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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추억은 영원히 원문보기 글쓴이: 예원
한국미술사-백제예술의특징, 백제 전통문양 무늬,백제시대 회화 불상조각 건축 탑
문물이 직접 교류되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자극받고 있음을 고분(古墳)의 축조나 출토유물의 성격에서 볼 수 있다. 불교의 영향으로 한성시대부터 사찰의 건축과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불교 용구의 생산은 백제의 한성시대부터 사비시대까지 이어져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한성시대는 초기의 약 500년간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현존하는 미술품은 거의 전무하며,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의해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문헌자료에 의하면 마한이 3세기 후반부터 진나라에 조공무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계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인 경기 양평, 문호리, 삼곶리, 가락동, 석촌동, 연천 등에서 토기, 대롱옥[管玉], 널무덤[土壙墓]출토 흑유(黑釉)거치무늬 토기 등이 있다.
중국 동진에서 수입된 4∼5세기 미술품은 청자 도연편(陶硯片), 흑갈유 전문편(錢文片), 청자 사이호(四耳壺), 법천리 청자양형기(羊形器), 화성군 천계호(天鷄壺) 등이 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한산에 절을 세우고 승려를 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유적과 유물이 없다. 이 시기에 예배대상인 불상 등은 전래되거나 제작되었지만 귀걸이 이외의 장신구 등의 금속공예품은 거의 없다.
웅진시대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백제세력이 위축되면서 64년간 천도했던 시기로 초기에는 지방호족과의 다툼으로 혼란하였으나 곧 국내를 정비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고, 불교를 발전시키는 한편, 중국 양(梁)나라와 문물을 교류하여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6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속공예품을 위시하여, 새로운 전축분 축조, 대통사(大統寺) 창건, 수원사(水源寺) 등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불교중흥의 바탕을 이룩하였다. 불교에서 외래양식 수용은 북위와 동·서위 양식을 받아들여 강건한 기상이 보이는 한편, 백제적인 우아함과 세련된 기법을 볼 수 있다.
사비시대는 백제의 웅비(雄飛)의 시기이며, 부여는 마지막 천도로 123년 동안 수도였다. 성왕(523∼554)은 백제의 중흥의 왕으로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 양나라와 교류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였다. 미륵사(彌勒寺), 왕흥사(王興寺)와 같은 대찰을 창건하여 "사찰과 탑이 매우 많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흥하였다. 중국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남조(南朝)문화 뿐만 아니라, 그 이후 북조예술의 요소도 보이며, 백제미술은 국제적이고, 개방적이면서 백제적인 특징을 찬란하게 승화시킨 절정기의 높은 수준이 가늠된다.
백제미술의 특성은 북방적인 고구려 문화 요소를 토대로 하여 시대성·자연환경·토착성·인위적 창조성을 갖고, 서남의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외교를 통해 받아들여 진취적으로 수용, 창조적으로 융화하여 찬란한 백제적인 미술품을 재창조하였다. 나아가 일본에 백제문화를 전파하여 일본문화 형성의 기조를 이루게 하였다.
2. 백제시대의 회화
고구려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들 나라와는 다른 차분한 화풍을 이루어 백제 특유의 완만하고 유연하며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고구려 회화와 유사한 양식을 창조했다. 고구려의 영향은 몇몇 고분벽화에서 확인되며, 중국 남조 특히 양나라와의 교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양서(梁書)》 등의 기록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전하는 백제시대 회화작품으로는 공주송산리 6 호분(公州宋山里六號墳), 부여능산리고분(扶餘陵山里古墳)의 사신도(四神圖)·연꽃무늬[蓮花紋(연화문)]·비운무늬[飛雲紋(비운문)] 등의 벽화, 부여 규암면 절터에서 발견된 <산수문전(山水紋塼)>,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 등으로 매우 드물다.
