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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6. 묵상글 ( 연중 제13주일. - 예수님을 닮은 삶.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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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6. 연중 제1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닮은 삶」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한 한 주간되시길 빌며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기쁨충만 하시길 희망합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길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에게 정복당한 북왕국 이스라엘에 정착한 토착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짐산에서 하느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자기들만의 성전을 그곳에 건립하였습니다. 이 믿음이 장벽이 되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다인 사이에는 적대감으로 인한 싸움도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냉대를 받으시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사실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지냈는데 그들의 태도는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먼 이들을 보게 해 주시고,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의 생명을 파괴하러 오지 않으시고 구원하러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 안에서 원수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 있는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보면 오해도 있고, 모함과 시기질투, 미움과 싸워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겨내는 승리의 길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하시며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하는 마을을 피하여 다른 마을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무와도 맞서지 않고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목적지를 향합니다. 그의 목적지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누가 반대를 하든 상관없이 당신의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가야할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마음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에 직면할 때 예수님의 처신인지? 아니면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격하게 반응하고 있지 않은지? 사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통해서 내 마음의 너비와 폭, 깊이를 보게 됩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은총의 도구입니다. 개구리는 개굴개굴 울다가도 위협을 느끼면 소리를 멈춥니다. 안전하다 싶으면 또 울지요.. 강아지는 먼저 짖어대고 그 다음에 자기에게 유익할 것 같으면 고리를 칩니다. 우리 신앙인의 처신은 일단은 침묵하고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논어의 ‘선진’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공자께 여쭙니다.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곧장 하다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는냐?는 말씀입니다. 제자 ‘염유’가 똑같이 묻습니다.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었으면 곧장 해야지!” 이에 ‘공서화’가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는 까닭을 묻자 공자께서 대답합니다. “염유는 물러서는 사람이라 나가게 했고, 자로는 나서는 사람이라 물러서게 했다.”
참 스승은 상대에 따라 다르게 대답하십니다. 눈높이를 맞춰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길을 떠나고 냉대를 받으며 가정이라는 안전한 처소조차 없이 지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이는 말합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시며 우선순위에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하는 이에게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시며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서로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게 얘기하고 있습니까? 자녀에게, 이웃에게 내 것을 강요하고 가르치려는 욕심을 부리지는 않나요? 자녀들도 큰 아이, 작은아이가 받은 탈랜트가 다릅니다. 상대를 위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먼저 챙기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어른과 어린이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시죠? 어른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는 다른 어떤 일에도 우선합니다. 주님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은 입으로 선포되기도 하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의 모범, 표양을 통해 선포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삶’, ‘육을 거스르는 삶’을 통하여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당부하셨습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 왜 그러셨을까요? 철저한 ‘무소유’는 가진 것으로 행세하는 세상에서 세상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한 눈 팔지 말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다른 헛된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해야 할 일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은 정처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이미 지나간 일에 매여 있어도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를 자꾸 돌아보아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마침표를 찍은 것에 대해서 물음표를 달지 마십시오. 그분께는 오직 ‘지금여기’가 유일한 삶의 자리였습니다. 우리도 약속된 천상의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여기’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천상은 여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여기서 열립니다. 그러므로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드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라티아5,13).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사랑을 사는 나의 처신에 따라 복음이 선포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서로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제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는 기적을 하고 예수님께 와서 자랑을 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10,17).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사랑의 사람으로 하늘에 기록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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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사람은 넘어지면 앞을 보나
지는 사람은 넘어지면 뒤를 본다.
이기는 사람은 눈을 밟아 길을 만들고
지는 사람은 눈이 녹기를 기다린다.
이기는 사람의 호주머니에는 꿈이 들어있고
지는 사람의 호주머니에는 욕심이 들어있다.
이기는 사람이 잘 쓰는 말은 ‘다시 한 번 해보자’이고,
지는 사람이 잘 쓰는 말은 ‘해봐야 별 볼일 없다.’이다.
이기는 사람은 걸어가면서 계산하지만
지는 사람은 출발하기 전에 계산부터 한다.
