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분황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 창건된 사찰로 절의 이름이 芬(향기로울 분) 皇(임금 황)으로 향기가 나는 임금 즉 선덕여왕을 지칭하고 있다.
일찍이 서라벌에는 전불(前佛)시대(부처님이 오시기 이전의 시대)부터 일곱 곳의 인연 있는 절터 즉 '7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가 있는데, 이곳에 다시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은 이 절 터를 일일이 적고, 상세하게 하나하나 설명을 곁들인 협주(夾註)까지 달아 두었다.
열거한 순서는 창건 연대순과 같으니, 이는 후에 오면서 지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쇠다리 동쪽 하늘 거울 숲(金橋東天鏡林) 흥륜사(興輪寺), 세 줄기의 내가 갈라지는 곳 또는 모이는 곳(三川岐) 영흥사(永興寺), 용궁 남쪽(龍宮南) 황룡사(黃龍寺 또는 皇龍寺), 용궁 북쪽(龍宮北) 분황사(芬皇寺), 모래내 끄트머리(沙川尾) 영묘사(靈妙寺 또는 靈廟寺),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숲(神遊林) 천왕사(天王寺 또는 四天王寺), 사위 맞아들인 밭(胥請田) 담엄사(曇嚴寺 또는 曇巖寺)의 7곳이다.
분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에는 634년(선덕여왕 3)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석탑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당간지주가 있고, 탑 북쪽에는 근래에 세운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일찍이 원효는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疎)를 썼으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도가 있었고, 755년(경덕왕 14)에 강고내말(强古乃末)이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약사여래상을 만들어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좌전(左殿)의 천수대비 벽화는 영험이 있어서 경덕왕 때 희명(希明)이라는 어린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고 전한다.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遺骸)로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는데 언젠가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고 전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 원효의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101년(숙종 6) 숙종의 조서에 의해 한문준(韓文俊)이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건립했다. 그 뒤 몽골 침입과 임진왜란 등으로 큰 손상을 입었다. 현존 당우로는 보광전· 승당· 종각이 있으며, 이밖에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 화쟁국사비편(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석정(石井)· 석등· 건물지의 초석 등이 남아 있다.
이곳 분황사의 가람배치와 규모를 확인하기 위하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1991년부터 연차적으로 발굴한 바에 의하면 처음 창건할 당시에는 품(品)자 모양 1탑3금당의 가람배치임이 밝혀졌다. 이 후 3차에 걸친 중건과정에서 1탑1금당 형식으로 바뀌었으며, 금당의 방향도 오늘날과 같이 남향에서 서향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하였다. 수년전까지 지금의 금당 맞은편과 북쪽에 두 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이를 철거하고 금당 뒤쪽에 새로 요사채를 건립하였다.
분황사가 건립될 당시의 주지는 자장율사(慈藏律師)였다. 당나라에는 9층탑의 원형이 남아 있는데 자장율사가 당에 유학한 사실이 있으니 그 탑을 모방하여 9층탑을 세운 것이 아닌가하고 짐작하는 이들도 있다.
자장율사 다음으로는 원효대사가 이 절에 주석하였다. 민중과 더불어 함께 하고자 했던 그의 불교철학은 여기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가 창시한 법성종(法性宗)을 분황종(芬皇宗)이라고도 한다.
1965년 분황사의 뒷담에서 북쪽으로 33m 되는 지점에 있는 우물터에서 20여 구의 석조불상이 발굴되었다. 이 불상들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강당 뒤쪽에 전시되고 있다. 대부분 8세기말이나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 말기의 분황사파 조각이라고도 불린다. 발견된 상들을 분류하면 목이 잘린 원각(圓刻)의 불좌상 11구, 암판(岩板)에 부조된 불좌상 2구, 원각보살입상 1구, 불두(佛頭) 5점, 불상편과 광배 및 광배편 등이다. 이 상들 중에 많은 불좌상들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고, 약합을 든 약사불상 1구,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상 2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상들은 각기 다른 형식의 법의를 걸쳤으며 조각수법도 약간씩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시에 제작되지는 않은 듯하다. 법의는 통견(通肩)과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입었는데, 우견편단의 경우 오른쪽 어깨 끝에 매듭장식이 표현되어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된 불좌상 형식의 다양한 변형과 토착화 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들이다.
1920년대 분황사 석탑
당간지주(幢竿支柱)
분황사 남쪽 담장으로부터 30여m 떨어진 곳에 당간지주가 덩그렇게 서 있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192호이다.
