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내일 벌초하려 오실겁니까?"
"응 가야지!"
동생의 전화를 받고 보니 기분이 씁쓸했다. 어릴적 집집마다 그 많던 형제들은 살길 따라 뿔뿔이 흩어지고, 아버지 세대를 기준 한명씩만 행사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러 대표를 정한 것이 아니라, 먼곳에 살거나 알아도 매년 참석않는 형제들을 끌어 모을 수는 없는 법이다.
문제를 이렇게 만든건 조상님들의 책임이 크다. 그나마 결국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속담이 증명되고 있는 현실이니 다행이다.
그런데 벌초를 할때마다 나는 기계를 잘못 다루다보니 어정쩡하게 섰다가, 베어낸 풀들을 갈쿠리로 걷어내는 정도여서 동생들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침일찍 차를 몰고 묘소에 도착하니, 남들처럼 가까이 살지도 못하고, 제대로 돌보지 못한 행태에 울컥하는 기분과 마음이 숙연해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연출이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건 시대의 선택일 수 밖에 없었다.
영문 모르는 예초기는 무법자인양 연약한 식물들을 쳐내며 그 웅웅거림의 소리가 고요한 산천을 잠깨웠다.
이 묘지 많은 언덕받이에 서기까진 왠지 다가서는 발걸음이 날이 갈수록 낯설어 짐을 느낀다. 언제까지 내가 이곳을 다녀갈 수 있을까?
젊은시절 정든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며, 언젠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뼈를 묻을 것이라던, 그 각오는 한동안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었고, 지금에 와서 잠시나마 그 흔적을 헤짓거려 보는 것이다.
우리들은 부모님들이 일제 36년이란 치욕의 압제에서 견디다 피폐된 나라를 되찾았고, 6.25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포화속에서 가까스로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가끔 "우리 또래는 대포소리에 놀라 자다가 놀래 깨었고, 제대로 자라지도 못했다"는 우스개 소릴해댔다.
모든 것이 부족한 시절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사라호 태풍으로 농사가 초토화된 해도 있었고, 계속된 5,60년대 보릿고개의 배고픔도 견디어 내야 했다.
세월이 흘러 동물이 자라면 어미곁을 떠나듯, 우리들은 빈손으로 고향을 떠나 잘 살아 볼것을 다짐하고, 자식만큼은 가난의 대물림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세월은 쌓이고 엮어져 생은 어느듯 함께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 작금의 나이에 다달았다.
비록 자식세대들에겐 '헬조선'이라며 환영받지 못하는 과거의 오염된 역사로 치부되었지만, 나름 열심히 살아온 인고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고향은 산좋고, 맑은 강물이 흘러내려 바다로 향하며, 기차가 지나가는 그리운 곳이다.
나는 지난시절을 생각할때마다 그러한 향수가 묻어나는 노천명의 시가 머리에 떠올랐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에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가진 것은 부족했지만 마냥 즐거웠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검은 고무신 신고 책보따리 대각선 둘러맨채 자갈밭 신작로를 내달렸었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고무줄 놀이, 조약돌 놀이, 땅따먹기, 팽이치기, 강가에서 멱감으며 고기잡고 겨울에는 스케이트 타던 그리운 추억들, 백사장 버드나무 아래서 나무가지 꺽어 칼싸움 하고, 물빠진 도랑에서 고기 잡으며, 시멘트보 오르는 은어 몽둥이로 잡던 즐거움, 소매어 놓은 정자나무에 기어올라 소꼬리 올가미로 매미 잡던 추억에다, 친구들과 도라지 캐고, 남의 집 밭에 든 소때문에 혼나던때, 고구마로 점심 때우고 지게지고 뒷산 나무를 하려가고, 흙가마로 감자 삶아 먹던 추억에 더하여, 추석이면 마을 어귀에 모여 달구경하고, 설명절엔 세배다니고, 보름날에 달집 짓던 가슴 따뜻한 그러한 까까머리, 댕기머리 아이들은 모두 고향을 떠났고, 그곳엔 산업화 물결이 스며들어 먹을 것이 풍족해졌지만, 갖난 아이 울음소리 그친지 오래다.
차를 몰아 동네 어귀로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서면, '골목집에 지금쯤 누가 살고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조금은 낮선듯한 골목에다 변해있는 집의 형태들, 마당의 폼나는 승용차와 농기계... 그럼에도 얼굴 읶은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 이유를 뒷산에 올라 즐비하게 선 묘비들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어릴적 땔나무감이던 야산 나무들은 아름드리 숲으로 우뚝 자리잡았고, 돌뿌리 피하며 걸었던 거친 산길도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황소 매었던 느티나무는 지난 태풍에 가지가 부러졌고, 높게만 보였던 뒷산 마루는 예전보다 낮아보여도, 왠지 낯설고 스산한 거리감으로 다가왔다.
벌초를 하다말고 바위에 걸터앉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눈에 보이는건 온통 푸르럼이다.
그러나 멀리 내려다 보이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새로난 철길과 읍내로 통하는 직선도로, 멱감고 고기잡던 강물의 곡선이 시선을 압도하고 있었다.
