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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눔ː이 탈 리 아 ) 스크랩 산 세바스티아노(San Sebastiano) 카타콤
섬김 추천 0 조회 309 17.01.29 18: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산 세바스티아노(San Sebastiano) 카타콤

 

 

 

'카타콤베'의 어원은 가난했던 로마인들이 무덤을 땅 위에 만들수 없어

땅 아래 자연적인 동굴에 무덤을 만들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굴을 찾을 수 없어 자연스레 땅을 파고

무덤으로 이용한것이 라티어와 그리스어가 섞인 '카타쿰바스'

-동굴의 옆이라는 뜻에서 유래 되었다고한다.

 

산 세바스티아노(San Sebastiano) 카타콤은

바실리카 교회와 무덤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탈리아 전역에 씌여져있는

'바실리카'의 개념은 교회의 기능을 담당하는 건축물로

로마시대에는 도시생활을 총체적으로 담당하던 건물이다,

이 카타콤베가 형성된 시기는 3세기정도로 보고 있으며

3세기 초대교회 건축물로 분류되어

그런데 이 산 세바스티아노(San Sebastiano) 카타콤
바실리카가 있고 그곳을 통하여 지하무덤으로 들어가게 되는

특이한 형태의 지하무덤인 셈이다.

 

로마에는 성 세바스찬의 카타콤, 도미틸라의 카타콤, 성 칼리스투스의 카타콤 등 대표적인 카타콤이 위치한다

 

 

 

 

 

로마시내에서 칼리스토 카타콤베로 가는 길엔 로마 소나무가 상징처럼 도로 사이를 점령하고 있고

소형차와 바이크가 많이 보인다. 칼리스토 카타콤베로 이동 중인데 3세기 무렵에 생기기 시작한 지하 무덤 당시

우리 나라는 신라가 국호를 사용하고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킨 시기쯤된다.

 이들이 기독교의 박해와 함께 로마의 역사를 바꿀 무렵 우리는 불교를 전래받고 태학을 설치할 시기이니

완전히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봐야할것이다.

 

 

 

 

이길이 아피아가도 9Via Appia Antica)이다. 베드로가 로마의 박해를 피해 밖으로 빠져 나가기 위해 택했던 길

그리고 예수님을 뵈었던 장소이기도하다. 지금은 오래되어 낡은 벽들이 흘러간 과거의 역사를 말해주는것같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Domine, Quo Vadis?)

 

고대 로마의 길인 Via Appia Antica- 아피아길은 로마로부터 나폴리를 거쳐 이탈리아 동쪽 항구인 Brindisi항구까지의 길인데

로마에서 그리스까지 통하는 긴 길인데 지금은 좁은 도로같아 보이지만 예전엔 마차길이었으니 넓게 보였을것이다.그리고 그 길

한쪽에 자리잡은 쿠오바디스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베드로가 묻자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러 로마로 간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이내 발걸음을 돌려

그의 운명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신세가됩니다. 리고 이곳이 꾸오바디스 성당인데 간간히 사람들이 문 앞에서면 반대편 쪽 복잡한 길을 건너 그곳에서 사진 찍는 모습이 간간히 보이기도합니다.

 

영화 '쿠오바디스'에서 정치는 돌보지 않고 삶의 욕망과 쾌락에 빠져있는 네로는 로마가 불타고 있을때

방화의 원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돌렸고 그때부터 대 학살이 일어나는데 참다못한 군인들과 신하들에 의해 네로는 버림을 받게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하는 네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학살이 일어날때 다시 돌아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베드로의 이야기가 생생해 지는것 같다.  베드로는 땅에 엎드려서 '쿠오 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다. 주는 대답했다. '네가 다시 한번 십자가에 매달리리라.'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곧 로마로 되돌아가 바티칸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의 삶의 목소리는 지금 로마의 바티칸에서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규하듯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에서 답할 이유를

찾으라고 말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이길을 지나면 성당이 보이고 칼리스토 카타콤베가 길 옆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도 있구요. 아피아 안티카 도로 주변엔 50여개의 크고 작은 카타콤이 있다고합니다.

그중엔 큰 카타콤이 이 산 세바스티아노 카타콤 그리고 산 칼리스토 카티콤입니다. 바로 옆엔 쿠오바디스교회가 있구요.