이기는 사람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지만
지는 사람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이기는 사람은 행동으로 말을 증명하지만
지는 사람은 말로 행위를 변명한다.
이기는 사람은 인간을 섬기다가 감투를 쓰지만
지는 사람은 감투를 섬기다가 바가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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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6. 연중 제1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6.24. 묵상글 말미
“다음 주일까지 어쩌면 월요일까지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다음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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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6. 연중 제1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6월 26일 연중 제13주일 고 도미니코 ofm
오늘은 연중 제13주일 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자유의 사람이 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2독서의 갈라티아서는 자유의 참된 의미를 말해 주고 있는데 바오로는 세심하고 완벽한 논거를 갖추어 지신의 사도직과 자신이 전한 자유의 복음을 수호하고자 합니다. 적대자들의 공격과 갈라티아 교회 신지들의 어리석음 앞에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았음에도 바오로는 절망하지 않고,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자유를 선포하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갈라티아서를 그리스도교의 ‘자유 헌장’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서를 통해서 죄와 죽음,유다이즘과 이교도 관습으로부터의 자유를 설파합니다. 바오로는 육체의 욕정에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란 자유인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자유의 참 모델이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근본인 이웃 사랑을 몸소 보여 주심으로써 사랑의 자유를 제대로 실천하며 사신 분이십다. 그러기에 자유의 완전한 의미는 주님의 영안에서만 완성됩니다. 유다인이냐 이방인이냐 할례를 받느냐 안 받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참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감으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참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늘 마음안에 주님께 대한 그리움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동경, 인식, 사랑 등 인간 존재가 행하는 모든 존재 실행의 의미 중심에는 그리스도와의 명확하고 자유롭고 전인적인 만남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육적인 것에 대해 죽는 순간 비로소 인간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됩니다. 육적에 대한 죽음속에서 인간의 자기의 고유한 본질을 스스로 자유로이 결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구원에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됩니다.
육적으로 죽는 순간 인생의 두차원이 교차됩니다. 외적인 것의 사라짐은 모두 내적인 것의 성장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육적인 자기 버림 속에서 참된 자유인으로 거듭 태어납니다. 육적으로 죽는 순간 외적인 것이 완전히 상실되는 순간 본연의 내적인 자유의 세계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적인 것에 대해 죽는 순간에 인간이 육적인 존재에서 본래의 존재 상태인 영의 사람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의미 합니다. 인간이 육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게 되면 순간적으로 자기 본래의 모습에 눈뜨게 됩니다. 그 사람은 온전히 빛과 광명으로 채워집니다. 순식간에 영적인 눈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알아듣게 됩니다. 자신의 삶의 사랑과 자유라는 하나의 전체로 집약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결국 육적인 죽음속에서 인간은 궁극적인 성숙에 이릅니다. 육적인 죽음의 순간 인간은 모든 것을 알고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 가운데 궁극적인 결단을 자유로이 내릴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 결단 속에서 인생은 가장 분명한 상태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매일 매일 육적으로 죽고 주님의 영안에 자유를 누리는 참 자유인으로 거듭나는 한 주간 되시길 빕니다.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6월 성령 열매성월 4주간 사랑 / 평화✝️
금주간 성서읽기 로마 1-7장
✝️ 1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다로카(Daroca)의 피묻은 여섯 개의 성체
스페인 - 1939년 2월 23일
주임신부는 경건하고 진지한 자세로 빠르게 산 위로 올라갔고 몇 분의 사제들과 약 백명 가량의 남녀신자들, 그리고 아이들이 사제의 뒤를 따랐다. 밤바람이 이따금씩 우리의 춧불을 꺼뜨렸지만, 사람들은 도우려는 마음으로 불을 새로 붙여 주려고 서로 애썼다.
두 명의 젊은 농부는 도중에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한 광주리의 초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춧불을 비추는 데도 불구하고 어디로 발을 디뎌야 할지 거의 볼 수 없었다.
