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살아갈수록 힘이 든다고,
외롭다고 할까?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이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느는 생각한다.
도시를 만들기 위해 하나 둘 장터를 빼앗아갔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사람들이 장터를 멀리하고, 장터에 가지 않으면서부터, 장터 대신에 대형 할인점이나
백화점에서 오는 셔틀버스에 몸을 실으면서 부터 비로소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살아갈수록 힘이 든다고 한다. 으리으리한 고대광실은 아니지만 비 안 새
는 번듯한 집이 있는데도, 삼시세끼 밥 굶지 않고 한겨울에 상추쌈을 싸 먹는 세상인데
도 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엄동설한에도 얼어죽지 않을 만큼 따뜻한 옷이 옷장속에 지천으로 걸려있고, 구멍난 양
말을 애써 기워 신지 않아도 되는 세상인데도 살기가 힘든다, 벅차다, 심지어는 죽어버
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롭다고 한다.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며 스포츠 경기를 텔레비전
앞에서 턱 괴고 바라보면서도 외롭다고 한다. 누군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무선호출기를 부적처럼 몸에 붙이고 다니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휴
대폰을 하루종일 켜놓고 있는데도 외롭다고 한다. 아침을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일본
에서,그리고 저녁은 또 중국에서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외로워 외로워 못
살겠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외로워하는지 아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함들고 외로운 이유는 하나남이 도시를 만들
었기 때문이라고,
내 말을 듣고 누군가 심하게 고개를 흔들지도 모르겠다. 도시야말로 인간의 행복을 최
대한 제공하고 미래를 완벽하게 보장하는 곳인데, 거기서 힘들어 하고 외로워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그 다음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대형 할인 마트에 가보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갖추어져 있지 않은가, 또 그 곳에서는 물걸은 손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부담없이 쇼핑할 수 있는데 무엇이 힘들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곳의 판촉
사원들을 보라, 무엇을 묻든 그럿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데 단 1분이라도 거기서
외로워 할 틈이 생기기나 하겠는가, 라고 말이다.
그 말도 일리는 있다. 그렇지만 내 말을 조금만 더 들어 봐주기를 바란다. 도시에
이른바 마트라는 이름을 단 대형 할인점이 세워지기 전에 도시의 상권을 쥐고 있던
왕자는 백화점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백화점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다. 수천 만원이 넘는 밍크
코트를 아무거리낌없이 걸어 놓고 백화점은 우리의 기를 죽이곤 한다.
백화점의 어떤 특별한 매장은 우리의 상상 그 너머에 사는 사람들이 출입하는 '신
세계'인것이다.
이 백화점이 생기기 전에는 슈퍼마켓이 등장해서 왕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슈퍼마켓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열결하는 목적으로 문을 열었다.
이른바 체인점 형태가 그것이다.
"슈퍼"라는 접두어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품목과 널찍한 매장을 갖춘 곳
이었다. 게다가 물건의 가격도 저렴했다.
그런데 "슈퍼"는 태평양을 건너와 머나먼 이국 땅 한국에서 어처구니없이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매장의크기나 판매하는 물건의 품목과 상
관없이 한국의 모든 가게들이 슈퍼라는 이름을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반란이었다.
담배 가게도 채소 가게도 슈퍼마켓이 되었고, 시골 초등학교 앞 문방구점도 슈퍼마
켓이 되었다.
슈퍼마켓이면 좀 다행이다. 뒤에 붙은 마켓을 아예 떼어내 버리고 "슈퍼"는 이제 한
국의 식료품과 잡화점을 모두 지칭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한국인들은 또 하나의 신조어를 창출한 것이다.
그 슈퍼마켓생기기 전에는 무슨무슨 상회라고 간판을 내건 가게가 상권을 쥐고 있
었다. 그 무슨무슨 상회는 구멍가게의 티를 갓 벗어난 꼴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땅에 납작하게 엎드린 좌판이 아니라, 적어도 벽에 바싹 붙여 층층이 세운 진열대를
갖추고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구멍가게가 생기기 전에는 진열대도 없이 땅바닥에 팔고 싶은 물건을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노점상이 있었다. 잘은 몰라도, 노점상은 그 먼 옛날, 물물 교환 형
태로 이루어지던 원시적 사거래의 형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 흔적은 지금
도 남아 있다.
