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362]弘齋,正祖7절, 詠月[영월]
詠月(영월) 달을 읊다.
-正祖(정조)
水面初涵夜氣淸(수면초함야기청)
수면은 비로소 (천지의) 맑은 기운을 받아들이고
盈輪新月極高明(영륜신월극고명)
차고 둥근 갓 돋은 달은 매우 높고 밝은데
若窮所照歸吾化(약궁소조귀오화)
만일 환히 비추는 (달빛을) 우리의 덕화로 돌릴 다면
東漸應知過八紘(동점응지과팔굉)
동점하여 응당 온세상에 두루 미침을 알리라.
<註>
涵(함) : (물에) 젖다, 적시다, 잠기다, 담그다, 가라앉다,
夜氣(야기) : 밤 사이에 생겨나는 천지의 맑은 기운. 청명한 마음을 가리킴.
盈(영) : 차다, 가득차 넘치다, 족하다, 뜻대로 되다, 만월(보름달).
輪(륜) : 바퀴, 수레, 돌다, 주위, 둥근 것,
新月(신월) : 초생달, 음력 초하루, 갓 돋은 달.
極(극) : 다하다, 극(한계), 용마루, 들보, 매우, 북극성, 근본,
窮(궁) : 다하다, 궁구하다, 끝, 어려운 사람,
불행, 가난, 극도로, 지극히, 매우.
✶동점(東漸) : 왕화(王化)가 점차 동쪽으로 옮겨짐을 말한다
八紘 : 팔방(八方)의 멀고 너른 범위(範圍)라는 뜻으로,
온 세상(世上)을 이르는 말 四方과 四隅 .땅의 끝. 전 세계
《淮南子》에서는 구주(九州)의 바깥에는 팔인(八殥)이 있고,
팔인의 바깥에는 팔굉이 있다고 한다. 八殥=八埏-팔방의 끝
八區- 팔방의 구역 八極- 팔황 八荒-팔방의 끝. 먼 곳
八面-여덟 방면 모든 방면
過(과) : 지나다, 실수하다, 허물, 책하다, 들르다, 두루 미치다,
紘(굉) : 갓끈, 경쇠를 매다는 줄, 경계의 표시로 친 줄, 넓다,
八紘(팔굉) : 여덟 방위의 너른 범위란 뜻으로 '온세상'을 말함.
<작가 소개>
조선후기 제22대(재위: 1776~1800) 왕.
이름은 이산(李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뒤에 眞宗이 됨)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그리하여 즉위하자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홍상간(洪相簡)·
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하였다.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해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해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승정원·춘추관·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작성지화’의 명분 아래 기성의 인재를 모으고,
참상(參上)·참외(參外)의 연소한 문신들을 선발,
교육해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우문지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곧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
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으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강고하게 세력을 구축하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해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해,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그는 즉위 초부터 문풍이 세도(世道)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쇄신을 통한 세도의 광정(匡正)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내건 것은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수이자, 탕평책의 구체적인 장치였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천하동례(天下同禮)’를 주창하면서 신권(臣權)을 주장하는
노론 중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 자제들은 북학사상(北學思想)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학자적 소양은 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의
종장(宗匠)인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해 그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런데 검서관들의 신분은 서얼로서, 영조 때부터 탕평책의 이념에
편승해 ‘서얼통청운동(庶蘖通淸運動)’이라는 신분상승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임용은 서얼통청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조처이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와 같이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해 문운(文運)을
진작시켜나갔다.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해
중인(中人)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하였다.
정조대의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일컫기도 한다.
문예부흥이 가능했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조선중화의식(朝鮮中華意識)이 고취되고,
이에 따른 북벌론(北伐論)의 대의명분 아래 조선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예치(禮治)의 실현이라는 당면과제를 국민상하가 일치단결해 수행해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자긍심과 조선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고유문화현상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문화의 제반 분야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그림에서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국화풍(國畫風)’, 글씨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국서풍(國書風)’이 그것이다.
이는 조선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바로 이러한 축적 위에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이른바 조선 후기의 도미적성관(掉尾的盛觀)으로 파악되는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정치문제였던 서학(西學)에 대해 정학(正學)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정조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문제에도 고심하였다.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해 사면해야 하는 갈등을 겪었다.
또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다.(고종 때 장조로 추존됨) 또한
양주 배봉산(拜峰山) 아래에 있던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해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가
다시 융릉(隆陵)으로 올렸고, 용주사(龍珠寺)를 세워 원찰(願刹)로 삼았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도를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완수하였다.
조선이 성리학이념을 채택하고 ‘우문정치(右文政治)’로 표현되는
문화정치를 표방한 지 400년만에 명실 부합한
전형적인 학자군주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弘齋全書)』로
간행된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다.
학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탁월한 학문적 능력으로
군사의 위상을 확보하여 문화국가를 통치한 것이다.
1800년 6월에 49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 언덕에 묻혔다가 그의 비 효의왕후가 죽으면서(1821)
융릉 서쪽 언덕에 합장되어 오늘날의 건릉(健陵)이 되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하=홍재전서 제1권 / 춘저록(春邸錄)
弘齋全書卷一 / 春邸錄一○詩
詠月[영월]-달을 읊다
弘齋,正祖
水面初涵夜氣淸。
盈輪新月極高明。
若窮所照歸吾化。
東漸應知過八紘。
수면에는 막 맑은 야기를 함축했는데 / 水面初涵夜氣淸
가득 찬 둥근 새 달은 너무도 높고 밝아라 / 盈輪新月極高明
환히 비춘 달빛을 몽땅 우리 교화로 돌린다면 / 若窮所照歸吾化
동점이 응당 팔방으로 넘어갈 줄 알겠네 / 東漸應知過八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