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모자의 그늘☆]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모자의 그늘]
김명이 시집 / 지혜사랑 156 / 도서출판 지혜(2016.09.30) / 값 9,000원
================= =================
모자의 그늘
김명이
안네 프랑크를 읽고 눈물 흘리지 않자, 넌 독해
내 의지 상관없이 피가 떨어지는 곳
비극의 시절 만난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섯 살 제제의 뒤를 따르며
내게도 자라는 슬픔
작아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는 누군가 마치 인심을 쓸 때만 가능하여
홀로 쓰다듬기로 했어요
한스가 물 위에 떠서
하늘의 꿈을 품었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날 벗어놓은 내 신발 떠내려간 것이
손뼉치고 좋아할 일인 것을
아버지의 목청이 커지고서 알았어요
통과의례의 피를 본 듯
테스가 쓴 챙이 모자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거대한 힘 굴복하며
모자를 몇 개씩 고르고
질적으로 다른 안네 프랑크와 마주쳤어요
그런 거예요 그런 거예요
태생적 한계에 맞선다는 것
저기 단상의 빛나는 이름의 그늘들이
해 지기도 전에 늘어만 가는
캄캄한 골목의 아이와
여인이란 순결의 악재를 즐기고 있어요
사과 이야기
김명이
면접관은 윤기 없는 얼굴로 지나가고
바구니에 담겨지기도 전에
아이는 떨어졌다
생이 다 익어 버렸다고 방을 허물고 있다
달콤한 사과를 기억했어
태양의 몸살과 구름의 살점과 바람의 가시가 훑고 간 후에
매만져 주는 엄마의 손이 지문들을 지워갈 때 붉어졌지
힘주어 매달려 있으면
공중의 냄새를 맡던 콩새와
산란을 앞둔 벌레가 먼저 과즙을 빨아 맛집 내고
아 수상한 발자국의 이빨에 덥석 물리기도 했어
아이야 달콤한 사과 열리는 것을
내 무릎에 들어와 묻곤 흡족해 했지
사과나무 지나갈 때 애기지구가 잘 돈다고 했던가
생리혈 묻어나온 속옷 축하 파티를 했는데
그 후로 드문드문해진 우리
다음을 들려주지 못한 채 풋사과 익어가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을 몰라 헤맸어
거침없이 쏟아지는 네 방
저녁엔 오래전처럼 오래전과 다르게
고랭지 사과와 침 뽑힌 벌의 소식마저 전해줘야 할까
이제 사과밭을 떠나간 사과가
왕관 딱지를 붙이고 백화점에서 혹은
골목가게 인심을 쓴 만큼으로 놓이는지도
진짜를 말해줄 수 있을 때가 된 것 같아
그러니까 오늘 네 방을 실컷 무너뜨리고 슬프렴
참 오전에 동사무소에 다녀왔는데
아직 엄마의 지문이 싱싱해
실험인간
김명이
엄마는 재래시장에 품 팔러 가고
식은 방에 백일 못 채운 아기 혼자
돌아와 방문 열 때
뒷머리엔 피딱지 엉기고 독이 피었다죠
성장의 조건으로 고려해야할 전적
유별난 편두통은 쥐의 송곳니가 묻혀있기 때문이어요
형상에 박혀서 갉고 있는데
쉰이 되어도
속속 드러나는 흡혈의 증거
아직 덫에 잘 걸리고
얍삽하게
재빠르지 못한 것은
재빠르지 못하는 것도
DNA가 혼종의 실험상태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어요
자라는 동안
손톱을 살갗에 붙이지 않아
품행방정하단 기록
그 말은 왜 그리 어렵던가요
도심에 중성고양이가 많아져
지레 겁먹는 일은 줄었지만
진짜 예고 없는 출현에
꽁무니 빠지게 줄행랑칠 땐
동물병원 문 앞에 쥐똥 무더기 누어줄까 싶다가도
내 몸은 실험체
견뎌야 할 진행 중
뒷거울 속에 낙인이 뚜렷하게 푸르고요
얼음 왕국
김명이
철학적이고 경문의 종이여야 하나
보통 노래로 춤추며 살다 가면 안 되나
