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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金弘壹 (1898~1980)】 "윤봉길 의사 홍구공원 의거 지원, 한국광복군 참모장"
1898년 9월 23일 평북 용천군 양하면(楊下面) 오송리(五松里)에서 아버지 진건(振健)의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일서(逸曙), 초명은 홍일(弘日), 이명은 왕웅(王雄)·왕일서(王逸曙)·왕복고(王復高)·최세평(崔世平)이다. 아버지가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풍곡재(楓谷齋)라는 서재를 근대식 소학교로 고쳐 운영하자 여기에서 배웠다. 이후 만주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부친의 권고에 따라 펑텐(奉天)으로 가서 소서변문(小西邊門) 밖 양등학교(兩等學校) 고등과에 입학하였으나, 중국인들의 민족적 차별과 멸시로 인해 한 학기만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당시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이었던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편입하여 1918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황해도 신천의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여름방학 때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는 혐의로 일제 경찰에 붙잡히는 바람에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맏형 홍익(弘翊)의 권유를 받아들여 중국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1918년 9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하이(上海)에서 군관학교 입학 방법을 찾고 있던 중 반일 단체인 구국단(救國團) 단장인 황지에민(黃介民)으로부터 구이저우(貴州) 독군의 아들인 류강위(劉剛吾)를 소개받고, 그를 통해 구이저우육군강무학교(貴州陸軍講武學校)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아시아 전역에 걸쳐 조직망을 가지고 있던 국제적인 비밀결사 흥아사(興亞社)에 가입하고 중국식 이름 왕웅(王雄)을 쓰기 시작하였다. 1918년 12월 구이저우육군강무학교에 입학하여 1년 여의 교육 과정을 마치고 2백 명 가운데 15위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곧바로 육군실시학교(陸軍實施學校) 산포병과(山砲兵科)에 들어가 포병장교 교육을 받았다. 육군실시학교를 졸업할 즈음 일어난 제2차 호법전쟁(護法戰爭)에 기관총소대장으로 참여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1920년 11월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고자 구이저우를 떠나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노백린(盧伯麟)으로부터 ‘원동혁명군’ 편성 계획과 각지의 독립군과 지원자들을 모두 집결시키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시베리아행을 결심하였다. 이때 서북간도와 연해주의 무장부대들이 시베리아의 자유시(스보보드니)에서 통합군단을 결성하기 위해 연해주 이만으로 모여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1921년 3월 1일 상하이에서 3·1운동 2주년 기념 행사를 마치고 곧바로 간도로 출발하였다. 북간도 둔화현(敦化縣)에 도착하여 북간도국민회 회장 마진(馬晋)으로부터 창바이현(長白縣)에 독립군의 잔여 부대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이들을 이끌고 시베리아로 이동하려고 창바이현으로 향하였다.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군비단)은 1919년 중국 창바이현 지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였다. 군비단은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고자 하는 임시정부의 계획에 호응하여 군사부를 연해주로 옮길 것을 결정하였다. 1921년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한 후 윤동선을 소대장으로 한 33명이 1차로 연해주를 향해 떠났다. 이후 총 9회에 걸쳐 약 500명이 연해주 이만으로 이동하였다.
