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산 같아서
사사기 6:11-16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0주일이다. 광복절 기념주일이다. 1988년에 남북교회는 스위스 글리온에서 만나 해마다 광복절을 남북평화통일공동기도주일로 지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동안 남북관계는 자주 흔들리고 넘어졌지만 이 약속은 꾸준히 지켜왔다.
2015년 색동교회는 광복절 70주년에 특별예배를 드렸다. 8.15(토)에 십자가 예배를 드리고 그 시절의 가난한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오늘 광복절에 상록수를 부른 이유도 그런 배경이다. 무언가 우리의 의지를 표현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앞으로 광복절마다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기억하는 찬양예배를 드렸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내년 10주년부터는 색동교회의 모든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광복절 찬양예배를 준비하기 바란다.
김학순 할머니를 아시는가? 그 분 때문에 매주 수요일에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가 시작되었다. 그를 기억하는 기림일은 지난 주 수요일에 1400회를 맞아 서울과 세계 주요도시에서 일본에 항의하는 기림일 행사가 열렸다.
그 분이 누구인가? 세계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고백한 분이다. 67세 일이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평생 억울하고 분해 못살겠다며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사실 기자회견’을 하였다. 자신이 먼저 수치스러운 과거를 고백하면서 ‘나 말고 한 사람만이라도 더’ 고백하면 좋겠다고 했는데, 무려 240명의 할머니들이 위안부 피해사실을 정부에 등록하였다. 지금은 겨우 20명만 생존하신다.
김학순 할머니는 당시 동대문감리교회 집사였다. 그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평생 흔들리면서 살았으나, 믿음으로 대지를 깨뜨리고 일어난 새싹답게 세상을 흔들었다. 28년 전, 그 한 사람의 믿음, 그 한 사람의 고백은 얼마나 중요한가?
1)
한 사람이 중요하다. 그는 사건의 동기가 되고 일의 시작을 만드는 사람이다. 사사기 6장은 기드온이 소명을 받은 기록이다. 당시 미디안이 7년 동안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지배하던 즈음이었다. 얼마나 괴롭힘이 심하던지 백성들은 평지가 아니라 동굴에서 숨어 지냈다.
그런 위기의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한 사람 기드온에게 나타났다. 마침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 타작은 너른 마당에서 하는 것이다. 포도주 틀은 우묵하여, 밀을 타작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미디안 사람들이 너무 두려워 숨어서 타작을 하는 중이었다. 우리 조상들에게 왜놈도 그렇게 무서운 존재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는 기드온을 보고 기드온에게 인사하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12).
그 인사를 듣자면 마치 유쾌한 어조로 ‘굿모닝!’하듯 한다. 미디안의 약탈이 두려워 포도주 틀에 숨어 타작을 하는 기드온에게 아마 ‘안녕!’이란 인사도, 게다가 ‘큰 용사여’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 기드온의 아픈 곳을 찔렀을 것이다.
기드온의 행동은 결코 ‘큰 용사’의 모습이 못되었다. 기드온은 부끄러웠다. 타작마당이 아닌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모습이 결코 용사다운 행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드온은 가장 불안하고, 또 그 마음을 숨기고 싶은 상황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다. 그러니 마음이 고울 리 없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에게 불만스럽게 반문한다.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13).
종종 우리는 평화를 비는 인사에도 불만스러울 때가 있다. 우리교회는 예배마다 인사가 다르다. 새벽에는 굿모닝, 주일에는 주님의 평화, 금요일에는 할렐루야! 늘 악수를 한다. 다 이유가 있다.
종종 굿모닝은 무슨 굿모닝, 제기랄 평화는 무슨 평화? 행여 반감이 들 때는 없던가? 때로는 그런 의례적 인사말에도 핏대가 서는 경우도 있다. 나와 상관없는 남들의 평안한 삶에 대해 반감이 일어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당시 기드온이 그랬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에게 반문한다. 반감이 들었다. 과연 여호와께서 우리와 같이 하신다면 어찌 이런 고통이 있습니까? 또한 도대체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셨던 그 놀라운 기적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이젠 정녕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입니까?
2)
기드온은 누구인가? 기드온은 자기가 속한 므낫세 지파는 약하고, 또 그 중에서도 자기는 아비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한다. 기드온의 변명은 늘 우리가 하는 방식이다.
기드온은 스스로 작게 여기는 자였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자가 한 선택은 옳았다. 하나님은 스스로 크게 여기는 자를 결코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무가치하게 느끼고, 자신을 작게 여기는 자를 사용하신다. 사람은 무시해도 하나님이 그를 높이신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를 부르신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지혜가 보잘 것 없음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가능케 함을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16).