땅에 고개 떨어뜨리며 걷고 싶다
십 분만 양쪽을 살피지 않고 싶다
시동 켜자 눈발이 들어온다
주유소 찾아 기름을 가득 채우고
법원 사거리 진입할 때쯤
더는 갈 수 없으니 흰 몸을 세겨요
얼음왕국엔 길이 없어요
모두 길이에요
음악프로 진행하자는 눈 편지를 읽다 말고
아이스크림 떠먹었겠지
이런 날 아무렴 어때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오다가 만 눈
로또 반만 맞추고
그이의 심벌 팬티 피노키오 코처럼 높아져
요술지팡이가 될 수 없다고 힝힝
일만 개 꼬리풍선이 하늘로 헤엄치던
어젯밤 꿈의 조각일까
한 곡도 돌아가지 않았는데
막 포장해 놓은 검은 길이 드러난다
벌레의 그림자
김명이
비가 내리면 사라지는 벌레울음
처마에 찾아들지 못하여
수챗구멍 속으로 빨려갔을까
벌레를 분간하며 울음을 흉내 내곤 했어
날개가 있으면 새라고 우기던
아주 작아 가엾은 새
하나같이 손톱으로 튕기거나
손바닥으로 후려치곤 하잖아
벌레가 독을 품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너의 독이 내게 퍼졌으므로
몇 해 키운 선인장
썩은 몸을 뒤져보기도 했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창을 흔들고 벽을 퍽퍽 치면
발이 여럿 달린
그림자가* 기어올라 올 거야
너는 벽안의 나라 탈출하며 넘겼어
울음을 내는 벌레는
목젖이 붓도록 자신을 주었다는 것
저 빗줄기
벌레들의 시체가 모여
아릿하게 들려주는 엔딩 장면이라고
그치지 않고 새벽까지 비가 내리고 있어
* 그리마의 다른 이름
멸치식물
김명이
식물도감에도 없는 낯익은 식물
물 한 모금 물고 있다
건강이 최고라는 앵커와 새해 인사
완자 복근에 철골조보다 단단한 십일자 근육
그도 순간 사고로 붉은 줄 가로막는다
먼 입구 향해 흔들고 있는 의자
늦은 밤 그대 목소리 전화기에 들썩인다
문득, 해저로 떨어진 어느 세계
태평양을 끌고 왔을 지도 모를
완도산 택배박스의 멸치 내장을 꺼낸다
바닥에 기고 등 구부러져 살아가도
얄팍한 뼈로나마 말짱한 우리
양푼 수북하게 발라낸다
스러진 달빛 목덜미에 감고
명왕성 얼음바다 나르고 있을 그대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그대로 그대가 최고다
지금은 두 개의 요일
김명이
콧등에 집게를 꽂는 것처럼
화분에서 나온 굼벵이를 집고
난데없이 나타난 바퀴벌레도 눈감고 덮친다
그이가 손가락으로 슥 하면 나가떨어지던 것
눈을 뜨며 꿈쩍없이
전구를 갈아 끼우고
날렵한 망치질을 할 때마다
척척 붙은 수리공 딱지
그이가 빨간 요일에 돌아오면
아이는 무사히 대학을 마칠 수 있을 테니까
바깥 수상한 낌새에 보초 서며 졸린 간밤
낡은 잠금장치 분해하여
풀린 나사못 순서대로 놓고 조인다
그이가 놀란 눈을 감고 뒤에서 안아줄 거야
드라이버 돌리며 말문을 닫는 건
타관의 계절
내게만 속속 전해주는 음성배달부
갯바위에 앉아 저녁 파도를 낚는 중이라고
그이가 까만 요일에 옆구리를 맞추면
위험한 가계에 금이 갈 테니까
손잡이 다시 돌리며 승강구에 귀띔하는
두 개의 요일
만년고참, 직업을 대하는 방식
김명이
쿠키와 8시 50분까지 뒹굴고 싶어
여름은 밤이 있는 거니 잔 적이 없는 것 같아
어둠의 쿠션을 코앞에서 밀어낸 빛살
대낮 그 불안한 냄새의 진동이 느껴진다
어젯밤 회식자리 벌건 내가
이른 아침부터 전송된 손바닥 안
새 구두 한쪽 징이 빠져 삐딱거렸으므로
점포정리 매장의 염가 비밀을 투덜댄다
일반커피와 고급커피를 묻고 돌려야겠어
자판기가 삼켜버린 동전이 다시 생각날 거야
층층 차렷의 빨간 눈들
출구를 닫기 위해 포켓에 손을 넣는다
울음이 웃음으로 품어지던 밥
웃음이 울음으로 대답하던 밤
구두 밑창을 확인하고
시퍼런 추궁은 멈추거나
말의 발목 꺾인 곳에 붕대를 놓아 줄 뿐이어서
수시로 바꿔 낀 징은 버겁다
그들 목록은 상관하지 말자
