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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신앙고백서 4.성경-대선지서/소선지서
the four major prophets-- Isaiah, Jeremiah, Ezekiel, Daniel;
네 명의 대 선지자가 기록한 이사야, 예레미야(*애가 포함), 에스겔, 다니엘;
선지자 이사야는 주로 유다 왕국의 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 왕 시대에 활약하였으며, 여호와께서 예수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직접 현현하실 것과 구속사역을 담당하실 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예언하였다. 아울러 짧게는 백 여 년 후에 멸망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바사 왕 고레스의 실명을 거론하며 예언하기도 하였다. 이사야가 예언한 바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른다는 것은 임마누엘이신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복음이라는 샘이 사막과 같은 세상에 차고 넘치도록 전파된다는 것을 뜻하고, 동산에서 어린아이와 사자와 곰과 사슴과 뱀 등의 동물들이 종류에 상관없이 서로 해를 끼치거나 당하지 않고 어울려 논다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어 세워진 주님의 교회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각양각생의 성도들이 모여 복음으로 어우러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인해 매국노라는 누명을 감수하고서도 조국 유다 왕국의 멸망을 예언하고 지켜봐야 했던 눈물의 선지자였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명령이라서 하기 싫은데 억지로 강압적으로 예언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언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의 심령에 불이 붙는 것 같은 괴로운 열정에 사로잡혀서 순종한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왕국 시대의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유독 예레미야에게는 그의 심령에만 말씀하시고 외형적으로는 그 어떤 표적과 기사와 이적도 주시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예언 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도 드러낼 수도 없어서 갖은 괴로움을 당해야 했고, 시드기야 왕을 비롯한 유다 백성들은 오로지 그의 예언만으로 판별해야 했으며 끝내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선지자를 핍박하는 중죄에 빠지게 되었다.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표적과 기사를 주시지 않은 것은 유다 백성들을 혼미한채로 내버려두셔서 멸망에 이르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주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전하신 것은 표적과 기사들이 아니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의 편지였다. 따라서 교회에서 성경과 복음 사역과 설교자들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교회를 로루하마와 로암미로 삼으시겠다는 징조라 할 수 있다.
선지자 에스겔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국 여호야긴 왕을 비롯한 유다 백성들 얼마를 포로로 잡아간 때에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중에 여호와 그리스도께 부름받아 예언 활동을 하였다. 시기적으로는 아직 유다 왕국에 머무르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와, 바벨론의 왕궁에서 선지자를 하고 있는 다니엘과 동시대를 지내고 있었다. 에스겔은 종종 여호와 그리스도의 예언을 몸으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사람들 보기에 기괴한 행위를 해야 하는 수치를 견뎌야 했고, 예언을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갑자기 잃어야 한데다 슬퍼해서도 안되었으며, 겉으로만 듣는 척하며 찾아오는 가식적인 장로들에게도 예언을 해야 했었다. 그런데도 에스겔은 여호와 그리스도께로부터 어떤 위로나 칭찬이나 격려를 받지도 못하고 도리어 예언을 하지 않을 때 초래되는 피의 책임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여호와 그리스도의 선지자라 하더라도 지극히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눈으로 봤을 때 동시대 인물인 다니엘이 비록 같은 포로된 처지라 하더라도 자신과는 다르게 바벨론의 왕궁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는데다가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온갖 지혜와 환상을 풍족히 부어주셔서 바벨론 전역에 그 명성이 자자해지는 것을 보면서 일말의 자괴감도 가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은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을 견뎌내고 선지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였고 비록 표면적으로는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냉정하게 다루시는 듯해도 다니엘에 못지않은 웅장하고 영광스러운 환상을 통해서 여호와 그리스도의 돌보심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목격한 그룹을 타고 강림하는 사람의 형상을 한 신적 존재의 모습은 요한 사도가 밧모 섬에서 환상 중에 목격한 하늘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룹을 타시고 강림하신 모습과 동일하기 때문에, 에스겔이 본 사람 형상의 신적 존재는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할 수 있다. 에스겔이 말미에 기록한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의 환상은 훗날에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참 성전으로서 직접 이 땅에 오심으로써 복음의 물이 만방으로 뻗어나가게 되는 것을 예언한 것이다.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을 1천척마다 세 번 측량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연관된다.
