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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사(仙槎寺)
김종직(金宗直)
내 우연히 선사사에 이르니 / 偶到仙槎寺
바위는 쓸쓸한데 소나무 계수나무에는 가을 깃들었다 / 巖空松桂秋
두루미는 신라 시대의 일산을 펴고 / 鶴飜羅代蓋
용은 부처 하늘의 공을 찬다 / 龍蹴佛天毬
보슬비 내리는데 중은 누더기 깁고 / 細雨僧縫衲
차가운 강물에는 길손이 노를 젓네 / 寒江客棹舟
외로운 구름 조각 어지러운 풀을 띠고 / 孤雲書帶草
바람 소리와 함께 못 머리에 가득 찼다 / 獵獵滿池頭
-속동문선 제6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9
〈
선사사에서(仙槎寺)〉
김종직(金宗直
偶到仙槎寺 우도선사사
우연히 선사사에 이르니,
巖空松桂秋암공송계추
암자는 비었는데 소나무 계수나무 가을을 맞았네.
鶴翻羅代盖 학번나대개
학은 신라 때의 일산을 뒤집고,
龍蹴佛天毬 용축불천구
용은 부처님의 공을 차네.
細雨僧縫衲 세우승봉납
가는 비 내리니 스님은 누더기를 깁고
寒江客掉舟 한강객도주
차가운 강물에 나그네는 배를 젓고 있네.
孤雲書帶草 고운서대초
최고운 선생님 책을 묶었던 풀이,
獵獵滿池頭 렵렵만지두
살랑 살랑 온 못 주변을 가득 체우고서 나부끼네.
*선사사(仙槎寺): 출전 《동쪽나라의 시문선집 속집》 권 6. 《점필재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음. 형식 5언 율시. 각운 秋, 毬, 舟, 頭 하평성 우(尤) 운. 이 절은 대구의 하빈 남쪽 마천산(馬川山, 일명 錦城山)에 있는데, 암자 곁에 최치원이 벼루를 씻던 못이 있다. 《동람》 권 26 참조.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조선 초기의 문신. 호는 점필재(佔畢齋). 정몽주, 길재 등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로부터 수학, 뒷날 사림(士林)의 중심이 되었으며, 문학과 사학에도 두루 능통하였음. 중국의 항우가 그가 모시던 임금 의제를 죽이 것을 비난하는 글[弔義帝文]을 적어 세조가 단종을 죽인 것에 비유를 하였는데, 이 글 때문에 그는 죽은 뒤 관을 파내어 자르는 형벌을 받았고, 사림파에 속하는 그의 제자들도 일망 타진되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무오사화라고 한다. 이 때문에 그의 저술이 후세에 다 전하지는 못하나, 그의 시문집인 《점필재집》, 한국 한시선집인 《청구풍아》, 편저인 《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하고 있다.
*암공巖空: 이 일대의 오랜 역사와 전설이 다 공허게 되었다 비유일 수도 있음. 당나라 손적孫逖: 〈배사마님이 칭심사 절을 읊으신 시에 화답하여和崔司馬登稱心山寺〉: “정자에 기대어 일망무제함을 바라보니, 찾는 산 모두 큰 허공에 무쳤다네. 동굴은 비었는데 우임금의 자취 아득하고, 바다 고요한데 진시황 때 지나간 일 남았는가 살펴보네倚閣觀無際, 尋山盡太虛. 巖空迷禹跡, 海静望秦餘
*송계松桂: 소나무와 계수나무. 당나라 한유(韓愈) 〈현령의 집무실에서 책을 읽다縣齋讀書〉에 “산수 좋은 고을의 원으로 나와서, 소나무와 계수 숲에서 책을 읽누나出宰山水縣, 讀書松桂林”(《韓昌黎集 卷4》)
*학번나대개(鶴翻羅代盖): 다음 참고에서 인용한 《시화총림》의 번역본과 대조하면, 이 구절과 다음 구절에서 네 글자나 이 원문과 차이가 있으나, “바람”과 “비” “꽃”보다는 “학”과 “용”과 “공”이 의미는 연관이 있으면서도, 심상은 더욱 구체적이므로 그대로 둔다. “개盖”자는 “개蓋”자와 같은 뜻으로 통용된다.