7세기 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산수문전>은 백제미술의 한 정점(頂點)이며, 백제 회화의 우수함을 가장 잘 보여준다. 좌우대칭으로 짜여진 이 벽돌은, 아랫부분의 도식화된 수면(水面)과 윗부분의 구름을 뺀 나머지 부분에 산들을 가득히 새겨 놓았다. 바위산과 소나무 덮인 산들이 첩첩이 겹치고 쌓인 모습을 공간감과 거리감 있게 나타냈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조화와 느낌에도 마음을 써서, 원융(圓融)한 세계를 이루었다. <산수문전>의 이 삼산형(三山形) 산악도는 무령왕릉 출토의 동탁은잔(銅托銀盞)에도 나타난다. 또한 백제회화는 일본의 고대회화 성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백가(白加)·아좌태자(阿左太子)·인사라아(因斯羅我) 등의 이름이 일본 기록에 남아 있다.
3. 백제시대의 조각
384년(침류왕 1) 중국 동진(東晉)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고부터 불상이 조각되었다. 처음에는 중국의 불상을 본뜨다가 차츰 백제 고유의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서울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좌불상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백제불상으로, 네모난 대좌 위에 두 손을 앞에 모은 선정인형식(禪定印形式)을 취하고 있다.
부여군(扶餘郡) 규암면(窺巖面) 신리(新里)에서 출토된 금동좌불상과 부여읍 군수리(軍守里) 절터에서 출토된 납석(蠟石)으로 새긴 불좌상이 뚝섬에서 출토된 불상을 약간 발전시킨 6세기의 작품이다. 석조불상은 암벽에 돋을새김[浮彫(부조)]한 것들이 많다. 충청남도 태안군(泰安郡) 백화산(白華山)의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은 작은 보살을 중심으로 양쪽에 큰 보살이 서 있는 특이한 형식을 보여준다.
충청남도 서산시(瑞山市) 운산면(雲山面)의 마애삼존불은 얼굴의 티없는 웃음으로 <백제의 미소>라는 찬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우수한 수법을 보여준다. 왼쪽에 반가사유상을, 오른쪽에 관음보살입상을 거느린 삼존불은 삼국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진 형식으로 특히 백제에서 성행했는데, 중국 남조 불상들에서 그 원류(源流)를 찾아볼 수 있다.
이 형식을 본뜬 일본의 초기 불상들인 호오류사[法隆寺(법륭사)] 유메노도관음[夢殿觀音(몽전관음)]이나 금동48체불 중에도 두 손에 보주(寶珠)를 마주잡은 불상들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문화의 전파 경로를 짐작하게 한다. 7세기 전반기의 작품으로는 공주시(公州市) 의당면(儀堂面)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 등이 있는데, 오른쪽 다리에 무게중심을 둔 3곡자세와 달개[瓔珞(영락)]·천의(天衣)의 표현 등으로 미루어 중국 북제(北齊) 및 주(周)나라 말기와 수(隋)나라 초기의 새로운 양식이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때의 석조상으로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 삼기면(三箕面) 연동리(蓮洞里) 석불좌상이 있는데, 균형잡힌 몸매와 세련된 옷주름을 보여준다.
4. 백제 건축양식의 특징
처음에는 고구려와 거의 같았고, 그 뒤 중국 남조의 양식이 더해졌으리라고 짐작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공주·부여·익산지방의 절터와 석탑 2기뿐으로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백제 초기의 목조건축은 강직하고 웅장한 고구려 양식이었다가, 점차 경쾌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변하고, 지붕은 맞배지붕·우진각지붕 외에도 중국에서 온 팔작지붕이 새로이 나타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으로는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으로 삼고 있는 익산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과 이를 바탕으로 7백제양식의 완벽한 석탑으로 발전된 정림사지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이 있다. 부여지방의 여러 절터와 익산 미륵사 절터의 발굴로 백제 가람 배치의 대강이 밝혀졌고, 성터에 대한 조사도 많이 이루어졌다.
금제관식<왕비>
종 목 국보 제155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관(冠) 장식으로, 모양과 크기가 같은 한 쌍으로 되어 있다.
