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이름을 남기자 로마서 16장 1~15절 인간의 역사는 인생의 흥망성쇠(興亡盛衰), 명암(明暗), 부침(浮沈),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민초들의 삶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한 줄 한줄 짜아가는 베틀입니다. 2002년의 마지막 태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이제 한 뼘 남짓 허공에 걸려있는 세모의 마루턱에서 오늘 우리는 역사의 한순간을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접하고 있습니다. 뵈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에베네도, 마리아.... 등등 그들은 세상을 정복한 제왕도 아니고, 영웅도 아닙니다. 명예의 전당에 기록된 이름들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스물아홉명의 이름들은 시, 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있는 아름다운 이름들입니다. 진실로 이들이야말로 자기의 이름에 책임을 지고 자기의 시간들을 살다간 사람들입니다. 누가 위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기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가? 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사랑 받는 사람은 단연코 토스카니니입니다. 그는 첼로 연주자였는데 중간에 시력이 점점 떨어져서 악보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만 오천내지 삼만 개나 되는 악보의 음을 모두 외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악단의 지휘자가 갑작스럽게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어떤 대원 하나가 “악보를 모두 외운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면 어떻겠는가? 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기의 명지휘자가 극적으로 탄생되었습니다. 후에 그가 회고하기를 “어려울 때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내가 어려울 때, 시력을 잃어가고 소망이 점점 사라져 갈 때 더욱더 큰 위로와 확신을 주시고,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기적을 창출해 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2). 마가복음10장 27절의 말씀에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이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파이프라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만나고, 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위대한 역사의 창조자가 되고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잠언 16장 32절의 말씀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이기는 일이 그렇게 수월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남을 이기기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찬하장사 삼손은 나귀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일 수 있었는데 유혹과의 싸움에서 실패함으로 영원한 패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왕 중에서 가장 탁월한 다윗왕도, 대적과의 싸움에서는 늘 이길 수 있었지만 정욕과의 싸움에서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내 힘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 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찬송가 384장). 인간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23~24절의 말씀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셔야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날 대신하여 싸워 주셔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었던 다윗은 골리앗 앞으로 나아가면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했습니다(삼상7:45). 다윗의 물맷돌을 다윗이 던졌을지라도 골리앗을 넘어뜨린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고 했습니다(출14:14). 실로 싸움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은 창과 칼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가? 자기를 성결케한 사람입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탐욕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요일2:16).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레11:45) 하나님께서는 성별된 사람,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을 붙드시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이 사람이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습니다. Ⅲ. 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창세 이후로 이 세상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름은 실로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이 수다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특별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뵈뵈, 그는 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였다고 했습니다(2절). 브리스가와 아굴라, 그들은 바울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어놓은 충성된 자라고 했습니다(4절). 마리아, 교회를 위하여 수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6절). 안드로니고와 유니게, 그들은 복음을 인하여 바울과 같이 옥에 갇혔던 사람들입니다(7절).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주안에서 수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12절). 루포와 그의 어머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의 아내와아들입니다(13절). 빌립보 교회의 루디아는 평생 바울의 수발을 들고, 바울의 선교자금을 대었습니다. 바나바는 땅을 팔아 교회에 바친 사람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입니다. 위대한 복음의 종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바울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도우심이 있었지만 보이지 아니하고 음지에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수고한 수많은 동역자와 내조자들의 땀의 결정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않됩니다. 오늘 누가 로마서 16장 15절의 마지막에 그 이름을 기록 받을 것인가? 한번 밖에 살수 없는 단회적인 인생! 이 귀한 인생을 값있게 사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에, 하늘문교회의 교회사 위에, 기리 빛날 아름다운 이름을 기록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네 기업의 지경을 넓혀라 창세기 14장 14~18절 이제 2003년의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시간들은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또 가을이 오는, 유수 같은 그러한 시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초마다 우리를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초마다 감찰하시는, 시간들은, 분초마다 새로운 의미와, 하나님의 관심이 담겨 있고 시간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신전 의식을 가지고, 주어진 시간들을 선용하고 관리하는 청지기적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창12: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기업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롯도 그들의 기업에서 열심히 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처럼 그들은 복을 많이 받아 기업이 창대해지고 종들과 짐승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초지가 부족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축복을 받아도 축복 가운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서로 갈라져 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창13:8-9).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고 했습니다(창13:10). 롯은 애굽 땅과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아브라함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풀 한 포기 없는 헤브론 산지를 향하여 짐승떼를 이끌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창13:14-17). 이 축복의 약속이 어느 때 아브라함에게 임했는가?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 한 해 동안 여러분의 삶 위에, 여러분의 교회위에 풍성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Ⅰ. 롯이 아브라함을 떠났을 때 임했습니다. 본문 14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롯은 어떤 사람인가? 본문 10절에 “요단 땅을 바라보니 애굽과 같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롯은 그 애굽 땅과 같은 그곳을 선택하고 그곳으로 떠난 사람입니다. 롯은 일찍이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을 따라서 애굽으로 갔던 사람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아브라함은 다시는 그 마음에 애굽을 두지 않았지만, 롯은 애굽을 나온 뒤에도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애굽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은 풍요로운 곳입니다. 애굽에는 죄악이 많은 곳입니다. 애굽에는 향락이 있고 우상을 섬기는 곳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애굽에 내린 하나님의 재앙은 바로 그들이 섬기던 우상을 응징하신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성경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고후6:14).