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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사도행전 2:37~41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 승천 후 열흘째 되던 오순절 명절에 예루살렘 성에 모인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 순례자들 앞에서 사도 베드로가 선포한 복음을 듣고 최초로 개종자 삼천 명이 생겨나는 놀라운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시 믿지 않던 유대인들과 유대교 신봉자 3천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 기적적인 사건의 기록 속에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그에게 가장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 최우선 순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세 주일에 걸쳐 2장 14절 이하에서 36절까지의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말씀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표적과 이적이 따르는 공적 사역과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과 그의 승천과 그의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심과 성령을 지상에 보내신 일들을 사도 베드로는 회중 앞에서 차례로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36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격렬하게 증오하며 거부하며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높이셔서 그들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확신을 가지고 증거하였습니다. 왜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그토록 집중적으로 증거했을까요? 이는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구주로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때에만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있기에,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가장 근본적인 일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들음으로써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아무리 계속 나온다 해도 만약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교회 생활을 그냥 종교 생활로 알고 교회에 꾸준히 나온다 해도 그 종교 생활의 성실함이 그 사람을 진실한 신자로 만들어주고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선행을 행하고 법 없어도 살 정도로 사람이 선량할지라도 그가 그리스도 예수를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천국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복음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2 말씀에서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단지 교회에 나오시라고 권면한다면 그것은 아직 전도는 결코 아닙니다. 교회에 왔는데 만약 그리스도 예수 외에 인간의 도덕과 윤리와 성공의 비결만을 가르치는 설교만 듣고 간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도 필요한 가르침이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증거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알고 믿는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직장 동료와 친구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사람들로부터 성품이 선량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과 평화하고 선한 관계를 맺는 데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사역을 담은 복음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 이웃을 그리스도인으로 인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교회에 강림하셔서 말도 지식도 부족하고 성격도 괄괄하고 급하였던 베드로를 통하여 거리에 나와 모인 삼천 명의 회중 앞에서 행하게 하신 일은 바로 그의 입을 열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게 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낸 근본적인 기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 로마서 1:16 말씀에서 이르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고 하였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순교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쓴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디모데후서 4:1~5)
사도 바울은 후계자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증거하기를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상관하지 말고 항상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허탄한 이야기를 듣기를 기뻐하며 복음을 듣기를 싫어하겠지만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고난을 달갑게 받으면서 전도자의 직무를 끝까지 완수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복음 전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해기를 늘 간구하면서,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전하는 데 힘씁시다. 어떤 신자라도 그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성령께서는 가장 중요하고 급선무에 여기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복음을 듣고 거기에 응답하는 영적인 사건인 것이요 선량한 사람이 된다거나 다른 사람의 유익을 주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도 아님을 명심합시다. 예수님을 모르면 그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복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성령의 강림하심과 충만케 하심을 받아 예루살렘 거리에 나와 첫 설교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힘차게 증거하였던 것을 우리도 명심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가기 위하여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주의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를 늘 힘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깨닫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는 삼천 명의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하나님의 사역에 귀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증거된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은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 기이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3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사도 베드로의 복음의 증거를 듣고서 그 모인 회중들이 마음에 찔렸다고 하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본래 바리새인들과 한 패가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 무리의 비방과 거짓 선전에 속아서 예수님이 이단의 괴수요 거짓 선지자요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붙잡혀서 표적을 행한 악한 자라는 말을 그대로 믿은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해외에서 거주하던 유대교 개종자들 역시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안 좋은 비방들이 많이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의 입술을 통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소식을 새롭게 듣고 하나님께서 그를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담대한 선언의 말씀을 듣자 그들 마음은 크게 찔림을 받고 자기들이 잘못했음을 느꼈습니다. 자기가 바로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라고 느꼈습니다. 자기가 로마 군병처럼 그의 손과 발에 대못을 치고 그를 죽이는 데 앞장선 장본인으로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엄청난 중압감에 눌리고 가장 큰 죄인이라고 스스로를 느끼고 괴로워 견딜 수 없는 두려움과 슬픔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잃어버려진 존재요 하나님 앞에 대역 죄인이요 심판을 받고 저 영원한 불 지옥에 떨어질 악한 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붙들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눈물로 회개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회중들의 이와 같은 심정의 극적인 변화는 사도 베드로의 탁월한 말솜씨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의 언변이 좋아서도 아니요 사도 베드로의 인품이 훌륭해서도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가 남달리 탁월한 종교적 권위와 지위를 가져서도 아닙니다. 오직 이러한 극적인 회개의 역사는 주께서 약속하신 바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시어 그 자리에 함께하시고 사도 베드로의 입술의 말에 기름부음을 주어 그의 말을 듣는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의 마음이 임하여 그토록 자기 영혼의 위기감을 처절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요한복음 16:7,8 말씀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타락한 모든 인간은 양심이 무뎌져서 자기가 범하고 있는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런 것쯤은 다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세상에서 드러나 사람들에게 비난당하는 죄만 범하지 않는다면 자기는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죄라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세상 끝날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전혀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께서 복음을 증거하는 중에 역사하시면 그 사람은 전도자의 평범한 말에도 마음이 찔립니다. 달변이 아니더라도 큰 감동을 받습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자기야말로 가장 더러운 자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요 지옥 밑바닥에 떨어져도 할 말 없는 자라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 동안 친구와 동료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권면을 많이 받았는데도 도리어 그들을 조롱하고 핍박한 일이 얼마나 큰 교만이었는가, 얼마나 미련한 행실이었고 얼마나 큰 벌받을 행동이었는가를 깨닫고 두려움과 슬픔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자기는 영영히 기회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다급함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울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심령에 거룩한 큰 슬픔이 찾아와서 자기 죄를 자복하면서 용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일이 이 첫 번째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 사도 베드로의 설교 후에 나타난 것이요 그 후에도 모든 교회 역사 속에 나타난 부흥의 때마다 동일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곤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듣고 죄인의 마음에 찔림이 일어나고 눈물의 회개가 생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자기에게 소망이 없다고 하는 이러한 영적 각성은 인간 스스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일어나는 현상인 줄 믿습니다. 사람의 말의 현란함과 웅변실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 속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에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린도전서 2:3~5)