다니엘은 예레미야, 에스겔과 동시대 인물로서, 에스겔과 같은 시기에 느부갓네살 왕궁의 포로로 잡혀가 특별한 교육을 받고 왕궁에서 활약한 선지자였다.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의 꿈속에서 본 자기자신을 상징하는 금, 은, 철, 철과 진흙으로 만들어진 신상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은 비단 느부갓네살 왕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교회의 역사적인 흥망성쇠와도 관련이 있어보인다. 다니엘이 벨사살 왕에게 풀이해 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심판의 문구 또한 비단 벨사살 왕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맛을 잃은 소금과도 같은 거짓 교회와 거짓 신자와 거짓 목사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다니엘이 강가를 거닐다가 환상 중에 목격한 우바스 정금 띠를 두른 사람 형상의 신적 존재는 요한 사도가 계시록에서 묘사한 하늘의 주님의 모습과 동일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시라 할 수 있다. 유다 왕국의 귀족이었으나 바벨론의 포로가 된데다 오래도록 바벨론과 바사의 왕궁에서 총리의 역할을 신실하게 수행한 다니엘의 모습에서 교회와 성도들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세속 정부가 선하든지 악하든지 복음의 원리를 따라 마땅한 순종과 충성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and then the other twelve minor prophets-- Hosea, Joel, Amos, Obadiah, Jonah,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Haggai, Zechariah, Malachi.
또한 그밖의 열두 소 선지자가 기록한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호세아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예언을 위해서 정숙한 여인이 아니라 음란하고 문란한 여인을 아내로 들여야 했고 자신과의 부부관계에서 낳은 자녀가 아니라 결혼 후에도 다른 남자들과의 간음으로 아내가 낳아온 자녀들을 아버지로서 양육해야 하는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의 모습은 다름아닌 주님을 남편으로 모시면서도 버젓이 범죄를 저지르는 교회와 신자들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호세아의 모습에서는 주님께서 교회와 신자들을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와, 목사가 교회와 신자들을 어떻게 얼마나 사랑해야하는지와,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해야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요엘서에서는 극심한 자연재해가 범죄한 백성들에 대한 여호와 그리스도의 징벌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교회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세계적으로든간에 통상적인 자연현상이 아니라 모종의 비상적인 자연재해는 교회와 인류의 극심한 범죄에 대한 주님의 징벌이라 보아야 하며, 선지자 요엘의 예언대로 오로지 진정한 회개만이 재해를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울러 요엘은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시리라는 유명한 예언을 하는데, 이에 대한 대부분의 교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그 때를 매우 즐겁고 기분좋은 날로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엘은 여호와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과 더불어 하늘과 땅에는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 나타나게 되고 여호와 그리스도의 날은 크고 두려운 날이라는 정반대의 예언을 한다. 이는 성령께서 보혜사로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임하시는 것은 분명 우리의 구원과 신앙을 위해 필수적이고 유익한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받은 성령을 가지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악용하거나 그저 아무 개념없이 희희낙락하거나 하찮게 여겨서 성령을 소멸시키는 자들은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를 때 견디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성령을 받은만큼 자신이 가야할 좁고 협착한 길과 자신이 메어야 할 십자가의 멍에를 인식하며 매사에 조심하는 성도들은 크고 두려운 주님의 날을 안전하게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모스는 유다 왕국 출신으로서 양떼를 기르고 뽕나무를 재배하던 비천한 사람이었는데, 여호와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인해 이제는 아예 남남이 되어버린지 오래된 이스라엘 왕국에 가서 무시무시한 징벌과 심판을 예언한 선지자였다. 그는 자신의 비천한 신분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왕국의 제사장과 고관들 앞에서도 스스로 선지자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여호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은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선지자라 할만큼 율법과 계명에 해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겸비하는 말이었다. 세상에서 비천한 신분과 직업을 가진 아모스가 여호와 그리스도의 선지자로 당당하게 담대하게 활약한 모습은 흡사 주님의 제자들이 대부분 어부나 세리 등 천시받는 일을 했었어도 성령을 받은 후에는 더할 나위없는 지혜와 용기로써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한 것과 유사하다.
오바댜는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예인 에돔 족속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다.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과는 혈육이므로 마땅히 형제로서 대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조상인 에서가 야곱에게 극진한 호의와 배려를 베푼것과는 달리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시기하고 훼방하고 틈을 타서 괴롭히는데에만 치중하였기 때문에 여호와 그리스도께로부터 징벌을 받게 되었다. 이는 교회 및 성도들과 가족이나 친인척이나 친구나 학교나 직장이나 지역사회 등의 모종의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지 교회와 성도라는 이유만으로 까닭없이 해치려하고 저주하고 비방하고 악담하고 조롱하는 자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반드시 극심한 징벌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가르친다.
요나가 철천지 원수의 나라인 니느웨에 여호와 그리스도의 예언을 한 행적을 통해서는, 아무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원수와 같이 해악을 끼친 국가나 사회나 악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멸망하도록 저주와 비방과 악담과 조롱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가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의 범죄를 규탄하고 그들에게 임할 여호와 그리스도의 징벌의 심판과, 백성의 신앙 회복을 위해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한다.
