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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연구 | 강인한 | 신작 시 |
견우牽牛 외 2편
내 외로 가는 고운 날에
두어 평 텃밭을 장만하면
거기에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맞는 내 꽃모종
수정에 뜨물 부어 새순 기르듯
눈물을 길어 잎을 틔우고, 씨를 얻어 보리.
아기씨 족두리에 꿰인 구슬 알맹이들이
몸 비비며 수줍어하는 밤 이슥한
순금純金의 회오리바람.
불씨 빌려오듯 소중한 금빛
고단한 잠은 깨우지 않고 꽃잠은 깨우지 않고
멀리서 초록 두꺼운 해가림하며
쉼 없이 보살피리.
잔등이에 금이 간, 저 소용돌이를 타는 거북이
거북이의 닳은 발바닥을 가슴에 얹고
이랑 진 등허리에 살을 출렁이게 하는, 아기씨
은은히 나부끼는 은실 웃음 보려면
굽이 저승에서 동아줄 늘여
내 꿈 낚는 한 백년
백년을 땀 흘려도 싫지 않으리.
살진 은어銀魚가 무지갯빛 비늘로
한 마장의 물결 걷어 올리는 모양 익히어
수정 속 같은 바람 더불어 한 백년 땀방울로
꽃밭을 매며 살아 보리,
살아 보리.
하마 오늘 밤,
이승에서 밝히는 새우잠 속에라도
아기씨 눈썹 적실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내리겠지.
***
별이 지는 밤
어둠 속에서 문득
한 줄 네 마음의 실이 끊어져 나갔다.
어디선가 꽃 지는 소리, 밤새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산사나무,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얼크러진
산 여울의 은빛 비탈을 넘어
머언 둑을 소요하고 있을, 설레고 있을
내 소년의 바람이여.
잃어버리는 것, 잊혀지는 것 애석지 않아
사는 것, 내 사는 것이 호젓하였다.
끊어져 나간 네 마음의 끝 간 데에서
바람은 지금 길눈이 캄캄할 것이다.
어리석은 속단처럼
여기저기 흰 밤별이 떨어졌다.
***
풍경을 애완하다
유리 성城의 뜨락에는
유리의 햇살이 찰찰 부서지고,
까만 눈썹
사과 빛 뺨이 언제나 수줍은
네덜란드 소녀.
화사한 마음으로
미소하는 입 언저리에
해말간 꿈빛이 돌아
둥실한 구름 한 점
구름 속 새 울음 한 점
없어도
겨우내 외롭지 않은
귀여운 아이.
먼 고향 하늘엔 풍차가 도는데
네덜란드 소녀
커다란 눈망울에
파란 봄이 어린다.
| 작가 연구 | 강인한 | 근작 시 |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 2세 외 4편
삼천 년도 훨씬 지나
이제야 나는 바코드라는 지문을 가진다.
모래와 바람과 강물처럼 흘러간 시간이었다.
넌출지는 시간의 부침 속에
스쳐 가는 존재들,
철없는 것들,
공포의 아버지가 무섭고 두려웠으리.
아랍 놈들이 코를 뭉개고, 영국 놈들이
수염과 턱을 깨부수고 마침내
스핑크스는 눈도 빠지고 혀도 잃어버렸다.
시간의 돛배를 타고 이승, 저승을 오가는 검은 태양.
한 나라의 역사란
파피루스의 희미한 글자들
바스러지는 좀벌레들에 지나지 않으리,
날마다 피를 정화하는 히비스커스 꽃차를 마셔도
추악한 것을 어찌 다 씻어서 맑히랴.
콩코르드 광장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
저것은 일찍이
테베의 신전 오른편에 세운 것이었다.
트랩이 내려지고 갑자기 울려 퍼지는 팡파르,
공항이다.
엄정한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나는 아부심벨에 두고 온 사랑을 생각한다.
불타 버린 심장으로 느낀다.
전쟁에 이겨야만 남의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저 오벨리스크가 침묵으로 말한다.
이곳에서 나는 이집트의 파라오,
까마득한 이방의 시간과 대지 위에 서 있다.
***
배낭을 짊어지고 아고라로 가는 사람들
아고라의 아침은 비둘기들의 조찬으로 시작된다.
가로등 아래 진설된
말라붙은 컵라면과 한밤의 토사물과
지난밤 다른 도시에서의 테러와 소요
종교부족 간의 전쟁 기사를 싣고 뒤척거리는 신문지들.
