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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율기(律己) 제6조 낙시(樂施은혜 베풀기를 즐기는 일)
오늘은 두 번째 꼭지, ‘가난한 친구나 궁한 친척들은 힘을 헤아려서 돌보아 주어야 한다.’
목민심서 율기(律己) 제6조 낙시(樂施)
2. 가난한 친구나 궁한 친척들은 힘을 헤아려서 돌보아 주어야 한다.
한집안 사람들을 임지에 데리고 오지는 못하더라도 이들 중에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식구를 따져서 매월 생활비를 대 주지 않을 수 없으며, 소공친(小功親)(주1) 중에서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반달 생활비를 대 주어야 하며,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곤경에 처했을 때만 돌보아 주면 될 것이다.
가난함이 그리 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틈틈이 조금씩 보내주면 될 것이다.
가난한 친구가 와서 도움을 청할 때에는 후히 대접을 하고 물건을 줄 적에는 노자까지 계산하여 집에 돌아가서도 남는 것이 있게 하는 것이 좋다.
유송(劉宋)(주2)의 강병지(江秉之)(주3)가 신안 태수(新安太守)로 있을 때 받은 녹봉(祿俸)을 모두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벼슬살이하는 동안에 책상〔書案〕(주4) 하나 만든 것뿐인데 그것마저도 관고(官庫)에 넣어 두었다.
방언겸(房彥謙)(주5)이 경양령(涇陽令)이 되었다. 옛날부터의 가업(家業)이 있었고, 또 받은 녹봉도 모두 친척이나 친구들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주는 데 쓰고 비록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태연히 지냈다. 일찍이 그의 아들 방현령(房玄齡)(주6)에게, “사람들은 모두 녹봉으로 부자가 되는데 나만은 벼슬살이 때문에 가난하게 되니 자손들에게 남겨줄 것은 청백(淸白)뿐이다.” 하였다.
나유덕(羅惟德)(주7)이 영국지부(寧國知府)로 있을 때 하루는 유인(劉寅)(주8)을 만나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며, “오늘 아주 유쾌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므로 유인이 무슨 일이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말하였다. “요즈음 가난한 일가 10여 인이 굶주리다가 멀리까지 와서 도와주기를 청하기에 그동안 모아 둔 녹봉을 모두 털어서 주었는데도 아버님 이하 온 가족들이 한 사람도 내가 하는 일을 막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기분이 유쾌합니다.”
팔송(八松) 윤황(尹煌)은 부임하는 고을마다 종족(宗族)을 만나면,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관곡히 대접하였다. 자신의 생활 규모를 줄여가면서도 종족이 요구하면 반드시 들어주면서 말하였다. “우리 종족이 쇠퇴하여 녹을 먹는 자는 나뿐이다. 만약 내가 돌보아 주지 않으면 비록 청렴하고 절약했다는 이름은 얻을지라도 조상의 마음을 체득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벼슬살이하는 도리가 제 몸만 살찌게 하지 않으면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관고(官庫)에 남은 재정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그것은 지극한 덕(德)이며, 재물을 남용하여 관가의 빚을 지게 되면 그것은 예(禮)가 아니다.
근세에 이복암(李伏菴)(주9) 어른이 만윤(灣尹)이 되어 함부로 은혜를 베풀다가 공채(公債)를 8천 냥이나 졌다. 비록 그 허물을 보고 어진 마음을 알 수 있으나 벼슬살이하는 사람이 본받을 일은 못 된다.
감사(監司) 한지(韓祉)(주10)가 임지에 있을 때 매양 시제(時祭)(주11) 때를 당하면 여러 비장(裨將)들을 시켜서 제단(祭單) - 제수단자(祭需單子)이다. - 을 썼는데 온종일 걸려서야 끝이 났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제사드리는 데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하니, 한지가 “이들은 모두 우리 선영(先塋) 안에 있는 동족들의 무덤이다. 우리 선조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다 같이 지친(至親)으로서 함께 한 산에 묻혔는데, 한쪽 자손은 부귀영화를 누려 조상이 관에서 바치는 성대한 제물을 받고 한쪽 자손은 쓸쓸하여 조상이 술 한 잔도 받지 못한다면 어찌 신도(神道)가 편안할 것이며 족속들의 부귀영화에 힘입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전의(全義)의 수령으로 있을 때 읍의 재력이 지극히 보잘것없었으나 여러 곳의 제단(祭單)은 한결같이 이와 같았다.