그렇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운 말의 권면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품 좋은 인도자의 수고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연구와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자기 죄를 깊이 깨닫고 자기 영혼이 잃어버려진 존재요 하나님 앞에 무서운 진노를 받아 영원히 멸망당해 마땅한 가장 불쌍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만들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공로 외에는 자기가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하심만으로 된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스가랴서 12:0 말씀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에 대하여 미리 예언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라”
그렇습니다. 성령은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곧 간구하는 성령이십니다. 그 성령이 부어지면 그는 찌른 바 그 곧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 아버지처럼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전도할 때 말을 잘하여 전도하려고 준비하기보다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뜨겁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전도받는 사람을 향하여 이런 저런 수고와 방법으로 그 마음을 구슬리려 하지 말고, 도리어 그 영혼을 성령님께 의탁하며 성령께서 그 마음을 감동 감화하여 주시기를 위하여 많이 기도합시다. 전도하는 과정에서도 듣는 자의 닫힌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그 마음 눈과 귀를 열어달라고 기도하면서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성령을 의지하면서 기도하며 전도하게 되면, 때가 되면 전도 대상자의 마음이 열리게 되고 그 마음이 찔리고 애통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자기의 영혼이 참으로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고 마침내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사람의 이성이나 감정의 동요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라는 것을 항상 기억합시다. 할렐루야.
셋째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외적 신앙 고백이 뒤따릅니다.
38절로부터 41절까지 읽어봅시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회개한 사람들에게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례란 그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결코 아닙니다. 세례를 받지 않을지라도 진실한 신앙만 있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세례는 사람이 주 예수를 영접할 때의 믿음을 외적으로 인치는 행위입니다. 믿는다는 증표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과 사도들이 주 예수를 믿은 자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한 까닭은 세상 사람들 중에 섞여 살지라도 자신을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라고 시인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태복음 10:32,33)
고 하였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그 세례 받은 자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했다는 공개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앞에서, 세상 앞에서도 자기의 신앙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믿고 그를 따르는 자라고 인정하는 결단을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기독교인이라고 불리워지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도의 요청에 그 당시 삼천 명이 응답하여 그날 열두 사도들에게 다 세례를 받았으니 아마도 그들은 가까운 예루살렘 실로암 못에 가서 물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삼천 명이 세례를 받는 광경은 매우 놀라운 광경이었을 것이고 그 장관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중에는 당시의 종교 권력을 쥐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 무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핍박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속에서도 기꺼이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에 순종한 것은 그들이 이제 어떤 핍박과 멸시를 받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겠다는 확실한 결단을 세상 앞에서, 마귀 앞에서 보여준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듯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믿음을 속으로만 간직하지 아니하고 세상 가운데 증거하며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임을 담대하게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렇듯 크게 세 가지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복음을 전해들음으로써 지적인 각성이 일어납니다. 복음 없이는 절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듣든지 못 듣든지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복음을 듣는 자가 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자기의 죄를 깊이 자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은혜의 복음이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느끼고 매달리는 역사가 있어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숨은 제자가 되면 안됩니다. 담대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가족에게 자기가 예수 믿는 자임을 시인하고 핍박을 받고도 조롱을 받고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당당히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영적인 일이요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크신 은혜의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하루에 삼천 명, 하루에 세상에서 오천 명이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난 것도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역사 속에 성령의 첫 번째 강림의 때처럼 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택한 자들을 돌이켜 부르신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1903년의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그러한 부흥이 있었고 1905년의 저 인도에서, 그리고 1907년에 일제 치하 속에 암울했던 우리 나라 시절에 평양 장대현 교회 사경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저 미국의 캔터키 주의 작은 시골 도시 윌모어에 있는 애즈베리 대학에서 성령이 찾아오심과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오고 영적 갱신이 역사가 극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2023.2.8. 대학 채플 시간에 성령의 감동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도 하루 24시간 예배가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그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애즈베리 대학의 캠퍼스 부흥의 역사는 1970년과 2006년에도 이미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은 이처럼 자기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극적으로 역사하는 일들을 지금도 종종 이렇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찾아오심과 역사하심이 앞으로도 한국 교회에서, 세계 교회에 일어나서 교회가 갱신되고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복음을 전해듣고 마음이 찔려 회개하고 돌아와 세례 교인이 되고 세상 가운데 주님의 이름을 시인하며 증거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도 성령께서 2008년과 2009년에 찾아오셔서 수십명의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고 방언 은사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일하시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함께가는교회를 통하여서 성령께서는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빚어오셨고 앞으로 또 빚어가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각 사람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계속하여 구원받기로 작정된 주의 백성들을 찾아서 지극히 복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시는 가장 위대한 일이 힘차게 계속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