우리들의 내부에서
녹슨 태양이 술렁이는 아침
우리들의 과거는 검푸른 이오니아의 바다
학교에서 바라본 금환일식, 금테 두른 태양
혹은 노래도 꽃도 없는, 진실이 없는
신문지.
모두들 헤어져 간 소년들의 운동장에서,
은밀한 숲 속 산책로에서
발길에 차이는 마스크, 마스크, 마스크……
가위눌린 꿈속,
떠나간 친구들의 엉뚱한 변모
집배원의 피곤한 손에서 반려되는 우리들의 안부.
경광등 번쩍이며 사이렌이 울리고,
우리들의 영웅은 없고 슈퍼맨도 오지 않는
시시티브이를 피해서
유아를 학살하는 어린이집 지붕에 비둘기와 낮달
울고 있는 아이들, 아이들의 삭은 이에
순금의 비가 내린다.
하늘에서의 분분한 낙하, 그것들이 맑은 음색으로
대낮의 시가지를 뛰어다닌다.
주말이나 휴일 우리들은 영화관에 갔다가 외식을 하고
바람이 이는 엷은 미열을 느낀다.
(선별진료소로 찾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파이프오르간 기분 좋은 모음과 함께
우리들이 마련하는 한 줄씩의 귀가
일몰이 드리워진 공원 벤치에서
지그시 머리를 드는 식욕
고궁의 뒷길을 가는 잿빛 부연 눈물
눈물 속에 잠기는 참 작은 세상, 잿빛의 카페
잿빛의 포장마차에서 문득
죽은 친구들의 하얀 손이 나온다.
그들의 하얀 손이 나와서 어두운 우리들의 이마를
뭉쳐져 있는 기억을 더듬는다.
나무가 자란다.
가시 돋친 나무가 철근처럼 지붕을 뚫고 자란다.
그 나무 등걸 안에 은밀한 음성과 식탁,
아침 식탁을 앞에 두면 우리들은 마리오네트
즐거운 마리오네트
우리들의 내부에 순순히 귀항하는 늙은 태양.
두 개의 국기를 배낭에 창검처럼 꽂고
국경일 아침마다 아고라로 나서는 사람들
검찰의 선택적 수사와 선택적 기소와 선택적 정의를
사랑하는 영원한 보수주의자들, 할렐루야
눈부신 은총 속 이 도시엔 소문이 많다.
이면도로 질척이는 헛소문에
돼지들이 빠진다.
돼지들 꿀꿀거리는 온종일
하늘엔 안개처럼 축복처럼, 방사능 미세먼지가 뿌옇다.
***
개가 죽은 자리는 어디인가
사람으로 살기
그저 순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사람 차마 못할 일
저지르며 살지 아니하기
독한 맘 먹지 않고 순둥순둥 살아가기.
여기 어디라는데, 모질고 사나운
개가 개에게 물려 죽은 자리,
이 동네 어디쯤일까
흔적도 없네.
늙은 내외가 도란도란
공원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하늘 저만큼
고추잠자리 떼 지어 날고,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건네주는
따뜻한 보리차 한 잔.
오래전 사나운 개가 죽을 때
그때는 공기 중에 먼지도 아니었을 아이들,
앳된 아이들이 병정놀이를 하네,
삼삼오오 무전기 들고 서성거리네.
그 개가 얼마나 사나웠는지
그 개가 얼마나 악독했는지
때 되면 배고픈 저 아이들 아무것도 모르네.
짜장면을 시켜 먹었는지
아이들이 퍼질러 앉은 일대의 공기에 섞여
짜장면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세월은 가네.
***
밤새 안녕들 하신가요
요즘 모두들 한 줄로 코를 꿰어 정신이 하나도 없소.
이 특별한 감기를 전 세계에 고루 나누어
지구인이 한 동네 한통속이란 사실 배우고 때로 익혀
진리의 깨우침을 주기 위함일지니
너는 왜 안 죽고 뭐 하냐?
다들 깊은 땅속에, 산중에 진작 들어 제자릴 찾아갔거늘.
백 년 전 세월이라면 벌써 사라졌을 늙은이들은
젊은것들 손에 열쇠 물려줬을 나이로
지금도 치매나 가지고 놀려구? 예끼!
네발 달린 거라면 들짐승, 산짐승
책상다리 빼고 다 잡아먹는 중국에서 나왔는지
버릇없는 식성 시커먼 박쥐 콧구멍에서 연기처럼 나왔는지
그래 잘났네, 중국, 한국, 일본
올림픽에 목매다는 일본의 크루즈에도
후춧가루처럼 뿌려 주고 시나몬처럼 뿌려 주고
이란, 인도, 호주에도 이탈리아 스페인
콧대 높은 미국엔들 안 주면 섭섭하지.