자정이 지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급히 산을 올랐기 때문인지 우리는 땀을 흘렸다. 약 세 시간 정도 걸어가고 나서 우리는 작은 산의 꼭대기에 도달했다. 성직자들은 오래되고 존귀하며 화려한 작은 성당 안에서 성광을 대제단 위에 올려 놓았다. 성가를 부르면서 공동으로 성체를 경배하기 시작했다. 한 시에 성직자들은 일부 신자들과 함께 도시로 돌아갔다. 그 젊은 부인은 유감스럽게도 어린 아이들 때문에 자기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나에게 설명하며, 여섯 시에 새벽 미사에 참례하러 되돌아 오겠다고 했다.
매 시간마다 성체 앞에 있는 남자들은 서로 교대를 했다. 그들은 감실 바로 앞에다 무릎꿇고 앉는 좌석을 놓았다. 그 자리에서 헌신적인 젊은 농부툴과 고용인들과 대학교수들은 라틴어로 성체성사의 응답송을 외웠다.(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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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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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6. 연중 제1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함당하지 않다.”(루카 9,62)
오늘은 연중 13 주일이며, 교황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의 주제는 부르심과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이 부르심과 응답의 과정, 아니 끊임없는 부르심과 응답으로 이루어진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1독서>는 예언자 엘리야가 엘리사를 후계자로 부르는 장면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기 겉옷을 걸쳐주며, 예언자 직분과 권한과 능력을 전해줍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먹게 하고, 엘리야를 따라나섭니다. 그야말로 다시는 그 일터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위해 모두를 버리고 따라나섭니다.
<제2독서>는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으니, 육의 욕망을 채우기보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다.”(루카 9,51).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예수님과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봅니다. 혹 우리도 우리를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려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제자들의 부르심에 대한 내용을 전해주는데, <제1독서>와는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에게는“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급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하시며 내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셨는데, 그가“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하시고, 또“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이에게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함당하지 않다.”(루카 9,62)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당신을 따라나서겠다는 사람을 내치시는가 하면, 당신이 부른 이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일도 허락하지도 않으시고,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왜 일까요?
바로 여기에 참된 제자 됨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첫 번째의 사람을 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낮고 겸손한 진정한 제자의 삶에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또 당신이 부르신 이가 ‘먼저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고자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당신을 따르는 삶은 죽음의 나라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 나라의 삶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하는 것을 거절하신 것은,“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말씀이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그를 “하느님 나라”로 부르시며,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자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예수님이 제시하고 계시는 “하느님 나라”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당신을 따르겠다는 나선 첫 번째 사람을 통해서는 하느님 나라는 섬김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임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을 따르는 길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낮고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삶임을 드러내줍니다.
당신이 부르신 두 번째 사람을 통해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은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죽은 이들의 나라가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선포하는)일임을 말해줍니다.
당신이 부르신 세 번째 사람을 통해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쟁기를 가는 일임을, 곧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이 당신을 따르는 제자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 곧 부르심 받은 이가 가야 하는 길, 그것은 부르신 분이 선사하시고 함께 이루시고자 하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자 되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하오니, 주님!
제 손이 당신 말씀의 쟁기를 잡고, 당신 나라의 밭을 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주님!
당신은 저의 탯줄, 저의 보금자리, 저의 무덤이오니
제 머리가 항상 당신 가슴에 기대어 있게 하소서.
제 몸이 당신 밭에 머물게 하소서.