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체험하는 길은, 우리들의 삶에서 이 “롯”을 추방해야 합니다. 향락과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본문 13장 1절은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다”고 했습니다. 죄악을 버려야 합니다. “롯이 떠났다”는 말은, 정욕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롯이 바라본 요단 들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같아 보여서’ 우리를 현혹 시키는 것이 정욕입니다.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3:16). 보암직 하고, 먹음직 한 것이 세상 정욕입니다. 이 정욕을 다스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Ⅱ. 아브라함에게 주신 미래적 축복의 약속입니다. 본문 17절에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라고 하셨습니다(신11:24).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은 육적인 축복이었습니다. 네가 밟는 땅을 네게 주리라는 기업의 축복입니다. 동서남북, 네가 바라보는 모든 땅을 네게 주리라는 풍성한 기업의 축복입니다. 2.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은 영적인 축복입니다. 본문 16절에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에서 티끌 같이 수많은 자손들을 “자손”이라고 단수로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신약 갈라디아서 3장 16절의 말씀에서 해석하기를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다윗의 뿌리에서 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이 받을 구원의 축복입니다. 이 아브라함이 받은 육적 기업의 지경이, 발 닿는 곳, 땅끝까지 이르기를 소원하고,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 되는, 우리들과 우리들의 후손의 후손 위에, 풍성한 영적 축복이 임하길 바랍니다. Ⅲ. 기업의 축복은 예배의 제단에 임했습니다. 본문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후 아브라함이 지체하지 아니하고 행한 것은 바로 단을 쌓는 예배의 삶이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행한 것이 정한 짐승을 잡아서 번제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창8:20). 이삭이 장막을 옮기고 제일 먼저 행한 일은 여호와께 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그 해에 농사를 지어 100배나 얻었습니다(창26:12). 엘리야의 기도 응답이 갈멜산 꼭대기에 쌓은 번제단에 임했습니다(왕상18:39). 아브라함의 모리아산상의 번제단에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임했습니다(창22:14). 에스겔의 제단에 바다의 물이 소성하는 생명수가 흘렀습니다(겔40:9). 헤브론의 아브라함의 제단은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를 예표합니다. 헤브론의 막벨라굴에 사라,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 레아, 야곱 등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해골이 묻혔습니다. 이곳이 여섯 도피성중의 하나였고(수20:7), 다윗이 7년 반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린 다윗왕국의 왕도였습니다(삼하4:1~4). 헤브론은 이스라엘 신앙의 발상지였고, 신정 왕국의 태동지였습니다. 교회는 먼저간 천천 만만의 신앙의 조상들의 흔적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이 한 해는 세속에서 구별되고, 성별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육적인 축복과 영적인 축복이 풍성한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과 섬기는 교회가 그 지경을 넓히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동서남북 땅끝은 여러분의 축복스러운 기업의 지경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바꿉시다 요한복음 5장 1 ~ 10절 여름 해수욕장이나, 어린이 풀장에 가보면 노란 줄에 빨간 깃봉을 세운 표지판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저지선은 안전한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안전한데 더 나아가면 위험하다는 표시입니다. 거기까지 나아간 사람은 돌아서야 합니다. 이 선을 넘어서 더 깊은 곳으로 나가면 또 저지선을 만납니다. 이 선은 금지선입니다. 이 선을 넘으면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이 금지선은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최후로 돌아설 기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살이에서도 이러한 기회들은 있습니다. 공부할 기회도 있고, 성공할 기회도 있고, 돌이킬 기회도 있고, 회개할 기회도 있습니다. 이 기회를 잘 살리고 적절히 대응한 사람은 성공한 삶을 살수 있고, 이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은 실패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도 이 귀중한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는데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던지, 내가 빨리 움직일 수 없었던지, 다른 사람의 동작이 나보다 빨랐던지, 어떤 연고를 인하여 병 나을 기회를 노친 사람입니다. 이런 경우에 세상 사람들은 사주팔자 소관이라고 탓하기도 하고, 운명이라고 체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운명론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능히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어느 때 인생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는가? Ⅰ. 예수를 만날 때 인생이 바뀝니다. 이사야 61장 1절 말씀에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본문의 병자도 38년 동안이나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는 자신을 어쩔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만 그런가? 아닙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행각이 다섯이 있는데, 거기 누어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 이 사람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그를 만나 주실 때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이 모두 변했습니다. 예수를 만난 베드로는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울은 바울이 되었습니다.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행3:1)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베데스다! “자비의 집”, “은혜의 집” - 오늘의 베데스다는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오늘의 베데스다인 교회는 실패한자가 찾아오는 곳입니다. 슬픔당한 자가 찾아오는 곳입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 받을 자가 찾아오는 곳입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자가 찾아오는 곳입니다. 여기에 위로가 있고, 여기에 회복이 있고, 여기에 치료가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자 마다 인생이 변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능력을 체험하시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Ⅱ. 믿음이 있어야 인생이 바뀝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믿고 기다려서 이삭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믿고 기다려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14년을 기다려서 라헬을 얻었습니다. 요셉은 17년을 기다려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을 기다려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오늘 이 사람은 38년을 기다려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마태복음 15장의 수로보니게 여인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주여 옳소이다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 ”그 시로 그 딸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마15:28). 간절한 소원이 인생을 바꿨습니다. 끈질긴 믿음이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믿음으로 사라는 죽은 몸에서 이삭을 받았다고 했습니다(히11:11).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고 했습니다(히11:29).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 성을 두루 돌때 성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히11:30). 믿음으로 기생하합은 정탐꾼을 숨기고 멸망 받는데서 구원 받았다고 했습니다(히11:31). “이런 사람을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했습니다(히11:38). 믿음이 이깁니다. “믿음이 이기네 주예수를 믿는 믿음이 온세상 이기네”(찬397장)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믿음으로 인생을 바꾸시는 복된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Ⅲ. 사랑이 인생을 변하게 합니다. 사랑은 세상을 변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심이 38년 된 병자의 인생을 바꾸셨습니다. 마가복음 12장에는 가난한 과부의 두렙돈의 헌금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성전 문 앞에서 연보궤에 헌금하는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들 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할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무엇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칭찬의 말씀을 하셨는가? 그녀의 하나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300데나리온 - 장정 300일 분의 임금도 드릴 수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자기의 생활비 전부, 두렙돈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예수님 사랑이 같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요일4:7).