높이 22.6㎝, 너비는 13.4㎝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비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에 무늬를 뚫어서 장식하고 밑에 줄기를 달았다. 예리한 도구로 도려내어 무늬를 만들었는데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매우 정연한 느낌을 준다. 중심부의 연꽃받침 위에 놓인 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덩굴무늬가 있고 병 위에는 활짝 핀 꽃 한송이가 있다. 중간부터 위쪽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무령왕릉 안에서 같이 발견된 왕의 관 장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구슬 등의 장식이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며,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백제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중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백제금관
백제에서 출토된 관모로서는 전남 나주군 반남면의 백제시대 옹관으로부터 출토된 내ㆍ외관모 한벌과 공주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각 한쌍의 왕과 왕비의 금제관모장식이 있다.
백제에서 출토된 관모로서는 전남 나주군 반남면의 백제시대 옹관으로부터 출토된 내ㆍ외관모 한벌과 공주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각 한쌍의 왕과 왕비의 금제관모장식이 있다.나주 옹관으로부터 출토된 금동관 중 내관은 반원형의 금동판 두장을 맞붙여 위쪽 둥근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씌워 붙였다.관모의 가장자리에는 간단한 인동문(忍冬紋)이 둘러져 있고, 바탕에는 초화문이 안쪽에서부터 돌출된 점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세부의 의장(意匠)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앞서 고구려의 진파리 1호분 출토의 금동투각관모와 상통한다.한편, 외관은 너비 3㎝의 둥근 테두리 위에 세개의 입식을 세운 것으로, 입식들은 각기 가운데에 곧게 솟은 줄기를 중심으로 세 갈래의 가지가 뻗쳐져 전체적으로 투각된 수목형의 모습을 나타나게 하고, 표면에는 군데군데 원형의 영락을 매달았다.무녕왕릉에서 발견된 금제의 관모장식들은 모두 순금판을 도려내어 줄기와 꽃잎을 나타낸 초화형으로서, 원형의 금제 영락은 왕의 관식에만 매달려 있으며, 왕비의 관식에는 영락이 없이 보다 간결하게 만들어 졌다.
◈ 백제벽돌무늬
◈ 백제시대전통문양
연꽃당초무늬 백제시대
◈ 백제와당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관 장식
좌우대칭이 되지 않고 생동감 넘치는 불꽃 모양의 느낌이다. 사실 그 문양은 이집트와 서아시아 전역에서 나타나는 팔메트라는 식물이란다. 생명을 상징하는 왕비의 관식에도 나타나고, 삼국의 모든 고분이나 예술작품에서 팔메트문양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드라마 '서동요'의 오류, 서동의 아버지 위덕왕이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의 장식은 왕비의 것이다. 중앙의 문양을 보면 탁자위에 항아리가 하나 나오고 거기서부터 연꽃이 피어나는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백제 금동대향로.
93년 처음 발견되었을 때, 정권의 정당화에 이용되었다는 그 아픔의 향로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도로 공사를 하던 중 땅 속에서 발견되었다. 일부러 땅에 묻은 듯 하다.
향로 뚜껑부분과 아랫부분으로 나누어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아랫부분은 용과 연꽃과 물속의 모습들, 윗 부분은 산과 신선과 사람들과 봉황 등, 육지의 모습들을 표현했다.
너무나 완벽해서 처음 발굴한 사람들이 본래 우리의 문화는 이렇게 빽빽히 문양을 넣지 않는 풍조여서 중국의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었다함.
백제의 유리구슬
백제의 것으로는 유일하다는데 이것은 수입이라기보다는 백제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 같다. 신라는 수입했던 게 확실하고, 게다가 하나 밖에 없는 유물로 그게 제대로 된 설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제 사비시대 숫 기와의 막새
기와는 암 기와와 수기와가 있다. 넓적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암 기와와 둥글게 겉으로 드러나는 숫 기와, 그 중에서도 가장자리 부분이기 때문에 막새라고 한다.
웅진시대부터 이미 연꽃 문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데, 사비시대에는 그 문양의 세련됨이 절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는다.
[출처] 백제의 찬란한 문화(서동요의 시대)|작성자 영심이
여러 가지 문양과 설명
기하무늬
낙랑시대 고분의 벽돌에 새겨진 무늬에서 시작하여 신라토기의 간단한 선무늬, 고려시대 의 청자기, 조선시대의 백자기를 거쳐 오늘의 추상무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와 역사를 거쳐 왔다.