이 당간지주는 전체 높이가 3.7m, 너비는 아랫부분이 70cm, 윗부분이 50cm이고 두께는 아래가 46cm인데 위로 갈수록 줄어들어 안쪽으로 비스듬히 깎인 형태이다. 한 쌍의 돌기둥이 70cm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고 귀부(龜趺)를 조각한 간대(竿臺)만 남아있다. 귀부는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목은 움츠린 상태이며 오른쪽 앞다리와 왼쪽 다리 부분이 크게 깨어졌고 겁에 질린 듯 목을 잔뜩 옴츠리고 있다. 등에는 귀갑무늬가 없고 당간을 놓는 자리는 한가운데가 아니고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당간지주는 보통 일주문 밖에 있는데 두 개의 돌기둥이다. 당간지주 사이에 세우는 당간(幢竿)은 절의 행사를 멀리서도 알 수 있도록 당(幢) 또는 번(幡)이란 깃발을 높이 매다는 나무, 쇠, 돌 등으로 만든 깃대를 이르는 것이다.
분황사 당간지주로 여겨지는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당간을 받치는 거북모양의 받침돌이 있는 특이한 양식으로 이 시기 당간지주를 연구 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당간지주
모전석탑(模塼石塔)
사찰에 세우는 탑이 중국에서는 벽돌을 구워서 쌓은 전탑(塼塔), 우리나라는 돌로 된 석탑(石塔), 일본은 나무로 만든 목탑(木塔)이 많다.
분황사 석탑은 국보 제30호로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이다. 634년(선덕여왕3)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뒤에 몇 차례 보수되었고, 지금의 탑은 1915년에 수리한 모습이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있으나 원래는 9층 또는 7층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90년대 삼성문화재단에서 탑재들을 종합하여 분석 한 결과 원래는 9층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3층의 탑은 높이는 13m이다.
기단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1m로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았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마리씩을 네 모퉁이에 배치하였다. 네 마리의 동물이 모두 사자상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모두 여섯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 두 마리는 현재 경주 박물관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탑 주위에 사자를 배치하는 사례가 없기 때문에 이 사자들은 인근의 왕릉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남서쪽과 북서쪽에 있는 것은 사자임이 분명하나 남동쪽과 북동쪽은 사자상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상을 물개로 보기도 한다. 남동과 북동 방향은 동해를 바라보는 쪽이니 왜구의 침입을 막아낸다는 의미에서 바다 동물인 물개를 배치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그 사실을 알고 물개의 다리를 모두 잘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북동쪽에 있는 돌사자(물개?)의 파손이 심했는데 1996년 12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분황사의 의뢰로 남동쪽에 있는 것을 모델로 해서 새로운 석재를 보강해 좌대와 다리를 복원했다.
1층 네 면에는 입구가 열려 있는 감실(龕室)을 만들고 입구 양쪽에 금강역사상을 세웠는데 한쪽은 입을 벌린 아금강역사(밀적금강), 맞은편은 입을 다문 훔금강역사(나라연금강)인데, 옷 무늬가 각기 다르다.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답게 근육이 꿈틀대는 것 같다.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석탑과 비교해 볼 때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은 전탑과 동일한 양식으로 상하에 모두 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옥개받침(층급받침)은 1. 2층은 6단, 3층은 5단인데, 낙수면 역시 1. 2층이 각각 10단이고, 3층은 방추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이 탑은 처음 9층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어리석은 중(愚僧)이 이를 개축하려다 또 허물어뜨렸다고 한다. 이 때 한 개의 구슬을 얻었는데 모양이 바둑알 같고 빛이 수정과 같은데 촛불을 갖다 대면 밖이 훤히 보이고 해가 비치는 곳에 두고 솜을 가까이 하면 불이 붙어 화주(火珠)라고 했다는데 돋보기인듯하다. 이 구슬을 백률사에 간직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15년 이 탑을 수리 복원할 당시 2층과 3층 사이 석함(石函)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각종 옥류와 패류, 금은제 바늘과 침통, 가위 등과 함께 고려시대에 사용하였던 숭녕통보와 상평오수 등이 출토되어 고려시대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함과 사리장엄구에서 나온 각종 공양품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분황사 스님에 의하면 과거 탑 바로 앞으로 난 도로를 주행하는 차량진동으로 인하여 분황사석탑 훼손되어 현재 기단 부분 벽돌 1백여 개가 반으로 쪼개져 있으며 탑신 서쪽부분도 탑 자체의 하중과 차량진동으로 벽돌 틈새가 벌어져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보수가 시급 하다고 한다. 또한 1915년 탑 복원과정에서 탑 내부에 발라놓은 콘크리트 성분이 비가 오면 녹아내려 흰 석회가 탑신을 뒤덮는 백화현상도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분황사탑에도 회칠을 했다는 채색론적 입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분황사 모전석탑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像)
보광전(寶光殿) 안에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19호인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약사여래불은 질병의 고통을 없애주는 부처로서 동방정토약사불, 약사유리광여래,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모든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해 주는 의왕(醫王)으로서 신앙되었던 부처님이시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 후기 작품으로 높이가 3.45m이며, 강희 19년(1680)에 중건된 분황사 보광전(寶光殿) 안에 안치되어 있다. 이 불상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왼손에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데 이 약합의 뚜껑 안에 "건륭(乾隆) 39년 을미(乙未) 4월 25일 조성야(造成也)…" 등의 불상 조성기가 있는데 건륭 39년은 실제 을미가 아니라 갑오(甲午)이다. 양식(樣式)이나 조형기법(造形技法)으로 보아 18세기(世紀) 후반의 작품이다.
