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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의 문제
1960.11.13. 히메지野里교회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 忠雄)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 1:20-24)
오늘 히메지(姬路)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생사의 문제라는 제목을 들고 나왔는데, 생이라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즐겁게 산다, 살고 싶다’ 다들 이런 생각을 하지만, 여러 가지 일들이 뜻밖에도 일어나, 산다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지요. 살다 보면 기쁜 일이 거의 없어, 삶이 괴롭고 어렵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살을 꾀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원하여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서 살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도 인간에게는 정해진 일이며, 반드시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런데 그 삶의 방식도 참 여러 가지가 있으며, 죽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 稲次郎)처럼 갑자기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있고, 돌연사하는 이도 있으며, 평범한 죽음도 있습니다. 죽음을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죽고 싶지 않다는 분도 있듯이, 사는 방법도 죽는 방법도 가지가지입니다. 결국 인간의 과제라 할까요? 우리 인생에게 주어진 문제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까 하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을 겪습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일이 있지요. 내가 속한 사회, 국가, 세계 등등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이 맞닥뜨리는 각각의 삶, 각각의 죽음이 집합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 공회당에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히메지(姬路)사범학교의 임원으로 부속소학교를 세운 고데 코헤이지(小出 小平治)라는 분에 대해 말씀하겠습니다. 이분이 히메지에 오기 전에는 오카야마현에서 소학교(向陽小學校)교장을 하였는데, 그때 교직생활 10년의 감상을 쓴 ‘10년의 감(感)’이라는 글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없을지 모르지만, 히메지사범학교에 그 글이 걸려있었습니다. 이 고데 씨가 1906년 2월 어느 날인가 히메지에서 돌아가셨는데 그때 나이가 35세였습니다. 이분의 죽음을 애도하며 당시 사범학교 교장이던 노구치(野口 援太郞)라는 분이 남긴 추억문이 있습니다. 그것을 읽어 봅니다.
“아아, 군은 왜 그렇게 높고 큰 품성을 지녔던고! 사람들은 실로 군의 생애를 보고 흔들릴지 모르나, 나에게는 해답이 명료하게 보였다. 나는 그의 심중에 어떤 존재가 있음을 보았다. 그 어떤 무엇이 참으로 군을 이렇게 높고 크게 만들었다. ‘어떤 무엇’의 존재를 설명하기 전에 우선 군이 최후에 보여준, 실로 위대하고 숭고한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그 ‘어떤 것’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었다. 고데 씨는 이 ‘어떤 것’을 마음에 품어 멋진 교육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고데 씨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때는 2월 15일 오후 9시경이었다. 군의 집 한 칸에는 수 명의 지인이 앉아, 아주 근엄하게 어둠 가운데 군의 병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옆방에는 최후의 교훈을 주려는 듯, 군이 부인의 어깨에 기대어 정좌하고 있었다. 앞에는 활달하신, 군의 늙으신 아버지가 군의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조용히 군의 상태를 지키고 있다. 밖에 간병인 부인 한 분, 지우 두 명, 그리고 나 역시 거기에 있었다. 군이 성서의 애독하는 장과 찬송가 중 애창곡을 보여주었다. 이미 죽음이 임박한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군은 창백한, 그러나 온후한 얼굴로 무엇을 형용하듯 미소가 피어났다. 기침과 염증으로 기도가 막혀 오로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괴로운 중에도 부드러운 그 얼굴은 무슨 일인가. 그는 아무말 없이 따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돌연 말을 꺼냈다.
「영면(永眠)이 두려웠었는데, 지금 비로소 그 즐거움을 깨달았어.」
알아듣기 어려운 작은 소리로 끊어지듯, 그러나 명료하게 자신의 귀한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갑자기 크게 외치고 싶었다.
「오오. 자네, 유쾌하지 않는가?」
「그래그래. 정말 즐거워. 여러분의 얼굴이 희미희미해졌어 실로 유쾌하네.」
이렇듯 행복한 미소가 세 번이나 배어 나왔다. 부인은 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의 그런 모습에, 뜨거운 눈물로 슬픔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시아버지를 부르며 말했다.
「아, 아버님 기뻐해 주세요. 저는 남편이 이렇게 기쁨에 가득차 죽음에 임하는 걸 보니, 조금도 슬프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기쁜 마음입니다.」
아아, 무슨 이런 광경이 있을 수 있는가!”