족적을 지우려다 구멍 난 적이 있어
그리 구부리는 것은 관절의 유연성 테스트
나는 아직 척추가 반듯하다
불편한 진실
김명이
고르고 고른 소장 책입니다
목차 분류 별 것 아닌데
알수록 헛것 됩니다
점점 미궁에 빠진 나는
오랜 시간 정독하고 묵독하고
다시 한 번 되돌려 읽기를 하다가
다 이해하고 다 넘기는 것이 힘들어진 나는
나머지를 구겨 넣을까 던져버릴까
동공 반짝이게 한쪽만 펼쳐놓고
가 읽은 거야 말하려다가 나는
빗금 겹으로 그은 곳에 또 멈춥니다
한계 다다라 입술을 깨물 때
무지가 경지인 듯
막무가내 넘기는데
물의입자까지 가세하자
울렁울렁 책에서 신음이 터집니다
자신의 덕목이고 핵심인 실천
첫 번째 해석해냅니다
주석까지 달아 늫으려 합니다
주의 사항
사용 횟수 단 한 번뿐
분리수거장
김명이
검정 올림머리의 화사한 여인네가 고용되었다 희고 두꺼운 화장 아래 몸놀림은 가지런하고 긴 목에 걸려 바르르 떠는 공후의 소리가 스쳐간듯 싶었다 그녀의 출현 후 새벽에 수거물을 나르던 노후한 사내들이 뜸해지고 부스스한 아낙들이 북적거렸다 수거물이 탈탈 털어도 나오지 않던 주간에는 옆구리가 헐렁한 쓰레기봉투를 버리기도 했다
분리기계이듯 이 바닥 유일하게 장수한 땅꼬마 아줌마의 표정에도 급속도로 짙은 구름무늬가 새겨졌다 그녀 덕분에 빗방울이 굴러가는 날 뒤집어 쓴 비닐옷의 기럭지가 비애 끝에 걸렸다
아낙들의 입술에 생긴 거품이 차츰 풍선으로 변해갔다 땅꼬마 아줌마 입술에도 빨간 립스틱이 선을 넘어서곤 했다 때마침 이른 한파에 품어 온 보온병의 커피가 건재한 텃세를 훅 날렸다 폐비닐이 화사한 여인네의 발목에 달라붙었다 빠져나가지 못한 풍선들이 메타세콰이어에 걸려 터지자 가누지 못한 채, 겨울 목련처럼 민 가슴만 남겨놓았다
다시 새벽에 수거물을 나르며 노후한 사내들이 분주해졌다 청소부가 쏟아놓은 바닥물이 튕기자 경비는 결코 서지 않는 바지주름을 당겼다
외곽의 힘
김명이
그가 가까스로 닿은 곳은
신의 별이야
늘 가장자리에 밀리면서도
신의란 별것 아니라던
당신
소주에 피자안주
목재 찻상에 쇠수저
도시의 외곽을 떠돈 가장
중심에 놓이고 싶다
당신의 집중된 눈빛이
차갑게 널브러진 수저를 잡고
뜨거운 찻잔의 중심으로부터
빙그르르
지구를 돌리는 것이다
담벼락
김명이
아버지는 제삿날 제주를 서둘러 비웠다. 줄줄이 꿰어진 계집아이, 수심으로 패인 새벽 마루에 앉아 우산대를 당겼다. 나는 반죽덩어리 같은 백일아기가 늘어진 옷을 물고, 등에서 딱딱해질 때까지 마당을 돌았다. 띠를 풀고 골목으로 튀어나오면, 담벼락에 붙은 땅거미가 좁쌀 볕마저 감으며 나를 따돌리곤 했다. 오촉 전등이 밤하늘로 속절없이 빨려가고 떨어지는 꼬리별 따라 조등 밝히던 새벽, 물 긷다가 손마디에 엄마의 눈금이 흔들렸다. 달이 차올라 붉은빛 이슬이 비쳤다.
외할머니는 옥양목 조각을 접어 엄마 입에 물리고
울음 꼬리가 문고리 붙잡고 멈출 때까지 나는 또 조마조마 쭈그러질 것이었다
등굣길에 삘기를 뜯어 껌이 되도록 씹었다. 채변봉투에 빨간 고추 수두룩 걸린 금줄을 그린 종례시간, 내가 깎아놓은 지시봉이 머리를 겨냥했다. 버짐 핀 낯을 달구며 깨진 창문으로 쏟아진 땡볕, 짝꿍은 원기소를 굴린 후 아깝게 깨물었다. 하굣길에 전설의 능력자처럼 오디를 따서 입가에 무더기로 발랐다. 뛰어나온 엄마의 무릎이 땅에 닿으며, 짚은 날보다 먼저 태어난 사내 같은 계집아이, 그날 꽃고무신 한 짝이 냇가에 떠내려갔다. 해 저물도록 물속에서 뻐끔거렸으나 지느러미는 생기지 않았다.
나의 신탁은 들통 났지만 뒤늦게 본 효험
마침내 엄마는 담벼락에 칠공주파를 꽂은 지팡이로 강력한 보스가 되었다
다듬이 소리
김명이
새로 지은 집에 원목장롱 들이던 날
나비경첩 떨어지고 부스럼 난 자개장 속
내장 긁어내
마당 가운데 불꽃놀이를 했어요
엄마는 한사코 거두시는 걸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졸랐을까?