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을! 우리들의 사랑이 나와 이웃의 인생을 바꾸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기를 극복합시다 열왕기하 9장 14~20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흔히 위기의 시대라고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이 위기는 어느 특정지역, 특정한 사람들에게 만 임하는 것이 아니고, 양상은 달라도, 모든 인생들에게 보편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웹스터 사전에는 Turning time : 전환점이라고 했습니다. 위기를 부정적으로 보면 절망으로 떨어지는 시간이요, 긍정적으로 보면 지금까지 살던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역사창조의 전환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위기도 인생은 이 위기를 극복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절박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위기를 당하여 정신 차려야할 때 인간은 정신을 잃어버리는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위기관리 역량이야 말로, 그 사람의 능력이요, 성공과 실패의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히스기야 왕은 지금 국가적인 일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일차침입으로 국고는 바닥이 났고, 십팔만 오천명이나 되는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이스라엘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것입니다. 랍사게의 말처럼 “말 이천필을 준다”해도 탈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왕하18:23). 강자 앞에 선 약자 ! 이 약자는 어떻게 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을까? 오늘 이 나라가 안고 있는, 북한 핵 위기, 에너지 위기, 상존하는 전쟁위기 그리고 우리들의 각자 각자가 타개해야할 크고 작은 위기 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본문을 중심으로 그 해법을 구하길 원합니다. Ⅰ. 위기가 닥치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본문 19장 1절에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라고 했습니다. 앗수르의 선전포고로 히스기야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왕하19:3) 무슨일이 낭패한들 이처럼 낭패스러울 수 있겠는가? 무슨 일이 다급한들 이보다 더 다급하겠는가? 그런데 히스기야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 앞에서 왕의 모사나, 군대장관이나, 장수들을 불러서 위기극복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옷을 찢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극한 슬픔과 분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베옷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슬픔과 회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위기를 당한자나, 고난을 당한자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이렇게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에는 우연이나, 돌발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는 세계에는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하늘을 나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재난이 어찌 우연하게 임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자신을 돌아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깊히 성찰했을 것입니다. 이 일이 왜? 오늘 이 백성에게 임했을까? 성경은 열왕기하 18장 12절 말씀에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하여 함락된 원인을 “이는 저희가 그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치 아니하고 그 언약을 배반하고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모든 명한 것을 거스려 듣지도 아니하며 행치도 아니하였음이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8년 전에 망한 사마리아가, 이러한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했다면, 오늘 똑같은 상황이 이스라엘에게 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똑 같다는 말씀이 아닌가? 또한 히스기야왕 14년에 앗수르 왕이 유다 모든 성을 쳐서 취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 그리고 은 삼백 달란트, 금 삼십 달란트를 상납하기 위해서 전 곡간을 털고, 왕궁 곡간을 털어도 부족하여 전문에 입힌 금을 벗기고,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서 앗수르 왕에게 보냈습니다(왕하18:13~16). 그런데 이러한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은, 금을 주면 위기를 해결할 줄 알았습니다. 세상방법으로,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인간 내부에 뿌리깊이 박힌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위기의 극복은 하나님의 바른 관계 회복으로부터 해결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고 했습니다(시34:18). 위기가 닥칠 때 제일먼저 할 일은 엎드려 회개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합니다. Ⅱ. 위기가 닥치면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14절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고 하였습니다 히스기야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보시고, 들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먼 훗날 천국에서 뵈올 하나님이 아니시고, 하늘 보좌에 높이 앉으신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나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편지를 펼쳐 놓고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왕하19:16). 그는 이사야에게 말하길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을 인하여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황하19:4). 위기를 극복하는 두 번째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 뿐 아니라, 그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을 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22:22) 하나님이야 말로 모든 문제의 해답의 열쇠의 쥐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렘29:13).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사55:6). 히스기야의 하나님은 오늘 나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닥친 모든 위기를 그분께 맡김으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Ⅲ. 합심하여 부르짖는 기도는 위기를 극복합니다. 본문 19장 2절에 “궁내대신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입혀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라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위경에 처하여 혼자서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중신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에게 부탁하여 함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선지자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 행할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세 번째 방법은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위기가 닥쳤습니까? 그 문제를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교회로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합심하여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마18:20). 예수님은 우리의 죄짐 뿐 아니라 우리의 수고의 짐도 대신 지시고 해결하시는 분이십니다.(마11:28) 나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 여호수아 10장 6~14절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병법가인 손무는 전쟁의 전술, 전략, 용병술, 승리의 비기 등을 기록한 “손자병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병서는 후대의 많은 무장들 사이에 전쟁의 작전교본으로 애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예리한 통찰력과, 해박한 식견은 오늘 날에도 퇴색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는 인기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싸움은 손자병법 같은 탁월한 작전과 전략과 지략과 모략으로서 승리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군사들인 성도들의 영적싸움은 어데서 승리의 비결을 배울 수 있겠는가? 성경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엡6:12). 악한 세상의 권세들과 악한 하늘의 영들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 본문은 그 승리의 비결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본문 8절에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자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의 삶을 인간의 뜻대로 살아가는 줄로 종종 착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생사화복은 사람의 손에 달려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왕 솔로몬은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전9:11). 