한편으론 인구에 반비례하여 늘어난 들판의 비닐하우스를 보며, 그 폐쇄된 공간속에서 땀흘리고, 삶의 고뇌에 한숨짓는 농민들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시간은 빨라지고, 육신은 늙어간다.
추석을 앞두고 감과 밤 등 과일과 오곡이 익어가고, 서너 차례 강한 태풍을 견디어낸 벼가 무거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뛰놀던 마을 앞 정자언덕, 아름답던 뒷동산은 나의 마음을 점차 밀어낸다.
슬픈 일이다. 어느새 내가 외지인이 되고 말았단 말인가? 소문에 의하면 외지인의 진입이 차별되고, 객지에 나가살다 죽으면 상여도 못들여 온다 는 가슴 저미는 말도 있었다.
다가서려면 더 큰 사랑과 용기가 필요할터, 어째 이제는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다. 거칠고 모자라는 먹거리에도 해맑은 웃음 웃던 우리들도 세상 탐욕에 어우러져 표정이 일그러졌다.
또래 중 한둘은 안타깝게도 생을 마다하고 고향의 뒷산에 누웠거나, 여럿은 낮선 하늘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대체 우리들은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는 하는걸까? 누군가는 맘편하면 그것이 행복이고, 그곳이 천국이라고 하였었다.
이쯤해서 우리는 이별 연습을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생노병사(生老病死),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종교에서도 피할 수 없는 어려운 과제이다. 어차피 태어나고 헤어짐은 생명체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해마다 꽃을 피워도, 식물은 꽃이 피면 줄기가 시들기 마련이다. 대나무가 60년에 꽃을 피우고, 우담바라는 3000년만에 꽃을 피운다는...그들은 식물이고, 종족번식을 위해 꽃을 피운다. 꽃이 핀 대나무가 죽는다는건 숙명이다.
꽃이 졌다고 서운해 할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거니 생각해야 한다.
이렇듯 생이란 왔으면 가야하고, 헤어지는 그 과정에서는 애틋함과 슬픔이 남게 된다. 그래서 이별연습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지나친 소유욕은 이별에 많은 한을 남기기 마련이다. 재물이 그렇고, 세월 또한 그렇다. 100세 시대라고? 힘든 인생여정이다.
"내가 빨리 죽어야 할건데..." 많이 들었던 말이고, 이별연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음껏 기뻐하거나 슬플땐 실컷 울라고 하였으니, 눈물이 마르면 슬픔도 덜하는 원리일게다.
눈물은 슬픈 마음의 거울이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울고, 살아가면서 인생의 고달픔의 과정에서 눈물짓고, 죽어 나의 육신이 형체가 변해가는 순간 남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울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나와 그들의 이별연습이다.
중요한 것은 헤어지는 연습만이 능사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활달하고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생의 마감을 더 긍정적으로 받아 들인다고 하였다.
평소 생활을 통하여 궁금증을 해소하고, 미련을 갖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운 사람에게 전화를 하고, 보고싶은 사람을 만나며, 하고 싶은 것을 즐기라는 말이 된다.
방법 중의 하나는 휴대전화의 연락처를 지우지 말고, 통화기록을 늘여 가는 것이다. 그속엔 그리운 고향의 모습이 담기고, 보고싶은 친구가 다가서게 될 것이다.
그러한 행복을 맞볼때면 이별의 시간은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팽창하듯 끝없이 멀어짐을 느끼게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며, 잠시 지난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한다.
[당신의 시간]
가을날의 오후
뒷산 언덕 바위에 누웠다.
하늘은 벌써 추위를 느끼는양 군데군데 하얀 새털구름을 둘렀다.
공중을 보면 술 취한 그날 밤처럼 지구가 돌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다면 분명 시간도 구름처럼 개념없이 흘러갈 것이다.
애써 '느림의 미학(美學)'이란 주제어를 공중에다 뛰웠다.
순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찰나에서 억겁으로 무한의 팽창이 된다.
그러나 당신의 시간
다가오는 시간, 머무르는 시간, 멀어져 가는 시간은 무심한 세월이란 치마폭에 숨었다.
누군가는 붙들고, 누군가는 버리고 도망을 쳤다.
행복과 불행의 시간들은 서로를 낯가림해한다.
시간은 투쟁의 대상이고, 역사의 마중물(Priming Water)이다.
다가가는 자에겐 깨달음이고, 기다리는 자에겐 버림의 대상이다.
그래서 시간은 소중하거나, 때론 원망의 대상이 된다.
시간은 철부지 아이를 키우고, 중년의 어깨를 누르며, 소명을 다한 이들을 잠재운다.
시간은 돈이고, 시간은 인생의 여정(旅程)이다.
사람들은 영면(永眠)이라는 두려움을 대비하기 위해 수면이라는 시간과의 이별 연습을 해댄다.
시간을 붙잡고, 마음속 즐거움을 채워라!
다시금 눈을 감고, 마음속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
순간 자정 앞둔 수능생의 일과표처럼 남은 시간이 아쉽다는 생각이 솟구친다.
그렇게 시간은, 시간은 점차 당신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