러시아와 이집트에 한 꼬집씩, 브라질도 한 움큼……
예전에는 반세기 1세기마다
전쟁을 설설 풀어 인구를 맞추던 신통방통 묘수
홍역이며 에이즈가 안 되니 오늘은 COVID-19로,
어렵고도 어려운 지구상의 인구 문제
야훼와 알라가 머리 맞대고
종횡무진 널뛰며 쿵더쿵, 길길이 풀어 보는 중.
오존층 더 벌어진 축복의 구멍으로 눈부신 햇살 모셔내어
북극 빙산 깨뜨려 흐물흐물 조각난 얼음덩이 속
수천 년 동물 사체가 기지개를 켜네요.
그 사체에서 죽은 듯이 지내던 바이러스 해방시키고
살판 죽을판, 몽땅 떨이 팬데믹이니
어이쿠, 밤새 안녕들 하신가요?
***
지붕 위의 황소들
닷새째 내린 비로 도로는 강이 되고
어- 어- 하다가 물이 차올랐어.
그리곤 기적처럼 둥실 떠오른 게야.
간질거리는 물살들이 아랫배를 밀어 올리는
기분 좋은 부력,
이참에 여행이나 떠나 볼까
떠오른 것들이 저희끼리 신나게 노래하고 있잖아.
물침대 고무 매트도, 깔깔거리다
뒤집어진 냉장고도, 둥실둥실 귀여운 승용차도
지나가잖아. 그냥 서로 바라보며 떠올라 웃고 웃고
울고불고 이러다 죽는 거 아냐?
물 밖에 고개만 내밀고 흘러가는데,
샌프란시스코 9,023킬로미터, 카이로 8,485킬로미터,
상파울로 18,330킬로미터……
놀이공원 이정표도 떠서 건들대며 지나가는 거야.
공항 가는 리무진이 떠내려 오면 그걸 타야지.
저거야. 지구별에 불시착한 어린왕자처럼
올라보니 지붕이잖아.
아냐, 요술 담요야. 자 이제 떠나자.
저기 북극성을 향해
하쿠나 마타타, 아브라 카다브라!
| 강인한姜寅翰 시인 자전 연보 |
1944 | 3월 26일(음력 3월 3일) 전북 정읍군 정주읍 시기리 평화동에서 세무공무원 진주강씨 강형준 씨와 전주이씨 이희자 씨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남. 본명은 동길東吉. |
1950 | 이리초등학교 입학. 6․25전쟁이 터지고 당시 이리세무서장이었던 아버지가 전주형무소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함. |
1954 | 음력 3월, 광주사세청(지금의 국세청) 조사과장이었던 부친이 지병으로 48세에 별세. 광주서석초등학교 2학년부터 5학년까지 다니다가 6학년 봄 이리중앙초등학교로 전학, 거기서 졸업함. |
1956 | 3월 정읍중학교에 수석 입학. 미술반에 들어 활동했으며 학교 대표로 전북 도내 중고등학생 사생대회와 백일장대회에 참여하여 양쪽에서 각각 가작 입선을 하기도 함. |
1959 | 전주고등학교에 입학. 1학년 1학기까지는 미술반, 2학기부터는 문예반에서 활동함. 문예반 지도교사는 신석정 선생님으로 우리 문예반 학생들에게 ‘맥랑시대麥浪時代’라는 동인 명칭을 붙여 줌. 오하근・이한기가 2년 선배, 강일부・오홍근이 1년 선배, 송준오・강동길, 그리고 1년 후배로 손풍삼・이추원・김준일, 2년 후배로 이상렬 등이 늘 시와 소설을 습작하며 합평회를 가지기도 함. |
1961 | (고 3) 5월 16일 군사쿠데타 발발. 10월 성균관대학교 주최 전국 고교생 백일장대회에 현대시 장원을 함. 주어진 백일장 시제는 「오늘」. |
1962 | 전북대학교 국문과에 입학. 박정희 군사정권의 대학생 정원 축소정책으로 국문과 신입생은 정원미달인 6명뿐. 1학년 봄, 전북대학신문사 학생기자로 선발됨. 이후 4학년 1학기까지 강의실보다 교내신문사에서 더 많이 활동함. |
1964 | (대학 3) 11월, 경북대학교 전국대학생현상문예에 시 「사자공화국死者共和國」 당선. 이때부터 강인한姜寅翰이라는 필명을 사용함. |
1965 | 4월,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신 앞에서」가 당선 없는 가작으로 입선. 5월, 고려대학교 전국대학생현상문예에 시 「내 이마의 꽃밭에서」가 당선 없는 가작 입선. 겨울에 교내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더러운 강」 당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1965」의 당선 통보를 받고, 다시 나흘 뒤 당선취소 통보를 받음. 12월 15일자 전북대학신문에 발표된 작품이므로 취소한다는 것. 이듬해부터 동아일보는 ‘기발표 작품은 당선을 취소한다’는 규정을 명문화함. 그러나 요즘에도 미등단의 무명 신인이 학내의 교지나 학보에 발표하는 습작활동을 당선 취소의 사유로 삼지 않는 신문도 있음. |