바로의 군대가 아무리 많고 철병거가 600승이나 있었어도, 맨몸으로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요단 강물이 아무리 창일하고, 여리고 성이 아무리 견고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런가? 왜 그들은 패해야 하고, 왜 그들은 이겨야했는가? “전쟁이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대하20:15).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라고 했습니다(시24:8). 그러므로 아모리족속의 31 왕도, 가나안의 다섯 개국 연합군도 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의 말씀에도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다”고 했습니다. “붙이다(ןתנ나탄)”은 ‘준다’는 뜻입니다.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키셔야 할 인간을, 인간의 손에 맡기셨다면, 그들은 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고 하셨습니다(창9:2). 삼라만상을 인간의 손에 붙이시니 힘센 황소도, 사나운 독수리도 인간의 다스림을 받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힘으로 한다면 인간은 하루살이에도 눌려 죽을 연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을 삼손의 손에 붙이시니, 나귀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이고(삼하15:15), 미디안 군대를 기드온의 손에 붙이니 기드온의 300용사가 미디안과 아말렉의 모래알 같이 수다한 군사들을 진멸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삿7:12). 하나님께서 앗수르군대를 천사의 손에 붙이니 하룻밤에 18만 5천명의 앗수르군대를 멸망시키셨습니다(왕하19:35).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과 크게 하심과 작게 하심과 이기게 하심과 패하게 하심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내 힘으로 삼는 사람이 승리합니다(시18:1). 나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는 사람이 존귀해 집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는 자가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본문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수10:14). 그분은 지금도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 싸우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Ⅱ. 기도하는 자가 승리합니다. 본문 12, 13절에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박을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9장 23절에는 애굽을 징치하시는데 뇌성과 우박과 불을 보내시어 사람과 짐승과 밭의 곡식을 치셨습니다. 욥기 38장 22, 23절에는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벨호론 전투에서 하나님께서는 큰 우박덩이를 내리시어 아모리 군대를 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칼에 죽은 자 보다 우박에 맞아 죽은 자가 많았다”고 했습니다(수10:11). 이 우박이 자연의 현상이 아니었던 것은 이스라엘 군사들은 상하지 아니하고 아모리 사람들만 선별적으로 공격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이적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고무되었겠는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는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지어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성도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 믿음대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습니다(요일5:14).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하셨습니다(마8:15).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했습니다(약5:15). 누가 태양을 머물게 할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막9:27).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구의 자전을 멈추게 하시고, 우주의 타임스케쥴을 새롭게 설정하셨습니다. 성도의 기도야 말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응답으로 받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말씀의 확신위에 굳게 선자가 승리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히11:1).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말씀의 일점일획도 변개되지 않습니다. 성도의 승리의 약속은 이미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선언은 “내가 다 이루었다”입니다(요19:30). 예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는 자는 그 말씀을 인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사탄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내 것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8:20). 주의 성령께서 오늘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오늘 우리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영적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태양을 하늘에 매달고, 달을 머무르게 할 수 있는 능력자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불사신입니다. 성도는 불패전의 그리스도의 군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버립시다. 취합시다 에베소서 4장 21~32절 성도는 비록 이 세상에서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삶의 패턴을 가지고 살고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영주권을 두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하신 섭리가운데서 성별의 과정을 거쳐서 당신의 백성들을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구별된 삶을 살지 않으면 않됩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표상이 나타나는 자라야 만이 미래의 소망을 보장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도마다 각기 다른 신앙 체험과 각기 다른 토양에서 배양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잘 조화시키고 융화시킬 때, 각기 다른 색깔로 짠 색동의 아름다움처럼 다양화 속에서 하나로 일치된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된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성도의 생활원리를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Ⅰ. 성령안에서 거듭나야 합니다. 본문 22절에 “엣 사람을 벗어 버리고 … ”, 24절에“새사람을 입으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전래의 풍습에 섣달그믐 날에는 목욕을 하고, 설빔으로 가라 입는 세시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지난 한 해의 허물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마음과 각오로 새해를 맞는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옷을 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헌옷, 더러운 입던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벗어 버려야하는 엣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을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유혹의 욕심”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자기의 뜻대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롬3:23).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았습니다. 옛 사람은 오직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자기의 뜻대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실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셨습니다(마15:14). 우리는 성경에서 자기 뜻대로 살다가 실패한 사울 왕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15:9). 자기 뜻대로 선택하여 실패한 요나와 나오미를 볼 수 있습니다(욘1:2, 룻1:1). 세상의 온갖 죄악이 어디서부터 왔나? 하나님의 뜻을 버린데서 왔습니다. 세상의 온갖 분쟁이 어디서부터 왔나? 사람이 자기의 뜻대로 사는데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이 어떤 삶인가? 기도의 삶입니다. 본문 23절의 말씀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심령이 새롭게 된다”는 말씀은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서 사람이 결심하고, 결단하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중생의 사람을 말합니다(요3:5).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삶은 예수님처럼 의롭고, 예수님의 자비하심처럼 자비롭고, 예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한 신의 형상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열매로서 나타 날 것입니다. Ⅱ.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취해야 합니다. 본문 25절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난 중생 받은 사람의 이웃관계가 어떠해야 하느냐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은 진리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성경에서는 철저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거짓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까지도 파괴합니다. 인류의 범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사탄의 거짓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웃과의 문제가 어디서부터 발생하는가? 신뢰성을 잃은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웃과의 관계에서 첫째의 경계는 거짓입니다. 새 사람은 진리와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반대되는 거짓을 버리고, 거룩함의 반대되는 거짓을 버려야합니다. 