제5회차 병력이 연해주로 이동할 때, 군비단에 합류하여 부대를 인솔하였다. 1921년 4월 5일 근거지를 출발한 군비단 군사부는 4월 8일 부근 티엔바오산(天寶山) 은광을 수비하고 있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독립군을 지휘하여 일군과 싸운 첫 작전”에서 약 2시간에 걸친 총격전 끝에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미산(密山)을 거쳐 우수리강을 건너 그 해 5월 10일 연해주 이만에 도착하였다. 당시는 군비단 군사부보다 먼저 이만에 도착했던 독립군 부대들이 이미 아무르주 자유시로 이동한 이후였다. 군비단 군사부 역시 이만에서 전열을 정비한 다음 자유시로 옮겨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유시에서 무장부대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 때문에 계획은 수정되었다. 혼자 자유시로 가서 분위기를 알아보고 난 뒤 이만으로 돌아와 군비단 군사부를 이만에 주둔시키고 소비에트 적군과 연결하여 백군 및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1921년 9월 군비단 군사부를 확장, 재편성하여 3개 중대로 구성된 대한의용군을 조직하고 제3중대장이 되었다. 또한 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독립군을 교육하였다. 9월 말 아무르강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현황을 파악해 달라는 소비에트 적군 아무르강함대사령관의 요청을 받고, 파견 대장이 되어 2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하바롭스크로 파송되었다. 그곳에서 일본군의 군용 전화를 도청하여 일본군의 병력과 배치 상황 등을 알아내 적군(赤軍) 함대사령부에 알려주었다. 또한 9월 23일 밤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몰살시키고 개선하였다.
1921년 12월 3일 이만 남쪽 스파스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백군은 하바롭스크를 향해 북쪽으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하였다.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의 요청을 받은 대한의용군은 일본군 및 백군과 맞서 전투에 참여하였다. 여기에서 ‘원동해방전의 첫 희생자’이자 “소비에트권력을 수립하기 위한 원동지역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투쟁의 역사에서 위대하고 잊을 수 없는 한 페이지를 차지한” 한운용 중대의 이만 방어전투가 벌어졌다.
한운용 중대의 뛰어난 전투와 희생으로 안전하게 물러난 1, 3중대를 통합 지휘하여 하바롭스크로의 철수작전을 실행하였다. 하바롭스크 인근 블라디미롭카에서 12월 14일부터 3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백군의 진격을 차단하여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이 안전하게 인역까지 물러나게 하였다. 볼로차예프카전투에서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이 승리한 후 한인특립보병대대 대대장이 되어 후방 수비 임무를 맡았다.
1922년 7월 20일 한인특립보병대대를 해산시키고 블라고베센스크와 헤이허(黑河)를 거쳐 고향의 지인들이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무링현(穆陵縣) 바미옌통(八面通)으로 갔다. 그곳에서 중학교를 설립하여 중국어와 수학 그리고 체육을 가르쳤다. 1924년 지린성(吉林省) 둔화현에서 마진·서상용(徐尙庸)·김계산(金桂山)·장기영(張基永)·임표(林彪)·마천룡(馬天龍)·임상춘(林常春) 등과 함께 대한의용군사위원회를 재조직하였다.
이후 간도에서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룽징(龍井)으로 파견되었다. 최세평이라는 가명으로 명동중학교 교사가 되어 수학과 체조를 가르치면서 그곳의 청년조직을 맡았다. 룽징의 일본 경찰에 신분이 드러나자 형 홍익이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던 창춘(長春)으로 피신하였다. 1926년 10월 9일 상하이를 거쳐 광둥(廣東)으로 가서 중국국민혁명군 총지휘부 소령으로 발령받아 북벌전에 참가하였다. 12월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였고, 1927년 3월에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중국국민혁명군의 북벌전이 끝난 뒤 상하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였다. 갖가지 종류의 무기를 취급하고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 것이고, 이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열투쟁에 쓰일 무기를 공급하고 나섰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사변 발발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였지만, 중국 정부는 소위 안내외양(安內外攘) 정책을 수립하고 기껏 일본을 국제연맹에 제소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민심을 자극하고 중국 정부를 격동시킬 계기가 필요하였다. 그 역할을 임시정부 아래 비밀리에 조직된 한인애국단이 맡았다.
김구(金九)는 이봉창(李奉昌)을 한인애국단원으로 가입시키고 첫 의거로서 일왕의 처단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김구로부터 멀리 던질 수 있는 폭탄을 구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가볍고 휴대하기 편한 마미(蔴尾)수류탄을 구해서 전달하였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거에 쓰인 폭탄이 바로 그것이다.