*학번鶴翻: 학이 아래로 위로 날아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거나, 거꾸로 배를 뒤집어 나는 것. 당나라 백거이白居易 〈희 깃털 부체白羽扇〉: “쏴아 쏴아 하는 바람 소리는 소나무에서 울려나오는 음향과 같고, 흔들흔들 나부끼기는 모습은 학이 하늘에서 뒤척이는 것과도 같구나䬃如松起籟, 飄似鶴翻空”
*나대개羅代盖: 신라 시대의 보개(寶蓋). 개는 보개니, 곧 보옥으로 장식한 천개(天蓋)로 불, 보살, 강사(講師: 강의를 주관하는 교수), 독사(讀師: 강사를 도와서 독경하는 사람) 같은 높은 사람이 앉는 자리 위에 쳐놓는 일산(日傘) 같은 것.
*용축龍蹴: 당나라 승려 교연皎然 〈장백영의 초서를 노래함張伯英草書歌〉: “놀란 용이 차고 밟으니 날아갔다가 떨어지려하고, 다시 옅보니 온 등림의 꽃 아침에 다 떨어진 듯하더라驚龍蹴踏飛欲堕, 更覩鄧林花落朝”
*불천(佛天): 불교 신자들이 부처님을 숭배하고 존중히 여기기를 마치 일반인들이 하늘을 숭배하는 것 같이 한다하여 이렇게 이름. 《불교사전》 p. 338.
“구”는 공인데 여기서는 꽃봉오리를 말한다. 《법화경》 〈서품〉(序品)에 “하늘이 만타라화와 마화 만타라화, 만수사화, 마화 만수사화를 내려서 부처님과 여러 대중에게 뿌렸다”는 말이 있음.
* 서대초(書帶草): 잎이 길고 질기기 때문에 책을 묵는데 사용한 풀. 후한 말기의 유명한 경학자 정현(鄭玄)의 문하생들이 이 풀로 책을 묵었다고 함. 송 소식(蘇軾)의 〈문동(文同) 님의 양천의 정원과 못․ 독서하는 난간(和文與可洋川園池․書軒)〉: “정원 아래 이미 책 묵는 풀 생겨나니, 사또께서 아마도 큰 학자 정현 선생님이 아니신지요?”(庭下已生書帶草, 使君疑是鄭康成)
*엽엽(獵獵): 바람소리. 《중국고대명문선집(文選)》에 수록된 포조(鮑照)의 〈수도로 돌아가는 도중에 지은 시(還都道中作詩)〉 “뭉개 뭉개 저녁 구름 일어나고, 설렁 설렁 저녁 바람 거칠어지네.”(鱗鱗夕雲起, 獵獵晩風遒)
【참고】 점필재의 시를 우리 나라에서 최고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지나친 칭찬이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매양 그 시에
가랑비 내리는 속에 중이 장삼을 꿰메고, 細雨僧縫衲
싸늘한 강에는 길손이 배를 저어간다. 寒江客棹舟
를 외우면 그 정교하고 세밀한데 탄복하지 않을 수 없고,
바람에는 나대개가 펄럭이고, 風飄羅代蓋
빗발은 불천화를 차낸다. 雨蹴佛天花
를 외우면 그 호방하고 원대한데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신흠(申欽)의 《밝은 창가에서 가볍게 나누는 이야기(晴窓軟談)》, 《역대시화총림 상》(홍찬유 역, 통문관, 1993) p. 558.
이 글 맨 앞의 번역에서는 제 7행에 나오는 “고운”이라는 말을 모두 “외로운 구름”이라는 말로 번역하여 두었는데, 이 선사사라는 절과 최고운(치원) 선생과 관련이 있다는 전설을 미쳐 조사를 하여 알아보지 못하고서 번역을 한 것이다.
제목으로 삼은 선사사라는 절 이름에 나오는 “선사”라는 말은 원래 다음과 같은 전고를 가진 말이다.
