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굴착기(쉴드)_61×34×12cm_골판지_2013
오중석 展--나른한 일상전
2013. 8. 14(수) ▶ 2013. 8. 20(화)
Opening 2013. 8. 14(수)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인사아트센터 B1 제 1전시관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 | T.02-730-1020
인사아트센터 | www.insaartcenter.com | 전북도립미술관 | www.jbartmuse.go.kr/korean
독점_50×35×12cm_골판지_2013
카타록그 서문 | 나른한 일상전
O Jung seok
현아,
마지막으로 본 지 18년이나 되었구나!
네가 파리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만나야지 하면서 미루다보니 그저 편지만 보낸다. 우리도 이젠 그날의 피로를 그날에 풀어줘야 하는, 드링크와 홍삼즙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어. 무의식적으로 켜놓은 라디오에서는 레인 앤 티어스가 흐르고, 습한 기온에 오히려 갈증이 나서 맥주를 냉동실에 넣었다. 20 ․ 30대에는 늘 대작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불편했고, 작업을 하면서도 막연히 불안하기만 했다. 이젠 조바심도 없고 소품이라도 마음 편하게 하며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 생각하니 속은 편안하다. 역시 타짜는 패를 돌려야 되고 술꾼은 술을 마셔야 되고 환쟁이들은 작업을 해야 존재감을 느끼는 것 같다. 지금은 걱정을 하지 않고 닥치면 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처음 그림을 시작했던 고등학생 땐 여자애들이 가득 있는 화실에서 데생을 하며 목탄덩어리를 목탄지에 문지르고 지우고를 되풀이 하며 무언가를 이룰 듯이 열심히 그렸었지. 라벨의 볼레로와 아프로디테스 차일드의 레인 앤 티얼스는 감수성을 자극했었던 것 같다.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며 금요일 밤엔 늦도록 작업을 한다. 직장에 다니고 나머지 시간에는 작업을 하는데, 전업 작가였을 때에는 느끼기 못했던 시간의 간절함이 오히려 지나간 열정의 불을 지펴준다.
강자독식_30×40×16cm_골판지_2013
2
오래 전 이야기지만, 흰색의 대형 푸들인 이브가 한 마리만 낳은 강아지에 대하여 말해야겠다. 79년 3월의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고 있던 중이었는데 교회 앞 삼거리에서 이브가 교미를 하고 있었지. 어릴 때라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 똥구멍이 붙어 버렸다고 생각한 친구들과 나는 당황해서 개들을 몰았지만 옆걸음으로 도망을 칠 뿐 효과가 없었다. 너희 집으로 간 나는 다급하게 “목사님 이브 똥구멍이 붙었어요.”하며 사건 현장으로 목사님과 함께 갔는데, 삼거리에선 친구들이 개들을 붙잡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고 우리가 가서 보니 ‘뽁’소리를 내며 맥주병 따는 소리가 나며 개들이 떨어졌지. 목사님은 웃으시며 “됐다”하셨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이브가 강아지 한 마리를 낳은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건조장_50×25×15cm_골판지_2013
3
내가 95년부터 제작해 온 돌출부조형식의 작품은 대부분 와이드 형식의 플레임을 유지하는데, 그린다는 것이 아닌 만든다는 개념이며 가볍고 견고한 재료인 우레탄과 골판지 등을 사용하여 감성과 이성적인 영역으로 나눠 작업을 하고 있어.
감성적인 작업의 주제는 그리움이야!
이제는 사라져 가는 방앗간, 건조장 등의 모습을 고증하는 차원이 아닌, 재해석하고, 형태는 차용했지만 눈높이와 소실점을 혼돈되게 배치하여 구상적인 아늑함보다는 몽환적인 형상으로 지나가 버린 시간이나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리는 기차와 전차들로 의인화시켜서 표현했다. 사실적인 작업에는 따스함이 보이도록 했지.
이성적인 작업의 주제는 냉소적 시각이야. 가까운 미래와 현재가 혼합되어 있지. 소각로와 파쇄기, 애벌레 모양 같은 터널굴착기, 고층의 수영장 같은 급수시설들을 만들었는데 몸의 외상은 항생제나 소염제로 치료한다지만, 마음의 외상은 마데×솔 같은 연고로는 해결되지는 않아서 쓰레기 소각장에서 사용되는 소각로와 폐차장에 있는 파쇄기들로 마음의 상처를 태우고 분쇄하여 치유를 바라는 것이지. 지하철 터널 굴착에 사용되는 쉴드는 내가 도려낸 다른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살다보니 무심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비의도적 피해를 준 일들이 아쉬움으로 남아서 자다 일어나기도 한단다. 이브가 낳은 강아지 레오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고층에 물을 가득 받은 급수시설은 급수시설로 위장한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수영장이지. 부족하지만 필요한 것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아쉬울 것이 없겠지. 미래에는 휘발유보다 비싼 수영장 물을 다시 식수로 쓰겠지...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작품들은 사실적인 형태에 기반을 두고 작업을 했다.
부조 작품에 숨은 그림처럼 놓인 함석집들이 사실은 내 작품의 주제야.
돌출 부조에 등장하는 기계들과 여러 건축물들이 집을 위한 소품이며 이야기를 맛있게 하려고 첨가한 조미료라 생각하면 된다. 풍경에 사람이 없냐고 묻는데, 그리움을 부여하고 세상을 비틀어서 보는데 있어서 사물만큼 선입견 없이 대상으로 설정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 같다.
92년부터 평면작업으로 진행해 온 적외선으로 본 풍경 시리즈는 열화상 카메라 이미지로 풍경 및 인물을 열감지하여 외곽선을 감지된 열로 형상화했으며, 생략과 여백을 강조하고 색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사물을 눈으로 볼 수 없는 색으로 그리려고 했어. 당시엔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현상하여 현상된 사진을 유성매직으로 변형하여 그렸는데, 이젠 스마트폰에 열화상 이미지를 단계적으로 변형시켜주는 앱이 나와 버렸으니 제작 시간을 단축해서 좋은 건지, 아니면 작업의 깊이가 떨어지는 건지 알 수 없구나.
이별_24×60×12cm_골판지_2013
4
고구마를 먹은 강아지 레오는 고통스러워했고, 병원에 갔지만 깜빡 잠든 새벽에 북어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지. 어린 것이 얼마나 아파하다 죽었는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단다. 아마도 레오가 살았다면 우리가 대학 들어갔을 때까지 100마리도 넘는 자손들을 남겼겠지. 34년이 지났지만 이브가 한 마리만 낳은 레오를 내게 준 너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달달한 바람 같은 일상 위에서 아무런 근심 없이 뒹굴던 5학년 아이와 레오는 가을의 쓸쓸함처럼 흑백사진으로만 남아있어. 밤이 깊어 가고 있다.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맥주를 꺼내 한 잔 마시고 다시 시작해야겠어.
2013년 7월 전주에서 중석
틈_30x60×16cm_골판지_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