거짓은 그리스도의 복된 교회의 지체된 자들이 반드시 버려야할 패덕중의 하나입니다. 둘째는, 분을 품지 말아야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분’은 불의를 보고 발하는 의분이 아니고 사소한 감정에 의한 분노를 말합니다. 잠언 29장 22절에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은 순간적으로 분을 다스리지 못한데서 오는 우발적인 범죄들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어찌하던지 빈틈을 찾아내어 성도들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켜서 죄를 짓고,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마귀에게 기회를 주고, 실패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새 사람의 삶은 옛사람의 행실을 멈추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은 선을 행하는 적극적인 자세로의 삶의 변화가 요구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덕행은 불신의 이웃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선으로 성도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무례하고, 저속하고, 진부한, 언행을 삼가고, 필요한 건덕을 위하여 은혜를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Ⅲ. 악을 버리고, 관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너희는 모든 약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책망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능력이나 권능이 아닙니다. 성령은 성도에게 있어서 인격적인 안내자이시며 지도자이십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시는 인격체 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웃에게 거짓을 행하거나, 더럽고 합당치 아니한 언행을 행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을 근심하시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독은 남을 해하는 마음입니다. 훼방은 악의로 상대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또한 악의는 남을 해하는 마음으로, 모든 범죄의 근원이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시키고 또한, 교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성도들의 지향하는 삶은 한 마디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되어야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삶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신 크리스챤의 생활강령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13:34).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고, 미움과 분노를 그치게 하고, 교회를 하나로 묶는 끈이 됩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출애굽기 14장 10 ~ 14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홍해 도강사건은 택한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구원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한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그들의 소유물인 우양의 어린새끼까지도 머리터럭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고 모두 홍해를 건넌, 완벽한 구원성취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요, 관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사46:3). 그러므로 성도는 대적에게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여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택한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 역사를 잠잠히 기다리고,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사43:2) 후일에 사도 바울은 구속사적 의미에서 이 이스라엘의 홍해 도강사건을 물세례에 비유했고(고전10:1~2), 과거 애굽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은 홍해에 장사되고, 이제 물로서 정결케된 새 이스라엘의 탄생, 곧 “거듭남”의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홍해 도강 사건은 택자에게 중생의 은혜를 베푸사,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보여주는 예표적 사건이요, 구속사적 의미를 지 닌 역사적 사건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와 같은 난관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환경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곤경에 빠진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곤경에서 구원하여 주실 이도 또한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와 애굽 군대의 추격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대적해 올 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위기가운데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인가? Ⅰ. 두려움에서의 구원입니다. 본문 10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열 가지 이적과 표적을 보고, 압제자 바로의 손에서 놓임을 받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감격과 기쁨이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그들의 기쁨과 감격은 불과 나흘 만에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지금 애굽의 바로왕이 600승의 철병거를 앞세우고 10만의 정예군이 그들을 추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킨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중해 해안의 불레셋 지경을 통과하는 지름길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지 아니하시고, 아라비아 반도를 낀 홍해길로 그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본문 2절에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하였습니다. 그곳은 양면이 깎아지른 절벽이요, 앞에는 홍해입니다. 당시에 세계를 제패하던 최강의 애굽 군대요, 전술과 전략에 능한 바로가 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안에 든 쥐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길은 오직 한 길입니다. 바로의 칼에 죽는 길과 홍해에 빠져 죽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믿는 자는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이요, 불신자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출14:10). 그 부르짖음이 무엇인가? 모세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환경을 보는 것입니다. 비를 먹음은 구름을 보는 것입니다. 구름을 보는 사람은 구름 위에 떠있는 태양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이라고 했습니다(딤후1:7).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습니다(사41:10).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용기와 확신과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우리들의 마음에서 불신앙을 몰아내고 두려움을 몰아내 주시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제할 때 가나안 일곱 부족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밥처럼 보였습니다(민14:9). 어떤 난관도, 어떠한 문제도 하나님을 믿는 담대한 신앙 앞에 평탄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서서 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을 인내하면서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죽은 우상을 섬기는 헛되고 무능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성도의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서 능동적으로 일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구원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이나, 인간의 열심으로 하나님 보다 앞서 행해서는 않됩니다. 진인사 대천명!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 성도가 마지막으로 취할 태도는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을 바라보고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제는 끝이다!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점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발점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니 홍해 바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덤이 되지 아니하고, 바로와 애굽군대의 무덤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고 했습니다(고전1:25). 누가 하나님의 신묘 막측하신 지혜를 측량 할 수나 있겠는가? Ⅲ.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았습니다. 바닷 가운데 진펄이 마른 땅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벽처럼 쌓였던 바닷물이 또다시 합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와 그 군대들이 수장되는 현장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음으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했습니다(출14:31). 하나님의 구원은 어느 때 임하는가? 믿을 때 임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능력 받고, 어떠한 환경도, 어떠한 위기도 믿음으로 극복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승리자가 됩시다 창세기 39장 1 ~ 6절 지혜의 왕 솔로몬은 말하기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전7:14). “곤고한 날”은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려운 형편이라는 뜻이고, 비참하고 불쌍한 처지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과 기쁨과 축복도 주시지만 때로는 병들고 찌들고 고통스러운, 곤고한 날도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둘을 “병행한다.”