가령, 쌀 두 되와 설탕 한 봉지를 서로 바꾸면 그게 물물 교환이 아닌가. 혹은 양파
한 접을 판 채소장수가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켜 먹고 양파값에서 자장면
값을 제하면 그것 또한 물물교환 아닌가.
그 노점상들이 오밀조밀 모여 상권을 형성는 곳, 그 곳을 우리는 일찍이 "장터"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느님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하나 둘 장터를 빼앗아
갔다.
나는 확인한다. 사람들이 장터를 멀리하고, 장터에 가지 않으면서부터, 장터 대신에
대형 할인점이나 백화점에서 오는 셔틀버스에 몸을 실으면서부터 비로소 힘들고 외
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열 두어 살 무렵까지 나는 면사무소가 있는 시골의 장터 근처에서 살았다. 가겟집
아이였던 나는 장터를 통과해 학교에 다녔고, 학교가 파하면 장터에서 동무들하고
어울려 놀았다. 장터는 학교 운동장보다 넓었다. 우리는 거기서 이웃 동네 아이들과
치열하게 영토 분쟁을 치렀으며, 하늘 속으로 공을 뻥뻥 차올렸으며, 자전거를 달리
며 낄낄거렸다.
그렇게 넓은 장터에서 우리가 놀 수 있는 날, 그날은 어른들은 "무싯날"이라고 불렀
다. 장이 서지않는 평일을 뜻하는 무싯날이 무시에서 온 말이라는 것을 그 때는 몰
랐다. 사람이 흥청거리지 않는 무싯날이 어른들에게는 더없이 따분하고 한가한 날이
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싯날 장터는 우리들에게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좋은
놀이터였다.
다만 닷새마다 한번씩 장이 설 때마다 우리는 장꾼들에게 놀이터를 내주어야 했다.
우리는 어렸기 때문에 딱지 한장을 놓고도 곧잘 다투었다. 하지만 장날만큼은 장터
의 주인들에게 자리를 깨끗이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장이 서는 날은 온 통네가 시끌벅적하게 잔치를 벌이는 것 같았다.
시외버스가 정류소에 설 때마다 장꾼들이 뭉게구름처럼 꾸역꾸역 버스에서 내렸다.
그들은 늘 머리에 쌀이나 보리쌀 서너 되라도 이고 있었다.
그 검게 탄 얼굴들을 모두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앙상한 뼈대의 각목 틀만 남
이 있던 장터에는 정말 잔칫날처럼 흰 천막이 둘러쳐지고, 장꾼들은 잔치에 참여하
는 사람답게 가장 아껴 두었던 옷을 꺼내 입고 장터로 몰려들었다.
장터 부근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어렵고, 또 키가 작았기 때문에 장꾼들의 발걸음만
내려다보고도 그가 무슨일로 장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물건을 팔러 온 사람들은
좋은 자리를 잡아야 했으므로 발걸음이 빨랐다. 그러나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은
대체로 느렸다. 이 느린 발걸음은 나이의 많고 적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젊을 적부터 우리 어머니는 그 중에서도 가장 느린 발걸음의 소유자였다.
어머니가 내복 한 벌을 사러 장에 나섰다고 하자. 어머니는 일단 장터의 모든 옷가
게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둘러보신다. 주인은 어머니가 원하는 내의를 어김없이
내놓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 치수가 맞는 게 없다, 천이 너무
얇다는 이유를 대며 태연히 다른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나는 안다, 정작 어머니가 핑
계를 대고 싶은 것은 옷값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어머니는 집중적으로 가격 흥정을 할 두세 군데 옷가게를 선택한 뒤에 길고
긴 옷값 줄다리기에 나선다.