기하무늬의 뿌리는 중국 하. 은. 주 시대에서 볼 수 있는데 외국의 기하무늬는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기하학적 조직성을 잃고 곡선적인 장식무늬로 변한 데 비해 우리의 기하무늬는 한국인의 놀라운 조직과 변화 조형 감각으로 발생과 도입의 초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예와 건축부분에서 고유의 기하무늬로 발달되어 왔다.
도깨비무늬
우리의 옛 전설이나 민담속에 살아 전해지면서 한국인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도깨비는 키가 8, 9척이 넘고, 무서운 털이 나 있고, 몸은 흑 적색이며, 눈은 무섭고 크며, 몸은 나체인데 허벅지에 창포를 두르고 있으며, 입에는 날카로운 영치가 네개 밖으로 나타나 있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각각 세가락, 머리에는 쇠뿔이 달린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도깨비는 병마, 액운, 천재지변 등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벽사 신앙으로 자리 잡아 우리 생활 속의 조형미술을 통해 표현되어져 왔다.
구름무늬
시시각각 변화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으며, 하늘에 떠 오묘한 조화로 그 신비로움을 더하였던 구름은 농경 생활을 하였던 우리 민족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주었다.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신라의 운문, 단순한 선수형으로 담백한 미를 보여주고 있는 백제의 운문 등 시대에 따라 변천한 구름무늬는 각 시대의 특유한 문화적 개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금속공예, 목공예, 화각공예, 단청, 자수공예 등에 두루 쓰였으며, 그 오묘한 조화와 상서로운 조화로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과 어울려 신비감과 상서로움을 더하였다.
태극무늬
우리 민족의 조화의 상징인 용에 대응하는 신비, 신성의 부호로서 신라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태극에 내포된 음양사상은 우리나라의 고대 문화유적이나 생활풍습을 통해서 잘 나타나는데, 고구려 고분의 벽화, 민족 설화, 의학에서의 병리, 생리 등을 음양으로 분류 하였다.
이러한 음양 상대성의 원만한 조화를 이상적 상태로 여겨왔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태극 무늬는 우리 민족의 국민정신과 주권을 대표함과 아울러 조화, 창조, 단결의 상징이었다.
연꽃무늬
연꽃이 고대 인류로부터 중시되어온 것은 비록 더러운 진흙에서 피어나나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하며, 수명이 길다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연꽃 무늬는 불교의 전파와 더불어 아시아 전역에 강한 영향력을 끼쳐 건축, 조각, 공예 회화 등 예술 전반은 물론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사용되며 발전되어 왔다.
당초무늬
그리스 및 페르시아, 중국 등 당초무늬가 발견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오래 그리고 널리 쓰이던 무늬이다.
어느 특정한 식물을 소재로 무늬화 시킨 것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발생한 인동문을 기원으로 발전해 온 가상의 식물덩굴무늬이다.
우리나라 당초무늬는 고구려 벽화나 막새의 것은 단순하고 힘이 있고 신라의 당초는 단순하지만 유려하다. 이러한 당초무늬는 고려에 전승되어 그 화려한 아름다움이 극에 다다르며,
그 후 조선시대의 능화판에 이르면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맛이 살아나는 서민적인 표현으로 되어 나타난다.
얼굴무늬
우리의 가면 모습은 강렬한 원색의 색채를 사용하였고, 울퉁불퉁 요철이 심하며, 모든 가면은 캐리커처라는 체에 한번 걸러서 표현했기 때문에 웃음에 앞서 괴기스럽게 보인다. 이러한 우리의 가면모습을 대하면 3번 놀란다. 우선 괴상망칙스럽게 생긴 것에 놀랄 것이고
둘째, 자세히 보면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라는데 다시한번 놀란다. 그리고 우리의 여러 계층을 그렇게도 흥미롭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에 또 다시 놀라게 된다.
나무무늬
나무가 지닌 우주성과 세계성, 그리고 신앙성은 그림으로 또는 무늬로 표현되어 왔는데 그 표현양식은 각기 다양하다. 나무를 나타내는 상징 도형은 나무의 뿌리, 줄기, 뻗어나간 가지를 나타내는 형상의 그림 문자로 나타나며, 신화적인 혹은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문자와 상징들이 상당히 많이 사용되어왔다.