《운부군옥(韻府群玉)》 권6에 “요(堯) 임금 때 큰 뗏목이 사해(四海)에 떠다니는데 그 위에 별과 달처럼 빛나는 것이 있고 12년 만에 한 번 주천(周天)한다. 이를 관월사(貫月査) 또는 괘성사(掛星槎)라 하는데 신선이 이 뗏목의 위에 머물렀다.” 한다. 일반적으로 사행(使行)을 선사(仙槎)라 하여 뗏목을 타고 은하수로 가는 것에 비유하는데, 이는 한(漢)나라 때 장건이 대하국(大夏國)에 사신 갔다가 뗏목을 타고 황하(黃河)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은하수(銀河水)에 이르렀다는 전설(傳說)에서 유래하였다. -고전db 주석정보
선사사라는 절은 검색을 하여 보니 대구 근처의 낙동강 유역에 있는데, 아마 강물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이라서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 같고, 그 주변의 산을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마천산에 이 절이 있다고 하였으나, 옛날 책들을 보면 대구, 달성에 선사산이라고 하는 산이 있다는 기록도 더러 있는 것을 보아서 아마 이 절 부근에 있는 산을 “선사산”이라고도 부르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지만 자세한 것은 더 조사를 하여보아야 할 것 같다. 어찌되었건 산이나 절 이름 치고는 “선사”라는 말이 붙어, 매우 신비하고도 멋지게 보이는 것 같다.
우연하게 선사사에 이르고 보니,
암자는[巖] 텅텅 비었는데[空] 소나무, 잣나무에만[松柏] 가을철이 무르익었구나[秋].
“암”이라는 글자에는 몇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뜻은 “물을 끼고 있는 지세가 험준한 골자기”이다. 그 다음 뜻은 대개 그러한 곳에 있는 “바위굴” 이고, 그 다음 뜻은 큰 건물에 딸린 “조그마한 건물”이다. 사실 이 시에서 이 글자를 번역할 때, 이 중에 어느 단어로 번역한다고 하더라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최고운 선생이 여기 와서 공부하던 이야기가 나오니까, 앞 뒤가 서로 호응하는 것으로 보려면 아무래도 “암자” 정도로 번역하여 주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고나면 그 다음에 나오는 소나무와 잣나무도 주석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한유의 시의 전고와도 약간 맞아 들어간다. 암자는 이미 비었는데, 그 분이 독서를 하시던 소나무와 잣나무는 여전히 가을을 맞이하였지만 조금도 변함이 없이 푸르기만 하구나. 마치 고운선생의 맑은 정신을 생각나게 하듯이…
지금 다시 보니, 제 3행에 나오는 “학”을 이 시인(점필재)이 이 시를 쓸 때 눈앞에 날아다니고 있는 학으로 본 것이 아니라, 절간의 어디에 신라 때 학문을 강의하던 법사의 머리위에 처진 일산 그려진 학의 모습을 돌에 조각하여 놓은 것으로 본 것이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용도 역시 조각된 용으로 보아야만 한다. 지금은 그러한 조각들이 이 절에 만들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옛날에는 일어났던 것으로 상상하여 보는 것이 더 신비하게 느껴질 것이다. 비록 번역문에서는 동사를 현재형으로 사용하더라도… 이 한 연에 대하여서는 위에서 읽은 시화에서 “호방하고 원대한데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하였다.
점필재 선생님은 조선 전기의 유학자 중에서 “오현” 중의 한분으로 조선전기의 정국에서 훈구파와 사림파와의 대립에서 사림파의 큰 줄거리를 이룩한 분이다. 그런데 지금 볼 수 있는 그의 저술은 대부분이 시이다.
《국역점필재집》은 시집(詩集) 23권, 문집(文集) 2권, 이준록 2권, 연보 합 9책으로 되어 있다. 시집 권1~권23에는 각체(各體)의 시가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으며, 각 권에는 대략 40~60제(題)의 시가 실려 있어 모두 1,076제(題)나 된다. 이처럼 문집의 대부분이 시로 구성되어 있어 점필재가 시문에 주력한 문장가임을 알게 한다. 이 때문에 퇴계(退溪)는 "점필재가 시문(詩文)에 주력하였는데 전아하여 도에 가까웠다."[-《퇴계집》권2, 〈閒居次趙士敬…十四首〉의 주]라고 비평을 하였는데, 이는 성리학에 대한 점필재의 저술이 남아 있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점필재의 시대는 아직도 성리학보다는 사장(詞章)이 더 성했던 시기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한국고전db 점필재집 해제에서 몇 자 수정 인용.