늙은 원앙이, 구이가 되고
목단자수 홑청, 검은 소리를 물었던가요
누렇게 바랜 무명 요대기
땟자국 낀 늘어진 옷가지에서도
다듬이질 소리만 들려
붉은 울음이 타들어간 노을 같았어요
나프탈렌 냄새 멈춘 내 황실무늬 장롱 속
몇 년치 쪼갠 월급 혼수로 붓고
언제 적 내력들 묵혀 나와요
발목을 누르는 새
살 풀린 검정고무시줄 속옷
바람에 들켜 던져버린 후
집착한 속옷은 진열처럼 쌓였는데
몸에 닳은 옷가지와 매화꽃 방석
그때처럼 누렇게 바래져
왜 그랬을까
방망이질, 멈추지 않고 나를 두들겨요
속적삼 접었다 펼쳤다
아스라이 사라진 엄마의 다듬이 소리
후광
김명이
그림자를 기르는
고요한 물빛의 시간
바람이 다녀간다
흔들리며 터지는 물결
번져가는 물결 속으로
그림자는 한꺼번에 자라서 사라지네
더듬던 너의 지문이 흩어진다
마디에 맺힌 탄성이 새어 나왔어
우리의 방황은 규칙에서 해체되고
리듬이 만들어질수록 무력해진다
부드러운 졸음을 낙원이라 말할까
마디를 건너가는 영속
이리저리 빗나가는
처음의 아침이 오고
안개가 가리키는
물의 길을 찾았나
마지막 한 가닥 안개를 쥐었을 때
뜻밖에도 너는 거기에 있고
짧은 그림자가 떨어지기 시작했어
그 많은 물이 죄다 잉태 중이라니
타인들
김명이
자정 넘어 도착한 바다 꼭대기 방
달빛 뿌려져 고구마 케익 같았어
허기졌지 허겁지겁 단추를 풀었지
해안선 불빛 이마에 건 갈매기
어둠을 꺾어 물결에 눕힌다
달의 애액 스며드는 새벽녘
속살에 파묻히기 위해
파도는 밤새워 모래 각질을 벗긴다
잃어버린 반쪽 한상 안에 있어서
바다처럼 오랜 시간의 눈물로 부풀었을 거야
바람 기척에 시선 돌린 채
옆구리에 타고 오르는 난처한 두 손가락
낭떠러지 꽃잎들 소리 질러
빛살이 예리하게 시트를 구겨 놓으며
사라진 약소한 시간
내 왼발 당신 가랑이 사이에 끼어 있고
우리는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붉었다
미간 주름이 깨어나고
추측을 남겨두고 온 그 밤
찰칵, 벽틈으로 기어든 반딧불이
무엇을 현상했을까
화석
김명이
그대를 만지는 동안
시간은 나를 멈추게 했다
분화구가 열리고
그토록 황홀한 용암
언 겨울이 녹듯
나도 모르게 더듬어간다
지나간 봄
꽃잎의 이름으로 새겨진 곳
몇 억 천 년 격렬했다
망초의 내력
김명이
그대와 내가 앉은 침목무늬 의자 틈으로
목을 빼고 있었어요.
담벼락 높은 집 귀퉁이의 손톱만한 꽃
아스콘 냄새 차오른 도로변에도
망초 피어 사람냄새 남아 있는 곳이라 했어요.
논두렁 밭두렁에 두셋 혹은 무리
과수댁 할머니는 낫질로 쓱싹 베어내면서도
“고놈 예쁘다 고놈 아깝다”
차곡차곡 밭둑에 들러놓았죠.
연해주로 떠나가 돌아오지 않는 가장
찾아 나선 숯 검댕이 속 발화했을 거예요.
창살 둘러놓은 철문 아래
아름답다고 불린 것들은
점점 입체를 발라볼 수가 없었어요.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 가는데
맘대로 안 되니 ‘망할 놈의 풀’로 불렀을 거예요.
틈에 핀 망초 바라보는 그대와
레일에 올라 탄 눈빛
잃어버린 나 동시에
“기특 기특 꽃송이”
망초 가득 핀 숲길로 들어갔습니다.
늦가을
- 아버지처럼
김명이
네 시, 낙엽이 떨어지고
하늘에 깃을 내밀지 못한 채
터미널 앞 좌판에 쌓인
오리알의 흰 슬픔을 보았어요
오래전 아버지가 쏘아보던 세상에서
지금 내가 비행하는
도시의 막다른 골목
북극의 수정 같은 빛깔일 까요
길바닥에 가솔을 내려놓은
그이의 축축한 신념도
흐린 하늘 거두려
깜빡거리게 될 뿐
몇 번의 가을이 가면
나도 아버지처럼
텃밭에 흰 빛을 모으려고
어두운 새벽부터 둥글게 말고 있겠지요
꿈의 연구소
-내게 적절한 시간이란 걸 알게 되면 나는 시냇물을 건널 거예요*
김명이
김 박사가 퇴직 후 창업한 꿈의 연구소
컴퓨터의 ←와
우르르 뛰어나간 Delete를 혼동하여
순간 Enter 자판이 막막해도 굽힘이 없다
여전히 밥은 사내의 포부가 아니라고
더듬거린 손가락을 한 번 불지 않고
서리 맞은 머리칼을 세우지만
돌출된 앞니가 산꼭대기처럼 들린다
십여 년 고객인연으로 벽시계를 들고 와서
연아 커피를 마시고
교가를 더듬다가 애국가 4절까지 훑는 동안
잘못 걸려온 문틀 같은 말씨에 넘어졌다
안경 앞 알짱대는 날파리 고객
십년후가 망한 입바람만 예약하시나
밀쳐놓은 신문에 은퇴 후 갈림 길
‘치킨, 시킬 것인가 튀길 것인가’
그는 두 개의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오후내 두 번째 수화기를 든다
여자의 목소리가 창문에 후드득
비 개이고 서늘한 가을 하늘에
손수건은 꼭 필요하다고 건네주었다
* 아바의 <I have a dream> 중에서
인도
김명이
나뭇잎이 죽었습니다 청소부 어깨가 바스락하며 화장터에 실려갑니다 나목이 되어 부들부들 뼈대한 줄 두르지만 피해갈 수 없는 바람의 눈, 수피의 얼룩이 짙어갑니다
사람들은 차츰 기억으로 나목을 더듬기 시작합니다 다른 이름을 수군거리기도 합니다. 감전사고까지 치며 정이 든 전신줄마저 떠나갑니다
몸 비틀어 지상에 뿌리 한 자락 걸쳐본들 바닥에 수행하는 인도의 성자 같습니다 상가 간판 주인은 모처럼 바라보며 빙긋 웃어줍니다
나목이 제 몸 떨며 소리 내지 않고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액을 간신히 빨고 있습니다 차디찬 한기 막아주는 해를 만나고 싶어 목이 가늘어집니다
왼쪽에 없는 친구를 대신하여 초록, 봄은 올테고 그때쯤 또렷한 이름 부르며 기댈 겁니다 가로수 빈 그늘 밑에 가면모자를 꼭 벗고 고개 숙여야 합니다
또 다른 삼경三經
김명이
시경 서경 역경이 사내의 중한 독서라 하고
니체는 피로 쓴 문학이라 하였으니
초경 월경 폐경을 겪어낸 이가 있아]그녀는 달의 몸을 받아
음력을 짓고 건사하는 동안
마침내 섭렵하게 된 궁의 문리를 트니
여인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리라
.♣.