"산수문전" 으로 백제시대 벽돌(전)이다.
*산수문은 고대 무늬 중 하나로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하단에는 물이 있고,
중단에는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 이어지고, 상단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떠있다.
*산수문전은 규칙적인 배열되어 있으며,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균형잡힌 구도로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수문전은 건축물 등의 재료에 장식된 무늬이며 우리나라 산수화 발달 초기 과정을 연구
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연꽃 당초 무늬 -무령왕릉 왕관장식
무령왕릉 벽돌 문양
백제궁 앞에 있는 백제의 상징, 봉황 문양`
백제시대
고구려에서 시작된 벽화·단청화법의 발달은 백제와 신라에 전파되었다. 백제는 뛰어난 화원들이 속출하였고 그 일부는 일본에 가서 회화의 조종(祖宗)이 되기도 하고 사공(寺工)과 더불어 건물의 화사들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백제 성황 19년(541년)에 중국 양(梁)나라에서 건너온 모시박사(毛詩博士)일행과 같은 온 화사 등에 의하여 전통화법에 새로운 외래법을 도입하여 화업은 더욱 발달되고, 불교통사 화업도 크게 발전되었을 것이다.
백제 단청의 유례로서는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 벽화, 경남 거창 둔마리 고분 벽화 및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발견된 것이 있다. 이들은 벽면에 호분을 바르고 벽화를 그린 것이며 화재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청·적·흑·백 등의 색채로 그렸다고 한다. 또 고출토품인 산경문전 · 연화·번룡 · 와운문전 등의 독특한 도안은 당시의 화공들의 우수한 기량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백제금동대향로의 높이는 62.5㎝. 동양 최고·최대의 향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 세상 만물을 찾아볼 수 있다. 향로는 한 마리의 커다란 용이 용틀임하는 형상으로 몸통을 받들고 있고, 몸통은 갓 피어나려는 연꽃봉오리의 모양을 한 채 몇몇의 연잎 끝은 살짝 반전, 정교하게 돋아 있다. 꼭대기에는 한 마리의 봉황이 여의주를 턱 밑에 낀 채 하늘을 향해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군더더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향로는 미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봉황과 몸체, 받침 등 전체적인 균형미가 돋보이는 걸작이다.
위로 왕릉 축조에는 모두 28종류 이상의 다양한 벽돌이 사용되었다. 이 중 주목되는 것으로는 명문 있는 벽돌과 문양 있는 벽돌이다.
문양 있는 벽돌에는 각각 짧은 변과 긴 변에 문양이 있는 것이 있는데 짧은 변에는 연꽃무 늬(蓮花紋)와 인동연꽃무늬(忍冬蓮花紋)로 장식되고 긴 변에는 연화사격자무늬(蓮花斜格子 紋)와 사격자무늬(斜格子紋)로 장식되었다.
백제의문양중에 으뜸가는것을꼽는다면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 있는 한 절터에서 출토된 일괄 유물이다. 이들 문양전은 모두 산수문전과 산수봉황문전, 산수귀문전, 연대귀문전, 연화문전, 와운문전, 봉황문전, 반룡문전 등 8매로 경질의 점토로 틀에서 찍은 것이다. 이 중 산수문전은 암반과 암벽을 전경으로 하고, 그 뒤에는 삼봉으로 이루어진 연산이 첩첩이 들어서 있다. 산봉우리마다 소나무 숲이 서 있고 산 위의 하늘에는 서운이 흐르고 있다. 근경에 나타난 암벽 뒤의 산중턱에 지붕에 치미가 있는 건물이 있고, 오른편 암반 위에는 이 집을 향해서 걸어가는 한 인물이 표현되어 있는 7세기 백제의 산수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외 7점도 모두 같은 크기의 것으로 봉황ㆍ반룡ㆍ와운ㆍ연화ㆍ귀ㆍ산수귀ㆍ산수봉황을 주제로 정교하게 제작하였다.
무령왕릉 왕비금관식
종 목 : 국보 제155호
소 재 지 :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관(冠) 장식으로,
모양과 크기가 같은 한 쌍으로 되어 있다.