1966 | 3월, 고등학교와 대학 7년간의 전주 생활을 정리하고 직장을 얻어 정읍으로 이사함. 이후 정읍의 호남고등학교에서 만 10년 동안을 국어교사로 근무함. 8월에 첫 시집 『이상기후』 300부 한정판을 전주 가림출판사에서 자비로 출판함. 신석정 선생님의 서문이 붙고 모두 30편 수록. 9월 김광림 시인이 주재한 『현대시학』에 「귓밥 파기」가 신인작품으로 발표됨. 등단 전의 비공식적인 처녀작임. |
1967 |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당선됨. 5월, 문공부의 신인예술상 문학부문 시조 「임진강」 수석 당선. 이후 ‘신춘시’ 동인에 들어 11집(1967. 4.)부터 19집(1969. 12.)까지 신춘시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함. ‘신춘시’ 20집 기념호가 준비 과정에서 무산되고 동인지의 수명이 19집으로 끝남. |
1971 | 한약방을 경영한 부안김씨 김형술 씨와 한양조씨 조순동 씨의 장녀 김명규와 결혼함. |
1972 | 장녀 율리 출생. 이 무렵 동양방송의 ‘신가요 박람회’에 본명 강동길로 응모한 노래 가사 「하얀 조가비」(노래 박인희), 「등불」(노래 영 사운드) 등이 작곡됨. 이후 정읍의 고등학교 두 곳과 평택의 신한고교 교가 가사를 강인한이란 이름으로 지어 줌. |
1973 | 장남 승일 출생. |
1974 | 1월, 두 번째지만 등단 후로는 첫 시집인 『불꽃』 500부 한정판을 전주 대흥출판사에서 간행. 시집에 모두 101편을 수록하였으며 시집으로서는 최초의 가로쓰기 조판을 함. |
1975 | 차녀 세리 출생. |
1977 | 3월, 광주의 살레시오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김. 이후 2006년 3월까지 광주에서 생활. |
1978 | <원탁시> 동인에 참여함. |
1979 | <목요시> 동인을 창립. 강인한・고정희・국효문・김종・허형만 다섯 시인으로 목요시 1집을 간행. 그 후 김준태・송수권 등을 2집부터 동인으로 영입함. 이 시기부터 시조창작에서는 완전히 손을 뗌. |
1980 | 광주 5・18 기간,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벌인 신군부의 계획적인 광주시민학살 사건을 직접 보고 듣고 겪음. |
1982 | 제3시집 『전라도 시인』을 태․멘기획에서 간행. 장석주의 해설, 카피라이터 이만재의 발문이 있고 모두 83편의 시와 프로필을 포함 이만재 촬영의 사진 20점을 함께 수록. 이 시집으로 연말에 제5회 전남문학상을 받음. |
1983 | 무크지 『민족과 문학』을 냄. 편집위원 강인한・김준태・문순태・윤재걸. |
1984 | 추석을 지낸 뒤 모친 심장병이 악화돼 65세로 별세. |
1986 | 9월, 제4시집 『우리나라 날씨』를 나남에서 간행. 77편 수록. |
1992 | 2월, 제5시집 『칼레의 시민들』을 문학세계사에서 간행. 서문에 “1980년 오월의 광주. 그때를 광주에서 겪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칼레의 시민들’이 당한 비통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났다.”라고 이 시집이 오월 광주의 시편들을 중심으로 묶은 시집임을 밝힘. 모두 60편 수록. 정현기의 해설. |
1998 | 5월, 시사성을 배제한 서정시들만을 묶은 시선집 『어린 신에게』를 문학동네 ‘포에지2000’ 시리즈로 출간. |
1999 | 3월, 제6시집 『황홀한 물살』을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 62편 수록. 김준태의 해설. |
2002 | 3월 인터넷 시문학 카페 <푸른 시의 방>을 개설하여 혼자 운영하기 시작. |
2003 | 1월, 시 해설 및 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를 시와사람사에서 간행. |
2004 | 2월 살레시오고등학교에서 명예퇴직, 37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침. |
2005 | 6월, 제7시집 『푸른 심연』을 고요아침에서 간행. 66편 수록. 나희덕의 해설. 격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주간을 맡게 됨. |
2006 | 4월, 아이들 셋이 결혼하여 살고 있는 서울로 이사함. |
2009 | 7월, 제 8시집 『입술』을 시학에서 간행. 64편 수록. 해설 대신 시에 대한 단평을 붙였는데 전해수・강경희・이숭원・김석준・장이지・고성만・김유중・복효근・한혜영・신지혜 등이 필자. 이 시집으로 2010년 3월 제42회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음. |
