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15분 전에 읍사무소 앞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어서 한참 두리번거리다 보니 관광버스가 도착했다 조금 있으니 함께 떠날 여러 선생님이 곳곳에서 도착했다 더러는 어린 학생을 대동하기도 하고 8시30분에 버스가 출발하고 나는 세 번째 창가에 앉았다
증평에서 두 분이 기다리다 합류하고 버스는 고속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옅은 보랏빛 안갯속 유연한 산 능선에 불그레 물드는 나무들 계단 같은 논두렁 층층이 황금빛 물결이 골짜기를 타고 오른다 물빛은 하늘빛을 닮아 청록색 강물이 비단처럼 구불구불 하얀 모래밭과 절묘한 앙상블로 차창을 스치고 누런 바둑판 같은 들판은 잘 기운 큰 쪽보를 펼쳐놓은 듯한 추수한 논과 지금 막 수확을 하는 논이 강줄기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다
양지바른 언덕배기 곤히 잠든 이들의 보금자리 옆에 하얀 억새들의 빤작이는 은빛 머리, 도로 옆 방음벽을 도배하며 기어오르는 빨간 담쟁이덩굴도 꽃처럼 불게 물든 벚 나무 잎도 개나리꽃 같은 은행잎도 이제 모두 환갑을 넘긴 누른 푸새들 저마다 갈 길이 바쁜 조금은 서글픈 계절이다
지붕에 조는 늙은 호박, 도로변에 늘어놓은 벼도 빨간 감이 주렁주렁 익어가는 작은 마을마다 우산처럼 알록달록한 지붕, 평화롭고 아늑한 그림들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고 정겨운 풍경이다
하동 가까이 올수록 강줄기 따라 파란 녹차 밭이 펼쳐지고 쌍계사로 접어드는 도롯가의 벚 나무들은 어느새 헐벗은 가지에 몇 개의 빨간 잎을 매단 채 아름드리 까만 알몸을 드러내고 하늘 높이 치솟은 상수리나무와 소나무들로 서늘한 터널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 쌍계사에 도착했다
사찰이 다 그렇듯이 일주문 지나 사천왕, 종각 지나 대웅전을 돌아 내려와 그곳의 특산물 참게 탕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강줄기를 끼고 달려 최 참판댁이 있는 평사리에 도착하니 세시 경이었다. 바둑판처럼 잘 경지 정리된 황금빛 들판 여기저기 사람숫자보다 더 많은 허수아비가 먼저 나와 우릴 맞아주었다
토지를 찍으면서 만들어둔 세트장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는 평사리는 우리를 그 옛날 소설 속으로 안내하여 한참을 꿈속에서 헤매듯 월순이네 집을 지나 길상이네 집에서 막걸리 와 도토리묵으로 목을 축이고 최 참판댁을 들러 탁 트인 앞 들판을 바라보니 소설속의 서희가 안에서 걸어나온다
초당을 지나 대숲이 우거진 토지문학관으로 향했다
박경리 선생님이 26년을 걸쳐서 완성했다는 대하드라마가 한눈에 펼쳐진다 병마와 싸우며 작품을 집필하시는 동안 "토지에 묻혀 살았고 토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고하는 것은 능동성의 근원이며 창조의 원천이다"
팔년만의 외출이 라는 선생님의 좌우명을 총총히 읽으며
선생님의 혼신을 다하시는 집념에 머리 숙여진다 올 오월에 타계하신 선생님을 추모하는 많은 글이 시화로 펄럭이고 선생님의 위대한 숨결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5시쯤에서 돌아오는 길은 남원 쪽으로 돌아 올라왔다 노을이 지는 섬진강에 몇 척의 배가 한가로이 떠 재첩잡이를 하고 강물은 유유히 멎은듯이 흘러간다
첫댓글 하동 가을 들녘 보기 참 좋았는데.. 저도 하동 여행한적 있거든요.. 녹차밭도 이쁘고..
그래요~~~~그곳에 시배지가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