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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길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는 답답하다고 했다. 그래도 지름길을 좇지 않았다.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그의 삶을 표현하는 이유다.
설기현 이야기다.
"왜 설기현을 기용하느냐고. 보여주지 않았나. 한국 공격수 중 유럽 선수들과 몸으로 부딪쳐 밀리지 않을 경쟁력을 갖춘 선수가 설기현이다."
2002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설기현을 두고 한 말이다. 설기현의 조별예선 부진을 짚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설기현만큼 논란의 중심에 오르내린 선수도 드물다. 2002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의 극적인 동점골 전후가 특히 심했다. ⓒ AFP/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그리고 2009년 1월, 설기현은 또 한 번 아무도 예측 못했던 사우디아라비아행을 전격 발표했다. 사람 놀래는 재주가 비범한 설기현이다.
애초의 길이란 게 있을까
설기현의 선택에는 무언가가 있다. 기량 논쟁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혹독하지만 시련을 애써 회피하지 않는다. 빠르고 쉬운 길이라도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손에 움켜쥐지 않는다. 더디더라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면 돌아가는 길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마이너리그와 2부 행이 그랬다. 애초부터 길이란 없다는 듯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길을 연다는 건 외로운 일이다. 누군가에게 그 선택은 전부일 수 있다. 물러설 곳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새로운 터전을 일구는 파이어니어, 개척자의 삶이다. 설기현의 자취와 닮은꼴이다.
설기현은 2000년 축구협회가 추진한 유망 선수 해외진출 프로젝트 1호로 벨기에 앤트워프에 입단했다. 여론은 냉담했다. 당시 시선은 벨기에리그가 마이너인데다 앤트워프가 중하위권 클럽이라는데 모아졌다. 1년 전 최용수가 웨스트햄 입단을 추진하다 '한국대표 선수가 입단테스트를 받는 것은 자존심을 스스로 꺾는 일'이라는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왜 마이너리그에 가느냐고 물었다. 설기현은 그게 빠른 길이라고 믿었다. 벨기에 안더레흐트 시절의 설기현. ⓒ AFP/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설기현은 당시 왜 마이너리그를 받아들였을까.
굴곡의 정선 아리랑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 마다 옛 일을 떠올렸다."
설기현의 '옛 일'은 아프다. 강원도 정선이 고향인 설기현은 9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탄광 사고가 빚은 참극이었다. 어머니는 둘째 설기현을 포함해 네 형제를 키우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난이 싫어 가출까지 했던 설기현이었지만 축구로 성공해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싶어 이를 악물었다. 별다른 주위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 빠른 길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그에게는 처음부터 지름길이란 존재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분데스리가의 차범근을 기억하는 설기현에게 유럽 무대는 유토피아였다. 하지만 가고 싶다고 문을 열어주는 곳이 아니었다. 쟁쟁한 선배들도 하나 같이 고배를 마셨다. 설기현은 옛 일을 떠올렸다.
'쓰러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포기하지 않았다. 가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갈 수 없다. 돌아가더라도 발을 떼야 갈 수 있다. 그것이 빠른 길이다.'
2부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과정과 도전은 설기현 축구인생의 좌표이기도 했다. 울버햄튼의 설기현.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2006년 레딩으로 이적하며 꿈을 그리던 빅리거가 되었고 세계적인 선수들과 같은 필드에서 달릴 수 있었다.
축구인생의 후반전
설기현의 전격적인 사우디아라비아행은 연장선의 도전이다. 풀럼에서의 입지가 좁아진 설기현에게 또 한 번의 선택은 불가피했다. 핵심은 과정으로의 길이었다.
서른 줄에 들어선 설기현은 축구인생 후반전을 맞고 있다. 반전까지는 아니어도 새로운 장에서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는 설기현이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대표팀과 K리그다.
2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선 설기현으로선 2010남아공 대회 출전 의지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상황이 여의치는 않다. 풀럼에서 부상과 결장이 이어지며 대표팀에서 밀려난 설기현이다. 대표팀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전에 나서 감각과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설기현이 유럽에 비해 주전경쟁이 덜한 알 힐랄을 행선지로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오는 6월10일 2010월드컵 본선행의 분수령이 될 한국-사우디아라비아전이 예정돼 있는 점을 고려한 결정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리그의 경험과 이해로 대표팀에 재승선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길의 U턴 항로
설기현의 또 다른 선택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설기현이 2006월드컵 프랑스전 종료 뒤 팬들의 성원에 답하고 있다.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문제는 위기에 처한 국내외 경제상황과 풀럼에서 받은 연봉 등을 고려할 때 유럽에서 K리그로의 직접 이동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간과 준비가 필요했다. 사우디아라비아행은 일종의 숨고르기다.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설기현 특유의 U턴 항로이기도 하다.
설기현의 또 한 번의 승부수가 성공으로 귀결될 지는 장담할 수 없다. 치열한 주전 경쟁을 통해 입지를 다져야 하고 6개월 임대 뒤 완전 이적이라는 단서 조항이 어떻게 매듭지어질 지도 모른다. 지난해 스웨덴 출신의 크리스티안 빌헬름손에 이어 이번 겨울이적시장서 설기현과 함께 루마니아 대표 미렐 라도이 등 유럽파를 중용한 알 힐랄의 시즌 성적 변수도 존재한다. 설기현이 세대교체 작업이 숨 가쁜 허정무호에 재승선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최후의 성패는 알 수 없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설기현의 또 다른 길의 시작이다. 지름길을 좇지 않은 U턴 축구인생의 후반전 킥오프다. 휘슬은 울렸고 경기는 재개됐다.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설기현은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면 또 어떤가. 애초의 길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 힐랄의 2008-09시즌 후반기 예상 주력 포메이션. 설기현의 왼쪽 날개 포진이 유력한 가운데 처진 스트라이커, 우측 날개 투입도 예측 가능한 수다. 기존 왼쪽 측면 자원으로 사우디아라비아 A팀의 알 술후브와 알 프라이디가 버티고 있어 치열한 주전 경쟁이 예상된다. ⓒ FOOTBALLISM |
*출처 : 네이버뉴스 - 축구전문가 박문성
첫댓글 그러고보니...설기현도 꽤나 져니맨에 속하는구나;;;9년동안 6개팀이라...사우디에서 활약하고...다시 유럽으로 돌아가길 바람..
돈좀 벌고 한국오는것도 괜찮은 듯...강원 fc로 가서 레전드 ㄱㄱ
설기현 레딩에서 첫시즌 초반포스는 그저 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