 

우선 성당 내부를 들러보았는데 카타콤은 10시에 문을 연다기에 한참을 기다리기가 아까워 성당 내부를 둘러보며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캐톨릭과 개신교간의 미묘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여러가지

형식적인 면이나 표현 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를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은

신구교 할것없이 공동의 목표이기도한것이죠.

 

 

 

 

좌측문은 성당내부로 통할 수 있지만 기념품을 팔고 있고 오른쪽은 칼리스토 카타콤베의 입구가 되기도합니다.

성당 내부를 보고 카타콤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8유로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하는데 지하동굴 카타콤베에 들어가면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찍을 방법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입장료를 받는것도 모자라 카타콤베에 대한 리플렛이나

카다록 등의 수입이 줄기 때문에 사진 촬영은 엄격히 금지되어있고 심지어 관리요원을 붙여 계속 따라 다니게하는 방법까지

동원하고 잇는것을 보면 이탈리아 사람들의 상술은 무덤까지도 수익으로 생각하는 모습에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우측문-지하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인데 매표소가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부 성당 벽에 대리석으로 성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있다.

 

 

 

 

카타콤은 로마시대와 함께 고난과 기독교의 흥망성쇠가 달릴만큼 어려운 시대에 초대교회 성도들의 숨결이 살아있는곳이다.

비록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바라던 하늘에 가 있겠지만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할 신앙의 기본이 이곳에 숨어있기에 중요하다 말하겠다.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를 받던 기독교의 역사가 밖으로 나오면서 카타콤베의 존재도 지면 위로

떠오르게된다. 그곳에는 일반 교인들의 무덤은 물론 순교자들과 로마군인의 무덤까지 흩어져 미로의 세계를 연출한다.

 

 

 

 

 

 

산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베(Catacombe di San Sebastiano)는 로마 장교이자 기독교 순교자인 산 세바스티아노의 이름을 딴 카타콤베다.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와 연결돼 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유골이 옮겨져 있으며 묘실 벽에 그들의 비문이 있다.

이 카타콤베 내부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곳도 눈에 들어온다.

 

 

 

지하무덤은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응회암으로 물과 공기가 닿기전엔 부드러우나 긁어내거나 파내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귿어지는 특성이 있는 안성맞춤인 지하묘지로 적합했으며 이곳엔 로마의 많은 기독교인들과 로마의 귀족들도 묻혀있다.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은 서기 288년에 순교한 세바스티아노를 위해 지어진 교회로 기독교가 공인된

4세기 전반에 건축되었고 17세기에 다시한번 재건축을 하게된다.

산 세바스티아노는 갈리아의 나르본 출신으로 283년 로마의 군인이 되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근위대에 근무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놉고 자신이 기독교인임이 밝혀져 죽을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명을 받고 화살을 맞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죽은줄 알았던 그의 목숨이 다시 회생하자 황제 앞에 나아가 항명하다가 뭉둥이로 죽게되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이곳에는 그의 모습을 조각으로 만들어 관속에 담아 전시하고 있는데 화살을 맞은 모습으로 누워있다.

 

 

 

 

 

 

 

산 세바스티아누스의 죽음

 

 

 

 

 

 

 

 

 

이곳 산 세바스티아노성당에는 특히 예수님의 발자욱을 본뜬 돌과 베드로와 바울의 유골이 있다고 한다.

전시된 모습을 보니 믿거나 말거나 한것같지만 그냥  믿음의 중요한 본질을 생각하기로 하였다.

 

 

 

프란체스코 [ Francesco d’ Assisi ]

 

이탈리아의 기독교 종교가. 본명은 Giovanni, F. Bernardone.

프란체스코 교단의 창시자. 아시시(Assisi)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라고 불린다.