=================
■ 시인의 말
생은 예상처럼
다가설 수 없어
묘연하도록 두꺼운 것
해가 저물고
또 그렇게 검은 빛에 닿아
심장을 꺼낸 무수한 밤들
서늘했고 지쳐서 부드러웠다
아직도 눈앞을 떠도는
성근 피상의 언어들
하늘을 놓친 별똥별까지
또렷이 호명하고자
폭염을 물고 버티었다
나의 하루하루는
목마른 언어와의 쟁투의 장
지금부터 좌절과 행복은
동의어라 명명하겠다
2016년 초가을
김명이
.♣.
=============== == = == ===============
김명이 詩集 [※모자의 그늘※]
[ 해설 ] -
페르세포네의 편지
안서현 문학평론가
모녀지간이란 다 그렇지 않을까. 가령 신화 속에 등장하는 모녀의 형상, 저 대지와 농사의 여신 데메테르와 그 딸인 계절의 여신 페르세포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명한 이야기다. 페르세포네는 사랑에 빠진 하데스에게 붙잡혀 지하세계로 끌려가버린다. 페르세포네의 아버지인 제우스가 데메테르에게 말하기를,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의 음식을 먹지만 않았다면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데메테르가 그녀를 찾으러 가지만, 이미 페르세포네는 하데스로부터 석류를 받아먹고 난 뒤이다. 그때 데메테르는 아마도 딸 페르세포네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충분히 일러주지 못했던 것을 뒤늦게 후회했으리라.
이 시집의 수록 시「사과 이야기」를 읽고 위의 장면을 다시 떠올려본다. 딸의 삶이 사과처럼 탐스럽게 여물어갈 때, 그 달콤함 뒤에 숨겨진 음험함에 관해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까 망설이는 어머니가 화자로 등장하는 시다. 다음의 구절을 보자. “생리혈 묻어나온 속옷 축하 파티를 했는데/그 후로 드문드문해진 우리/다음을 들려주지 못한 채 풋사과 익어가고/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을 몰라 헤맸어.” 어디서나 사랑(과 사랑이라는 이름의 함정들)에 관한 앎은 어머니로부터 딸에게 전수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 ‘다음’이야기라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세상의 딸들은 페르세포네처럼 멋모르고 석류를 받아먹기도 한다.