제 손이 당신 말씀의 쟁기를 잡고 진리의 밭을 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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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6. 연중 제1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현대인들의 사망 원인 1위는 ‘암’이라고 합니다. 통계를 보면 30초에 한명 암이 발생하고 60초에 한명 암으로 사망한다고 합니다. 하루에 2,880명이 암에 걸리고, 하루에 1,440명이 암으로 사망한다는 의미입니다. 1년에 1,051,200명이 암에 거리고, 1년에 525,600명이 암으로 사망한다는 의미입니다. 현대의학은 암을 이겨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암치료와 예방을 위해서 100조 이상의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암은 현대인을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하는 질병입니다. 암은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힘들게 하는 질병입니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사용하면서, 수많은 의사들이 연구를 하면서 암을 극복하려고 하는데 암은 여전히 사망원인 1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암에 대한 우리의 접근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의학은 암을 치료하는데 3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수술로 종양을 잘라내는 방법, 항암제를 사용해서 종양을 죽이는 방법, 방사선을 통해서 종양을 태우는 것입니다. 수술을 잘해도 암으로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항암치료는 삶의 질을 떨어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항암치료는 암세포는 물론 정상세포에도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방사선 치료 역시 정상세포에게도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수술을 했지만 재발해서 다시 병원으로 오는 환자를 보는 의사의 마음도 아프다고 합니다. 조류독감, 구제역, 메르스로 해 마다 많은 닭과 돼지들이 죽는 것을 봅니다. 그 원인은 바이러스에 있겠지만 닭과 돼지를 기르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좁은 공간에 많은 닭과 돼지를 기르는 방법, 충분히 잠을 못자는 환경, 아예 운동을 못하는 공간, 항생제와 호르몬이 섞인 사료를 먹는 닭과 돼지들은 바이러스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야생에서 기르는 닭과 돼지는 조류독감, 메르스, 구제역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걸리더라도 곧 회복된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공간에서 충분히 운동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잘 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면역력이 강하기 때문에 바이러스를 이겨낸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암에 취약한 것은 암세포가 강해서가 아니라, 현대인들의 생활방식에 문제가 많다고 합니다. 지나친 육식, 가공식품, 지방섭취는 우리 몸의 면역력을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역시 우리 몸의 면역력을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지나친 음주와 약물 복용도 우리 몸의 면역력을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닭과 돼지를 좁은 우리에 가두어 기르고 항생제와 호르몬이 섞인 사료를 먹이면서 닭과 돼지의 면역력이 약해졌듯이 현대인들의 생활방식은 암세포가 자라기 쉬운 상태라고 합니다. 자연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닭과 돼지들이 바이러스의 공격에 면역력이 강하듯이, 생활습관을 바꾸면 암에 잘 걸리지 않고, 암이 생겨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의사를 3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병을 약으로 고치는 의사를 약의(藥醫)라고 합니다. 병을 음식으로 고치는 의사를 식의(食醫)라고 합니다. 병을 마음으로 고치는 의사를 심의(心醫)라고 합니다. 수술하고, 죽이고, 태우는 것도 치료방법이지만 면역력을 키워서 미리 병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병에 걸렸어도 몸이 자연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로병사의 과정을 받아들이고 삶을 가치 있게, 보람 있게,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연에서 난 야채를 주로 먹는다면, 적당한 운동을 한다면, 욕심을 버리고 봉사한다면,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다면, 하루를 감사하면서 보낼 수 있다면 우리의 몸은 스스로 건강을 유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건강한 생활 습관과 이웃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암을 극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을 믿는다면 이 생을 기쁘게 마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사는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따라갔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마귀를 쫓아냈어도 기도하지 않으면 다른 마귀가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고백성사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못된 삶의 습관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세상의 욕망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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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6. 연중 제13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과거의 애착을 버리고 먼저 자비와 용서를 행함♣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십니다.”(9,51) 예수님의 인간 구원을 향한 순례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시고, 예루살렘에서 죽으시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이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 들르려 했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냉대합니다. 죽음을 통한 생명의 길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9,54).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십니다(9,55).