육계(肉髻)가 낮게 표현되고 전체적으로 비대하고 육감적이다. 불상의 얼굴 형태는 동안(童顔)이나 종교적인 신비함이 다소 빈약한 편이다.
양쪽 어깨가 드러나지 않은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두꺼운 편이다.
대좌(臺座)는 장식없는 판석(板石)으로 되어 있다. 1998년에 약사여래입상 개금불사시 약합(藥盒)뚜껑은 건칠제(乾漆製)로 확인되었으나 약합의 재질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불상은 청동제로 확인되었다.
원래 분황사에는 경덕왕14년(755)에 무게가 30만6,700 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의 난을 겪는 사이에 없어진 듯하다.
또한 본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도 있었다고 전한다.
보광전 약사여래
석정(石井)
탑의 북쪽에 있는 우물로 경상북도지정문화재자료 제9호이다. 얼마 전까지 절에서는 물론 절 부근에 사는 주민들도 이 물을 길어다가 식수로 사용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우물 안쪽을 철망으로 막아 두었다.
우물 상단의 틀은 큰 바위를 외부는 8각으로 다듬고 안쪽은 둥글게 깎고 아래는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외부의 팔각모양은 부처가 가르친 팔정도를 상징하며 내부의 원모양은 불교의 진리(윤회, 화합)를, 아래의 사각형은 사성제를 상징한다고 한다.(별첨 사성제와 팔정도 참조) 이 석정은 현존하는 신라시대의 우물로 가장 정교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라벌(徐羅伐) 동북쪽의 금학산(琴鶴山) 기슭 동천사(東泉寺)에 있는 동지(東池)와 청지(靑池)의 두 우물과 분황사의 이 우물에는 신라를 지키는 호국룡(護國龍)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세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 사실을 아뢴 뒤 남편을 찾아 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 찾아서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 그 뒤부터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석정
화정국사비부(和靜國師碑趺)
삼룡변어정 동쪽편에 특별한 장식 문양이 없는 비석받침이 있다. 이 비부는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97호로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원효의 화정국사비를 세웠던 곳이다. 숙종6년(1101년)8월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에는 방치되어 있었던 듯한데, 비석 받침이 절 근처에서 발견되자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비 받침 위쪽에 '此新羅和靜國師之碑蹟'이라 적고 작은 글씨로 김정희라고 새겨놓았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의 소찬(所撰)인 화정국사비가 있으니 오금석(烏金石)이라'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비부만 남아 있고 네 모서리는 떨어져 나갔다.
화정국사비부
선덕(善德)의 의미
선덕(善德)은 불경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에서 따온 듯하다. 선덕바라문은 불법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교화할 전륜성왕의 전형으로 인도에 실존했던 아소카왕이 될 인연을 이미 갖고 있으며 석가모니를 섬겨 장차 도리천의 왕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이는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자신은 도리천에 묻히고 싶다는 사실과 연결해 볼 수 있다.