감사 이창정(李昌庭)(주12)이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있을 때 공과 성명이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관(官)의 품계도 공과 같았다. 성명이 같은 그 사람의 친구 중에 가난한 선비가 있었는데, 딸의 혼수(婚需)를 도움받기 위해서 찾아와 공을 보니 그의 친구가 아니었다. 실망하여 머뭇거리므로 공이 자리에 앉힌 후 서서히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사람이 사실대로 말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본인이 아니라도 관계없다.” 하면서 후히 대접하고 혼수를 마련해 주되 한 가지도 빠진 것이 없게 해주었다. 그 사람이 감사히 여기며 말하였다. “비록 그 친구가 마련하더라도 이와 같이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역주]
[주-D001] 소공친(小功親) : 유복친(有服親)의 하나. 종조부모(從祖父母)ㆍ재종형제(再從兄弟)ㆍ종질(從姪)ㆍ종손(從孫)을 말하는데, 5개월 동안 복을 입는다.
[주-D002] 유송(劉宋) : 남조(南朝) 송(宋)의 별칭. 유유(劉裕)가 세운 나라. 420~479.
[주-D003] 강병지(江秉之) : 남조(南朝) 송(宋) 무제(武帝)부터 문제(文帝) 때 사람으로 자는 현숙(玄叔)이다. 벼슬은 신안 태수(新安太守)ㆍ임해 태수(臨海太守) 등을 지냈는데 치적이 많았다. 《宋書 卷92 良吏列傳 江秉之》 《南史 卷36 江秉之列傳》
[주-D004] 책상〔書案〕 : 원문에는 ‘書’로 되어 있으나 《송서(宋書)》 및 《남사(南史)》에 의해 ‘書案’으로 고쳤다.
[주-D005] 방언겸(房彥謙) : 수(隋)나라 문제(文帝)ㆍ양제(煬帝) 때 사람으로 자는 효충(孝冲), 시호는 정(定)이다. 벼슬은 북제(北齊)에서 제주 주부(齊州主簿)를 역임하였고, 수(隋)에 들어와서 장갈령(長葛令)ㆍ약주사마(鄀州司馬)ㆍ사예 자사(司隷刺史)ㆍ경양령(涇陽令)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많았다. 집안이 본디 부유하였고 또 전후 벼슬살이할 적에 받은 녹봉도 다 친척이나 친구들을 도와주어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隋書 卷66 房彥謙傳》 《北史 卷39 房法壽傳 房彥謙》
[주-D006] 방현령(房玄齡) : 당 태종(唐太宗) 때의 명신으로 자는 교(喬)이다. 《구당서(舊唐書)》에는 이름이 교(喬), 자가 현령(玄齡)으로 되어 있었다. 시호는 문소(文昭)이다. 벼슬은 좌복야(左僕射)ㆍ사공(司空)을 역임하였고,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졌다. 《唐書 卷96 房玄齡傳》 《舊唐書 卷66 房玄齡列傳》
[주-D007] 나유덕(羅惟德) : 명(明)나라 세종(世宗)~신종(神宗) 때 학자. 이름은 여방(汝芳), 자가 유덕(惟德), 호는 근계(近溪)이다. 벼슬은 태호지현(太湖知縣)ㆍ영국지부(寧國知府)를 거쳐 포정사 참정(布政使參政)에 이르렀다. 저서에는 《효경종지(孝經宗旨)》ㆍ《명통보의(明通寶義)》ㆍ《광통보의(廣通寶義)》ㆍ《일관편(一貫編)》ㆍ《근계자명도록(近溪子明道錄)》ㆍ《근계자문집(近溪子文集)》 등이 있다. 《明史 卷283 儒林列傳 二 王畿羅汝芳》 《明儒學案 卷34 泰州學案 三 羅汝芳》
[주-D008] 유인(劉寅) : 자는 경보(敬甫)이다. 벼슬은 산동도어사(山東道御史)를 지냈다.
