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해안 산골마을, 내 고향마을인가 싶다.
오래된 옛집이 대부분이다. 예전에는 모두 짚으로 이엉을 이은 초가였으나 오래 전에 기와, 함석, 스레이트 등으로 지붕을 고친 집이 있다.
새앙골(샘골 사투리)에는 五家였으나 제일 하단에 있는 담부리집(잔돌을 부은 언덕 아래)이 사랑방을 개수하여 주인과 임대하는 양 살았기에 六家.
한 지붕 두 세대인 아주머니는 80대 할머니 혼자서 산다.
지난해 여름철에 주인집 조씨 노인네가 대전 석교동 자기네 집으로 갔다가 孤獨死했다.생골에는 현재는 두 집에만 사람이 산다.
생골 가운데집에는 황씨네 할머니 아들내외 자식 둘이 산다. 어린애들이 커서 지금은 중고등학교에 다닌다.
1957년부터 함석집이라고 불렸던 내 집은 이제는 나 혼자만 주민이다.
둘이서 함께 살던 어머니가 2015년 2월 말에 돌아가신 뒤에는 주로 서울에서 머물다가 해동되는 봄철에 잠깐 내려갔다. 씨앗 뿌리고, 초가을에는 선산 벌초하러 내려가고, 늦가을에는 시향/시사에 참가하려고 잠깐씩 머무나 대부분은 서울 아파트에서 머문다.
오래된 낡은 옛집이라서 겨울철에는 위풍이 무척이나 세고, 추워서 더욱 그렇다.
예전에는 사면초가(四面草家)였으나 지금은 아니다.
草家지붕을 인 집은 하나도 없다.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사업을 하면서 지붕개량을 했다.
짚으로 덮은 이엉지붕을 벗겨내고는 값이 싼 쓰레이트로 개량했고, 조금 나은 집은 기와지붕, 함석지붕, 시멘트 콘크리트 지붕 등으로 개량했다.
내 시골집에는 스레이트로 된 창고 지붕이 몇 평 쯤 되며, 인체에 해로운 석면지붕이다.
석면 폐암환자가 많은 충남 광천에서 제조했을까?
1957년 봄에 초가지붕을 벗겨냈던 당시를 기억한다.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에 다녀오니 초가지붕에 머슴(일꾼아저씨), 동네사람, 대전에서 온 목수들이 짚을 벗겨내고 있었다.
얼마 뒤 산뜻한 함석집으로 변모했다.
한때 근동에서 알아주던 함석집이었다.
지금은 2010년대 말.
사면초가인 곳이 있을까?
경남 경주 양동 민속마을, 전남 순천 낙안읍성, 안동시 안동하회마을, 충남 외암리 민속마을 등지에는 조금은 남아 있겠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
이제는 가고 없는 그들.
이제는 사라져간 옛기억들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무슨 까닭일까.
'꿈엔들 잊힐리야' 김열규 씨의 책을 펼쳐야겠다.
오늘은 무척이나 날씨가 서늘하다.
서해안 대천에서 큰당숙이 전화하셨다.
오는 9월 15일(토요일)에 서낭당 앞산 산소부터 금초한다고.
서낭당 당산 느티나무에는 금테 두른 흔적이 늘 남아 있다.
아내는 그날 전남 동광양시 친정 여조카의 딸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다면서 속으로 불불거린다.
'당신은 결혼식장에 가, 나 혼자 내려 갈 거여'라고 말했으나 아내는 대꾸도 안했다.
당뇨약 먹는 남편 혼자서 시골 내려가는 게 무척이나 그럴 게다.
2018. 8. 26. 일요일.
첫댓글 요즘은 초가지붕도 보기어렵네요. 전시용으로나 볼수있을까?
예... 그거 짚으로 이엉, 나래를 엮고 매고하는 곳 거의 없을 겁니다.
비용 많이 들고, 기술자도 없고, 짚으로 올린 지붕은 오래되면 케케한 냄새 썩는 냄새가 나고,
쥐, 참새, 노랭이 등의 동물과 벌레가 끼어들고...
화재가 나면 치명타를 입겠지요.
그 옛날 초가집 큰 방에 큰
이불 하나에 옹기 종기 둘러
누워잤던 기억이 새록이게
하는 초가집 생활이 그리워집니다
이엉 나래를 엮는 그 때가
행복했던 기억은 아마도 생활의 책임이 없어서일지 모르겠습니다
예.
동네마실 가면 사랑방에서 누나, 또래 처녀들과 함께 이불 속에 발을 뻗쳐서, 살짝 톡톡 건드리고는...
벌써 50년 전 저너머의 세상 이야기입니다.
도시태생에 도시에서만
살았으니 사면초가 구경은
민속촌에서나 했지요~
예전에는 정이 있었지요. 구부렁거리는 논길이며, 마을안길이며, 가난한 사람들이 정말로 많았지요.