-남동신 '지장의 불교사상과 불교 치국책'에서-
선덕왕의 즉위와 그의 남편
장녀 천명이 아닌 차녀 덕만(선덕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진평왕이 선덕이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이 있어 천명에게 양보할 것을 권하자 천명이 이에 따랐다. 왕위에 오를 당시 선덕왕의 남편은 김용춘이었으나 선덕왕이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자 용춘의 형인 용수가 선덕왕을 모시게 되었다. 자식이 없을 때 세 명의 남편을 두는 삼서의 제도에 따라 흠반공과 을제공도 선덕왕의 시중을 들도록 했다.
-이종욱,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서-
※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왕의 남편이 음갈문왕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종욱은 음갈문왕을 흠반공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남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단지 화랑세기에서 남편의 한 사람이라고 한 을제공에 대해서 '원년(632) 2월 을제공에게 국정을 맡아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
제27대 덕만(德曼, 曼을 万이라고도 한다)의 시호는 선덕여대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년 임신(632)에 왕위에 올라 16년 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미리 알아맞힌 일이 모두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 ․ 자주색 ․ 흰색의 세 가지 빛깔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다. 왕이 그려진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 하면서 이내 뜰에 꽃을 심으라고 명령하여 그 꽃이 피고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더니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서 겨울철인데도 많은 개구리들이 모여 3, 4일 동안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왕에게 물었더니 왕이 급히 각간 알천 ․ 필탄 등에게 명령하여 날랜 병사 2천 명을 뽑아 빨리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을 물어서 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그들을 엄습하여 죽이라고 하였다.
두 명의 각간이 명을 받고 각기 병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과연 부산(富山, 경주에서 서쪽으로 12km 떨어진 건천읍과 산내면 사이에 있는 해발 640m의 산으로 주사산 또는 오봉산이라고도 불리어짐) 밑에 여근곡이 있었다. 그곳에 와 숨어 있던 500명의 백제 군사를 모두 잡아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亏召, 백제 무왕 때의 장군)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근처에 숨어 있는 것을 또 포위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또 뒤에 온 병사 1200명도 역시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
셋째 왕이 아무 병도 없는데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짐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 지내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일지 못하여 어디냐고 여쭈었더니 왕이 말하기를 "낭산 남쪽이다."라 했다. 그 달 그 날이 되자 과연 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안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지었다. 불경에 '사천왕천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이로써 대왕이 영험하고 신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국유사 기이편 선덕왕 지기삼사조에서-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나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비옵나이다.
1,000손과 1,000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 다 없는 이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시오면, 그 자비(慈悲) 얼마나 클 것인가.
찬(讚)해 말한다.
죽마(竹馬)·총생(총笙)의 벗 거리에서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 눈 먼 사람 되었네.
대사(大士)가 자비로운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몇 사춘(社春)이나 버들꽃 못 보고 지냈을까.
-삼국유사 탑상편 '분황사 천수대비 맹아득안' 조에서-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문무왕 때 광덕과 엄장이라는 두 승려가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였다.
"극락세계에 먼저 가는 사람은 꼭 알리도록 하자."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 숨어 살면서 신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해서 처와 함께 살고 있었다. 엄장은 남산에 있는 암자에서 화전 농사를 짓고 살았다.
어느 날 붉은 빛을 띠며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소나무 그림자가 고요히 저물어가는 저녁이었다. 그 때 창밖에 인기척이 들리며 이런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제 극락으로 가네. 자네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도록 하게."
그 소리를 듣고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구름 위에서 하늘의 노래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으로 뻗치었다.
이튿날 엄장이 광덕의 집으로 가 보니 과연 그는 죽어 있었다. 이에 즉시 광덕의 처와 함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장사를 치른 후 엄장이 광덕의 처에게 말했다.
"이제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소?"
"좋습니다."
그녀는 주저함이 없이 승낙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장은 남산의 집으로 가지 않고 그 집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밤이 되어 불을 끄고 엄장이 잠자리를 함께 하려고 하자 놀란 그녀가 엄장에게 말했다.
"스님께서 서방정토에 가기를 원하는 것은 마치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이 어리둥절해서 다시 물었다.
"광덕도 이미 이렇게 했을 것인데 왜 안 된다는 말이오?"
