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1064) - 핵 위험을 일깨는 오펜하이머 신드롬
오늘(9월 8일)은 밤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 바야흐로 하늘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이어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백로 절기의 하늘과 황금 들판
몇 주 전 화제영화 오펜하이머를 관람하였다. 세계최초의 원폭실험(1945년 7월 16일)에 맞물려 미국에서는 7월 하순에 공개하였는데 이미 50여 개 나라에서 개봉, 흥행수익 1조원을 넘어선 화제작이다. 상영시간 3시간의 긴 분량에 R등급(청소년 관람 불가), 일반인이 잘 알지 못하는 물리학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는 묵직한 전기 영화이면서 우크라이나전쟁과 북한의 핵탄두실험 등의 위험요인, 해묵은 이념논쟁 등 복합 상황이 증폭되어 최근 여러 매체에서 ‘오펜하이머 신드롬’ 이 일고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30여 년 전 연수행사로 나가사키를 방문하여 처참한 원폭피해상황을 살핀 것을 시작으로 첫 번째 원폭투하로 널리 알려진 히로시마평화공원을 여러 차례 돌아보며 원자폭탄의 위력과 공포를 피부로 체감한 터라 흥미 있게 영화를 관람하였다. 지난 4월 하순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하였을 때의 기록, ‘다음 행선지는 원폭피해로 유명한 히로시마, 버스에 올라 히로시마평화공원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1945년 8월 6일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20여만 명이 사망하고 수십만이 부상을 입은 끔찍한 참상을 교훈 삼아 평화를 염원하는 뜻으로 만들어진 공원이다. 그 안에 2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 부근에 이르니 20여명의 교민들이 손을 흔들며 일행을 반긴다. 먼저 위령탑에 꽃다발을 바치고 묵념. 비명에 스러진 영령들이여, 하늘의 위로와 평안을 누리시라. 위령비 근처에 평화의 종이 세워져 있다. 그곳에 들러 온 누리에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하는 타종을 한 후 공원을 한 바퀴 돌아 숙소로 향하였다. 거리에 펄럭이는 깃발,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G7 정상회담이 이곳에서 열리는 것을 알린다. '세계에 평화를, 한일에 우정'의 기치를 내걸고 때에 맞춰 평화공원에 이른 발걸음이 뜻깊어라.’
히로시마평화공원의 한국인원폭피해자위령비에 꽃다발을 바치며
언론에서 다룬 오펜하이머 신드롬의 편린을 살펴보자. ‘현실이 된 오펜하이머의 공포…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전기(傳記) 영화 “오펜하이머”가 국내 개봉 5일째인 8월 19일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오펜하이머는 핵이 인류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로 말년을 군축(軍縮)의 아버지로 살았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뜨고 이듬해 유엔 핵확산금지조약(NPT)이 채택된 지 50여년이 흘렀음에도 세계의 핵무기는 계속 불어나고 있다. 오펜하이머가 개발한 원폭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돼 2차 세계대전 종식의 결정타가 됐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개발을 이끈 핵무기가 무분별하게 확산해 인류를 파괴할 위험한 무기가 될 것을 우려했다. 지난해 초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혹시라도 러시아가 보유한 4400개 넘는 핵탄두 중 하나가 쓰일 경우 막대한 사상자가 나올지 모른다는 공포를 전 세계에 드리우고 있다. 미국과학자연맹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핵탄두 수는 9576기에 이른다. 뒤늦게 핵개발에 나선 핵 신흥국도 핵무기 증가에 영향을 끼쳤다. 북한(증가율 100%), 인도(26%), 파키스탄(21%), 이스라엘(13%) 등이 2017년 이후 현재까지 핵탄두 수를 많이 늘린 국가들이다. 미 과학자연맹에 따르면 북한의 핵탄두는 2017년 15기에서 올해 30기로 늘었다. 이들 국가의 핵 확산 속도가 빨라진 배경엔 저렴해진 개발비가 있다. 오펜하이머는 개발비가 낮아지며 핵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할 국가들까지 핵개발에 나서는 상황을 우려했는데, 북한이 전형적인 사례다. 이는 핵무기의 전 세계적 확산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조선일보 2023. 8. 21, '현실이 된 오펜하이머의 공포’에서)
핵 무기를 껴안은 세상, 특히 위험요인이 큰 지정학적 요충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에 우리 모두 각별한 경각심과 위기대처 역량을 기울였으면.
