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 헨리코(7.13)
헨리코(7.13)
성인명 헨리코 (Henry)
축일 7월 1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황제
활동지역
활동연도 973-1024년
같은이름 앙리, 하인리히, 헨리, 헨리꼬, 헨리꾸스, 헨리쿠스
성 헨리쿠스 2세(Henricus II, 또는 헨리코)는 973년 5월 6일 독일의 바이에른(Bayern) 또는 힐데스하임(Hildesheim)에서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2세와 부르고뉴(Burgogne)의 왕인 콘라트(Conrad)의 딸 기셀라(Gisel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 작센(Sachsen) 왕조를 시작한 하인리히 1세(918~936년 재위)의 손자였지만, 오토 2세 황제(973~983년 재위)와 오토 3세 황제(996~1002년 재위)에게 모두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바이에른에서 추방당하여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는 프라이징(Freising)의 아브라함 주교에게 교육을 받다가 힐데스하임의 주교좌성당 학교를 졸업하고 바이에른으로 가서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성 볼프강(Wolfgang, 10월 31일) 주교의 제자가 되었다. 995년에 사망한 부친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4세가 되었고, 998년에는 룩셈부르크(Luxembourg)의 여백작인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3월 3일)와 결혼하였다. 결혼 첫날밤에 성녀 쿠네군다는 남편에게 정결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하기 위해 동정을 지키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남편인 성 헨리코 또한 평소 그러한 희망이 있었다며 일생 남매처럼 지내되 세상에는 알리지 말자며 동정서원을 발했다.
성 헨리코가 황제에 오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1002년 1월 23일(또는 24일) 오토 3세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의 로마로 진군하던 중 비테르보(Viterbo) 근처에서 21살의 나이에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세 명의 후보자가 독일의 왕권을 차지하고자 했다. 그중에서 성 헨리코가 가장 강력하게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였지만 귀족들 상당수는 그의 즉위를 반대하였다.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그해 6월 독일 마인츠(Mainz)에서 영향력이 큰 소수의 귀족과 교회 인사들의 도움으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마인츠의 성 빌리지스(Willigis, 2월 23일) 대주교에게 도유를 받고 왕위에 올랐으나 실질적으로 최종 승인을 얻기까지는 1년이 더 걸렸다. 그 후 1014년 2월 14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베네딕토 8세(Benedictus VIII)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올렸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독일의 왕으로서 영주권에 대한 왕권의 확립과 독일 성직계의 강화와 교회의 개혁과 쇄신이었다. 그의 통치 중에 독일 왕국의 동쪽 국경은 안정되었다. 그는 왕의 권한과 왕실 교회를 활용하여 권력을 확고하게 하고 영토를 통합시켰다.
성 헨리코는 성녀 쿠네군다와의 혼인 중에 동정을 지켜 ‘요셉의 결혼’이라는 전설이 나올 만큼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스승은 성 볼프강이었고, 클뤼니(Cluny) 수도원의 기틀을 마련한 성 오딜로(Odilo, 1월 1일)와 복자 리카르도(Richardus, 6월 14일)는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젊어서 사제직에 관심이 있었고, 결혼 후에도 수도자가 되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자신의 직책상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신심은 수도자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교회에 관련된 그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1004년 메르제부르크(Merseburg) 교구를 복구한 것과 1007년 밤베르크(Bamberg) 교구를 설정하고, 그곳을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든 것이다. 그는 또한 여러 수도원을 세우고 당시 권력을 독점하던 왕실 수도원들을 개혁하였다. 그리고 대립교황인 그레고리오 6세(Gregorius VI)에 맞서 교황 베네딕도 8세를 지지하였고, 독일의 시노드들에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1014년과 1022년에는 교황과 함께 개혁을 위한 시노드를 개최하여 참석하였다. 그는 1024년 7월 13일 괴팅겐(Gottingen) 근처의 그로나(Grona)에서 세상을 떠나 밤베르크의 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성 헨리코 2세는 1146년 교황 에우제니오 3세(Eugenius 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라 중세 독일의 왕 중에서 가장 명예로운 왕이 되었다. 성 헨리코는 냉철한 실천력으로 단기간에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황제의 권력을 회복하고 대내외적으로 교회를 보호하며 선교하는 것을 국가의 과제로 간주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신성한 왕권을 행사하며 성직자들을 자기 주권의 강력한 지지자요 제국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보조자로 생각했다. 그의 전례적 기념일은 1631년 선종한 날인 7월 13일로 로마 보편 전례력에 삽입되었다가 1668년 7월 15일로 변경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7월 15일 목록에서 성 헨리코가 아내인 성녀 쿠네군다와 함께 순결을 지켰고,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Stephanus, 8월 16일) 왕과 함께 왕국 대부분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밤베르크에 묻혔다고 전해 주었다. 196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인 7월 13일로 다시 돌아왔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13일 목록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성 헨리코가 아내인 성녀 쿠네군다와 함께 교회의 삶을 쇄신하고 유럽 전역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힘썼으며, 선교의 열정으로 가득 차 많은 주교좌를 설립하고 수도원을 세운 후 오늘날 독일의 괴팅겐 근처 그로나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