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지리산 하동바위 코스에는 김치바위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그 바위를 되살리려 시도하면서 지리산을 다른 각도로 한번 볼까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능선종주의 백미라고 할 지리산 주능선 종주는 언제부터였는지도 부기해본다.
엊그제 한국산서회 월례 모임에서 강승혁선배에게서 반다나도 모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반다나가 무언지 되물었더니, 무심코 내가 손수건이라고 부르는 걸 뜻했다.
등산기념품이라 모으고 있다고 하니 지리산 반다나 3장을 등산박물관에 기증했다.
20여년 전 지리산에 빠지면서 산거라 하면서 맨 좌측의 것을 펼치면서 나의 호기심을 끌어 냈다.
그가 제기한 의문은 이것이다.
뱀사골 산장에서부터 주욱 이어진 등산로 점선이 왜 벽소령에서 세석산장까지 없냐라는 거다.
혹시 한때 벽소령 군사도로 좌우로 능선 종주가 금지된 시절이 있던 건 아니냐면서.
그러고보니 의아하긴 하다.
그런데 그 순간 사실 나의 관심을 끈건 오른쪽 백무동의 하동바위 코스에 있는 김치바위였다.
요새의 그 어떤 지도에도 등장하지 않으니, 김치바위는 금시초문이다.
김치바위가 언제적 불린 이름인지를 알면 결국 이 반다나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류는 등산박물관이 한국 최고의 조사기관^^이 되시겠다.
* 1970년 김용성이 만든 지도. 벽소령을 종단하는 도로의 남쪽은 아직 공사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명명방식에도 그 어떤 트렌드가 있다.
'김치 바위'라는 명명방식은 지리산을 놓고 볼 때 전례에 없다.
직감으로는 '불놀이야', '윷놀이' '빙빙빙' 등 80년 전후의 '국풍(國風)' 분위기에 편승한 느낌이 들었다.
월간 산에서 부록으로 내어놓은 80년대 후반 지도에는 없는 걸 확인했다.
당시 한국에서 등산지도 제작과 안내 산행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우형과 안경호가 1984년 펴낸 '산으로 가는 길'을 보았더니..
이렇게 등장한다.
이 지도의 제작 시기는 좌측에 1982년 세워진 연하천 산장 표시가 없는 걸 보면 1980년대 초에 만들어진 걸로 보인다. 그러니까 애초의 80년 전후 '국풍'분위기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나의 직감은 대체로 맞아 떨어진 셈이겠다.
노고단쪽에 있던 '별장터'를 넣은 걸 보면 이 반다나의 제작자는 좀 특이한 분이었던 것 같다. 일제 때 선교사들의 별장들이50여채 세워져 있던 노고단 별장은 6.25때 완파된다. 그 결과 전후의 상흔이 남아 있던 60년대 초의 몇몇 지도에만 '피서지'라고 적혀 있을 뿐, 그 이후 다른 지도에서는 보기 어렵다. 위의 1984년 이우형의 지도에도 없고, 그 이후의 지도에도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터에 위에 있던 반다나는 어떤 연유로 별장터라는 글이 들어가 있을까 궁금하다.
어쨌던 70년대말에서 80년대 초 지도를 기초로 하여 제작된 것이 되겠다.
그렇다면 김치바위라고 명명한 이는 누구일까?
1970년 중반 아마도 백무동 입구에서 활동하는 상인들로 구성된 모임일 마천산악회 가 있다.
마천 향토지에 의하면 그들은 한신계곡 코스를 정비하고 '첫나드리 폭포'를 명명하고, "특히 한신지계곡은 1974년도 마천 산악회에서 약 80만원을 들여 개척한 코스이다. 이곳의 무명폭포 및 내림폭포 장군대 등의 지명도 마천 산악회에서 명명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들은 1974년 당해에만 그치지 않고 상당기간 계속해서 활동하였을 것이다. 하동바위 코스도 그들의 영역이니만큼 김치바위라는 간판 역시 그들이 세웠을 가능성이 농후하겠다.
김치바위는 어떻게 생겼을까?
김장김치를 닮아서가 아니라 사진 찍을 때 '김치~'하는 모습을 연상해서일 것 같다.
웃는 도룡룡이라고 알려진 멕시코 도룡룡인데, 아마 이렇게 생긴 바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등산객들은 그 이름을 새기고 공유하기 전에 간판은 무너졌기 쉽겠다.
그렇다면 벽소령에서 세석산장까지 등산로를 표시하는 점선이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김신조 때문에 북한산이 한참동안 폐쇄되었듯이 이곳도 군사보안상 통행 제한이었을까.
그건 아닌걸로 보인다.
우측에 지도에서 제일 중요한 장터목 산장도 없는 걸 보면 반다나 제작의 오류에 불과할 것이다.
1972년 산행기, 1977년 산행기 그리고 1985년 산행기 3편을 보니 지리산 종주를 했음을 확인했다.
글이 길어지지만, 여기서 끝내면 조금 아쉬어서 한마디 더. 알아도 전혀 쓸데없는 잡학인데, 그렇다면 지리산 종주는 언제부터 시작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한국에서 종주산행의 백미는 지리산 종주이기 때문에 사실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지 않겠다.
노산 이은상은 1938년 조선일보팀의 일원으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탐험을 하였다.
풍부한 재력으로 가이더와 포터를 고용한 그들은 사진에서 보듯이 등짐없이 화엄사에서 노고단을 오르고 있다.
그러나 반야봉에서 '언젠가 능선을 이어 종주하고 싶다'라는 마음만 담고서 피아골계곡으로 하산한 다음, 하동의 대성골에서 세석산장으로 다시 올라 천왕봉을 향했다.
1936년 양정고산악부도 밀림을 헤치고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해서 역시 반야봉 즈음에서 하산한다음 하동에서 다시 올라갔다.
1942년 이이야마 다츠오가 만든 지리산 지도이다.
보시다시피 여기에는 주능선 전체가 점선으로 이어져 있다.
현재까지 발굴한 지리산 지도 중에 전체에 등산로가 표기된 건 처음이다.
그러니까 1940년 즈음해서야 비로소 지리산을 '통'으로 등산을 했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이상 반다나를 통해 숨어있던 지리산 골골 이야기 한토막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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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맨위 3장의 반다나 중 오른쪽 반다나 2개는 색깔만 다른 것인데, 1996년 세워진 벽소령 산장이 기입되지 않은 걸 보면 그 이전에 세워졌다는 것도 부기한다.
다른 관심으로 보면 더 재미있는 걸 알 수 있을텐데 오늘은 여기서 그만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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