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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가는 속도라면 한 시간에 달에라도 가겠습니다. 과장이 심한가요? 그런데 정말 소리도 없이 잘도 갑니다. 새 달 들어 어느덧 열흘이 지났습니다. 올해는 풍년이 예약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요렇게 정기적으로 비가 내린대요? 하기야 이제 겨우 시작이니 가는 동안 뭔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도 시작이 좋습니다. 안 그런가요? 아무튼 코로나19도 빨리 지나가면 좋겠습니다. 자연은 그런대로 잘 운용이 되는 것 같은데 문제는 사람입니다. 꾸준히 지속되는 사고들, 속된 말로 없는 사람만 쓰러집니다. 무전유죄인가요? 하늘도 무심하지. 일상적으로 하는 말 이제도 듣습니다. 철저한 수사, 재발방지! 거참!! 그렇다고 그런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그들도 죽을 맛이겠지요.
그래도 어김없이 주말을 맞습니다. 아파도 힘들어도 슬퍼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손님은 시간밖에 없는 듯싶습니다. 이왕이면 기쁘게 맞고 싶은데 이 공간 안에는 왜 이리도 아픈 일이 많은가요? 다행일까요? 그래도 오래 머물다 가지는 않는 듯합니다. 공간은 그대로일지라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유월의 중순을 시작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을 만들기 바랍니다. ^&^
2021년 6월 12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1-06-06주일설교(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니)
성경 요한복음 1 : 1 - 4 2021년 6월 6일
설교 :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니 김종우 목사
오래 전 할머니 사기단 이야기가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노인네들이 노인들을 상대로 건강식품을 사칭하여 싸구려 한약재를 팔다가 잡힌 것입니다. 고작 수천 원짜리 한약재를 2백 만 원에 파는 장면이 뉴스에 나온 것입니다. 한 할머니가 길가에 앉아 팔고 있는데 관심을 가진 노인이 다가와 이리저리 물어봅니다. 그 때 기다렸던 바람잡이 할머니 두 분이 다가와서 거들지요. 아무래도 값이 좀 과하다 싶어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바람잡이 할머니가 제의를 합니다. 자기도 좀 부담되어서 망설이고 있는데 그러면 함께 돈을 모아 사서 둘로 나누자고 합니다. 자그마치 4백 만 원짜리를 둘이서 부담하니 2백밖에 안 됩니다. 한결 수월하다고 느껴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삽니다. 그렇게 하여 겨우 수천 원 어치의 한약재를 2백 만 원에 팔았습니다. 정말 놀랍지요. 어떤 할머니는 은행에서 5백 만 원을 대출하여 관절염에 특효라는 약을 사들였습니다. 알고 보니 모두 가짜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몸이 약해지고 병들었으니 고생이고 가족들에게도 짐이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낫고자 하는 열망이 크지요. 무슨 짓이든 못하겠습니까? 바로 그런 약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 간절함을 알고 유혹하는 것이지요.
나이가 들수록 더욱 건강에 관심이 높아지고 병에 대한 두려움이 커집니다. 오래 사는 것, 장수는 누구나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병들어 누워서 오래 사는 것은 의미가 없지요. 그렇게 오래 사느니 죽는 편을 택할 것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행복하게 오래 사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마음 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요. 요즘 성인병이라고 나이 가려서 찾아옵니까? 소아성인병까지 등장하였습니다. 세상에 질병에 걸리기를 소원하는 사람도 없고 병에 걸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기치 않은 때에 병이 찾아옵니다. 두렵지요. 그러니 평소에 건강을 지켜야 하고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각자 아는 상식들을 동원하여 좋다는 운동도 하고, 음식도 잘 먹고, 여러 가지 좋다는 약도 복용합니다.