2012 | 3월, 한국시인협회 이사에 위촉됨. 9월에 제9시집 『강변북로』를 ‘시로여는세상 기획시선’으로 간행. 52편 수록. 신진숙의 해설. |
2015 | 5월, 아들이 현지 직장에 취직하여 살고 있는 요르단에 부부 여행. 신비한 페트라 협곡을 관광, 깊은 인상을 받음. |
2015 | 6월, 강인한 대표시 100선 『신들의 놀이터』를 책만드는집에서 간행. |
2016 | 추석 무렵 아들이 전근 간 케냐에 율리, 세리 등 10인 가족 여행을 함. 현지에서 아들네 식구들이랑 2박3일의 탄자니아에 관광 여행. |
2017 | 3월, 제10시집 『튤립이 보내온 것들』을 시학에서 한국의 서정시 100번째로 간행. 60편 수록, 유성호 교수의 해설. 9월, 평창에서 열린 한국시인협회 주최 한중일 시인 축제에 중국 대표 시인 19인, 일본 대표 시인 20인과 함께 한국 대표 시인 40인에 선발되어 참석함. 『2017 한중일 시인축제 시선집』에 실린 「빈 손의 기억」을 읽고 나카모토 미치요中本道代, 야치 슈소谷內修三 등 일본 시인들 여러 명의 깊은 관심을 받음. 특히 야치 슈소는 이 시에서 받은 깊은 감명을 에세이(25매 분량)로 작성하여 자기 블로그에 게재하고 “(한중일 시인축제 시선집에서)이 한 편의 시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다. 기뻤다.”면서 일문 원고를 메일로 보내 줌. 카페 〈푸른 시의 방〉에 게재한 「아름다운 감동과 눈부신 무음 교향악의 매력」이라는 제목의 비평 에세이가 그 번역문임. 추석 무렵, 가족들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여행. 12월, 시집 『튤립이 보내온 것들』로 ‘시와시학 시인상’을 수상. 또한 이 시집이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우수도서로 선정됨. |
2019 | 2월, 맏딸 내외와 우리 내외가 카이로로 직장을 옮긴 아들이 살고 있는 이집트 여행. 4천 년이 넘는 고대문명의 유적들이 여기저기에 지금도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람. 현대보다 고대의 이집트 문명이 더 신비롭다는 생각을 함. 파라오 람세스 미라의 방부 처리 문제로 미라를 프랑스로 이송하여 파리공항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정부가 국가원수에 준하는 의식으로 그 앞에서 사열을 했다는 사실에 감동의 전율을 느낌.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 2세」를 쓰게 된 모티브. |
2020 | 10월, 격월간 『현대시학』이 주관하는 제6회 전봉건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됨. 수상작은 제11시집 『두 개의 인상』. |
2021 | 6월, 문예바다에서 기획한 서정시선집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출간. 첫 시집 『이상기후異常氣候』부터 열한 번째 시집 『두 개의 인상』까지에서 서정성이 강한 작품들로만 54편을 모아서 엮고, 「서정抒情을 향하다」 산문(원고지 28매)을 덧붙인 시선집. |
| 작가 연구 | 강인한 작품론 |
영혼의 깊은 곳을 울리는 예표豫表의 시
― 강인한의 시 몇 편, 새롭게 읽기
김종회
1. ‘언어의 보석’에 몰입한 반세기 세월
시인 강인한姜寅翰은 1944년 전북 정읍 출생이다. 본명은 동길東吉. 전주고등학교 문예반에서 신석정 선생을 만났고, 전북대 국문과를 거치며 시인의 길을 예비했다. <전북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해프닝’을 감당한 후, 공식적인 데뷔는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시 「대운동회 만세소리」 당선이었다. 그런데 그 한 해 전 1966년 첫 시집 『이상기후』를 상재했으니, 이미 시를 쓰며 사는 생애를 약속했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박인희가 부른 「하얀 조가비」, 영 사운드의 「등불」 등의 작사가이기도 한 터이니 그의 어록으로 소통되고 있는 ‘언어의 보석’이 어떤 모형으로든 지근至近 거리에 있었다 할 것이다. 시인 자신으로서는 사뭇 행복한 삶의 행보行步다.