* 여러 매체에서 다룬 논평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칼럼 ‘왜 이제 와서 오펜하이머 신드롬인가’를 통하여 이를 올바로 이해하면 좋으리라.
‘세계적 오펜하이머 신드롬 따라 영화관을 찾았다. 과학사가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 넘어가던 전환기, 정치·경제적으로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며 파시즘에 대항할 이데올로기로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에 젖었던 격동기, 그 시대를 산 비범한 과학자가 제2차 세계대전의 신무기 개발 주역으로 이룩한 성취, 이후 세상의 파멸에 대한 공포 때문에 냉전시대 마녀사냥에 희생된 비극의 역정은 인간의 이중성과 과학기술문명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각본의 원작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2006년 퓰리처상)다. 영화의 배경이 된 맨해튼 프로젝트는 역사상 가장 모험적인 산학연군관 프로젝트로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 원자도시를 비롯해 테네시주 오크리지 우라늄235 생산시설, 워싱턴주 핸포드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와 분리공장, 전국 각지의 대학에서 60만 명이 참여했다. 투입 예산은 22억 달러(현재 가치 330억 달러)였다.
개발 과정은 고전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과학기술계는 자율성을 중시하고, 군은 보안 위주의 관료주의를 고수했다. 기업의 경영진과 기술진, 과학자와 엔지니어 간의 긴장도 증폭됐다. 영화는 1954년 오펜하이머의 안보 청문회와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 상무장관 후보의 청문회를 긴박하게 오간다. 관련 인물의 성격과 신념 차이, 수소폭탄 개발을 둘러싼 이견, FBI 기밀문서 등 정치 상황이 얽혀 모두 패자가 된다.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와 엮인 배신자로 망가졌고, 스트로스는 상원 표결에서 46대 49로 상무장관 대행으로 그쳤다. 부결 표를 던진 케네디 상원의원은 1963년 4월 대통령으로 오펜하이머에게 미국 과학자 최고의 영예인 페르미상을 수여하기로 서명한다. 그러나 그는 암살되고 2주일 뒤 존슨 대통령이 시상한다.
1944년 연합군이 독일 원자탄 개발이 초보 단계임을 확인하게 되자, 과학계의 핵무기 반대 움직임이 가시화한다. 닐스 보어는 원자탄 개발 이후의 세계의 분열상을 경고하며 원자력의 국제적 관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투하 결정은 군부와 트루먼 대통령의 몫이었다.
2022년 12월 제니퍼 그랜홀름 미 에너지부 장관은 오펜하이머에 대한 편견과 불공정의 증거가 밝혀졌고, 그의 애국심을 확인해 스파이 혐의를 철회한다고 했다.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한 애국심으로 원자탄 개발을 지휘했으되 수소폭탄 개발과 핵확산을 반대했던 오펜하이머,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대량살상무기 개발 경쟁이 세상을 파멸시키는 연쇄반응, 핵 홀로코스트였다. 힌두교와 인도문학에도 심취했던 그는 1965년 NBC 인터뷰에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를 인용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술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언급되고, 가장 빈곤한 국가에 속하는 북한이, 오펜하이머의 예측대로, 개발 비용이 낮아진 핵무기를 소유하게 된 상황은 그의 공포를 긴박하게 현실화하고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의 진화가 어디까지 가서 의도치 않은 결과를 빚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 그 잠재적 공포가 오펜하이머 신드롬의 배경이란 생각이 든다.(중앙일보 2023. 9. 8, 김명자 칼럼 ‘왜 이제 와서 오펜하이머 신드롬인가’에서)
오펜하이머 신드롬을 상징하는 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