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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23편 1-6절
찬송 / 446장 · 오 놀라운 구세주
성서 / 이사야 50장 4-9절, 마태복음 13장 10-17절
말씀 / 아침마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사 50:4)
그러나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다.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마 13:16)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말을 참 잘했고, 다른 친구는 말없이 들어주기를 참 잘했지요. 그들은 수도원에서 같이 공부하고 수련 정진해서 사제가 되었습니다. 말을 잘하는 친구는 역시나 탁월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설교하면 재잘거리던 참새들도 멈추어 귀를 기울일 정도였지요. 사람들은 그의 설교에 감동했고 열광했습니다.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주 많은 사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그는 자신 있게 당당하게 설교를 시작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맥이 풀리고 발음도 새고 말도 뒤엉겼습니다. 설교는 죽을 쑤어버리고 말았지요. 왜 그랬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까, 그날은 평소와 다른 게 하나 있었습니다.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들어주던 그의 친구가 거기에 없었습니다. 너무 아파서 침상에서 끙끙 앓고 있었지요. 그랬습니다. 그의 설교의 힘은 그의 잘난 입이 아니라 그 친구의 귀에 있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어느 소설엔가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가 전해준 말씀을 받아 읽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사야는 희망의 예언자입니다. 바빌론에 유배되어 어둠 속에 헤매는 사람들에게, 그는 위로와 희망의 소식을 선포했지요. 특히 이사야는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서 구원으로 이끌어줄 ‘하나님의 종’을 주목합니다. 이사야는 세 번에 걸쳐서 ‘주님의 종’을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은 두 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입니다.
어둠 속에 헤매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주는 사람,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주님의 종’,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먼저 첫 번째 종은 이사야 42장 1-4절에서 소개되지요. 그는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사람이지요. 공의, 정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은 어떻게 공의를 이룰까요? 세상에서는, 특히 공의를 짓밟는 독재자일수록, 강력한 영도력으로 공의를 세운다고 공언하지요. 삼청교육대에 처넣어서 불의의 씨를 개조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사야가 말하는 주님의 종은 그런 영도자가 아닙니다. 그는 목소리가 작습니다.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서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답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불도 끄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 참 답답하지요? 그렇게 유약해서야 어떻게 불의를 척결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주님의 종은 무엇으로 공의를 세운다는 것일까요?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3절) 무슨 말입니까? ‘진리’입니다! 공의는 불법과 거짓과 폭력으로 세우는 게 아니라 진리로 세우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공의는 그 세우는 방법도 과정도 정의로워야 한다, 그 말이지요.
여기 이사야가 노래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님의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온유하지만, 그러나 유약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종은 의의 길이 너무도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의의 길은 곧 고난의 길이라는 것도 사무치게 압니다. 그러나 다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낙담하지 않고 끝끝내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사야가 노래하는 ‘주님의 종’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주님의 종이 ‘공의’를 세우는 사람이라면, 두 번째 ‘주님의 종’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두 번째 ‘주님의 종’을 소개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학자’입니다. 학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학자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일깨우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학자는 무엇보다 말을 잘해야 합니다. 입이 중요하지요. 사람들을 가르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말을 잘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는 ‘학자’는 좀 이상합니다. ‘주님의 종’인 이 ‘학자’는 ‘입’보다 먼저 ‘귀’가 열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주시는 사람, 그의 귀를 깨우쳐 주시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학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진정한 학자는 귀가 열려서 먼저 듣고 깨우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내 귀를 깨우쳐 주신다고 했지요. 무슨 말입니까? 학자는, 진정한 학자는 한 번 귀가 열리면 끝나는 게 아니라, 날마다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무릎 꿇고 들어야 하고, 아침마다 귀를 열어 깨우쳐야 한다는 말이지요. 내 귀가 열렸다고 자만하는 사람, 그래서 스스로 제 귀를 틀어막아 버리는 자는 학자가 아닙니다. 아침마다 내 귀를 깨우쳐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 그 사람이 학자요, 주님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참 어둡고 혼돈한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아침마다 우리의 귀를 깨우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하시면서, 이 백성이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멀었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이 백성의 정말 큰 문제는, 그들의 귀가 닫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이 무디어져서,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고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귀가 꽉 막혀 있으니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듣지 못하니 무엇으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청맹과니는 도저히 깨우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왜, 어째서 그들의 귀가 그렇게 꽉 막히고, 눈이 암흑처럼 어둡고, 마음이 회칠한 무덤처럼 무디어 버린 것일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막힌 것은 이미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 구약성서를 들여다보면, 예언자들은 언제나 자기 가슴을 치며 속 터지게 부르짖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벽창우(평안도 소) 귀에 경 읽어주기였지요. 사람들은 도무지 한사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아니지요, 알아듣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알아듣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너를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는다.”