그런데 사실 건강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몸을 누가 만들었다고요? 시 103 :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만드신 분이 가장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인생들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원칙은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원칙을 만듭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지요. 정작 창조주 하나님의 법칙은 무시하고 자기네가 만든 법칙만을 고수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만든 법칙을 고수하면 수명이 얼마나 길어질까요? 시 90 : 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오랜 시간 그 수준을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점점 좋아지고 있다 하니 아마도 하나님이 떠나시던 때의 수준까지는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창 6 :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120년, 그 정도만 살아도 대단하다 싶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수명은 어디까지 늘어날 수 있을까요? 사 65 :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백세에 죽는 자는 아이랍니다. 도대체 얼마나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쩌면 아담처럼 노아처럼 살 수 있는 때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 정도도 넘을 수 있지 않을까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수한이 있는 생명이 아니라 영생이니까요. 처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과연 죽도록 만드셨을까요? 창 1 :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영원하신데 자식들이라 하는 우리는 죽어야만 합니까? 죽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하신 바가 아님을 믿습니다. 요 6 :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멘! 설명이 길겠지만 아무튼 일단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한 마디로 ‘영생’인 줄 믿습니다.
지금 영생을 이야기하기에는 좀 벅찹니다. 일단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까,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법칙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찾으면 됩니다. 우리가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그냥 지나친 말씀들, 깨닫지 못한 말씀들을 찾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육체가 있고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있지요. 그 동안 우리는 보이는 육체의 건강에만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삼 1 :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우리가 강건하여지려면 먼저 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데서 비롯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만병의 근원을 감기라고 말했습니다. 자그마한 병을 우습게보면 결국 큰코다치는 결과를 맛보게 된다는 것을 경고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만병의 근원을 무엇이라고 말하지요? 예, 스트레스라고 말합니다. 스트레스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쉽게 표현하면 마음의 병입니다. 오래 전에 함께 근무하던 상사가 있었습니다. 저하고는 불과 두 살 차이밖에 안 됩니다. 그 당시 나이로는 겨우 50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간암 판정을 받았고 판정 받고 겨우 3개월 살고 떠났습니다. 문병을 갔을 때 저에게 해준 말이 기억납니다. ‘김 목사님, 힘들어도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제 명에 못 갑니다. 그것도 하나님 영광 가리는 일이지요.’ 당시 한 1년 정도 무척 힘들게 근무하였습니다. 보통 신경을 쓴 게 아닙니다. 결국 그렇게 된 것이지요. 본인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목회를 하는 것도 신경 쓰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걱정스러워서 충고를 해준 것입니다. 병원에 가면 통상적으로 해주는 말이 바로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지요.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왜? 만병의 근원이라는 것이지요.
마음이 상하면 일단 몸의 저항력이 쇠하기 시작합니다. 마음의 문제인데 왜 육체가 영향을 받는가? 우리가 몸, 마음, 영혼으로 되어있는데 이게 다 따로 놉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모두 한 그릇 안에 들어있는데 어떻게 따로 놉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고 영력이 좋다 하더라도 뼈가 으스러지거나 살이 찢어지는 아픔에 휩싸이면 평소의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한 마디밖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살려주세요! 이런저런 기도 제목대로 기도하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면 육체도 건강해야 합니다. 금식기도가 아니라 없어서 굶는다면 기도보다는 눈앞에 밥만 오락가락할 것입니다. 또한 마음이 상하여 있는데 설교 말씀이 은혜스럽게 들려오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모두 건강해야 합니다. 그런데 순서에 문제가 있지요.
몸이 건강하면 신앙생활을 경건하게 하는데 사용하는 경우가 많겠습니까, 세상 일락에 빠지기가 쉽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일락에 빠지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영혼이 건강해서 경건한 생활에 익숙하다면 건강한 몸으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세상 일락에 빠질까요, 하나님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낼까요? 답이 어렵지 않지요? 그래서 영혼이 먼저 잘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영과 몸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먼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세상을 향하면 근심걱정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늘 우리의 몸을 상대로 하여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가장 이겨내기 힘든 유혹이지요. 예수님은 우리 마음 밭을 비유하실 때 가시떨기를 말씀하셨습니다. 마 13 :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한 마디로 염려와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것이지요. 마음이 세상으로 향하면 끝이 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백성인 우리가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가 당하는 일이고 그래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어쩌면 몰라서 당하는 일이 아니라 알면서도 당합니다.