예수님은 역사적, 종교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을 배척하거나 비난하시지 않고 온정을 베푸셨습니다. 오히려 적대 감정을 지니고 그들을 없애버리려 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치유와 해방을 위해 죽기까지 자신 전부를 바치신 것입니다. 우리도 모든 이를 차별 없이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9,58)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현세 재물이나 권력, 명예를 얻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님을 상기시켜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공동체의 삶을 보면 ‘장’(長) 자리에 연연하고 직무를 마치고도 ‘장’이란 호칭을 듣기 좋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장'이 가장 많은 곳이 교회인 듯합니다. 또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에서 권력이나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의 힘에 기대려 합니다. 허세도 없고 진실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따르겠다(9,59)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9,60) 하십니다.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따르겠다(9,61)는 이에게는“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9,62)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생명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할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모르는 죽음의 세계, 인간적인 인연, 자신의 과거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세속에 죽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 살아야겠지요. 우리의 부르심은 오직 세상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고, 조건 없이 그리고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며 철저히 주님을 따르는 삶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절대적이며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하는 길입니다. 오늘도 나의 일, 현세의 가치를 추구하는 몸짓을 멈추어 하느님께 눈길을 돌리고, 과거의 애착을 끊어버리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사랑과 정의의 길을 먼저 추구하는 행복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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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6. 연중 제1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제자의 삶
-사랑, 이탈, 따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도다.”
어제 저녁성무일도시 흥겹게 불렀던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다. 눞고 싶구나.”
석가모니의 마지막 임종 장면이다. 죽음은 내가 걸어가는 ‘저 모퉁이’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의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러하듯 나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김수영을 비판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김수영의 일상을 간과했던 탓이다. 김수영의 일상은 소민적 모양새였지만, 그것은 ‘살아돌아온 자’의 치열한 일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누군들 일상을 견디는 장사가 있으랴. 세상은 아주 조금씩만 나아져 간다. 그래서 세월이 답답하고, 지난 자취는 흔적도 없이 잊혀가고, 먼지같은 개인은 늙고 시들고 사라져 간다. 이것이 남루하지만 숙연한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어제 읽은 대목입니다. 이 글을 쓴이는 황석영 작가이고 그는 김지하 시인이고 김수영은 그 유명한 ‘풀’의 시인입니다. 세분 다 대가大家의 반열에 드는 참 치열하게 산 분들입니다. 일상을 견디지 못해 변절이요 변질이요 부패요 속절없이 무너지는 삶입니다. 참으로 깨어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치열하게 절박하게 주님의 참제자 답게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누가 뭐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나 불암산의 옹달샘으로 머물으리라
확장도 개발도 홍보도
그 무슨 인위의 장식도 없이
자연 그대로의 옹달샘으로 나 머물으리라
님 안에 숨어 사는
옹달샘으로 나 머물으리라
목마른 이들에게 샘솟는 생명수가 되리라.”-1997.4.3.
치기稚氣어린 여기 이 자리에서의 25년전 고백이었지만 예나 이제나 끊임없이 샘솟는 “옹달샘의 영성”은 제가 희구希求하는 삶입니다. 이와 더불어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의 영성” 역시 제가 희구하는 삶입니다. 엊그제 많은 비가 내린 후부터는 노래하며 맑게 흐르는 맑은 불암산 계곡물을 보며 산책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동요도 불러보며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을 따라 참제자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합니다. 긴 듯 하지만 짧은 인생이 흡사 인생휴가人生休暇처럼 생각됩니다. 10일간 휴가 떠났던 도반이 귀원했습니다. 출발할때는 긴 듯 했지만 금방이듯 인생휴가도 그러할 것입니다.
“집에 오니 참 편하다.”
얼핏 스치듯 순간 들은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인생휴가 참 치열하게 잘 살다가 본향집인 주님의 집에 도착했을 때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참 제자의 삶”입니다. 오늘은 교황주일입니다. 모든 교황님들이 그러하지만 특히 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참제자의 모범입니다. 온전히 자기를 비운 주님 추종의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참제자로 살 수 있을까요?
첫째, 사랑입니다.
주님께 대한 열렬한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런 이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오늘 제1독서중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에서도 우연같겠지만 엘리야는 첫눈에 엘리사의 내적 주님 사랑을 직감했음이 분명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하는 엘리사의 모습이 이를 증명합니다. 제1독서 마지막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엘리사는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파부침선破釜沈船의 결연한 자세를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파부침선은 밥짓는 가마솥을 부수고, 돌아갈 배도 가라앉히고 결사의 각오로 싸움터에 나서거나 최후의 결단을 내림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대로 스승 엘리야에 대한 엘리사 제자의 신뢰와 사랑을 반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도상의 절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합니다만, 첫째는 에둘러 거절하고 둘째와 셋째는 당신의 제자로 택하시려 하는 데, 분명 이들의 당신 향한 사랑을 직감했음이 분명합니다.