지금껏 그는 모두 11권의 시집을 내놓았다. 두 권의 시선집과 한 권의 비평집도 있다. 56년 문학 인생에 그 분량이면 다작多作도 과작寡作도 아니다. 격동기의 현대사를 살아오면서 그는 꼭 써야 할 만큼의 시를 생산한, 자기 관리와 절제에 익숙한 시인으로 보인다. 시작詩作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균형감각은, 기실 태만이나 남발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물론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의 미학적 수준이요 가치다. 그에 대한 논의를 잠시 미루어 두고 보면, 그에게 주어진 전남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시와시학상, 전봉건문학상 등이 객관적인 참고자료가 된다. 2002년부터 그가 운영해 온 인터넷 시문학 카페 ‘푸른 시의 방’은, 그가 시와 더불어 세상을 만나는 뜻 깊은 통로가 아닐까.
필자의 시각으로 강인한의 시 세계는 크게 두 가지 성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그의 태생적 언어 감각이 촉발한 문학적 순수성과 서정성의 세계. 이는 지난 6월 ‘문예바다’가 기획 출간한 서정시선집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가 확고한 증빙이다. 시인은 여기에 첫 시집 『이상기후』에서 열한 번째 시집 『두 개의 인상』까지의 전체적인 작품 속에서, 서정성이 강한 54편의 시를 한데 묶었다. 다른 하나는 시대적 현실을 시적 암시와 더불어 강고하게 드러내는 사실성의 세계. 이 대목의 바탕에는 아마도 1980년의 ‘광주’를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체험의 역사성이 개재해 있을 것이다. 1982년에 나온 제3시집 『전라도 시인』에서부터 1992년의 제5시집 『칼레의 시민들』까지를 일별해 보면, 쉽사리 이를 납득할 수 있다.
어느 시인인들 시적 서정성과 현실 인식의 사실성을 함께 포괄하지 않으랴마는, 강인한에 있어 그것은 ‘천생天生의 시인’이라는 충분조건과 ‘통한의 체험’이라는 필요조건이 직조물의 씨줄과 날줄처럼 교직된 시인으로서의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 글은 강인한 시의 총체적 면모를 말하는 소임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의 근작 시 5편과 신작 시 3편에 대한 작품론을 수행하는 것으로 역할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에 제대로 부응하자면 시인의 세계를 충실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그러하기에는 주어진 시일이 촉박하여, 여기에서는 위태롭게도 앞서 살펴본 대강의 범주를 유념하며 8편의 시를 검토할 수밖에 없다. 이제껏 이 시인이 산출한 풍요로운 수확의 면모를, 보다 체계적으로 살펴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2. 역사와 현실의 질곡을 넘어선 희망
강인한의 근작 시 다섯 편은 동서고금의 지구별 여러 곳을 무대로, 주어진 현실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가진 자들의 맨얼굴을 보여 준다.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 2세」는 그러한 형국을 강력하게 제기하는 인상 깊은 시다. 제목의 어투는 꼭 국가원수의 국빈 방문 분위기다. 실제로 그렇다. 시인의 기록에 의하면, “파라오 람세스 미라의 방부 처리 문제로 미라를 프랑스로 이송하여 파리공항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정부가 국가원수에 준하는 의식으로 그 앞에서 사열을 했다”는 것이 아닌가. 과거의 문화 약탈자가 오늘에 이르러 최상의 의전을 베푸는 상황이, 그래도 ‘감동의 전율’을 불러온다. 시인의 깨어 있는 눈은 이 까마득한 세월을 뛰어넘는 이율배반적인 ‘방문’을 매우 엄중하게 바라본다.
삼천 년도 훨씬 지나
이제야 나는 바코드라는 지문을 가진다.
모래와 바람과 강물처럼 흘러간 시간이었다.
넌출지는 시간의 부침 속에
스쳐 가는 존재들,
(중략)
한 나라의 역사란
파피루스의 희미한 글자들
바스러지는 좀벌레들에 지나지 않으리
날마다 피를 정화하는 히비스커스 꽃차를 마셔도
추악한 것을 어찌 다 씻어서 맑히랴
콩코르드 광장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
저것은 일찍이
테베의 신전 오른편에 세운 것이었다.