마음이 세상을 향하면 따라오는 것이 염려입니다. 즉 근심과 걱정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무덤에나 가서 찾으라고 합디다. 그런 사람 없지요. 이것이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가난한 사람만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런 사람이 무슨 걱정거리가 있을까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의 근심이 있게 마련이고 종류가 다를 뿐이지 그들도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우리는 지난 몇 년 사이에 자살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못 살겠다 하는 사람만 죽은 것이 아니지요. 내노라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쩌면 잘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는 그 강도가 더 클 수 있습니다.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겠지요.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지만 사실 그 스트레스를 안고 계속 산다 한들 자기 명대로 살기도 어렵습니다. 왜요? 스트레스가 그 몸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들 곧 당신의 백성이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복을 주실 때도 단순히 오래 사는 것만을 명하지 않으십니다. 범사가 다 잘 되어야 하겠지요. 신 28장에서 복을 명하신 내용은 그것을 요약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3 - 6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아멘! 주변 모든 일들이 다 잘 되면서 오래 살아야 하는 것이 복입니다. 요삼 1 : 2절도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바라시는 것이지요. 할!
이 모든 복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그 건강의 복을 얻기 위해서라도 먼저 무엇이 잘 되어야 한다고요? 영혼이 잘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이 바르게 서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지만 그것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딤전 4 : 7 - 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아멘!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신경을 쓴다면 그것은 약간의 유익만 줄 뿐이랍니다. 하지만 경건 즉 올바른 신앙생활은 범사에 유익하다고 말씀하지요.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도 건강하게 만들어줍니다. 말씀대로 영혼이 잘 되어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몸의 면역력이 강화될 것이고 오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레 17 : 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그러므로 생명을 유지하고 또한 건강하게 지탱하려면 어디에 신경을 써야 합니까? 바로 피입니다. 오늘날 모든 질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고 했는데 그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이야기이고 육체를 따라 이야기한다면 어디에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까? 바로 피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발단이 피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인병 대부분이 피와 혈관의 문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피가 생명과 일체인 것이지요.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피를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피는 어디서 만들어지지요? 골수 즉 뼛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 또한 마음과 어떻게 연관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잠 17 : 22 “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마음이 즐거우면 비록 좋은 약을 먹지 않아도 저절로 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근심으로 덮이면 어떻게 된답니까? 뼈가 마르게 된답니다. 그런 뼈에서 좋은 피가 만들어질까요? 아니 필요한 만큼 만들어질까요?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잠 14 : 30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시기는 마음에 불을 지핍니다. 결국 뼈를 썩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인데 몸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문제는 뼈를 썩게 하니 자연히 어디로 문제가 확산되겠습니까? 바로 생명인 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잠 12 : 4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아내가 속을 썩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엄청 스트레스를 받을 것입니다. 그 결과 역시 뼈를 썩게 만듭니다. 명을 재촉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래저래 그만 살자고 재촉하는 셈이 되겠지요.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뼈가 건강하게, 피를 맑고 깨끗하게, 그래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자면 생명을 담아야 합니다. 어디에? 마음에. 어떻게? 요 1 : 1 - 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아멘! 그가 누구입니까? 말씀입니다. 지금 말씀을 의인화하여 전해주고 있지요. 그 말씀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무엇이 있었다고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말씀을 담으면 생명을 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담은 사람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경건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그 경건이 어떻게 유익을 준다고요? 범사에.