어머니의 옷값 흥정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나는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몇번이나 되풀이
해야 했다. 어릴 적에 내 몸을 감고 있던 옷이며 내 발을 감싸고 있든 신발은 모두 그렇
게 어머니의 눈물 겨운 고투 끝에 가까스로 선택된 것들이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장날 아침, 사방에서 몰려든 장사꾼들이 전을 펼치는 분주
한 모습 말이다. 옷장수는 월남치마여 "고리땡" 자지며 두툼한 "돕바"를 보기 좋게 높
이 내다 걸고, 약장수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에 차력사를 데려와 멍석을 깔고
터를 잡고, 튀밥 장수는 기계 밑으로 장작을 막 지피기 시작하고, 씨앗 장수는 자루
주둥이를벌려 이름을 알 수 없는 채소며 약초 씨앗들을 꺼내 놓고, 어물전에는 비늘
이 번득거리는 생선들이 싱싱한 비린내를 풍기고,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는 근육질
의 어깨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옹기전에는 옹기들이 말갛게 얼굴을 씻고 나란히
앉아 팔려 가기를 기다려고, 강아지를 팔러 나온 사람은 갑자기 도망가는 강아지를 쫓
아 이리 뛰고 저리 뛰기도 하며, 소전에는 검은 오버 깊숙이 손을 찔러 넣고 어디선가
컴컴한 낯빛으로 소장수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으며, 장터 한쪽에 임시로 차린 국밥집
의 가마솥에는 돼지 머리가 둥둥 뜬 국이 김을 뿜으며 부글부글 끓었다.
장날만 되면 이 세상이 거기 다 있었다. 아쉽고 부족한 것은 거기 다 있었으며, 넘치고
풍족한 것도 거기 다 있었으며, 반질반질한 것도 투박한 것도, 불쌍하고 가엾은 것도,
잘나고 못난 것도,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는 것을 빼고 있는 것은 거기 다 있었다.
열세 살이 되던 해, 나는 그 장터를 떠나 도시로 갔다.
그 때부터 나는 백화점의 쇼윈도우와 마네킹을 들여다보며 그 옛날의 장터를 까맣게
잊어먹었다.
아니, 잊어먹었다기보다는 스스로 잊어버리려고 애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장터란 도시의 잘 꾸며진 상가에 비해서 불결하고 비위생적이며 예의 없는 곳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학교에서 낡고 오래된 것들에 대해서는 당연히
혐오감을 가져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내가 받은 교육은 낡고 오래된 것들, 시
간의 이끼가 더덕덕지 낀 것들, 먼지와 파리똥이 쌓인 것들, 세월이 만든 주름살 같은
것들을 하루 바삐 잊어버리기를 강요받는 훈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70년대 초반에 정부는 5일장을 없애거나 축소시키려고 무모한 시도를 한 적이 있
다. 새마을 운동에 저해가 된다는게 그 이유였다. 그 당시 정부가 지적한 5일장의 문제
점은 불공정거래가성행한다는 것, 지나친 소비를 조장한다는 것, 농민들의 관습적인 시
장 이용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그로 인해 농업생산성이 저하된다는 것, 농촌에 퇴폐 풍조
가 조성된다는 것 등이다.
한 마디로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농촌 정책이었다.
그것은 전국의 들판에 있던 농민들의 휴식처인"모정(茅亭)"을 그저 낮잠만 자는 곳으로
인식하고 막무가내 폐쇄하라고 주문했던 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러한 농촌 죽
이기는 과거 지우기를 통해 결국은 우리의 유구한 전통마저 지워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
았다. 시골 장터도 그렇게 스러져 갔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를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질을 절뚝이는 파장
신경임 시인의 시[파장]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명구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시다. 이 시가 처음 발표된 해가 1970년이었다.
30년이 흘렀다.
세상은 변했다. 이제는 시골 어디에도 친구들끼리 주머니를 털어 갈 색싯집 하나 없다.
달이 환한 마찻길도 사라진 지 오래도.
그리고 앞으로도 또 30년이 흐르면?
마찻길이라는 말을 잊어버렸듯이 그때 가서 우리는 장터라는 말을 잊어버릴지도 모른
다.
첫댓글 탄백님 잘 봤습니다. 옛 장터의 풍경이 눈에 선 하네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