높이 22.6㎝, 너비는 13.4㎝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비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에 무늬를 뚫어서 장식하고 밑에 줄기를 달았다.
예리한 도구로 도려내어 무늬를 만들었는데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매우 정연한 느낌을 준다.
중심부의 연꽃받침 위에 놓인 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덩굴무늬가 있고
병 위에는 활짝 핀 꽃 한송이가 있다.
중간부터 위쪽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무령왕릉 안에서 같이 발견된 왕의 관(冠) 장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구슬 등의 장식이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며,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백제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지석(誌石)은 삼국시대 고분 중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 연꽃
속세에 때묻지 않은 청정한 정토(淨土)를 상징하여 불교공예나 조각품의 장엄장식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연뿌리와 줄기가 서로 얽혀 있는 것은 형제애를, 연꽃 열매와 씨앗은 자식을 많이 가지기를 소망하는 유교적인 관념과 관련이 되어 조선시대에도 길상문양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백제 기와와 전돌의 특징>
백제시대 기와의 종류는 쓰임새에 따라 암ㆍ수막새, 암ㆍ수키와, 서까래기와(椽木瓦), 도깨 비기와, 망새 등으로 구분된다. 기와에 나타낸 문양은 연꽃무늬(蓮花文)ㆍ파형무늬(巴文)ㆍ 당초무늬ㆍ민무늬 등으로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 가운데 연꽃무늬가 거의 대부분 을 차지하고 있다. 기와의 문양에 보이는 연꽃무늬의 특징은 꽃잎이 넓고 부드러우며, 또한 그 끝단을 위로 향하도록 살짝 반전시키는 등 매우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백제의 기와는 초기에는 낙랑과 고구려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웅진시대 이후에는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부드럽고 세련된 형태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백제의 기와는 신라 와 일본 기와에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전돌은 주로 벽돌무덤, 궁궐 및 사원 건축에 이용되었는데 그 종류나 쓰임새 모양이 다양 하다. 전돌은 용도에 따라 무덤 전돌과 탑 전돌 등으로 구분된다. 형태에 따라서는 방형전 돌, 삼각전돌, 능형전돌(陵形塼), 이형전돌로 구분되고 문양의 유무에 따라 민무늬전돌과 무 늬전돌로 나뉘기도 하며, 글씨가 새겨진 명문전돌도 있다. 무덤 전돌은 고구려나 백제에서 확인되며, 공주의 송산리6호분과 무령왕릉의 것이 대표적인데, 부여 정동리 가마터유적에서 발견된 연꽃무늬와 글씨가 있는 전돌은 무령왕릉에 쓰인 전돌들과 비슷하여 주목된다.
무늬전돌은 부여 외리 유적에서 출토된 8종의 무늬전돌이 대표적인 예로서 산경(山景)무늬, 귀형(鬼形)무늬, 반용(蟠龍)무늬, 봉황무늬, 연화와운(蓮花渦雲)무늬 등이 출토되었다. 이 전돌들은 조각 수법이 매우 세련되었고, 화려한 의장(意匠)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군수리 절터에서 출토된 상자모양 전돌이 있다.
이러한 무늬전돌은 6∼7세기에 제작된 것이 많으며, 백제미술의 부드러움이나 세련됨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다.
서까래기와 부여가탑리 | 도장찍힌기와 부여가탑리 | 연꽃무늬수막새 백제6-7세기 | 연꽃무늬수막새 백제6-7세기 | 연꽃무늬수막새 부여외리 |
백제 문양 특징 조사
산수문전
우리나라 고대 국가 중에서 예술이 가장 뛰어났던 나라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백제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백제 예술품들의 특징은 따스한 온화함과 여유로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백제 예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이 있다면, 아마도 6세기 백제왕들의 무덤에 쓰인 산수문전이 아닐까? 산수문전은 산수풍경을 앝은 부조 형식의 틀을 떠서 구워 만든 벽돌이다. 이것은 일제시대인 1937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의 옛 절터에서 8종의 문양전(보물 제343호)과 함께 출도 되었으며,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와 똑같은 파편 1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전시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19년 (541)조에 “왕이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어 글로써 모시박사, 경의 및 공장, 화사등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라고 기록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남조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이 시기 백제왕들은 이웃의 다른 나라들처럼 화강암을 쓰는 묘제 대신 중국식 전돌로 만든 묘제를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왕릉은 한 장씩 틀에 넣어 구워낸 전돌로 건축하기에 이른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은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무덤
내부의 현도와 관이 놓인 현실에 줄을 맞춰 전돌로 쌓아올려 독특한 멋을 풍긴다. 현재 국립박물관에는 이 고분에 사용된 전돌이 전시되어 있어 백제미술품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다.