우리가 쉽게 하나님 말씀을 먹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먹습니까? 말씀이 먹어집니까? 말씀이 눈에 보입니까? 물론 성경책은 보이지요. 그러면 성경책을 한 장 한 장 뜯어 먹습니까? 그런 뜻이 아닌 줄 압니다. 사실은 하나님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듣는다는 것이고 성경책을 읽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들으면 어디로 들어갑니까? 뱃속으로, 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냥 읽고 들으면 저절로 감동과 즐거움이 생깁니까? 아니지요. 시 119 : 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과연 말씀이 꿀보다 더 달고 맛있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그만한 기쁨과 감동이 온다는 뜻이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읽었다고, 들었다고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 아닌 줄 압니다. 깨달음이 올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깨달음이 올 때의 감동과 기쁨을 경험해본 사람은 압니다. 바로 천국의 기쁨이지요. 막 날아오릅니다. 세상적으로 그리고 우리 육신의 상태대로 표현한다면 엔돌핀이 용솟음친다는 말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바로 그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눅 24 :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그들은 밤을 무시하고 그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그 기쁨을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도 이겨내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강건함 즉 몸도 마음도 그 영혼도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언제 깨닫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눅 24 :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보입니까? 언제 마음이 뜨거워졌답니까? 예, ‘성경을 풀어 주실 때’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우리와 수준이 다릅니다. 그들은 유대인이고 어려서부터 율법 곧 성경을 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우리처럼 성경을 개인 소지하고 있던 때가 아닙니다. 그러니 성경이 어디에 있습니까? 머릿속에 있습니다. 한 예를 보겠습니다. 행 13 :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안식일마다 외웠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외웠는데 알아요, 몰라요? 모른다는 말입니다. 읽어도 모르고 써도 모르고 외워도 모릅니다. 무엇을 모를까요? ‘선지자들의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그 말씀이 사실로 나타나기 전에는 세상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이미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29 : 11 - 12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묵시’란 다른 말로 ‘예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예언의 말씀은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하는 것입니다. 유식하든 무식하든 상관없이 모릅니다.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절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선지자든 선견자든 눈이 감기고 머리가 덮였으니 모른다, 그 말씀입니다. 선지자 선견자 같은 말이지만 아무튼 오늘날로 말한다면 백성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언은 그 말씀이 이루어져서 나타날 때까지는 모른다, 그 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듭니다. 우리 잘 아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 7 :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자 처녀가 잉태하여 낳을 아들이 누굽니까? 하나님께로 이 말씀을 받은 이사야 자신도 몰랐습니다. 왜요? 그 때 일어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이 누구인지는 그 아들이 직접 나타나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또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그 아들이 ‘예수’라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러니 믿으려고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3년 따라다닌 제자들조차 긴가민가하면서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아마도 ‘이게 아닌가벼,’ 하면서 흩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부활하시고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 성경대로 풀어주신 것입니다. 비로소 예수가 메시야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언의 말씀은 당사자가 나타나 풀어줄 때까지는 모릅니다.
우리가 여태 교회 다니면서 듣고 배운 말씀은 초보일 뿐입니다. 구태여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경 속에 많은 부분 역사와 교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대부분 그랬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은 몰라서 안 지키기보다 알면서도 못 지키는 부분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예수님이 그 죄 값을 치르려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수준이 아니라 약속을 지켜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약속은 곧 예언이지요. 구약의 약속이든 신약의 악속이든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이십니다. 한번 오셨고 다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을 믿고 지켜달라는 말씀이지요. 그 속에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 1 : 1 - 4절이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차 말씀하셨습니다. 요 6 :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54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문제는 이 말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면 다시 오시는 그 날, 마지막 날에 영생을 얻을 줄 믿습니다. 그러면 죄로 말미암아 생명이 단축되었던 우리가 다시 장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조건은 생명이신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깨달은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 때가 되었는지 알아야 하고, 예언을 이룬 그 분을 찾아야 합니다.
<분노의 질주 - 더 얼티메이트>
옛날에 미국산 TV극 ‘전투’(The Combat)란 것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매주 재미있게 시청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싫어하셨습니다. 출연하는 미군은 죽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총 맞아 죽는 군인은 오로지 독일군 뿐이었습니다. 너무 일방적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현실감이 없으니 재미없다는 것이지요. 이와 비슷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명사수가 총질을 해도, 그렇게 쏘아대도 결코 총탄을 맞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반면 그 반대쪽 조직원이나 군인들은 픽픽 쓰러집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싶지요. 그런 것 따지자면 영화 볼 일 없습니다. 안 보면 됩니다.
그럼에도 돈을 내고 봅니다. 벌써 9편까지 등장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끝날까요? 아직은 아니리라 짐작합니다. 이들 가족이 멀쩡하게 살아들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악이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고 악당들 또한 여기저기 나타날 테니 말입니다. 할 일이 생길 거란 말이지요. 그 누구에게 맡기기보다 가장 확실한, 소위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팀입니다. 나름대로의 정의감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어느 갑부나 아니면 조직 또는 한 나라의 정부까지도 믿고 의뢰할 수 있는 집단이란 말입니다. 어쩌면 악의 대명사와 반대쪽에 있는 정의의 사도라 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끈끈한 가족애로 뭉쳐져 있습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과 동정을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총질을 하고 폭탄을 터뜨리면 좀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악도 선으로 바뀔 듯합니다.