는 말씀은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동시에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통한 날에도 교만할 수 없고, 곤고한 날에도 좌절하거나, 비참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형통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데, 곤고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욥기 2장의 말씀에 보면, 환란과 질병 고통과 곤고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통한 날에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곤고한 날에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삶에 곤고함이 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처방도 가지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이 곤고한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요셉은 완벽한 승리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무엇이 열일곱 어린 히브리 노예를 당시에 세계를 지배하던 애굽의 총리로 우뚝 서게 했는가? 오늘 누가 자기의 인생을 승리하는 인생으로 가꾸어 갈 수 있는가? 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는 승리자가 됩니다. 본문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자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요셉과 함께 하셨는가?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보다도 고난에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 형제들로부터 시기와 질투, 미움을 받고 열일곱 어린 나이에 종으로 팔려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썼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유혹에도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유혹을 극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믿음을 붙잡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인생의 승리의 비결은 무엇인가?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지키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일45:4). 하나님은 믿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승리하는 인생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그 주인에게, 바로 왕에게 은혜를 입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습니다(창39:3).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고, 요셉 때문에 바로 왕이 복을 받고, 요셉 때문에 흉년만난 애굽의 백성과 주위의 모든 나라 백성들이 흉년에 굶어 죽는데서 구원 받았습니다. 그들이 요셉을 보니, 하나님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고, 왕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 앞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서 종으로서 충성을 하니, 보디 발이 그에게 가정총무를 맡겼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 죄수로서 충성하니, 전옥이 그에게 모든 죄수와 감옥안의 제반 사무를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로서 충성하니, 바로 왕은 그를 애굽을 총괄하는 애굽의 제 2인자의 권세를 주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요셉처럼 애굽의 총리가 되어 성공하기를 원하는데, 요셉처럼 종으로서 충성하기를 싫어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총리로서 충성하기를 원하는데 죄수로서 충성하기를 싫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데, 하나님께 인정받길 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좇아가는 사람은 많은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확실히 알고, 확실히 붙잡을 진리는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과 초점을 맞추는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어디를 가나 형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삶이 하나님과 초점이 잘 맞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초점이 잘 맞추어진 요셉은 그의 주인 보디발과도, 감옥의 전옥과도, 술 맡은 관원장과도, 떡 맡은 관원장과도, 바로 왕과도 초점이 잘 맞추어 질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잘돼야 잠겨진 문이 열리고, 축복의 불이 붙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깨끗하고 진실한 사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 9절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 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정욕으로 그의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물질로서 그의 손을 더럽히지 아니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라고 했습니다(사59:1~2). 해가 중천에 떠있어도 구름에 기리우면 햇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마음과 영혼과 몸이 깨끗했으므로, 눈이 밝아져서, 하늘의 이상을 볼 수 있었고, 7년 후에 임할 일과, 14년 후에 일어날 일들까지 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몸도 마음도 영혼도 깨끗하지 못한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상이 보이지 아니하고, 우리의 삶에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레11:45). 하나님처럼 정결하고, 하나님처럼 진실하고,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요셉처럼 곤고한 인생을, 요셉처럼 영광스러운 인생으로 바꾸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종처럼 피곤하고, 죄수처럼 고달파도 깨끗하고, 진실하여 인생을 승리로 이끄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부르십니다(Ⅰ) 누가복음 19장 1 ~ 10절 성경에 나타난 여리고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리고를 “향기의 도시(a place of fragrance)” 라고 불렀습니다. “예리코”라는 말은 어원상으로는 “루아흐 - 냄새를 맡다”란 뜻입니다. 이는 이 지방에 유명한 발산향 나무숲이 많았기 때문에 불려진 이름이기도 하고, 여리고 성이 여호와께 바쳐진 성이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합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때 제일 먼저 정복된 가나안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가나안에서 처음거둔 첫 열매로서 여호와께 바치고 그곳에서 노획된 은, 금들은 모두 하나님께 드려서, 여호와의 창고에 보관시켰습니다(수6:14). 그래서 여호와께 바쳐진 제물-, 그래서 “향기의 도시”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에는 기생 가합이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창틀에 붉은 동아줄을 매달아서 여리고 성의 진멸 중에도, 유일하게 구원 받은 곳이 여리고이고,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노심초사 하던 여호수아 앞에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나타난 곳 이기도합니다(수 2장). 먼 훗날 엘리사 선지자가 쓴물 근원에 소금을 쳐서 단물을 만든 곳이 여리고 성입니다(왕하 2:19~25). 오늘날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에 이르는 불모의 땅에서 시냇 물소리는 들을 수 있는 곳이 여리고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만나러 뽕나무에 올라간 세리장 삭개오를 부르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길 원합니다. Ⅰ. 예수님의 부르심은 선택적 부르심입니다. 본문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셨습니다. 삭개오! 그 이름의 뜻은 “순결, 정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의 이름과는 정 반대 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풍요로운 국경도시 여리고에서 세금을 받는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의 로마 조세제도는, 일정한 지역을 특정인에게 주어서, 일정 금액은 로마정부에 바치고 나머지는 세리가 갖는, 일종의 도급제도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들은 세금을 늑징하여 자기들의 사복을 채우는데 급급했습니다. 때문에 당시 세리는 잘 살았고, 반면에 백성들은 세금에 쪼들리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는 매국노요, 도적중의 도적이요, 죄인중의 죄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삭개오는 물질적으로는 부요하게 살았지만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늘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죄책감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러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거리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고, 더구나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예수님을 만나야 겠다는 일념으로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 그는 점잖은 세리장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뽕나무 아래에 이르셨습니다.