이 딸들의 이야기를 계속 추적하고 싶다면, 내친김에「그녀들의 동굴」까지 함께 읽어본다면 어떨까. “눈 뜬 이성에 눈 감”아야 했던 답답한 새벽들을 보낸 ‘나’의 방이 ‘나’에게 ‘동굴’과도 같았다면, 이제 신부가 되어 결혼사진 안에 박혀 있는 액자 속은 ‘나’의 또 다른 “사각 유리 동굴”이다. 한때는 역시 딸이었던 ‘엄마’역시 그러한 동굴 속에 갇혀 있다. “평생 굶긴 지아비 하룻밤 굶긴들 탈나실까” 딸의 집에 왔다가도 바쁘게 길을 나서는 ‘엄마’가 결혼사진을 보고 넌지시 남기고 간 “어쩌겄냐 그때는 계집애가 말 나면 집안 망치는 것인디”라는 말은, ‘나’에게 건네는 말인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이 시의 제목이 ‘그녀들의 동굴’인 이유다. “엄마, 아직도 이 동굴이 끝나려면 멀었나 봐요.” 그렇게 세상의 딸들은 페르세포네처럼 한순간에 사랑의 함정에 갇혀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김명이 시인의 시집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딸들’의 이야기이다. 다시 신화 속으로 돌아가 보자. 데메테르는 제우스를 찾아가 페르세포네를 찾아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하고, 또 겨우 만난 페르세포네가 다시 지하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다시 항의하여, 일 년 가운데 절반만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에 머무르기로 한다는 타협안을 이끌어내기도 한다(그녀가 지하세계에 머무르는 동안 땅에는 겨울이 찾아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페르세포네가 한 말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다. 할 말이 더 많았던 사람은 어쩌면 당사자인 페르세포네가 아니었을까.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면 나중에 데메테르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써서라도 그녀는 할 이야기가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몸을 양피지 삼아 써낸 몇 편의 시로 그 편지를 대신했을까. “그녀들의 동굴” 속에서의 페르세포네적 시 쓰기, 그것이 김명이 시인의 시가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오래된 경험의 세계
앞서「사과 이야기」라는 시를 통해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전수되는 사랑의 지혜에 대해 이야기해보았다. 「또 다른 삼경」역시 이러한 여성적 진리, 혹은 여성적 경험의 가치를 다시 조명하고 있는 시다. 과거 삼경三經이라 했던 경서들 위주의 학문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여성들을 꾸준히 배제해온 진리의 체계다. 그에 반해 시인이 말하는 새로운 삼경은, 초경부터 숱한 월경을 거쳐 폐경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몸으로 체득하게 되는 여성적 지혜의 세계다.
다소 유머러스하게 “여인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리라”라고 비약하며 마무리된「또 다른 삼경」에 비해, 같은 의미가 보다 구체적인 표현을 얻고 있는 시가 바로「오래된 경험」이다. 화분에 철쭉꽃이 피지 않는 것에 대해 “해를 거르는 일이야”라고 무심하게 던진 ‘엄마’의 말 속에서, 그리고 그럴 때는 잔가지를 잘라주라고 “가위를 쥐어주”고 가는 ‘엄마’에게서 ‘나’는 “오래된 경험”을 느낀다. “굵은 가지가 더 굵어지고/볕이 도로처럼 들 것”이라는 ‘나’의 깨달음은, 그만큼 쓸쓸한 시간은 이따금 찾아오는 성숙의 시간이라는, 인생 일반에 대한 위로처럼도 들린다.
나는 잔가지 잘라
가장자리에 꽂아 놓습니다
위와 같은 「오래된 경험」의 마지막 연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화분 건사하는 지혜를 실천하는 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굵은 가지로부터 잔가지로 이어져나가는 생의 연속성의 이미지이기도 하며, 또 가위로 잘라낸 가지가 꺾꽂이를 통해 새롭게 살아난다는 희망의 이미지이기도 하여 더욱 의미심장하다.
이와 같은 여성적 계보의 인식은「다듬이 소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엄마’가 쓰던 낡은 자개장을 태워버리던 날의 “불꽃 튀는 소리”와 “아스라이 사라진 ‘엄마’의 다듬이 소리”라는 두 개의 청각적 심상을 겹쳐 놓고 있다. 한편으로는 ‘엄마’의 물건이나 흔적이 사라져버렸다는 것, 다시 말해 어머니에서 딸로의 계보적 이행을 서글픈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멈추지 않고 나를 두들”기는 “방망이질”의 소리를 계속해서 되살려냄으로써 아직도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계보적 연속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엄마의 성」은 또 어떤가.
맨 처음 내 몸 구석구석 어루만졌을 여자
끝없는 슬픔으로 배냇저고리에 감싸 입혔을 여자
그 여자 싫어서 도망치지만
어느 새 내 손에 익은 그 여자의
또 한 남자 못 떠나고 되돌아온 맛
-「엄마의 성」부분
딸을 처음 배냇저고리로 감싸면서 어머니가 “끝없는 슬픔”을 느끼는 것은 딸에게 찾아올 삶의 양면적 얼굴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딸에게 ‘사과 이야기’를 할 때 ‘엄마’가 망설이듯이(「사과 이야기」), 갓 태어난 ‘나’의 작은 몸을 어루만지면서 ‘여자’는 슬픔에 젖는다. 이러한 끈끈한 여성적 유대는 ‘맛’을 매개로 하여 심화된다. ‘나’는 ‘여자’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만든 음식의 맛이 “어느 새 내 손에 익”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김명이 시인의 시가 만일 여성의 삶을 하나의 고착된 이미지-절대화된 모성 이미지나 페르세포네와 같은 수동적 이미지-로만 표현하고 있다면 그것은 명백한 한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에게 이와 같은 여성적 공감은 그녀들이 이 세계를 대하는 데 있어 적용되는 여성적(관계의)원리로 확장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이 글의 마지막 절에서 더 살펴보기로 한다.
그늘 아래서의 성장담
앞에서 여성적 계보에 관한 시들을 읽어보았다면, 이번에는 여성적 성장에 관한 시들을 모아 읽어볼 차례다. 먼저「담벼락」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줄줄이 꿰어진 계집아이”들의 삶 속으로 독자들은 초대된다. 제삿날이면 백일 된 아기를 등에 업고 종일 마당을 돌다가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풀려나곤 하는, 엄마가 거듭 출산을 할 때마다 “조마조마 쭈그러”진 채로 냇가에 꽃신을 떠내려 보내는 한 소녀의 모습을 본다. 그녀는 삶이라는 것이 담벼락 근처를 서성이는 일임을 자연히 알게 되었을 터다. 「모자의 그늘」에서도 비슷한 에피소들들이 변주되고 있다.