어쩌면 만화영화보다도 더 만화 같은 이야기지만 그래도 봅니다. 특별한 이야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소위 볼거리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이야기라고 해봐야 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도 어쩌면 이미들 알고 있습니다. 다 처리하고 모두 모여서 가족 파티나 아니면 모두 불러 모아 조촐한 식사를 하는 겁니다. 그러려니 하고 보는 겁니다. 사건 발생의 통지와 가족의 재집합, 그리고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서두는 간단히 끝내고 곧바로 액션으로 들어갑니다. 쏘고 패고 두들겨 부수고, 터지고 무너지고 박살나고, 그렇게 진행됩니다. 쉴 틈 없이 전개됩니다. 게다가 장소도 여기서 저기로 왔다갔다 눈 돌아갈 시간조차 없을 지경입니다.
이번에는 지구 밖까지 나갑니다. 그것도 우주선이 아니라 자동차로 말입니다. 글쎄, 몇 세기 후에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게 가능해? 말도 안 되지만 그러려니 하고 보는 겁니다. 그런 거 따지면 이 영화 볼 수 없습니다. 아이들 만화 보듯이 아니면 공상과학 영화 보듯이 보면 됩니다. 아마도 제작 과정에서도 그런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성이나 현실성 같은 것은 당초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로지 보여주자 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관객 또한 무슨 새로운 볼거리를 기대하고 영화관에 들어오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무슨 뜨거운 감동을 찾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ㅋㅋ
여기 주인공들은 결코 죽는 일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이전에 죽은 동료까지 살아서 돌아옵니다. 아주 그럴싸한 구실을 댑니다. 역시 그러려니 하고 보아주면 됩니다. 그렇다 하니 그런 줄 알고 보면 됩니다. 참으로 다행(?)일 수는 없지만 중요한 주인공 한 사람은 실제 현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가족에서 물러섰습니다. 아주 예외적 사건이지요. 그런 일을 제외하면 주인공이 사라질 일도 바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리라 봅니다. 바뀌는 것은 처치해야 할 악인들의 집단입니다. 그들은 그 한 편에서 역할을 다하고 죽어 나가야 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악을 조종하는 주모자는 이번처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다음 편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지요. 관객은 그렇게 또 다음을 기대하고 자리를 뜹니다.
이번에 새로운 등장은 숨어있던 ‘도미닉’의 동생 ‘제이콥’이 나타난 것입니다. 두 팀의 대결은 뻔한 이야기고 그것을 좀 더 생동감 있게 만들자니 옛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리고 가족애를 더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자 악당으로 등장해서 변하여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의 무리들 가운데서 배반하는 일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형이 구해줍니다. 자신이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여태 소식도 없던 동생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하기야 친 형제이니 앞으로도 더 빛나게 활동하리라 기대합니다. 아마도 세상을 떠난 ‘브라이언 오코너’ 대신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시간이 넘는 지루함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뻔하고 오로지 달리고 부수고 터지는 장면이라 그게 그겁니다. 그래서 그 시끄러움 속에서도 졸음이 오더라 그 말입니다. 거참!! 나이 탓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 ‘분노의 질주 - 더 얼티메이트’(Fast & Furious 9 THE FAST SAGA)를 보았습니다.