선지자 나훔은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다 왕국을 침공하여 괴롭힌 앗수르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한다. 크건 작건 간에 교회와 성도들에게 적의를 가지고 참소하며 훼방하는 자들은 앗수르와 같이 용서없는 멸망의 심판을 당하게 된다.
하박국의 예언에는 불법과 불의가 횡행하는 것에 대한 탄식과 여호와 그리스도의 응답과 이에 대한 선지자의 감사와 찬양이 들어있다. 탄식하는 하박국의 모습에서는 하늘의 제단 밑에서 순교자들이 하루빨리 심판을 집행하실 것을 탄원하는 것과 이 순교자들에게 주님께서 흰 옷을 한 벌씩 주시며 조금만 더 기다릴것을 종용하시는 모습이 연상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는 하박국의 유명한 고백은, 그저 입술로만 가볍게 흥얼거리는 노래로 끝나서는 안되고 설령 복음으로 인해 나사로처럼 거지가 되어 굶어죽을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주님 한 분만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선지자 스바냐는 히스기야 왕의 4대손으로서 유다 왕국의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로서 유다 왕국의 범죄를 규탄하고 멸망의 형벌을 예언하였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 그리스도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는 스바냐의 예언은 단순히 아름다운 곡조에 맞춰 잔잔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노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징벌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간신히 회개하고 돌아온 신자들, 즉 부친에게서 유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떠나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다가 굶어죽을 때가 되어서야 거지꼴로 간신히 돌아온 아들과 같은 신자들을 주님께서 그 악한 아들을 끌어안고 입맞추고 좋은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며 큰 잔치를 벌인 아버지처럼 사랑으로 품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개 선지자는 바사 왕 고레스의 명으로 성전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던 유대인들이 여러 훼방에 맞닥드리게 되면서 재건 의지가 사그라든 것을 책망하면서 조속히 성전을 재건할 것을 촉구하였다. 감사하게도 유대 백성들은 그러한 학개 선지자의 책망과 촉구를 저버리지 않고 그동안 자기들이 생계를 핑계로 성전 재건을 소홀히 여겼던 죄를 회개하고 다시 심기일전하여 성전 재건을 성공적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이 둘째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비록 외형적으로는 솔로몬의 성전보다 한없이 보잘것 없어보여도 성전에 내리실 영광과 은혜는 솔로몬의 성전보다 한없이 클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렇게 볼품없어보이는 성전에 더욱 풍성한 영광과 존귀와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은, 이 땅의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독생자이시자 참 성전이신 것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신 성도들의 볼품없는 인성에 거하셔서 우리 자체를 성전으로 삼으신 것과, 사도 바울이 고백한 바 우리의 육신이 후패해갈수록 우리의 영이 날마다 새로워지게 되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학개 선지자의 예언을 교회 건축의 근거랍시고 교인들에게 건축헌금을 강요하는데 써먹는 목사들은 자기들의 욕심 때문에 성경을 왜곡하고 악용하는 자들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와 같이 활동하였는데, 유대인들이 성전 재건을 완성하기는 하였으나 그것 자체만으로 신앙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오해하여 실제 제사와 삶으로는 여전히 거룩해지지 않으려는 그들의 태도를 예언으로 책망하였다. 스가랴 선지자가 기록한 여러 환상들은 요한계시록의 환상들과 비슷한 부분이 여럿 발견된다.
말라기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의 활약으로 어찌어찌 성전 재건과 제사를 회복시킨 유대 백성들이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타성에 젖어 마음이 결여된 제사를 드리다가 결국에는 거저줘도 안받을 하찮은 제물을 바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예언으로 책망하였다.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온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한 것이라면 과부의 두 렙돈도 어느 부자들의 헌금보다도 크게 받으시고, 설령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부자들의 큰 헌금은 영적인 유익은 없을지언정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약간의 유익을 얻을 수 있으나, 마음도 없고 물질적 가치도 하찮은 헌금은 불탄 포도나무 가지처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유대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내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어떻게든 유대 백성들의 질낮은 신앙을 끌어올리시려는 회유책인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세속적인 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들의 신앙이 매우 저열하고 하찮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구약성경은 말라기에서 완결되며, 이후 말라기가 예언한 선지자 엘리야, 즉 세례 요한이 등장하기까지 대략 4백여년 동안 선지자를 통한 예언은 중단된다. 이 기간 동안에 유대인들은 다니엘의 예언처럼 헬라 왕 알렉산더를 거쳐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고, 유대인들이 지켜온 구약성경들은 알렉산더의 부하 중 하나이며 이집트 지역을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투입되어 헬라어로 번역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