지금은 앞산, 앞뜰이 산업단지로 또 편입되고... 북편만 조금 남았네요.
저한테는 꿈엔들 잊힐리야가 되었네요. 마을 전체적인 윤관은 남아 있어도 많이도 훼손되었지요.
예전 시골에선 함석집이면 최고였죠
한방에서 여러형제가 같이 살던시절
그렇게 자란 형제가 더 정이 좋대요
요즈음 옛날 그시절이 그리울때가 많아요
댓글 고맙습니다.
예전 시골집에서는 고만고만한 얘들이 바글바글했지요.
온 동네가 다...
지금은요? 서해안 산골마을에서는 노인밖에... 그것도 할머니들이 대부분...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다운 것인가요?
님의 댓글처럼...
저 역시 도시에서 자라
아직 도시에서 사니
농촌의 초가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초가가 국보급 입니다 ㅎㅎ
진짜 초가는 거의 없을 겁니다.
현대식 모조품이기에... 나무기둥 하나만 보았도, 문짝을 보아도.. 모두 모조품 가짜...
초가... 그거 사진 속에나 진짜를 보겠지요.
댓글 고맙습니다.
울동네는 대다수 와가여서 함석지붕은없고 마을종갓집에서는 밖깥어른이 돌아가시고 안계시고 친구와 그 어머니가 살고있어서 맨날모여 이불속에 다리펴고 남동창 들과 지지고볶고 놀았지요 ㅎ
그리운 그때 그시절의 추억과 기억을 많이 지니셨군요.
군불 때서 따끈따근한 방바닥... 이불 속에 두 다리를 쭈욱 뻗은 모습들이... 떠올려집니다.
그 얼굴들, 그 이름들이 떠오르고... 저는 더러는 이름조차 생각이 지워지는 세월에 와 있대요.
고맙습니다.
그쪽에서는
벌초를 금초라고 하는군요
해마다 문중 벌초 동참 인원이 줄어들어
너무 힘이 드는데 올해는 몇명이 참석할지
벌써 걱정이 됩니다
더러 사용하고 유식한 말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풀이를 올리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伐草-무덤의 잡풀을 베고 다듬어서 깨끗이 함. 禁草-불을 조심하고 때맞추어 풀을 베어 무덤을 잘 보살핌
@하염없이 예.
풀 베다. 벌초, 금초... 금초가 입에 뱄지요.
금초에는 불이라는 개념도 들었다는 뜻풀이에 고맙습니다.
서해안 보령지방에서는 '금초'가 입에 밴 말이지요. 저도 여든할 살의 당숙한테 얼마 전 들었고요.
禁火伐草 : 약자이군요. 덕분에 공부합니다.
금초, 벌초, 사초 : 무너진 무덤에 흙등을 돋궈주고 잔디 등을 심어주는 것...
""사면이 초가"인 곳은 양동마을, 낙안읍성, 하회마을, 외암리 민속마을 등이 잘 알려져 있고 아주 귀한 유산입니다.
새마을 사업의 최대 실패작이 초가집을 무차별적으로 없엔 것이라고들 하니 근래 아담한 현대식 마을도 잘 보존했으면 좋겠는데 마구 허물어 버리니 안타깝습니다.
좋을 글 잘 보고 갑니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
때로는 강제였고, 때로는 자발적이었고... 좋은 의미도 있지만 더러는 아쉬움도 있지요. 옛것들이 다 부셔서 내다버리는 것으로만 여겼기에.
돌담. 흙벽, 느티나무, 서낭당, 뜻이 있는 바윗돌, 옛지명(토박이말), 생활용품들이 많이들 사라졌지요.
또 민속품 수집 장사꾼이 슬쩍 훔쳐가고...
댓글 고맙습니다.
양동마을에는 함석집도 없고 초가집도 없습니다.
양동마을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대부분 기와집이고, 더러는 초가도 나오는데...
양동마을에는 모두 기와집인가요?
머슴, 종. 평민들도 다 기와집에서 살았나요?
2015년 11월 늦가을 양동마을 입구의 민가에서는 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지붕에 올리는 모습이 기억나는데...
고개가 갸우뚱?
함석지붕이야 구한말이나 일제시대 쯤에서 들어왔을 것이고,
500년 전쯤에 형성된 양동마을의 과거에는 전혀 없을 것이고...
제가 헷갈려서
님 덕분에 더 공부합니다.
@곰내 양동마을에, 곰내님 의견이 맞은것 같네요
초가집 전혀 없는 것 아니고요. 아직도 마을에 듬성듬성 있고요
그 지붕을 다시 이는(덮는) 일은 경주시에서 지원해 준다고 들었습니다
@우경(愚耕)
예.
제가 초가지붕을 이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초가도 무척이나 많았는데...
님의 댓글에 고맙습니다.
초가집을 부수지 않고 보존하려면 그게 엄청나게 불편하며, 돈이 많이 들겠지요.
경주시에서 보조해 주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