<맨 온 렛지>
어쩌면 가까이서 함께 일한 사람이 이용하기 편하고 쉬울 수 있습니다. 한 장소에서 같이 일하지 않았다 해도 같은 업종이라면 그 일의 특성을 알고 있기에 역시 생소한 사람보다 이용하기 쉬울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용당한 사람의 배신감은 매우 클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도 일어날 법한 일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사회적 신뢰 유지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런 일을 당하면 그 배신감만큼 복수심이 커집니다. 이야기의 구성 상 흥미 촉발을 위해서 아마도 그런 설정을 할 수 있습니다. 보는 사람도 감정도 증폭됩니다. 감정이입이 되어 몰입하여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갑부들은 대인관계 폭이 매우 넓습니다. 특히 정치인들과 관공서 관련 인사들과 연줄이 다양합니다. 어쩔 수 없는 연결고리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에게 득이 될 것이니 말입니다. 아무리 정의 사회라고 하지만 인간관계를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눈감아주고 감싸주고 후원하고 지원해줍니다. 세상에 아무 도움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서로 돕는 일이고 서로 잘 먹고 잘살자는 식입니다. 문제는 남을 해코지하고 자기 이득만 챙기려하는데 있습니다. 함께 잘살자가 아니라 자기네만 잘살자는 것이지요. 자기네 배 불리려고 다른 한쪽에서는 피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더구나 모함하여 인생을 쪽박 차게 만들거나 가정을 풍비박산 나게 만든다면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호텔에 들어섭니다. 이미 예약된 사람이기에 프런트에서 친절히 안내합니다. 고층 전망 좋은 방으로 잡아 들어갑니다. 방에 자리 잡는가 싶더니 자기 손을 댄 모든 기구에서 지문을 지웁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는 창턱으로 나갑니다. 비좁은 창턱에 나가 창에서 조금 옆으로 벗어나 아슬아슬하게 섭니다. 아래가 까마득해 보입니다. 21층. 도로에 있던 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손짓으로 위를 가리킵니다. 저 위에 사람이 있어요. 한 사람, 두 사람,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모두 놀라지요. 자살하려는가? 그렇게들 생각합니다. 누군가 신고합니다. 조금 지나자 경찰차가 달려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주변으로 모입니다. 여기저기 탄식이 나옵니다.
경찰이 방으로 들어와 창문으로 내다보며 설득해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응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경관을 불러달랍니다. 그렇게 하여 전혀 모르던 두 전직 경관이 만납니다. 자살하려는 ‘닉 캐서딘’과 휴직중인 ‘리디아 머셔’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머셔는 얼마 전에 자살하려는 경찰을 막지 못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 트라우마로 휴직 중입니다. 어쩔 수 없이 불려왔습니다. 비슷한 경우를 또 당하고 있는 셈이지요. 어쩌면 보상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계산하여 닉이 부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닉의 정체를 몰랐다가 대화 중에 통보를 받습니다. 또 경찰이야?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피 중인 죄수의 신분입니다. 단지 결백을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어찌 알 수 있습니까?
다른 한편 닉의 동생 ‘조이’와 그 애인 ‘앤지’가 건너편 건물 깊숙한 곳에서 침투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호텔과 마주한 이 건물 모두 ‘데이빗 잉글랜더’의 소유입니다. 그 건물에는 잉글랜더의 보석금고가 있습니다. 데이빗은 자기가 고용한 경찰들과 짜고 매우 유명한 다이아몬드를 도난당했다고 신고하였습니다. 그 도적으로 닉이 붙잡혀 25년 형을 받았습니다. 닉은 모함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풀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족이 협력합니다.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시행합니다. 건물 밖에는 경찰이 깔려있고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TV 중계까지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삶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의도적인 자살극입니다.
그런데 머셔는 닉의 말을 믿어야 합니까, 흔히 죄수들의 거짓 결백 주장이라고 무시해야 합니까? 일단 죄인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살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믿음과 불신이 오락가락합니다. 일단 경찰 내사과에 사건의 경위와 닉이 말하는 경찰들의 사건 관련 이야기들을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한편 관련자들은 초조해집니다. 어떻게든 닉을 처리해야 합니다. 조이와 앤지는 일단 다이아몬드를 차지하는데 성공하지만 잉글랜더의 수하에게 붙잡힙니다. 또한 닉은 잉글랜더에게 붙잡힙니다. 잉글랜더는 빼앗긴 다이아몬드를 찾아 건물 밖으로 나가 옥상에 있는 닉에게 야유를 보내며 유유히 도망갑니다. 어찌 될까요?
도난당했다는 다이아몬드는 잉글랜더가 숨겨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도난 신고 후 보험금을 엄청 챙겼습니다. 고급 도둑이지요. 닉이 결국 그것을 붙잡아내고 해피하게 끝납니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사회적 법망이 아무런 힘도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맥이 빠집니다. 그런 경우를 주변에서도 봅니다.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맡기고 살아야 하나 두려워집니다. 각자도생이어야 하는가? 영화 ‘맨 온 렛지’(Man on a Ledge)를 보았습니다. 2012년 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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