놀라운 일이다. 그런 반감이 기드온을 통해 선한 분노로 거듭났다. 숨어서 현실을 인정한 채 비굴한 모습으로 살던 그 기드온은 이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위대한 사사로 거듭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기드온이란 이름의 뜻은 ‘넘어뜨리는 사람’이다. 그날 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네 아버지가 세운 바알 제단과 우상을 ‘넘어뜨리라’고 명령하신다. 기드온은 먼저 우상의 자리에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뽀개어 불쏘시개로 삼았으며, 우상숭배자인 아버지 소유의 수소를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쳤다. 그가 넘어뜨린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다. 하나님은 숫자가 많음을 미신처럼 신봉하는 사람, 전쟁무기의 신통력을 의지하는 사람을 물리치신다. 오직 공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뢰할 때 크고 놀라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지금도 기드온이란 이름은 전 세계 모든 호텔과 숙소의 방방마다 파란색 성경의 이름으로 찾아간다. 기드온 성경협회를 통해 사람들의 빈 마음을 두드린다.
여호와의 사자는 든든히 믿음과 희망으로 바로 서라고 한다.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주님은 산 같아서 언제나 그 곁에 계신다. 하나님이 떠날 리가 없다. 네가 그 곁으로 돌아와 산 같으신 주님을 의지하라.
이번 광복절은 아주 특별하였다. 74년 전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는데, 다시 일본과 맞서는 상황이 되었다. 아베는 위안부와 강제노동에 대해 사죄는커녕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의 대법원의 판결을 부정하고 대통령의 민주적 통치를 걸고 넘어졌다.
그래서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통령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만듭시다’라고 강조하였다. 이 말은 해방 직후, 시인 김기림이 쓴 ‘새 나라 송(頌)’ 중에서 따온 것이다. ‘시멘트와 철과 희망 위에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 가자.’
많은 이들이 공감하였다. 우리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아직 이루지 못한 까닭은 우리가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이고, 아직도 우리가 분단돼 있기 때문이다. 일본 뿐 아니다. 중국에 대해서도, 미국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세워야 한다.
여전히 시시비비, 두려움, 우리 안의 적이 많다. 기드온과 같은 믿음으로 넘어 뜨려야 한다. 그래야 새로 시작할 수 있다.
3)
오래전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히 12:28).
이미 산 같으신 주님은 믿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주셨다. 그것은 은혜의 나라이다.
폴 틸리히는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에서 땅의 기초가 진동하여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사 24:19)할지라도 영원히 지속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땅이 늙고 낡아질 때, 나라와 문화들이 죽을 때, 영원하신 분(The Eternal)이 그의 무한한 존재의 옷을 갈아입으십니다 ... 오직 두 가지 대안만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절망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파괴에 대한 확신입니다. 다른 하나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폴 틸리히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단지 시적 은유가 아니라, 엄연한 시대의 징조로서 신앙적 의미를 간파한 것이다. 오늘 인간은 불안하다. 우리의 터전은 흔들리고 있다. 물론 해답은 있다. 주님은 산 같아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시인 도종환도 흔들리는 세상과 인생을 노래하였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2004년 교보생명 광화문서점 글판에 소개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공감을 얻았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흔들리고, 저 마다 제 인생이 푹 젖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대로 꽃은 흔들리며 핀다. 인생은 젖으면서 자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흔들림을 견디면서 더 깊이 뿌리내리고, 젖고 또 젖으면서 인내를 통해 희망이 자란다.
아마 지난 주말에 지리산을 종주한 어린 친구들도 잠시 흔들리는 마음, 젖은 인생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성큼 성큼 자라나는 것이다.
사사기 7장에서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치는 과정을 보라. 기드온은 많은 수의 군사력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가 사용한 것은 전쟁 신무기가 아니다. 다만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 3가지였다. 기드온은 두려움이 없는 300명을 앞세워 전혀 상상치 못한 방법으로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이미 겁에 질린 미디안 군대는 나팔소리, 항아리 깨지는 소리, 함성 소리에도 자멸하고 말았다.
광복절 경축사는 3.1운동 33명의 대표자 중 남강 이승훈의 말도 인용하였다.
“나는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제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리스도인 이승훈의 말은 마치 예수님의 씨 뿌리는 사람의 말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씨앗이 움터 새싹으로 올라올 때 그것은 대지를 흔들며 피어난다.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아무리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새싹도 스스로 땅을 흔들며 스스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러기에 연약하고 작더라도 한 사람의 믿음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 고백은 얼마나 중요한가? 홀로 시작하는 것 같지만, 홀로가 아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주님은 산 같아서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신다.
그러니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비에 젖는 것을 핑계 삼지 말 일이다. 성경은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히 12:28).
하나님의 은혜가 늘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허락하시고, 은혜로 받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