무령왕릉은 당시 중국 남조에서 이루어진 네모난 현실 축조의 묘체를 따라 전을 배열하여 건축했다. 하나하나 틀에 넣어 빚어 만든 전벽돌은 출토품들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인데, 여기에는 두툼히 새겨진 연꽃이나 봉황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의 풍경화로 간주되는 산수문전이다. 전돌은 두께 5cm에 사방 29 ~ 29.5cm의 정방형으로 각각 국립부여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산수문전은 좌우와 상하가 서로 대청을 이루는 안정된 구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산과 구름, 나무와 암자들은 백제인들의 무욕적인 사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매우 수준 높은 산수화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이것이 전돌을 구워 만든 장인의 작품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린 당시 백제 화공들의 작품수준은 분명히 이보다 훨씬 뛰어났으리라.
부여 규암면 외리 절터에서 발견된 이 문양전들은 미적 가치도 물론 높지만 백제인의 정신세계 종교세계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북주서>의 백제전은“ 그 나라에는 승려와 절, 탑은 매우 많지만 도사는 없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백제가 도교를 수용한 적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교국가로 알려져 있는 백제는 산수문전을 포함한 8종의 문양전들 가운데 연꽃을 그린 연화문전을 제외하면 대체로 불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백제의 유물, 그 중에서도 특히 산수문전은 오히려 도교적인 요소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문양전 가운데 봉황문을 볼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원형의 연주문대안에 한 마리의 봉황을 조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산경과 구름이 둘러싸인 중심에 한 마리의 봉황을 배치한 문양전이다, 이중 후자의 하반부에는 중첩된 산경문이 전개되어 있고, 상반부인 하늘에는 화려한 형태의 구름이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한 마리의 새(봉황)가 지상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런 화면 구도는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교나 사상 혹은 신화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문양전이 그리고 있는 종교란 다름아닌 도교일 것이다.
<산해경 서산경>에는 “곤륜산에는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이 순조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 순조가 바로 봉황이다. 곤륜산은 서왕모가 거주하고 있는 곤으로 사람이 신선이 되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세계이며, 불사의 국토로 알려진 곳이다, 요컨대 산경문전은 신선세계인 곤륜산과 그곳에서 서식하고 있는 봉황을 묘사한 문양이라고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 남북조, 특히 남조는 중국 역사상 도교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따라서 남조와 교류관계가 활발했던 백제는 문헌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았지만 분명히 남조로부터 도교를 수입했을 것이다. 남조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백제인들이 당시 남조에서 유행하였던 도교를 받아들였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빈번한 문화교류를 감안할 때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조를 통해 도교를 받아들인 백제인들은 현실을 초월한 신선세계를 동경하는 세계관을 갖게 되었는데, 그 단전인 증거가 바로 충청도 부여의 한 절터에서 발견된 산수문전이다.
산경치봉황무늬벽돌
연꽃구름무늬벽돌
연꽃무늬 수막새
귀족층 분위기 반영
백제의 금동향로에서 표현하고자 한 주제는 불교의 蓮華藏世界와 도교의 神仙世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보다 기본적인 주제는 蓮華藏世界예요.
다시 말하면 향로 전체적인 구성의 골격은 蓮華藏世界를 조형적 배경 으로 한 것이고, 그 蓮華藏世界의 구체적인 내용에 도교의 신선세계의 모습을 표현한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백제의 불교는 중국 남조(南朝)의 불교를 주로 받아들였는데, 그 남조불교(南朝佛敎)는 道敎思想을 받아들여 융합시킨 것이었습니다.
