압력으로 그 배후를 조사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는 증언을 한 것이 있다.
7월 20일 김구선생 암살사건에 대한 최종 수사결과가 군당국에 의해 발표되었고 8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동안 안두희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안두희의 죄명은 국방경비법 제43조 군인의 정당가입 금지 위반과 金九선생을 살해한 혐의였다. 재판은 첫날 김학규에 대한 검사의 증인심문으로 시작되었다. 김학규는 비밀당원이 없음을 주장했지만, 증인으로 나선 홍종만이 안두희가 비밀당원임이 틀림없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안두희는 김구선생의 용공 이적성을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고 애국적인 단심으로 김구를 살해하였다고 그의 정당성을 피력하였다.
안두희의 변호인들은 5.10 선거와 단정, 대한민국을 반대한 金九를 살해한 안두희의 범행목적과 동기가 정당했다며 대한민국에서 표창할 일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즉, 변호인들은 "피고를 애국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반역자가 애국자를 살해할 수도 있고, 애국자가 애국자를 살해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안두희가 의식적으로 범행을 하지 않았고 또 자수하였으니 이를 많이 참작하여 2년 집행유예 판결을 바란다고 까지 했다. 이 때 법정 내에서는 박수소리까지 들렸다. 검사는 안두희에게 총살형을 구형하였으며, 재판장 원용덕을 위시한 재판관들은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한편 김학규는 6월 27일 안두희를 한독당에 가입시킨 혐의로 헌병사령부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그에 관한 재판은 현재 그 재판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확실한 혐의내용에 대한 것도 분명치 않지만, 안두희가 재판한 재판부에서 사건을 취급한 것이 아니고 당시 채병덕 총참모장의 장인이던 백홍석대령이 재판장으로 있는 다른 재판부에서 심리되었다. 그가 받은 형은 안두희와 같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5년으로 감형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15년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백범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와 같은 처벌을 받았다는 역설을 볼 수 있다. 그는 앞에서 밝혔듯이 암살자들의 꾀임에 빠져 안두희를 입당시켰을 뿐인데, 이것이 오히려 그의 죄목이 되었던 것이고 안두희가 '안의사'라는 대접을 받으면서 독방에 당번이 돌봐주고 부인과 면회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복역하였던 것과는 반대로 24시간 동안 수갑이 채워진 채 육군형무소 지하감방에 수감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 후 1년도 안되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점령되기 직전 27일 안두희는 당국의 지시로 석방되어 육군에 복귀한 반면에 김학규장군은 인민군이 입성할 때까지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다가 인민군에 의하여 석방된 후 수원에 내려가서 이름을 숨기고 변장한 채 숨어살다가 몇년 뒤 정부당국에 발각되어 재수감된 후 4.19 때까지 복역한 비극적인 처우를 받았던 것이다. 결국 김학규장군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김구선생이 가장 신임하는 애국자의 한 분이었는데, 이승만정권의 잘못된 사건 조작으로 김구선생 암살의 공범자 취급을 받았던 것은 정말 아이러니컬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첫댓글 이글을 보고 역사를 다시한번 공부 하였습니다.
역적 안두희 숨박꼭질 하다 세상 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