(겔 33:32)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을, 설교를, 듣기는 듣는답니다. 그저 한번 사랑 타령이나 해보라며, 그놈 목소리 한번 좋다며, 뭐 옳은 소리 하네 하며 듣기는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구니에 동전도 던져 주겠지요? 그러나 거기서 끝이랍니다. 이것이 예언자/설교자의 신세라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그저 사람들의 귀를 만족시키는 어릿광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사람들의 귀가 막혔을까요? 에스겔은 ‘욕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애초에 사람들은 말씀을 따르려 하지 않고 탐욕을 따르려 한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하와가 선악과를 탐내서 말씀을 거슬렀던 것처럼, 유다가 은 삼십 냥에 스승을 판 것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보다 더 악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인간의 욕망에 편승해서 부추기고, 그것을 이용하고 사기를 치는, 배나 더 탐욕스럽고 사악한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그저 잘 된다, 만사가 다 잘 된다 하면서 신도들의 등을 치고, 무슨 트로트도 아닌데 삼 박자 사 박자 축복을 남발하면서 간을 빼먹는 사악한 설교자들입니다. 예언이 아니라 부적을 팔아먹는 사이비입니다. 에스겔은 이런 종교 사기꾼들을 영혼의 사냥꾼이라며 경계했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팔목마다 부적 띠를 꿰매고, 각 사람의 키에 맞도록 너울을 만들어 머리에 씌워주는 여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겔 13:18) 에스겔의 저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면, 그래서 영혼이 없어지면, 그게 무엇입니까? 좀비 아닙니까? 에스겔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널브러진 마른 뼈들과 같지요. 이 좀비 맹신이 에스겔 시대의 죄악이었고,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 종교의 죄악입니다. 이 마른 뼈들이 다시 이어져서 살이 붙고, 좀비 같은 사람들의 귀가 다시 열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바람을 일으켜주시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제가 한민교회 목회자로서는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이제 내일이면 노회에서 제 은퇴를 허락하겠지요. 이렇게 은퇴하기까지 지켜주시고 인도하여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목회하면서 생각해 보면, 그동안 참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스물일곱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해서 뭣도 모르고 설교를 시작했지요. 그러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설교를 해야 했겠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뭘 알기나 하면서 설교했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무모하고 뻔뻔하게 강단에 설 수 있었는지, 생각할수록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제가 그토록 많은 설교를 한 것보다 더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툴고 섣부른 제 말을 들어주신 신도들입니다. 제 설교를 듣느라고 얼마나 많은 인내와 배려가 필요했을까요? 그 많은 설교를 한 제 입이 수고한 게 아니라, 그 많은 말을 들어주신 교우들의 귀가 정말 대단하고 엄청 고생한 것이지요. 주간에는 직장에서 가정에서 일하느라 수고하시고, 주일에는 교회에 와서는 설교를 듣느라 고생하셨으니,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진짜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민교회 교우들의 귀가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내 귀를 깨우쳐 주시기를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뭐 자주 애태우게 하시기도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내 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만 은혜로 말씀을 준비하고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의 큰 고민은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교인들의 귀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보수적인 큰 교회에서 목회했는데, 언제나 교인들의 귀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답니다. 한 번은 설교하다가 권력자의 불의를 비판했더니, 한 장로가 벌떡 일어서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귀가, 특히 교회 권력자들의 귀는 듣기 좋은 소리, 소위 은혜로운 말만 들으려 한다는 것이지요. 거짓 예언자가 예레미야에게 협박하며 말했듯이,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다른 데 가서 밥벌이나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끔찍한 일이지요. 그런 그야말로 막귀를 의식하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가 밥벌이라면, (밥벌이는 원래 거룩한 것이지만) 어릿광대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강단에 설 수 있을까요? 견딜 수 없는 참담한 일이지요.
바로 그런 점에서 저는 정말 행복한 설교자였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장 마음에 둔 것은 바로 우리 교우들의 ‘귀’입니다. 그저 입에 발리고 귀에 단 소리만 기다리는 귀가 아니지요. 진리에 기울이는 귀입니다. 의를 사모하는 귀입니다. 쓴소리도 달게 들어주는 귀지요. (이거 저의 착각은 아니겠지요?) 이렇게 들을 줄 아는 귀가 있는데, 제가 어떻게 허튼소리를 하고, 설교를 허투루 준비하겠습니까? 제 설교는, 여전히 미숙하지만, 제 입이 아니라 여러분의 귀가 만들어낸 설교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귀가 열리신 분입니다. 그래서 귀 기울여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땅속에 묻혀 있는 아벨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신 분입니다. 파라오 권력에 억압받는 히브리 사람들이 한 맺힌 부르짖음을 들어주신 분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우리 예수님도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에 귀 기울이시고, 고통당하는 병자들의 신음을 들어주시는 분이지요. 우리의 슬픔을 이미 아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아버지께 기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귀밝은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는데,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는 데,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우리가 다만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찍이 종교개혁자 루터는 당대를 가리켜서 교회의 바벨론 포로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로 살았던 그 암흑의 시대가 바로 그때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바빌론 포로기에 이사야는 ‘귀가 열린 주님의 종’을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귀를 깨우쳐 주시는 ‘주님의 종’을 기다렸지요. 그리고 오늘, 우리는 또다시 교회의 바벨론 포로 시대를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사냥하는 마녀’가 맘몬이라는 용의 대가리를 타고 횡횡하는 어둠과 혼돈의 때지요. 이런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우리의 귀를 깨우쳐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과 함께, 다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당당하게 이 어둠을 뚫고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서로의 아픔을 귀 기울여 들어주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생명의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우리의 귀를 깨우쳐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