둘째, 이탈離脫입니다.
억지로의 이탈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봤을 때,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 선명할 때 저절로 이탈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이탈이, 버림이 뒤따릅니다. 이탈의 사랑, 이탈의 무욕, 이탈의 자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신선한 감동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한결같이 이탈의 자유를 선택하여 종살이의 멍에에서 벗어날 것을 명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
과연 이런 정처없는 무집착의, 이탈의 삶을 살수 있겠느냐 에둘러 답변하며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의 청을 거절하는 주님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역시 일상사에 초연한 이탈의 삶을 명하시는 주님이시며,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그 목표임이 환히 드러납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이, 비전이 이탈의 동인動因임을 깨닫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셋째 경우 역시 과거를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며 당신을 따라 이탈의 초연한 삶을 살것을 명하시는 주님이시며, 역시 하느님 나라의 꿈과 비전이 이의 동인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이 강렬할수록 자연스런 이탈의 삶임을 봅니다.
셋째, 따름입니다.
1.“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2.“나를 따라라.”
3.“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셋 다 주님을 따르겠다 하나 첫째는 에둘러 거절당했고, 둘째와 셋째는 지체없이 세상사에 연연하지 말고 당신만 보고 따를 것을 명하십니다. 새삼 주님의 참제자로서의 삶은 “따름의 여정”임을 알게 됩니다. 부단히 안팎으로 버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며 평생 주님을 따르는 여정입니다. 이에 대한 바오로의 가르침이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바로 따름의 여정의 내용을 보여 줍니다. 막연한 따름이 아니라 이탈을 통해 얻은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데 쓰라는 것입니다. 따름의 여정은 사랑의 섬김의 여정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좋고 유익하며 적절한 말씀인지요!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며 더불어 주님을 따름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 역시 따름의 여정에 귀한 영감을 제공합니다. 따름의 여정은 성령의 인도따른 여정임을 또 깨닫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육의 욕망에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따라 주님 따름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제자에게 따름의 여정은 사랑안에서 섬김의 여정임을, 성령의 인도에 따른 여정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참으로 살고 싶습니가?
주님의 참제자 답게 사십시오. 참제자로 살아갈 때 참기쁨이며 참행복입니다. 사랑의 여정, 이탈의 여정, 따름의 여정의 삼위일체로 이뤄지는 참제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따라 자기를 비우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참제자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시편16,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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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6. 연중 제1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필요한 문구류가 있어서 서랍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아서 서랍 안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한다고, 오랜만에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쓸모없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나중에 어떻게든 쓰겠지.’라는 생각으로 서랍 안에 고이 모셔놓았던 것도 있지만, 전혀 필요 없는 것도 많았습니다. 몇 년 지난 영수증도 있었고, 잉크가 전혀 나오지 않는 펜, 말라비틀어진 물티슈도 있었습니다. 모두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것을 왜 가지고 있었던 거야?’라고 생각하게 하는 물건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물건만 그럴까요? 우리 마음 안에도 쓸데없는 것이 참 많음을 깨닫습니다. ‘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들을 너무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삶에서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간직해서는 안 되는 마음들도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미움, 질투, 단죄, 폭력 등의 부정적인 마음들을 꼭 움켜잡고 있어서는 주님을 온전하게 따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낸 뒤에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의 장례도 아닌 아버지의 장례까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주님을 따르겠지만,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그 장면이 오늘 제1독서에 나오지요. 이때 엘리야는 엘리사의 부탁을 거절했을까요? 아니면 받아들였을까요?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족들과의 작별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엘리야의 부름보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훨씬 더 준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각자는 주님의 부르심을 삶 안에서 계속해서 받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마음을 비우고, 주님의 마음으로 채우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삶은 아버지의 장례보다도 더 우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부름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존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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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행동이 빗나간 사람일수록 남을 모략하는 법이다(몰리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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