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뽕나무 위를 우러러 보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야”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 순간 삭개오는 고압선에 감전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는데, 예수님은 삭개오를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지성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만 아시지 아니하시고, 그의 생각도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의 마음의 고통과 아픔도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의 소망도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의 기도도, 그의 찬양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리고 성의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오직 삭개오의 이름만 부르셨습니다. 실로 선택적 부르심입니다. 실로 영예로운 부르심이었습니다. 인격적 부르심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부르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뽕나무 아래에서 삭개오를 부르신 것처럼 수많은 세상사람 가운데 나와 여러분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임마누엘의 부르심입니다. 본문 5절에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네 집은, 세리장의 집입니다. 죄인의 집입니다. 매국노의 집입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고통 받는 자의 집입니다. 나를 보기를 원하는 네 집에 유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임마누엘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의 이 부르심은 파격적인 부르심입니다. 충격적인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했습니다(눅19:7).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머무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9:1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마9:13). 오늘 우리는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우리가 의로워서 의로우신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다 어쩔 수 없는,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허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고 계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만이 들었습니다. 이 시간에 그 음성을 듣는 복된 심령이 되시길 바랍니다. Ⅲ.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음성입니다. 본문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택자 구원의 완성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찾는가? 택자만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가? 택자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요10:3~5). 그렇다면 삭개오는 택한 백성이요. 선택받은 선민이요.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성민입니다. 다만 그는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잃어버린”의 뜻은 “자리를 이탈하여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중에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 삭개오를 찾아서 여리고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잃어버린 택자의 구원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오늘”의 구원입니다(눅19:9). 선택적 구원입니다. 타력구원입니다. “이 집에” - 가족구원입니다. “이르렀으니” - 예수님으로부터 임한 구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슬픔당한 자, 실패한자, 병든 자, 고난당한 자, 영혼이 곤비하여 방황하는 자 - 우리 모두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마1:28). 예수 안에서 쉼을 얻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부르십니다(2) 눅19:1~10
셰익스피어의 3대 비극작품중의 하나인 “햄릿”은 “살 것 이냐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하는 유명한 독백을 했습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사람은 딜레마에 빠져 죽음의 병에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기로에 선 처절한 인간의 모습은, 인간을 마침내,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뜨리고 야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는 명쾌한 부르심은 인간에게 불안속의 방황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인간 편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삶 가운데 개입하셔서 주권적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율종교에서 볼 수 있는 불가항력적인 소명인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는 음성을 듣는 두 번째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Ⅰ. 에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인 부르심입니다. 본문 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여리고 성내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본문 2절 “삭개오는 키가 작고 사람들이 많아 할 수 없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여리고 사람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이적적 행사로 인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겠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병 고치심의 소문을 듣고, 병 고침 받고자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다”란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보러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삭개오처럼 키가 작은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간 아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도상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올라 앉아 있는 뽕나무 밑에 오셔서 “삭개오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삭개오 하나만을 자명하여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렇게 개인적으로 하나, 하나 부르십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나사로야”라고 부르셨습니다. “달리다쿰!” 소녀야 일어나라! “청년아 일어나라!” 이렇게 개별적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만 부르셨습니다(창12:1). 실로의 성전에서는 “사무엘아”부르셨습니다. 옆방에 자고 있는 엘리 제사장은 부르시지 않았습니다(삼상3:9).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예레미야를, 에스겔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아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고(요1:47), 베드로와 요한은 고기 잡는 어장에서 부르셨습니다(눅5:10). 마태는 세관에서 부르시고(마9:9),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행9:7). 오늘 나와 여러분들도, 열심히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르심이 귀한 것입니다. 그렇게 부름 받은 나와 여러분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의 부르심은, 삭개오가 열심을 다해서 뽕나무에 올라갔기 때문에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의 구도심이나, 열심의 공로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창세전에 우리의 이름을 아셨다”고 했습니다(시139:16). “모태에서 조성되기 전에 우리를 취하셨다”고 했습니다(시71:6).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택정하시고, 그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택정된 삭개오를 찾아서 여리고성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세상 중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별하시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택자를 세상이라는 큰 덩어리에서 떼어 내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43:1). Ⅱ. 급히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본문 5절에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속히 내려오라”는 말씀은 머뭇거리거나, 지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긴박성이 내포되어 있는 부르심입니다. 왜 그런가? 세상의 종말은 찰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오늘 결단하지 아니하면 내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내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믿으라, 그러나 내일 믿어라! 하나님께 충성해라, 그러나 내일하라. 전도도, 선교도 내일하고 십일조도, 감사도 내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달력에는 내일은 없습니다. 성도의 종말이 아! 하는 순간에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아! 하는 순간에 여객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져서, 산등성이를 들이 받습니다. 아! 하는 사이에 군함의 함교가 날아갑니다. 아! 하는 사이에 지하철이 불에 타 없어집니다. 아! 하는 사이에 수십 층의 무역센터 건물이 먼지처럼 사라집니다. 이 세상어디에 나를 위한 내일이 있는가? 언제 천천히 예수 믿고, 언제 천천히 천국 가겠는가? 기독교의 복음 초청은 “속히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탄 천국열차는 간이역마다 쉬어가는 완행열차가 아닙니다. 우주를 27번이나 왕복한 콜롬비아 우주 왕복선이 음속의 250속도로 공중분해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너의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약4:14). 그러므로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고후6:2).