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범 감독은 과거 안양 KGC를 이끌 당시에도 무척 좋아하던 감독이었지만,
야인 시기를 지나 원주 DB의 지휘봉을 잡은 이후에는 좋아하는 걸 넘어 존경스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나름 꽤 오랜 시간 농구팬이었지만, DB의 이상범 감독은 제가 그동안 가져온 농구관을 많은 부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네이버 인기 웹툰 "신의탑"에 나오는 캐릭터 "베이로드 야마"는 꽤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마를 상대로 [두려움]을 느낀 상대는 어떤 기술도 야마에게 통하지 않게 되죠.
말 그대로 만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두려움]이란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곤 합니다.
스포츠 세계에도 [두려움]이 경기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은데, 골프에서는 이를 [입스]라고 부릅니다.
스윙 전에 샷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안 증세를 뜻하는데, 때로는 근육경련이나 발한도 일어난다고 하네요.
[입스]는 골프에서 온 용어이긴 하지만, 골프 뿐 아니라 야구, 농구 등 구기 종목이나 피아니스트 등에게도 나타납니다.
NBA 중계에서 해설자가 자유투 상황에서 [입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입스]를 겪었던 프로 골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시작은 기술적인 문제에서 왔다고 합니다.
자신이 기술적으로 실력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발생한 [실패의 경험]이 결국은 정신적인 문제로 이어진 것이죠.
[입스] 극복 사례들을 찾아보면 정답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편안함을 찾고 거기서 오는 [성공의 경험]에 있다고 합니다.
2017-18시즌 원주 DB는 하위권 후보였습니다. 이상범 감독 역시 당장의 성적보단 리빌딩에 초점을 맞췄죠.
하지만 시즌이 끝났을 때 순위표 꼭대기에는 원주 DB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정말 예상 밖의 시즌이었죠.
재밌는 점은 성적 외에도 원주 DB가 1등을 한 항목이 또 있는데, 바로 [턴오버]입니다.
경기당 11.8개로 10개 구단 중 가장 많은 [턴오버]를 저질렀는데 시즌 동안 가장 많은 승수를 쌓은 팀이 되었죠.
농구에서 [턴오버]는 대표적인 [실패의 경험] 입니다.
일반적으로 [턴오버]가 많은 팀이나 선수는 승부처에서 더 불안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일종의 [입스]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턴오버]가 가장 많은 팀이 리그 1위??
기존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이상범 감독이 이끄는 원주 DB를 보면 해답을 어렴풋이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실패의 경험]보다 더 많은 [성공의 경험]입니다.
[성공의 경험]으로 인해 [입스]는 코빼기도 볼 수 없고, 오히려 선수들은 더더욱 [자신감]이 넘치죠.
이상범 감독은 누구보다 원주 DB의 선수들을 잘 알고 있고, 선수가 가지고 있는 [장점]으로 선수를 활용합니다.
선수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명확한 롤을 줍니다. 그리고 실수에 대해 절대 꾸짖지 않죠.
선수에게는 자연스럽게 [성공의 경험]이 쌓여 갑니다. [실패의 경험]은 머릿속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죠.
경기 중 원주 DB 선수들에게 [두려움]이 보이시나요? 오직 [자신감]과 [승리에 대한 의지]만 느껴집니다.
DB 김태술이 4쿼터 이상범 감독 대신 작전 판을 잡은 이유는?
https://sports.news.naver.com/basketball/news/read.nhn?oid=382&aid=0000768655
지난 13일 원주 DB와 창원 LG의 경기에서 재밌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작전 타임 중 김태술 선수가 작전판을 잡았죠.
17점을 앞선 경기 종료 50초 전, 이미 승리가 확실한 상황이었기에 이상범 감독은 별도의 지시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냥 작전 타임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김태술이 일어나서 작전판을 잡았고 선수들은 모두 집중했죠.
저는 그 장면에서 선수들의 [자신감]과 [승리에 대한 의지], 그리고 [신뢰]를 보았습니다.
이런 팀 분위기를 만든 것은 전적으로 이상범 감독의 남다른 지도력 덕분이었겠죠.
아직 시즌 초반이지만 원주 DB는 현재 패배 없이 공동 1위에 올라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턴오버]도 경기당 16.3개로 가장 많죠.
저는 그동안 [정확한 농구]가 승리를 가져온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이보다 선수들의 [자신감], [의지]가 더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울산 모비스는 그동안 [정확한 농구], [턴오버가 적은 농구]를 추구해온 대표적인 팀이었지만, 근래에는 유재학 감독도 생각이 많이 바뀐 것을 느낍니다.
통합 우승을 차지했던 지난 시즌, 재밌게도 울산 모비스의 [턴오버] 개수는 경기당 12.8개로 리그에서 가장 많았죠.
여전히 [정확한 농구]를 강조하며 선수의 [턴오버]에 화를 참지 못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감독들이 많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한국 농구의 발전에 해를 끼치고 있는 인물들이죠.
더 늦기 전에 다른 감독들도 깨닫는 부분이 있어서, 선수의 [장점]을 살리고 [성공의 경험]을 쌓아 리그 전체의 수준을 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선수들도, 팬들도 인상 찡그리지 않고, 웃으며 농구를 볼 수 있는 [행복 농구]의 시대가 오길 기대해 봅니다.
이상범 감독이 한국농구 감독들이 가야할 모델상이라고 생각됩니다.
농구뿐 아니라 사회 전반 트렌드가 이쪽이 맞는 것 같아요 ㅎ 여러모로 선구자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