지금 풀이하고 있는 이 시는 점필재의 대표적인 명작의 하나이지만, 오히려 위에서 본 점필재 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오직 《속동문선》에만 수록되어 있다. 이로 보면 위에서 해제하고 있는 책에도 이미 빠진 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분이 사후에 참화를 당한 뒤에 한 동안 그의 글을 보는 것 조차 처벌을 면치 못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하니까 그렇게 밖에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우리나라의 여러 시화에도 언급이 되어 있지만, 청나라의 저명한 학자인 왕사정王士禎의 《지북우담池北偶談》이란 책에 우리나라의 이름난 시를 소개한 글[朝鮮採風錄]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 글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강희(康煕) 17년(1678, 숙종4)에 손치미(孫致彌)가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가 조선의 시를 채집하여 《조선채풍록(朝鮮採風錄)》을 찬하였는데, 모두 근체시(近體詩)였다. 이제 그 가운데서 읊을 만한 것을 가려 뽑아 여기에 대충 실었는데, 임제(林悌)의 시 1수, 백광훈(白光勳)의 시 2수, 오시봉(吳時鳳)ㆍ김굉필(金宏弼)ㆍ조욱(趙昱)ㆍ정작(鄭碏)ㆍ성운(成運)ㆍ백광면(白光勉)의 시 각 1수, 김종직(金宗直)의 시 2수, 기매(奇邁)ㆍ정도전(鄭道傳)ㆍ어무적(魚無迹)ㆍ권응인(權應仁)의 시 각 1수, 조희일(趙希逸)의 시 2수, 김류(金瑬)ㆍ이달(李達)ㆍ정사룡(鄭士龍)ㆍ정지승(鄭之升)의 시 각 1수, 최경창(崔慶昌)의 시 2수, 유영길(柳永吉)ㆍ김질충(金質忠)ㆍ임억령(林億齡)ㆍ최수성(崔壽峸)ㆍ김정(金淨)ㆍ정지상(鄭知常)ㆍ설손(偰遜)ㆍ이식(李植)ㆍ권우(權遇)ㆍ허균(許筠)의 시 각 1수, 박미(朴瀰)의 시 6수가 그것이다.-고전db의 《해동역사》에서 인용
이 《지북우담池北偶談》 책이 전자판 《사고전서》에도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의 여러 시와도 비교하여 볼 수가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문구를 거기에서 검색하여 보니 “客掉舟”라는 표현은 점필재 선생의 이 시 이외에는 중국에서도 지금까지 사용한 사람이 없었고, “僧縫衲”이라는 표현은, 점필재 보다가는 조금 앞에 살았던 명나라 때 한 사람이 사용한 예[병부상서를 지낸 徐有貞의 《武功集》 〈游玄墓山聖恩禪院〉]가 하나만 보일 뿐이다.-이럴 경우 점필재가 이미 그 명나라 사람의 그 시구를 본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좀 더 검토하여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여기서 이야기되는 이 두 말이 들어가는 두 시구는 앞의 참고에서 읽은 바와 같이 “정교하고 세밀한데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명구들이라니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러한 좋은 말들을 그 분이 독창적으로 만들어 사용한 것 같기도 하니…
마지막 연은 앞 구와 뒷 구가 서로 엉겨붙은 연면구 인데, 앞구절의 “서대초”라는 말이 다음 구절의 주어가 되고 있다.
고운 선생이[孤雲] 책을 묶었던 풀만이[書帶草],
설렁설렁[獵獵] 온 못 주변을 덮었구나[滿池頭].
서대초라는 말의 전고와 관련이 있는 정현은 후한 말기의 이름난 경학자로 진시황 때 허물어졌던 유가 경전 연구를 집대성한 불세출의 대학자이며, 또 인품도 매우 고상하여 황건적들이 그가 살던 고을은 침범하지 않았다는 미담이 전하는 정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한국에서의 최고운 선생의 위치를 이렇게 높이 추앙한 것이다. 이렇게 이름난 곳에 그의 자취는 간 곳이 없고, 다만 그 때도 자라고 있었던 무정한 풀만이 지금도 여전히 이 선사사의 못 주변을 덮고 있구나.
시 한 수 안에서 호방하고 원대한 부분도 있고, 정교하고 세밀한 부분도 있으니, 이 시는 명작이 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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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 차례 수정게재
선생님 모쪼록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