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래요/정재학
저녁 굶고 술 마셔요 늘그래요 TV는 계속 짖어대요 혼자 두어도 잘 놀아요 가끔은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흘러요 보지 않아도 TV를 끄지 않아요 그때의 정적이 싫거든요 시월이 오면 손에서 땀이 흘러요 종이가 찢어져 편지조차 쓸 수 없어요 늘 그래요 그녀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어요 생각해 보니 연락이 안 온지 꽤 되었어요 그냥 무덤덤해요
내일은 영화나 한 편 보려고 해요 늘 그래요 웃다가 내가 왜 웃었는지 까먹어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한참을 생각하다 그냥 덮어두기로 했어요 늘 그래요 집에 들어와 보니 피아노가 부서져 있었어요 피아노 속에는 묵은 기침이 가득하고 책에서 쏟아져 나온 글자들이 바닥에서 꿈틀대고 있어요 눈썹에서 물감이 묻어 나와요 나는 허공에 검은 물감을 풀어 넣어요 늘 그래요 회색 물방울들이 날아다니며 기타 줄을 건드려요 꿈은 언제나 명확해요 사람들은 왜 자신이 하나의 꿈이라는 걸 믿지 않을까요 가방에서 잉크가 새고 있어요 옷이 더렵혀졌어요 사람들이 모래처럼 휘날려요 늘 그래요
<시 읽기> 늘 그래요/정재학
정재학의 시는 쉬르레알리즘의 시입니다. 그는 물리적 리얼이즘이 세계도, 사회적 리얼리즘의 문법도, 정신적 리얼리즘의 규범도 뛰어넘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육안에 의지하여 그 존재의 테두리와 이름을 부여받고 있는 나무, 바위, 토끼, 바다, 기차 등과 같은 물리적 세계의 표면을 해체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사회적 존재임을 주장하며 이들에 붙여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의미나 체계도 해체합니다. 이 모든 것은 삶의 방편으로 만든 일시적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관념의 유혹에 의하여 삶가 세계 속에 끼어드는 사상, 가치, 이념 등도 해체합니다. 이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리얼리즘의 세계가 표피성, 경직성, 조작성, 폭력성, 억압성 등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러한 세계를 만들며 그것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교육받습니다.
앞의 단락에서 한 말을 달리 말해봅시다. 인간들은 그들의 삶과 세계가 하나의 완벽한 문장이나 글처럼 만들어지기를 원합니다. 생이 일종의 문장쓰기라면 그들은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긴 문장을 비문이나 오문이 되지 않도록 말끔하게 만들어보고자 노력합니다. 어디 이런 긴 문장쓰기에서뿐이겠습니까. 하루가 하나의 문장쓰기라면 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의 모든 일들이 바르고 멋진 문장으로 완결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흠 없고 멋진 문장을 쓰기 위해서 세상이 인정한 단어와 규범과 의미를 매순간 선택하고 그것들을 주어와 동사가 맞아야 하는 문장처럼 옆으로 이어붙이고자 합니다. 그런 점에서 리얼리스트들은 빈틈없는 생의 문장을 어디서나 구사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정재학은 위 시에서 실토합니다. 나는 비문이나 오문이 없는 완벽한 문장쓰기를 나의 삶 속에서 단 한순간도 제대로 이룩해낼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문법에도 맞고 수사학도 그럴듯한 문장을 쓰고자 마음을 먹는다 하더라고 매순간 작동하는 방심과 우연과 욕망과 일탈에의 충동에 의하여 생은 비문이 되거나 오문이 되어버린다고 말입니다. 그런 비문과 오문을 못 본 척, 나 자신이 아닌 듯, 덮개로 쓱 덮어버리고 위장된 얼굴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삶의 리얼리티를 제대로 보여주는 정직한 자세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삶의 리얼리티는 리얼리즘 속에 있다기보다 쉬르레알리즘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술어가 맞는 문장을 쓰기 위하여 작문시간을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장쓰기는 늘 어려운 일이라서 평생 동안 바른 문장을 쓰지 못하는 사람도 허다하고, 비록 문장가라 할지라도 온전한 문장을 시종일관 써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글의 문제이고, 말의 문제로 와보면 우리들이 구사하는 말의 대부분은 비문과 오문 덩어리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말하는 것을 글로 받아 적으면 도대체 문장이라곤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늘 비문과 오문을 쓰며서 삽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문장과 문장 사이의 그 어머어마한 비약, 모순, 우연성 들을 스치며 그런 것이 없는 듯 그냥 삽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정확한 문장쓰기는 의지와 편리와 문명과 훈육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초자아의 행위입니다. 