안네 프랑크를 읽고 눈물 흘리지 않자, 넌 독해
내 의지 상관없이 피가 떨어지는 곳
비극의 시절 만난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섯 살 재제의 뒤를 따르며
내게도 자라는 슬픔
작아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는 누군가 마치 인심을 쓸 때만 가능하여
홀로 쓰다듬기로 했어요
한스가 물 위에 떠서
하늘의 꿈을 품었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날 벗어놓은 내 신발 떠내려간 것이
손뼉치고 좋아할 일인 것을
아버지의 목청이 커지고서 알았어요
통과의례의 피를 본 듯
테스가 쓴 챙이모자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거대한 힘 굴복하며
모자를 몇 개씩 고르고
질적으로 다른 안네 프랑크와 마주쳤어요
그런 거예요 그런 거예요
태생적 한계에 맞선다는 것
저기 단상의 빛나는 이름의 그늘들이
해 지기도 전에 늘어만 가는
캄캄한 골목의 아이와
여인이란 순결의 악재를 즐기고 있어요
-「모자의 그늘」전문
이 시가 그리고 있는 것 역시 여성의 성장이다. 모종의 독서담讀書談 위에,「담벼락」에서와 같은 여성 성장담이 오버랩 된다.「안네의 일기」를 읽고 “내 으지 상관없이 피가 떨어지는 곳” 즉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유대인 박해에 마주해야 했던 안네의 운명을 추체험하는 화자 ‘나’에게, 「담벼락」에서 “달이 차올라 붉은빛 이슬이 비쳤다”고 쓰던 초경 무렵의 소녀 이미지가 겹쳐진다.「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고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는 소년 제제를 보며 ‘나’는 “내게도 자라는 슬픔”을 느끼며 그에게 공감하는 것이다. 또「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권위적인 아버지와의 갈등 끝에 물에 빠져 죽게 되는 한스가 “물 위에 떠서/하늘의 꿈을 품었는지 의문”을 지니는 독자인 ‘나’에게는,「담벼락」속에서 어머니의 아들 출산을 기원하며 자신의 꽃신을 냇가에 흘려보내던 소녀의 이미지가 올라앉는다. 결국 그러한 성장은「테스」를 읽고 그녀와 같이 삶을 살지 않고 여성적 운명에 저항하겠다고 맞섰지만 결국은 그 “모자의 그늘”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귀결된다. 결국 ‘나’에게 성장이란 “태생적 한계에 맞선다는 것”의 고통스러운 의미를 깨닫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그와 같은 “캄캄한 골목의 아이”의-「담벼락」속에서 땅거미에게마저 따돌림 받던 아이의-고통이 자신만의 체험의 영역을 넘어서서 남성중심적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깨달음의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데서 이 여성적 독서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우리는 위 두 편의 시들에서 엿보이는 ‘칠공주’이야기, 「실험인간」이나「외로운 숨바꼭질」속 유독 외로웠던 유년시절 이야기, 「허수의 아버지」,「늦가을-아버지처럼」등에서의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푸른 쪽창」속 “엎질러진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여상에 입학”하고 “상행선 막차”에 오르는 ‘나’의 이야기 등을 읽고 페르세포네 신화화는 또 다른 딸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된다. 바로 우리나라의 바리공주 이야기다. 어느 왕이 딸만 내리 일곱을 낳게 된다. 화가 난 왕은 일곱 번째 딸인 바리가 태어나자마자 그녀를 옥함에 얹어 강물로 떠내려 보내고, 바리는 어느 평범한 노부부의 손에 자라난다. 후일 왕이 별이 들어 선계의 약수를 구해다 마셔야만 그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를 듣자, 바리는 홀로 먼 길을 떠난다. 위에 언급한 김명이 시인의 시 속 이야기들이 이 바리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딸들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다는 ‘바리 콤플렉스’가 은연중에 드러나 있다고 읽어볼 수 있겠다. 결국 “태생적 한계”에 맞서야 하는 안네 프랑크 혹은 바리의 삶, 그것이 바로 시인이 말하는 ‘딸들의 운명’일 터이다.