그러자 광덕의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저와 10년을 살아도 아직 하루 저녁도 한 이불을 쓴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몸을 더럽혔겠습니까? 오로지 매일 밤 몸을 단정히 하고 반듯이 앉아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암송하고 이미 진리를 깨친 뒤에는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그 빛 위에 올라가 가부좌를 하였습니다. 정성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에 가지 않으려 해도 어찌 가지 않았겠습니까? 무릇 천 리를 가고자 하는 사람은 첫걸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의 하는 일로는 극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엄장은 부끄럽고 무안하여 그대로 말없이 물러 나왔다. 그 길로 원효대사의 처소로 가서 도를 깨칠 수 있는 방법을 간곡하게 청하였다. 원효는 정관법(淨觀法) 즉 더러운 생각을 없애고 깨끗한 몸으로 번뇌를 없애는 방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장은 이에 몸을 단정히 하고 전날의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는 오직 한마음으로 도를 닦아 그도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가게 되었다.
광덕의 처는 바로 이 분황사의 계집종인데 관음보살 19응신 중의 한 분이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감통편 '광덕 엄장' 조에서-
원효대사(元曉大師)
속성 설(薛). 법명 원효. 아명 서당(誓幢)· 신당(新幢). 압량(押梁:慶山郡)출생.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648년(진덕여왕2)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가산을 불문에 희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태어난 집터에는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하였다.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唐項城:南陽)에 이르러 한 고총(古塚)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대오(大悟)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 후 분황사(芬皇寺)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 : 元曉宗· 芬皇宗· 海東宗 등으로도 불린다)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이 사실을 스스로 파계(破戒)로 단정,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 ·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자칭, 무애가(無愛歌)를 지어 부르며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또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왕과 고승(高僧)들 앞에서 강론하여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저서에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화엄경소(華嚴經疏), 대열반경종요(大涅槃經宗要),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대무량수경종요(大無量壽經宗要),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 범강경보살(梵綱經菩薩), 계본사기(戒本私記),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판량비론(判量比論),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십문화정론(十門和諍論) 등이 있다.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
사성제(四聖諦)는 사진제(四眞諦)라고도 하며 네 가지 틀림없는 진리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골격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처음 설법하신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네 가지 가르침이다.
① 고제(苦諦) : 현실세계의 참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범부(凡夫)의 생존은 괴로움이라는 진리이다. 인생의 고(苦)는 생· 노· 병· 사(生老病死)의 4고로 표시되며, 또는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怨憎會苦),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所求不得苦),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의 근본인 오온(五蘊)에 집착하는 괴로움(五取蘊苦, 五陰盛苦:생존에 대한 집착)의 넷을 더하여 8고라고 한다. 여기서 자연현상으로서의 생·노· 병· 사가 괴로움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생· 노· 병· 사가 괴로움인 것이다. 그럼에도 생· 노· 병· 사는 인생에 있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자기존재의 기반이다. 그러므로 이를 가리켜 고제라고 한다.
② 집제(集諦) : 괴로움의 원인을 나타내는 말이다. 자기가 취하는 생존이 바로 고가 되는 것은 마음 깊이 갈애(渴愛)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욕망의 근저가 되는 욕망이며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다. 갈애에는 욕애(慾愛:감각적 욕망) ·유애(有愛:생존의 영속을 바라는 욕망)· 무유애(無有愛:생존의 단절을 바라는 욕망)의 세 가지가 있다. 행복을 구하는 것도 욕망의 일종이지만 갈애는 그것과는 달리 욕망의 근본에 있는 불만족성을 말한다. 이것이 인간의 불행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집제라는 것은 갈애를 근본으로 하는 여러 가지 번뇌이며, 괴로움의 원인이다. 따라서 집제와 고제는 미망의 원인과 결과를 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발견하는 데에 불교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③ 멸제(滅諦) : 이 갈애가 남김없이 없어진 상태를 말하며, 이것은 이상적 경지로서 열반(涅槃)이라고 말한다. 또한 마음이 갈애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해탈(解脫)이라고도 한다.
결국 갈애에 물들지 않고 행동하는 마음의 자유로운 상태이며 이것이 참된 즐거움이다. 열반은 멸(滅)로도 번역되기 때문에 열반을 허무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멸은 갈애의 멸이지 마음 그 자체의 멸은 아니다. 갈애가 멸함에 따라 올바른 지혜가 나타나며, 그 지혜에 의하여 알게 되는 부동의 진리가 열반이다.
④ 도제(道諦) : 이 고(苦)와 집(集)의 멸(滅)을 실현하는 길을 도제라고 한다. 이 수행방법은 8정도(八正道) 또는 팔성도(八聖道)로 표시된다.
팔정도(八正道)란 원시불교의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에 의하면 고통을 소멸하는 참된 진리인 8가지 덕목을 말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正思):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 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⑥ 정정진(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출처] 향기나는 임금님의 절|작성자 정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