그와 같은 초자아의 행위는 일면 유익하지만 그것이 인간과 세상을 강압적으로 지배하여 초자아우월주의 혹은 초자아중심주의에 빠지게 되면 우리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신경증을 앓고, 자연스러운 삶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위 시에서 정재학은 비문과 오문으로 채워진 그의 삶을, 아니 우리들이 생을 ‘낯설게’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이 방학 때마다 만들어 책상 앞에 붙이는 어린이의 하루 일과표처럼 그렇게 계획적으로 진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일과표 속의 일과 일, 사연과 사연, 시간과 시간 사이에 오류나 착오, 빈틈이나 여백이 부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는 위 시에서 알려줍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방학을 주어와 술어가 맞는 완벽한 문장처럼 만들고자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 짜놓은 생활계획표를 보고서 우리는 얼마나 숨 막혀 했는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였을 때(항상 지키지 못하지만), 방학이란 기간이 쓰다 만 문장처럼 된 것을 보고 우리는 얼마나 커다란 죄의식과 상처를 받곤 하였는가 하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숭고하여 방학도, 생도, 나날도, 그 무엇도 완벽한 문장쓰기처럼 되기를 소망하지만 그것은 숭고한 의지의 작용일 뿐,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위 시의 앞부분에 나오는 저녁을 굶고 술을 마시는 행위부터, 맨 뒷부분의 사람들이 모래처럼 휘날리는 것으로 보인다는 고백에 이르기까지의 각각의 장면뿐만 아니라 그 장면들이 이어지는 과정엔 모두 오문과 비문같이 우리가 보기 싫어하는 것이나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이 끼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오문과 비문 같은 것들은 우리들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것들을 우리들 자신이라고 인정할 때 우리의 모든 문제가 보다 나은 해결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정재학은 위 시에서 “늘 그래요”라는 말을 리드미컬하게 반복하며 오문과 비문 같은, 그러나 솔직한 우리들의 일상을 태연하게 보여줍니다. 그가 보여준 모습들은 사회의 전면에 부각되어 칭송받는 것들을 아니지만, 언제나 우리 속에 있었던 우리들이 거울이자 동행자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늘 그래요”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위 시의 문채文彩로 작용하는 이 말을 저는 ‘우리는 늘 그렇게 오문과 비문으로 되어 있어요. 그것이 우리들이에요’라고 해석합니다.
구체적으로 위 시에 등장하는 오문과 비문이 중첩, 충돌, 공존, 나열, 결합의 실상을 적어봅니다. 저녁 먹고 술을 마십니다. TV는 아무도 보지 않는데 혼자서 강아지처럼 짖어댑니다. 보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TV인데 정적을 완화시켜줍니다. 시월이 되면 무슨 일인지 손에 땀이 흘러 종이가 찢어지니 그 위에 편지를 쓸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겼는데도 그냥 무덤덤합니다. 그냥 영화나 한편 보려고 합니다. 방금 웃었는데 왜 웃었는지 그 이유를 잊어버렸습니다. 집에 있는 피아노 속에는 여태껏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환상처럼 글자들이 책에서 쏟아져 나와 뒹구니 어지럽습니다. 눈썹에서 묻어나오는 것 같은 물감이 허공으로 풀어지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삶은 계획표처럼, 의지대로, 교육받은 대로, 그렇게 말씀히 진행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갑자기 두통이 오고, 갑자기 아이가 아프고, 갑자기 권태롭고, 갑자기 흥분하고, 갑자기 죽고 싶고, 갑자기 살고 싶고, 갑자기 슬프고, 갑자기 유쾌하고, 갑자기 비가 오고, 우연히 이 시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주의의 체제 속에 태어난 것이 우리들의 실상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뒤얽혀 만들어내는 우주와 생의 드라마 속에서 우리는 못난 문장들을 이리저리배치하다 주어진 생을 거의 다 바칩니다. 그러나 비탄할 일은 아닙니다. 바른 문장, 멋진 문장에의 꿈으로 인해 생에 긴장감이 넘치고, 그런 긴장감 속에서 나름대로 비문과 오문일지라도 진실한 문장을, 그리고 자연스러운 문장을 쓰면서 그것이 나 자신이라고 편안하게 인정하고 드러내며 사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모습이니까요.
정재학의 시는 편견으로 가득한 세상이 요구하는 완벽한 문장 같은 삶에 대한 우리들이 콤플렉스를 이완시켜줍니다. 그가 반복하고 있는 “늘 그래요”라는 위 시의 말처럼 우리들이 삶도 늘 그렇게 오문과 비문을 오가며 이루어지고, 실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그러므로 오문과 비문을 오가며 이루어지고, 실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그러므로 오문과 비문을 포용하며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보려고 애쓰는 것이 사실은 아주 소중하다는 것을 위 시는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문과 비문을 바른 문장이라고 하는 것과 대등하게 인정하기까지 참으로 적잖은 아픔과 세월이 필요합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