한국시의 맥락에서 바리공주 이야기는 거듭 재해석되어 왔다. 김혜순 시인에 의해, 생명을 구해내는 모성적 몸이 되는 바리의 이야기로 다시 읽히기도 했고, 또 김선우 시인에 의해 열정적 사랑의 여인인 바리의 이야기로 되풀이되기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와 같은 바리공주 이야기에 대한 또 다른 ‘다시쓰기’가 앞으로 김명이 시인의 시 세계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세계를 보는 딸의 눈
이러한 페르세포네 혹은 바리의 이야기는, 자신만의 ‘담벼락’ 이외에도 타인들의 삶의 ‘그늘’에 대한 공감의 시선을 통해 그 의미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자신이 겪은 ‘그늘’의 경험은 그녀 시의 화자들에게 있어 “홀로 쓰다듬”어 보는(「모자의 그늘」) 상처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그늘’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멸치나 그리마와 같이 작은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이나 (「멸치식물」,「벌레들의 그림자」)이나, “25시 마트”의 “알바생”부터 (「칠월의 석양 그리고 유리의 새들」) 새벽까지 치킨을 배달하는 “스쿠터” 청년에 이르기까지(「변두리의 백야」)잠들지 않는 도시 속 지친 이들의 피곤한 삶의 세목들에 대한 관찰이 더욱 의미있어 보이는 것은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당신, 기나긴 출장지 모텔에서
삐딱하게 꼬나문 담배 연기
나, 하늘을 찾으러
고시원 먹구름으로 거푸집을 짓는다
(중략)
그들 잠드는 소리 뒤척이다보면
그나마 감은 눈이 푸르다
-「지붕의 재해석」부분
모텔과 고시원에서 또 쪽방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이 밤새 뒤척이는 장면이다. 저마다 “기차에 놓고 내린 여행 가방” 같은 피로한 생들이다. 다닥다닥 붙은 ‘지붕’들은, 서로가 “잠드는 자리”까지 들려오는 바람에 잠을 이루지도 못하는 불면의 공간인 동시에, ‘나’가 ‘당신’의 모습을 보고 또 ‘그들’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어렴풋한 공감의 가능성이 생겨나는 공간으로도 ‘재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딸’의 눈으로 세상 보기는 , 앞에서 살펴본 딸과 어머니 사이의 모성적 유대와 공감을 모녀 관계의 바깥으로 확장해내는, 그리고 딸로서 겪어야 했던 슬픔을 통해 다른 삶들에 대한 연민을 길어 올리는 성숙한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김명이 시인의 시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페르세포네의 발화發話에서 비리의 진화進化로-을 예시豫示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
◆ 표4의 글 ◆
김명이의 두 번째 시집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사과 이야기」)을 체득하기 위해 “생살 냄새 흘러내리는 저녁”(「붉은 저녁」)을 더듬어 가는 몸의 수사학에 해당한다. 그녀 스스로를 “나무의 아류”(「대화한 적 있었을까」)로 명명하면서 “날개의 원형”(「칠월의 석양, 그리고 유리의 새들」)을 꿈꾸는 절망의 방정식이다. 따라서 그녀는 여성의 몸이라는 “태생적 한계”에 맞서는 도전적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순결의 악재”(「모자의 그늘」)를 즐기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것은 자신의 시가 “투명한 음모”(「푸념」)라고 굳게 믿고 있기에 가능한 인식이다. 그녀의 시가 아름다운 것은 일탈의 방식보다는 “주인의 사물”(「눈이 먼 베개」)로 남아 “바닥에 수행하는”(「인도」) 낮고 겸손한 성자의 자세를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 강희안(시인· 문학평론가)
「담벼락」과 「모자의 그늘」에서 엿보이는 ‘칠공주’ 이야기, 「실험인간」이나 「외로운 숨바꼭질」 등에서 엿보이는 외로움이 새겨진 유년의 이야기, 또 「허수의 아버지」, 「늦가을 ― 아버지처럼」 등에서의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푸른 쪽창」 속 “엎질러진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여상에 입학”하고 “상행선 막차에” 오르는 이야기 등은 우리로 하여금 페르세포네 이야기와는 또 다른 딸 이야기를 연상하게 한다. 칠공주라는 것, 버림을 받는다는 것, 부모를 위해 먼 길을 떠난다는 것 등이 그야말로 우리 신화 속의 바리 이야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딸들이 지니고 있다는 바리 콤플렉스가 드러나 있다고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질적으로 다른 안네 프랑크” 혹은 바리, 그것이 바로 여성의, 그리고 모든 딸들의 운명임을 김명이 시인의 시들은 말하고 있다.
- 안서현(문학평론가)
여기, ‘순수’와 ‘성숙’이 공존하는, 한 여인의 아름다운 시편들이 있다. 그녀의 삶이 한 편의 시였다. 이토록 감동에 젖어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넘겨 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 오주리(시인. 대학 강사)
.♣.
=================
▶김명이 시인∥
∙ 김명이 시인은 전북 오수에서 태어났고, 한남대학교 사회문화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석사) 했다. 2010년『호서문학』}과 『문학마을』로 등단했고, 시집으로는『엄마가 아팠다』가 있으며, 2016년 대전문화재단 및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창작지원금을 받았다.
『모자의 그늘』은 김명이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며, 여성들의 사랑과 고통의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다. 첫 시집『엄마가 아팠다』가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위한 진혼가라면,『모자의 그늘』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바리공주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다. 안네 프랑크, 다섯 살 제제, 물 위에 뜬 한스, 테스의 모자(『모자의 그늘』) 등이 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뿌리 뽑힌 자의 삶이며, 그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자 의무이기도 했던 것이다. 딸과 어머니,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어머니의 중심축은 여성성이며,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는 그녀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가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