백제 후기의 귀족층에서는 그러한 불교와 도교가 융합된 문화분위기에 젖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654년에 작성된 砂宅智積碑文은 그러한 분위기에 젖은 당시 귀족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이 그러한 세계관을 글로 나타낸 것이라면, 금동향로는 조형으로 표현했다는 차이뿐이었고, 그 주제는 전면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상징동물은 바로 백제인의 小宇宙
부여 능산리 출토 금동향에서 백제의 동물들이 한꺼번에 달려나왔습니다.
1300여년전 백제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하는 향로에는 봉황을 비롯하여 상상의 날짐승과 길짐승, 현실세계에 실재하는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상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 연꽃사이에는 두 신선과 수중생물인 듯한 26마리의 동물이 보이는데 특히 이 향로의 기마인물상들은 백제 미술품에서는 처음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곰은 母神的 존재
전체적인 구성원리는 음양의 체계를 이루어 아래로 수중동물의 대표격인 용을 등장시키고, 그 위로 연꽃과 수중의 생물, 지상계에는 산악과 짐승 및 신선, 천상계의 정상부는 원앙과 봉황을 배치하였는데, 봉황은 양(陽)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백제 금동향로에 등장하는 다양한 동물 가운데 특히 백제와 관련이 많은 곰, 남방계 동물인 원숭이와 코끼리, 백제미술품에서 처음 나타나는 기마상, 신령스런 영매로서 영생과 재생의 상징인 사슴 등이 민속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곰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한민족(韓民族)의 모신적(母神的)존재로서 한국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곰은 단군신화와 민간설화에서 여성으로 등장한다. 환웅과 혼인한 웅녀의 몸에서 단군이 태어난 건국신화, 삼국유사에 신라 김대성이 토함산에 올라가 곰을 잡고 곰의 징벌이 두려워 그 자리에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를 지었습니다.
고구려의 해모수는 유화를 웅신산(熊神山)기슭 압록으로 유인했다는 역사문헌기록, 여인으로 변한 곰이 나무꾼을 유혹해 동거한 금강(곰강)의 전설 등 곰은 우리 민족의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곰 웅(熊)'자 붙은 지명이 '웅천(熊川), 웅촌(熊村), 웅진(熊津), 웅강(熊江), 웅산(熊山)'등으로 많습니다.
특히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금강이 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명으로 흥미를 끌죠.
이 곰이 백제향로 정면에서 왼쪽에 꼬리를 치켜 세우고 걸어가다 도인을 향해 되돌아보고 있죠.
말은 신성한 동물
선계(仙界)의 산에 나타난 원숭이, 코끼리, 연꽃 등은 불교문화를 수용한 세계관의 한 표현입니다.
옛 그림 속에서는 원숭이가 십장생과 함께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자손번창(子孫繁昌)의 상징으로 스님을 보좌하는 역할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기마인물상은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백제 무인이 두발을 곧추세운 기세의 말을 타고 힘차게 도약하는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45도 각도로 위로 치고 나가는 금동향로의 백제 기마무인상(騎馬武人像)에서는 천리를 달리는 진취적 기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죠.^^*
말에 대해서 느끼는 관념은 변함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것 같아요.
말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신성한 동물',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으로 수렴되었으니까요.
그리고 그외 사슴과 새 그리고 맹호가 평화롭게 뚜껑의 맨 아랫부분에 부조되어 있습니다.
사슴이 유유자적하며 선계의 산으로 오릅니다. 사슴 아래 나무가지에는 새가 앉아 노래하고 나무 아래로 맹호가 포효하고 있죠.
그 모습에선 백제인의 여유와 취미와 예술, 그리고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사슴의 출현은 좋은 일이 생길 징조로 보았습니다.
청학이 신선의 벗이자 짝이듯이 사슴도 신선의 벗이자 시종(侍從)이었죠.^^*
사슴은 호랑이와 더불어 신선의 탈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금동향로의 1백개 부조상은 영원불멸의 하늘세계의 상징으로서 봉황과 북방 설원에서 썰매끄는 사슴, 상상의 동물인 공작, 하늘을 나는 天馬의 神聖함, 사람과 가장 가까운 영물로서 원숭이 등을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