― 「파리를 방문한 람세스」 부분
미라가 되어 방부 처리를 위해 파리공항에 내린 람세스 2세가 화자다. 아무리 팡파르가 울리고 의장대의 사열이 훌륭해도, 삼천 년 전 망국의 파라오는 수긍하지 않는다. 그는 ‘전쟁에 이겨야만 남의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며, ‘불타 버린 심장’으로 ‘오벨리스크의 침묵’을 예거한다. 장구한 역사적 사실史實과 목전의 현실적 사건을 하나의 꿰미로 엮어낸 절창의 시다. 거기에 시공을 초월하고 또 통합하여 바라보는 시인의 예지가 빛난다. 「배낭을 지고 아고라로 가는 사람들」 또한 이러한 시인의 역사 인식과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익히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 있던 광장이며, 물리적인 장소만이 아니라 모임 자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우리들의 내부에서
녹슨 태양이 출렁이는 아침
우리들의 과거는 검푸른 이오니아의 바다
학교에서 바라본 금환일식, 금테 두른 태양
혹은 노래도 꽃도 없는, 진실이 없는
신문지.
모두들 헤어져 간 소년들의 운동장에서,
은밀한 숲 속 산책로에서
발길에 차이는 마스크, 마스크, 마스크……
가위눌린 꿈속,
떠나간 친구들의 엉뚱한 변모
집배원의 피곤한 손에서 반려되는 우리들의 안부.
― 「배낭을 짊어지고 아고라로 가는 사람들」 부분
이 시에서 아고라는 물론 고대도시의 광장이 아니다.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BC 5세기 ‘그리스인들의 정치·재판·상업·사교·종교 활동을 모방하고 있지 않다. 시인은 다만 매일같이 마주하는 우리 삶의 퇴락한 일상 그리고 정치 집회를 위해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서 탄식을 감추지 않는다. 2,500년의 상거相距를 가진 지구 반대편의 풍경을 지금 여기에 반사해 보는 시인의 속내는 심란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것은 또 하나의 비판정신이다. 바로 그 반사경의 효력이 복무하는 곳에 이 시의 의미가 있다. 「개가 죽은 자리는 어디인가」는 이 시공을 넘어선 비유법의 방식과는 다른 영역으로, 사람과 개를 대비하는 새로운 비유의 형용을 시의 중심에 둔 작품이다.
여기 어디라는데, 모질고 사나운
개가 개에게 물려 죽은 자리,
이 동네 어디쯤일까
흔적도 없네.
늙은 내외가 도란도란
공원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하늘 저만큼
고추잠자리 떼 지어 날고,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건네주는
따뜻한 보리차 한 잔.
― 「개가 죽은 자리는 어디인가」 부분
이 시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개, 물고 물린 개의 모질고 사나운 정황을 병정놀이하는 아이들은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이 시의 행간에 그 사나움보다 더 세력이 있는 따뜻한 눈길을 묻어 두고 있다. 이러한 지점이야말로, 시인이 세상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표다. 늙은 내외가 나누는 따뜻한 보리차 한 잔 또한 그렇다. 「밤새 안녕들 하신가요」에서는 목하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COVID-19’를 제재로, 그야말로 온 세계의 사설을 펼쳐 보인다. 그 소리 가락 같은 문면文面 가운데는 ‘야훼와 알라가 머리 맞대고’ 문제를 풀어 본다는 서술도 있다. 또 다른 시 「지붕 위의 황소들」에서도 우화적 분위기 속에서 활달한 현실 탈출의 의지를 볼 수 있다. 그의 시가 우울한 시대 현실의 늪으로 침윤하지 않고, 세상살이의 기력을 새롭게 섭생하는 이유다.
3. 순정한 서정, 소탈한 자기성찰의 시
강인한의 신작 시 3편은 서정적 시어들의 각축으로, 또 그로 인한 시적 감응의 충일함으로 읽는 이의 공명共鳴을 촉발한다. 마치 여기 한 곳에 응결하기 위하여 작정하고 지은 듯. 이 시들을 반복하여 읽으면서 필자는, 서정성과 사실성의 두 축을 세워 그의 시를 탐색해 보겠다는 생각의 향방이 시의 실상과 어긋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견우牽牛」는 순정한 감성과 애잔한 사랑으로 넘치는 시다. 시의 화자가 ‘견우’이면 그 상대역 ‘아기씨’는 ‘직녀織女’라 호명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터. 동양 문화권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이 시공 초월의 사랑 이야기는,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애틋한 그리움의 상징이다. 나라마다 여름 별자리 견우와 직녀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내 외로 가는 고운 날에
두어 평 텃밭을 장만하면
거기에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맞는 내 꽃모종
수정에 뜨물 부어 새순 기르듯
눈물을 길어 잎을 틔우고, 씨를 얻어 보리.