부유한 의복상의 아들로 태어나 방랑했으나, 1204년 큰 병이 들어 앓던 중 개심. 겸허ㆍ청빈한 생활에 들어갔다. 1210년 10명의 동지와 함께 암실을 만들고 청빈ㆍ정결ㆍ복종 등을 규칙으로 한 공동 생활에 들어가 예수의 교훈을 실현하기에 전력, 모든 생물을 형제라 부르고 산천 초목을 자매라고 부르면서 전도하였다. 예수의 인격을 앙모하여 손발에 예수와 같은 형흔(刑痕)의 상처를 내고 은둔보다 사회 진출에 힘썼는데 차츰 많은 동지를 얻어, 1219년의 총회에는 에스파냐ㆍ이집트ㆍ아프리카ㆍ그리스ㆍ헝가리 등지에서 5천여 명이 참석하였다. 1223년 교단의 인가를 받았으며 수많은 여성 신봉자들은 클라라(A.Clara)를 중심으로 한 여성 수도원을 세웠다. 같은 이름의 많은 주교인을 내었고, 중세기의 어둡고 우울한 세계에 밝은 빛을 드리운 사람으로 알려진다.

 

프란체스코가 신의 말씀을 듣고 프란체스코 탁발 수도회를 설립한다.

1208년 2월 24일, 아시시 근처에 자신이 직접 재건한 예배당인 포르치운콜라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던 프란체스코의 귀에 마태복음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울렸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프란체스코는 신발을 벗고, 허름한 옷을 걸치고, 중부 이탈리아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러 나섰다. 곧 아시시 근처의 옛 나병환자 병원에서 소박한 생활을 하던 이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고, 복음 전도에 헌신했다. 그들은 성직자가 아니었으므로, '형제'를 의미하는 라틴어 '프라테르(frater)'에서 따 온 '프라이어(friar)'라는 호칭을 택했다. 사람들의 자선에 의존해 살아갔으므로, 걸인 혹은 탁발(托鉢) 수도사라 알려지게 되었다. 1209년, 프란체스코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로부터 새 수도회에 대한 승인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갔다. 인노켄티우스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한 가난한 이가 무너져 내리는 교회를 받치고 있는 꿈을 꾼 뒤 수도회에 축복을 내려 주었다. 인노켄티우스는 이단이 부상하고 있음이 느껴지던 당시에 탁발 수도사들이 강력한 설교 수단이 될 것임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1216년에는 그의 뒤를 이은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성 도미니쿠스가 알비파 이단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운 또 다른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쿠스 회에 허가를 내렸다.

개신교에서 널리 알려져있는 성가에서 볼 수 있는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는 누구나 알것이다.

 

성 프란체스코 - 평화의 기도 from Chikondi chili m’manja 주님,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Fratello Sole Sorella Luna, Brother Sun, Sister Moon, 1973

영화 성 프란체스코

 

1973년 제작된 영화로 '그레이엄포크너와 주디보우커 주연의 영화를 보면 성 크란체스코의 일생에 대한

감동을 얻을것같다. 그리고 캐톨릭 영화중 근래에 나온 영화 '보르지아'를 보았는데 기독교인들의 탐욕과 명예욕

그리고 세상을 향한 인간의 그릇된 생각들을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것 같다.

 

 

 

 

 

 

 

 

 

 

 

 

 

 

 

 

 

 

 

 

 

 

 

 

 

 

 

 

 

카타콤베의 묘와 벽면에 새겨진 그림이나 글자 중에는 물고기의 모양이 있는데 그리스어로 물고기는 'ichtous) 익투스라고하는데

이 단어를 위에서 아래로 늘어 놓으면

 

 

 

이 단어들의 첫머리 글자와 익투스의 글자가 맞아떨어진다. 이런 단어는 그리스어로 acrostics라고 한다. 즉 합체문자라고한다.

카타콤베의 내부에는 글과 그림들이 다양하게 묘비명으로 적혀져있고 죽음에 대한 절망보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영원을 기리는 글들이

보이기도한다.  카타콤베의 중요한 점은 손으로 흙을 긁으면 쉽게 떨어져 나가는데 일단 묘지를 만들기위해 흙을 퍼내면

어느정도의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특성으로 지하 묘지의 생성이 가능해 보였다.

 

 

 

 카타콤베에도 어김없이 수백년 이상을 자란 로마 소나무가 하늘을 뚫듯이 솟아있다. 둘레가 몇m가 될지도 모르는 나무들은

로마시내를 덮고 있으며 특히 묘지들이 있는 곳에는 영화에서나 봄직한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시원스레 하늘을 향하고 있다.

 

 

 

 

 

 

 

 

 

 

 

 

 

 

 

 

 

 

 

 

 

 

 

 

 

입구의 매표소에 적힌 입장료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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