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지금이 은혜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한 우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눅23:43). 속히 응답해야 합니다. 속히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구원도 충성도, 봉사도, 전도도, 효도도, 오늘입니다. 속히 결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Ⅲ. 내려오라고 부르십니다. 본문 6절에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고 하셨습니다. 지금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 앉아 내려다보고, 예수님께서는 땅에 서서 삭개오를 우러러 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만들어 놓은 높은 자리, 성공의 자리, 명예와 권력의 자리, 자혜와 지식의 자리 부요의 자리에 올라앉아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점이라는 인생 목표를 달성하고, 그 위에 올라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먼저 그 자라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땅 위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겸손의 걸음을 걸어 지금 여리고 까지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뽕나무 밑에 서서 삭개오를 우러러 보시기 때문입니다. 내려옵시다! 겸손의 자리로 내려옵시다! 우리는 땅에 엎드려, 주님을 우러러 보고, 주님은 서서 우리를 내려다 보셔야 합니다. 겸손! 그것은 크리스천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인생을 겸손케 하시는 부르심입니다. 마음으로 겸손하고, 말에도 겸손하고, 행동에도 겸손해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우러러 볼 때 우리는 주님을 바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축복하십니다. 교만한자는 낮추시고 미워하십니다. 예수님이 부르십니다(3) 누가복음 19장 1~10절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삭개오의 전인격과 그의 생애를 송두리채 뒤흔들어 놓은 대지진과 같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진은 소멸되지 않고, 지금도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옛사람의 파괴요, 새 사람의 탄생이라는 엄청난 인생의 지각변동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죽음과 생명의 부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리 마태의 경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험입니다. 다메섹 도상의 박해자, 사울이 받은 경험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삭개오의 경험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 -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사랑의 폭풍이요, 은혜의 폭풍이요, 축복의 폭풍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임한 복음의 대지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Ⅰ. 은혜와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본문 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 고 하셨습니다. 그 집이 누구의 집인가? 삭개오라 이름하는 세리장의 집입니다. 그 집은, 백성의 고혈을 짜서 부자가 된 집입니다(눅19:2).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그 집은 틀림없는 변절자의 집입니다. 로마 주구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유하러 들어가신 집은 죄인의 집이었습니다. 그것을 삭개오 자신이 인정했습니다. “뉘게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노라”고 했습니다(눅19:8).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가 부자가 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의 행복을 도적질했겠습니까? 그의 곡간에 보화가 쌓일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원성이 쌓였겠는가? 그가 배부를 때,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려야 했겠는가? 삭개오는 자타가 인정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메시야가, 죄인의 집에 머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머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주님의 파격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네 집에서 먹고 마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의 풍습은 초청을 받지 아니하면 남의 집에나, 남의 집 잔치에 참석하지 않 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네가 초청을 하던지, 초청을 하지 않던지,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편에서 삭개오에게 베푸신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선수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삭개오 편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소명입니다. 이 부르심은 주권적인 부르심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자격 없는 삭개오를 조건 없이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나와 여러분을 그렇게 부르십니다. 우리가 삭개오 보다 의로운 것이 있습니까? 삭개오 보다 선한 것이 있습니까? 삭개오 보다 깨끗한 것이 있습니까? 삭개오처럼 속물스럽고, 삭개오처럼 탐욕스럽고, 삭개오처럼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죄 많고, 허물 많은 나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이 하나님의 은혜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주여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주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우리는 진정 행복한 죄인입니다. Ⅱ. 구원을 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본문 9~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삭개오는 어떤 사람인가? 1.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뜻은 성별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혈통적 아브라함의 후손뿐 아니라,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도 포함됩니다. 이 말씀은 그가 구원의 언약 안에 예정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후사란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리고까지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 사람도” -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은 성별된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해야하고, 정결해야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칭찬과 칭송을 들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의 지탄의 대상이고, 죄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위대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로다” - 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추하고, 악하고,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나와 여러분이 바로 “이 사람도” - 의 범주에 들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2. 그는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그는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의 신분이였는데, 지금은 세리요, 죄인의 신분이되었습니다. 자기의 근본을 잃어버린 사림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출세하느라고, 부자되느라고,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영적인 축복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오늘 나와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잃어 벼렸습니까? 3.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렸다.”고 했습니다. 삭개오의 구원은 자력구원이 아닙니다. 자기의 노력도, 자기의 공로도 아닙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주어진 것이다” 타력 구원입니다. “예수!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마1:21). 기독교는 바로 이 타력 구원 종교입니다. Ⅲ. 예수님의 부르심은 효과적인 부르심입니다. 본문 6절에 “급히 -”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입니다. 지체할 수 없는 시급한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구체적인 행동을 촉발하셨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진솔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겸손케 하는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는 높은 뽕나무 위에서 내려와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지금 세리장 삭개오의 인격의 중심부에 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영혼 안에 생명의 요동이 일어났습니다. 성도여러분 ! 과연 기독교는 인류에게 소망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과연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확실한 대답은 “될 수 있다”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주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이 예수님의 초청이 있기 때문입니다. 찾아오시는 예수님! 문을 두드리는 주님의 음성이 있는 한 인류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타력구원의 종교, 기독교입니다. |
출처: 주일학교 설교 모음 원문보기 글쓴이: sang hee K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