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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실 그림 그리는 사람도 아니고 그림을 그릴 줄도 모릅니다. 예전에 고문자를 그림처럼 표현했을 때처럼 그냥 제 생각의 일부를 보여드리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는 사람입니다. 색을 배합할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마음놓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구도를 제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재주도 없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이런 생각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담아봤을 뿐입니다.
어릴 적에 보통 자라면서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자라면서 산타클로스와는 다르지만 어른들로부터 신화 이야기도 듣게 되지요.
그리고 별도 쳐다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산타클로스는 사라집니다. 어릴 적 호기심을 채워주던 부분이 선물과 함께 사라지면서 (산타클로스가) 아이들의 꿈속에서 사라져갑니다. 신과 신화에 대한 이야기도 어느 순간 희미해지고 사라져갑니다. 그래도 별은 실체이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사람 속에 영원히 남아있습니다.
어릴 적에 쳐다봤던 하늘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아이들은 하늘을 자기 머리 위에서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훨씬 더 멀리 두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좁게 생각했고 또 어떤 사람은 넓게 생각했고 어떤 사람은 밤을 전제로 하늘을 생각했고 또 어떤 사람은 밝기와 어둠을 떠나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저 별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 별일까! 그리고 그 별에 어릴 적의 꿈을 담기 시작합니다. 별은 실체라서 존재하지만 현재까지는 자기 뜻대로 가볼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는, 그 바람에 거꾸로 꿈을 담을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꿈을 놓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담아 이렇게 ‘사람’이라는 그림을 먼저 그려봤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여성 분들이 12cm 하이힐을 신으니 다리는 아프지만 마시는 공기가 달라졌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키 높이 구두를 신은 남성분들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로 30cm만 올라가서 보아도 사물은 다르게 보입니다. 1m를 올라가면 더 다르게 보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보면 너무 많이 다르게 보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그 높이는 자기의 생활 영역안에 없기 때문에 비행기를 탈때마다 창가에서 늘 내려다 보고, ‘하늘이 땅에서 쳐다보던 것과는 다르네!’ 라는 것을 느끼고 감상에 젖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엔 예쁜 구름을 사진 찍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상을 해볼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하늘을 쳐다볼 때 제가 제일 먼저 상상했던 것은 제 키가 이 육체에 갇혀져 있는 한계의 키가 아니라 제 상상력이라고 하든 영혼이라고 하든 그 키 자체가 더 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자의 소요유 편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를 건너뛰는 호연지기라고 했는데 사실 생각에 따라서는 그것이 호연지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릴 적 별을 보고 생각하는 호연지기는 저 별이 있는 곳까지 내 머리가 닿을 만큼 키가 커 본다면 말입니다.
‘사람1’이라는 작품에, ‘내가 서있는 곳 아래의 별들이 반짝일 것이다. 상하좌우가 전부 별천지일 것이다.
그래서 별을 그렇게라도 마음 속에 품고 사는 사람들!’ 저는 그런 사람들은 꿈을 놓지 않았다는 표현을 해봤습니다.
‘사람1’의 밑부분은 지구입니다. 우리 사는 곳이죠. 위에 있는 다양한 색은 제가 표현해본 방식으로 다양한 은하층입니다. 운하라고 해도 되고 은하라고 해도 됩니다. 다른 성운층이죠.
성운층을 뚫고 제 키가 100광년 정도 커 본 것입니다. 호연지기라는 말이 필요가 없는 그렇게 큰 자신을 표현해봤습니다.
저 은하수보다도 내가 더 올라가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커서 바라보는, 그 꿈을 갖고 있는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1’ 제목을 사실 사람이라고 했지만 원래 제가 지었던 이름은 ‘자화상’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작품 ‘사람2’도 자화상입니다. 그 별을 바라봐야 할 꿈들이 다 뱃속으로 들어가 먹을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늙고 어두컴컴하게 빛을 잃고, 자력으로 살지 못하고 어딘가에 의존하고 살고 있으면서, 등 뒤에 몇 개의 별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나 앞에는 이미 별이 없습니다.
그러든 말든 이 사람은 관심을 두고 쳐다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평생 살아온 것은 음식을 먹은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꿈을 먹어 치워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꿈을 잃고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해 봤습니다.
크게 보면 우리는 옆에 있는 나무와 풀들을 식물이라고 하고 우리를 동물이라고 합니다. 사실 동물과 식물의 구분은 상대적입니다. 식물도 움직이긴 합니다. 식물이 뿌리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입이기도 합니다 식물이 입을 땅에 박아놓고 있으니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얼마 없는 것이죠. 그래도 나름대로 입을 옮겨 다닙니다.
먼 우주에서 보면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 식물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물 식물도 상대적입니다. 적어도 언젠가 우리가 식물처럼 보이고 그렇게 살지 모르나 나름대로 동물로서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이 우주를 동물처럼 다닐 수 있는 지구에 메이지 않을 수 있는 꿈이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별을 보면서 상상을 많이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별에서부터 80광년 떨어져있다면 빛으로 80년을 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상상과 자기영혼의 날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꿈이 과학도 발전시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발상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얼개가 맞지 않아 여러 겹의 천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겹겹의 천구를 갈릴레오 갈릴레이 시대에 38개 정도로 정리하게 된 것 입니다. 누군가가 동심원으로 본다는 상상이 없었으면 지동설은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지구를 벗어나 볼 수 있다면 하는 상상과 과학적 관측이 결합이 되어 지동설이 나오게 된 것 입니다. 간혹 꿈이 과학과 결합되기도 합니다. 꿈이 현실성이 있으려면 꿈이 충분히 익어야 합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고 하지만 콩을 심는다고 해서 콩이 나지 않고 팥을 뿌렸다 해서 팥이 나지 않겠지요. 팥을 가꿔야만 나고, 콩도 가꿔야만 나겠지요.
꿈도 상상도 가꾸면 어느새 꿈도 상상도 이루어집니다. #천문을_담은_인간의_소망 우리가 별을 처다 보던 꿈이 꿈에서 많이 멈추어진 느낌이고 멈춤이 비록 현실 삶의 기반일지라도 꿈을 잊지는 않도록 하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기서 제가 보는 색들은 흰색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흰색이란 검은색이 먼저 있고 그림을 그릴 때는 흰색이 있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빛이 먼저 있고 그 빛을 빼야지만 흰색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흰색은 검은색이 먼저 있고 그 이후에 최후 과정, 완전 탈색된 과정에서 나오는 색입니다. 우주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검은 구멍은 있어도 완전히 흰 구멍은 없습니다. 그래서 흰색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1부 전시는 8월1일(일)까지 입니다. 2부는 28수 별자리를 중심으로 8.4부터~8.29까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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