[주-D009] 이복암(李伏菴) : 복암(伏菴)은 이기양(李基讓, 1744~1802)의 호이다. 조선 문신이며, 천주교(天主敎) 교도(敎徒)이다.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벼슬은 의주 부윤(義州府尹)ㆍ병조와 예조의 참판ㆍ좌승지ㆍ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냈다. 실학자 이가환(李家煥)과 서학(西學)을 강론, 나라의 혁신을 위해 서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순조 1년(180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단천(端川)에 유배되었다. 저서에는 《복암유고(伏菴遺稿)》가 있다.
[주-D010] 한지(韓祉) : 1675~? 조선 문신. 자는 석보(錫甫), 호는 월악(月嶽),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벼슬은 충청도ㆍ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청백(淸白)하기로 유명하였다.
[주-D011] 시제(時祭) : 옛날 음력 10월에 조상의 산소에 가서 드리는 제사. 또 2월ㆍ5월ㆍ8월ㆍ11월에 가묘(家廟)에 지내는 제사를 말하기도 한다.
[주-D012] 이창정(李昌庭) : 1573~1625. 조선 문신. 자는 중번(仲蕃), 호는 화음(華陰)ㆍ무구옹(無求翁),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순천(順天)ㆍ동래(東萊)의 부사(府使),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貧交窮族。量力以周之。
一室之人。雖不能率來。其有貧不能擧火者。不可不計其食口。繼其月料。小功之親。有貧不能擧火者。宜繼半月之料。其餘周急而已。
〇其貧未甚者。以時饋贈。
〇貪交來乞者。厚遇之。其贈也。計其路費。使歸家之日。得有羨餘可也。
劉宋江秉之爲新安太守。所得俸祿。悉散親故。在官止作一書。留以付庫。
房彦謙爲涇陽令。家有舊業。所得俸錢。皆以周恤親友。雖致屢空。怡然自得。嘗謂其子玄齡曰。人皆因祿富。我獨以官貧。所遺子孫。在於淸白爾。
羅惟德任寧國時。一日謁劉寅。喜動顏色曰。今日一大愉快事。寅問何事曰。近貧宗有十數人。以饑荒遠來乞周。比積俸餘。施散殆盡。家大人以下及諸眷屬。無一阻撓我者。爲是鬯然耳。
尹八松煌所至州郡。遇宗族。必盡誠款接。削衣貶食。有求必應曰。吾宗族衰替。食祿者唯我而已。若我不恤。雖得廉約之名。非所體祖考之心也。且居官之道。苟不自肥。斯無愧矣。
〇庫有餘財。悉以施人則至德也。濫用財物。以負公逋。則非禮也。
近世茯菴李丈爲灣尹。以濫施之故。負公債八千兩。雖觀過知仁。而非居官者所宜法也。
韓監司祉按藩。每當時節。使諸裨書祭單。終日乃畢。或問曰。所祭不已多乎。曰此皆吾先塋之內。同族之墓也。自吾祖而視之。同是至親。同葬一山。一枝榮貴。盛受官供。一枝寂寞。不能灑麥。豈神道之所安。奚賴於族屬之榮貴耶。曾宰全義。邑力至殘。而諸處祭單。一如此耳。祭單卽所云。祭需單子。
李監司昌庭任順天府時。有與公同姓名者。官品亦與公等。其友寒士一人。爲請嫁女之需。而來見公則非也。憮然逡巡。公與之坐。徐叩其故。其人吐實。公笑曰。固無怪也。待之加厚。爲備所需一物不歉。其人謝曰。雖使友人當之。不能如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