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율사가 사리 100과 가지고 와서 통도사, 태화사 황룡사에 보관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태화사를 지은 시기는 643년이다.
이 시기는 계단이 있을 시기가 아니고 울산 태화사지 부도에 두었던 것도 아니었다.
신라의 고승들도 입적하면 임시로 감실을 정하여 탈육후에 몇 년이 지난후에 석조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장율사 사리 백과를 가지고 와서 통도사에 보관 할때 그 당시에는 계단이 없을 가능성이 크며
더군다는 밀교의 용어인 금강계단은 더욱 없었다.
삼국유사는 계단에 보관 하였다고 하는 것은 즉 어느 정도 불교가 교학적으로 정립 된 후로 생각된다.
그리고 울산 박물관 12지 부도도 자장율사가 사리를 가지고 와서 시간이 지난 후에 12지 사리탑에 보관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금강계단이나 12지사리탑에 보관 했다는 것은 맞지 않다..
통도사 금강계단의 이전의 수계를 살펴보자
통도사 금강계단 설립 이전에는 어떻게 수계하였는가? 수계가 이루어진 사찰은 어느 곳인가? 출가사원과 수계사원을 의도적으로 구분했는가? 계단사원은 교종사찰에만 존재했는가? 사단사원도 있었는가? 私壇寺院도 있었는가? 등등의 문제도 주목하였다. 백제의 경우 587~588년경 이전부터 10사에 의한 수계 작법이 존재하였다. 신라 역시 四分律에 근거하여 수계시 10사 제도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다. 관단사원으로 불리는 수계사원은 通度寺(良州)・嚴川寺(康州)・長谷寺・莊義寺(漢州)・福泉寺(溟州)・普願寺(熊州)・華嚴寺(全州)・靈神寺(武州)・法泉寺(朔州) 등이 있었다. 관단사원은 지역적인 안배로 각 州에 하나 혹은 두 개가 있었으며, 중고기에는 통도사가, 중대에는 화엄사가 수계의 대표적 사원이었다--- 신라승의 受戒와 僧籍-- 연구자료 여성구
위의 논문 처럼 계단이 있었지만 현재의 통도사의 모습은 아니었다고 생각되며, 일설로 이어지는 금강계단은 더욱 아니었다.
금강이라는 것은 밀교의 용어이며 신라는 7세기 초에 초기밀교을 받아 들였는데 초기밀교는 진언 과 주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밀교이다.
즉 금강이라는 용어는 문두루 비법의 명랑이 이후 들어 온 8세기 중기 밀교 이후에 나온 용어로 추정되기에
통도사 금강계단에 사리를 보관 했다는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
그러므로 동굴에 보관 하던가 초기 계단에 사리를 보관 했다는 말이 더 신빙성이 있다.,
삼국유사를 지은 시기인 고려는 밀교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금강계단이라는 용어는 밀교가 성한 고려시대에 금강계단이라 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삼국유사는 계단이라 하였다.
그래서 금강계단이라는용어는 조선초기에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으며
자장율사 금강계단에 사리를 보관 하였다는 것을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계단에 보관 하였지만 지금과 같은 금강계단은 아니었을것이 보며
필자의 생각은 지금 통도사와 같이 화려한 계단은 아니었을것으로 보고.,
완주 안심사 계단과 비슷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여본다.
여러가지 추정은 가능 하지만 정답은 없다 그 당시의 계단의 기록이나
사진이 남아 있지 않고 정확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금강계단, 계단이라
할 수 없지만 여러가지 추론은 해 보아도 무방 하다고 본다.
첫댓글 덕분에 다시 공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