이봉창 의거가 있은 지 10일 만에 일본은 상하이를 침공하였다. 이에 한인애국단은 상하이에 정박하여 일본 주둔군사령부로 쓰이던 전함 이즈모호(出雲號)를 폭침시킬 계획을 세웠다. 중국인 잠수부 2명을 고용하고 상하이병공창에서 50파운드짜리 비행기용 폭탄을 급히 개조하여 마련하였다. 그러나 잠수부들이 겁을 먹고 제시간에 폭탄을 설치하지 못하여 폭파 시도는 실패하였다.
다음으로 김구와 상하이 부두에 있는 일본군 무기창고를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때 윤봉길(尹奉吉)을 비롯하여 동지 여섯 명이 탄약 창고 안에 일자리를 얻어 일하고 있었다. 인부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과 똑같은 형태의 도시락과 물통을 구하고 거기에 시한폭탄을 넣어 일본군 무기창고를 폭파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시락폭탄이 미처 만들어지기 전에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 일본이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함으로써 계획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이때 만들던 도시락폭탄은 바로 뒤를 이은 윤봉길의거에 성공적으로 쓰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거사는 한·중 관계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중국 국민당정부와 각 혁명 단체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도 구체화되어 임시정부는 침체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활동의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일본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면서 왕웅(王雄)이라는 이름 대신 왕일서(王逸曙)로 고치고 난징에 있는 중국 공병학교 부관처장으로 옮겨갔다.
난징에서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심이 되어 1932년 10월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을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또한 김구와 쟝제스(蔣介石)의 합의로 1934년 2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설치된 한인특별반의 운영에도 관계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12월 13일 난징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한커우(漢口)로 이동한 후 쟝링(江陵)의 중국중앙군관학교 성자분교(星子分校) 한인특별반의 교관으로 파견되었다. 한인특별반에서는 전술학·조선혁명사 등을 가르쳤고, 학생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1938년 5월 24일 한인 학생들이 6개월 과정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졸업하자 이들을 인솔하여 6월 2일 민족혁명당의 본부가 있는 한커우에 도착하였다. 이때 인솔해온 대원들을 중심으로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1939년 5월 대령에서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제19집단군 총사령부의 참모처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광복군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한국광복군은 창설과 함께 중국 국민당정부의 규제와 간섭을 받아야 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9(個準繩)’을 통해 광복군을 규제하였다. 임시정부는 국민당정부에 계속해서 9개준승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1944년 9월 8일 마침내 9개준승이 취소되었다. 광복군에 대한 지휘권이 임시정부로 귀속되자, 김구가 장제스에게 요청한 끝에 김홍일은 중국군에서 전역하여 광복군 참모장을 맡았다.
1945년 5월 1일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경력을 적극 활용하여 중국 국민혁명군과의 합작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광복군과 중국 국민혁명군 제74군단이 합작키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광복군과 OSS 합작 작전에 집중하자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후 광복군의 초모활동과 선전활동에 힘쓰던 중,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한국광복군 참모장직을 사직하고, 중국 국민혁명군으로 복귀하였다. 소련군으로부터 중국 동북지역을 접수하기 위해 설립된 동북보안사령장관부(東北保安司令長官部)의 고급참모로 동북지역에 파견되었고, 한교사무처장도 맡아 교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후 중국 국방부의 정치국 전문위원을 끝으로 중국군에서 전역하고, 1948년 8월 23일 귀국하였다.
국군에 입대하여 육군사관학교와 육군참모학교 교장을 맡고, 6·25전쟁 때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육군 제1군단장, 육군종합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다가 1951년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 후 주중화민국 대사,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 신민당 당수 등을 지냈다. 1980년 8월 8일 사망하였다. 회고록으로 『(大陸)의 (憤怒) -(老兵)의 (回想記)-』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21~25년 만주와 시베리아 독립군 시절의 김홍일 [판형1] |
중국 국민혁명군에 참가한 김홍일(1928~1931) [판형1] |
김구와 김홍일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