아기씨 족두리에 꿰인 구슬 알맹이들이
몸 비비며 수줍어하는 밤 이슥한
순금純金의 회오리바람.
불씨 빌려오듯 소중한 금빛
고단한 잠은 깨우지 않고 꽃잠은 깨우지 않고
멀리서 초록 두꺼운 해가림 하며
쉼 없이 보살피리.
― 「견우牽牛」 부분
견우가 풀어 보이는 사랑의 언어들은 맑고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은실 비’가 내리고 ‘순금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난다. 그의 시 곳곳에서 목도할 수 있는 이 ‘금빛’은, 시적 정서가 순방향으로 가장 고양된 지점을 가리키는 예표에 해당한다. 견우는 그 아기씨를 보살피는 일에, 아기씨의 ‘은은히 나부끼는 은실 웃음’을 보기 위해, ‘백 년’을 땀 흘리겠다는 언표言表를 내놓는다. “하마 오늘 밤, 이승에서 밝히는 새우잠 속에라도 아기씨 눈썹 적실 비 내리겠지. 은실 비 내리겠지”라고 부연하는 이 시인의 상상력은 한결 부드러우나 가히 우주적 확장을 담보하는 기세다. 거기에 시인의 오랜 문학 경륜과 시적 언어의 조탁彫琢이 결부되어 있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 문득
한 줄 네 마음의 실이 끊어져 나갔다.
어디선가 꽃 지는 소리, 밤새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산사나무,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얼크러진
산 여울의 은빛 비탈을 넘어
머언 둑을 소요하고 있을, 설레고 있을
내 소년의 바람이여.
잃어버리는 것, 잊혀지는 것 애석지 않아
사는 것, 내 사는 것이 호젓하였다.
끊어져 나간 네 마음의 끝 간 데에서
바람은 지금 길눈이 캄캄할 것이다.
어리석은 속단처럼
여기저기 흰 밤별이 떨어졌다.
― 「별이 지는 밤」 전문
이 시는 소탈한 자기 성찰과 정관靜觀의 깨우침을 함께 담았다. 어느 순간 조지훈의 「낙화落花」 또는 이형기의 「낙화」에 잇대어 읽는 느낌을 가져다준다. 시인은 자신의 가슴에 숨겨 둔 ‘내 소년의 바람’을 소환하고, 그로부터 잃고 잊히는 것을 넘어 ‘내 사는 것이 호젓’한 경지까지를 거멀못처럼 함께 묶어낸다. 흔히 볼 수 있는 만만한 각성覺醒의 단계가 아니다. ‘꽃 지는 소리, 밤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별이 지는 밤’의 일이다. 그 어둠 속에서 문득 ‘한 줄 네 마음의 실’이 끊어져 나가고, 시인의 심사는 그 각성이 앞서의 금빛 도색과는 현저히 다르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거기에는 ‘어리석은 속단’에 대한 경계도 포괄되어 있다.
유리성城의 뜨락에는
유리의 햇살이 찰찰 부서지고,
까만 눈썹
사과 빛 뺨이 언제나 수줍은
네덜란드 소녀.
― 「풍경을 애완하다」 부분
왜 여기에 다시 ‘네덜란드 소녀’인가. 이 글의 서두에서 검색한 바와 마찬가지로 수천 년의 시·공간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시인의 상상력, 그 외연의 너비에 비하면 이는 그저 하나 마나 한 우문愚問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일찍이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한바, 한 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는 자다. 소녀의 ‘먼 고향 하늘엔 풍차가 도는데’ 소녀의 눈망울에는 ‘파란 봄’이 어린다. 이 사소하지만 소중한 관찰의 눈과 그 감각은 이 시인이 소박하고 조촐하고 품위 있는 인도주의자임을 증빙한다. 이러한 시적 행렬의 선두에 서 있는 한, 그의 말과 글은 영혼의 깊은 곳을 울리는 예언자의 몫을 다할 것이다. 참으로 산뜻한 시 몇 편을 흔연한 마음으로 읽은 후감이다.
김종회 | 1988년 『문학사상』으로 문학평론가 등단. 평론집 『문학의 거울과 저울』 『영혼의 숨겨진 보화』, 저서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
산문집 『삶과 문학의 경계를 걷다』. 김환태평론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