이 노구치 교장은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크리스천이 죽음에 임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이 추도문을 썼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제 막 업무를 시작하여 히메지에 부임하고 겨우 2년. 나이 35세. 아내와 네 명의 어린 자녀와 나이 든 아버지를 남겨두었으니, 보통은 너무 비탄에 빠져 뒷목을 잡을 일인데, ‘유쾌하다, 유쾌하다’ 세 번이나 웃으며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폐결핵을 앓았으니, 기침과 가래가 나오고, 호흡도 곤란하여 끊어질 듯 어렵게 겨우 말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그 광경을 보고 노구치 교장이 놀라며 깊은 감동을 받아, 이 고데 군이 왜 그렇게 훌륭한 교육자였는지, 진심을 담아 일했는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잘 산 사람은 잘 죽습니다. 잘 죽는 사람은 잘 산 사람입니다. 잘 살지 않았는데, 잘 죽는 일은 없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와 어떻게 죽느냐는 결국 같은 문제입니다.
이에 대하여 저의 감상을 말하는 것보다 아까 읽었던 사도 바울의 빌립보에 보낸 편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 편지를 쓴 때는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있었습니다. 재판 결과를 기다리던 때입니다. 판결이 사형일까 무죄 석방일까 참으로 불안한 상태였지요. 바울은 60을 넘어 인생의 만년에 해당하는 나이였습니다. 아마도 62,3세 쯤 되었을 겁니다.
빌립보는 그리스 도시의 하나로, 바울이 그리스도 복음을 처음으로 전한 곳입니다. 거기에 세워진 에클레시아는 바울이 낳은 자녀들과 같아서 진정으로 마음 깊이 바울을 사랑하였습니다. 빌립보 신자들은 돈과 물품을 모아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그리하여 나온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앞에서 읽은 것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 받기를 원한다’라는 한 가지 목적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목적은 그리스도가 나로 인해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뭘 위해 사는가 말하면, 대개는 행복을 위해 삽니다. 혹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 또는 나라를 위해 산다고 합니다. 세계 인류 평화를 위해 산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존귀함 받기를 바라면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외의 목적은 없다고 말한 것이지요. 물론 제 가까이에는 주변 사람을 위해 산다는 신자들이 있는데,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께 영광이 된다면, 자신이 사는 의미나 목적을 이미 성취했다는 삶의 자세입니다. 죽는 일도 그렇습니다. 무엇을 위해 죽는가 하면, 자신을 위해 또는 가족, 또는 민족을 위해 죽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전시에는 나라를 위해 죽도록 장려하고, 죽으러 가는 경우도 있지만, 바울의 말은 결이 다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이는 삶의 보람이며, 기쁨입니다. 또 그를 위해 죽는다면 역시나 보람이며 기쁨입니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고데 씨의 삶과 죽음을 봅시다. 사는 동안 허다한 고통이 있었을 겁니다. 질병과의 싸움, 가족 부양의 어려움, 직업적 고충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남에게 오해도 받고 동료의 비난도 있었겠지요. 이런 모든 계산을 마치고, 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하면, 그의 인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다 하는 것입니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사연을 노구치 교장이 목격하였지요. 참으로 이 사람의 마음에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답고 높은 품성으로 살았고, 또 그렇게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은 것입니다. 고데 씨 인생의 보람, 죽는 가치가 언제까지나, 우리에게까지 다함이 없이 그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나는 이 사연을 편집하여 ‘고데일가의 신앙기록(삼일 서점, 1953년)’이라는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34-35쪽 되는데, 고데 씨 가족은 부인 카즈 여사, 네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특히 장녀는 고베여학원을 졸업한 재원이었는데,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하려고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정신에 병을 얻어 돌아갔다고 합니다. 카즈 여사의 소천 후 얼마되지 않아, 남은 세 자녀, 둘째딸과 셋째딸과 장남도 모두 훌륭한 신앙을 가졌지만, 결국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부모와 세 자녀의 신앙 기록, 지인의 추억문을 모아 제가 편집한 책입니다. ‘그는 죽기까지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다(히 11:4)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여지기 위한다’는 훌륭한 예시입니다.
열심히 일하여 어느 정도 돈을 벌었다든가, 어느 정도의 지식, 어느 정도의 직업적 성취, 이런 것들은 사실 의미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큰 일은 아닙니다. 모두 지나가는 것이며, 세월의 흐름과 함께 사라집니다. 결국 남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 구어역에는, ‘나에게 사는 것도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라고 했는데, 문어역으로 보면, ‘죽는 일은 유익’이라 간단히 되어 있어 구어역이 더 바른 번역입니다. 사는 것도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도 유익하다 말하였는데, 이는 종종 이야기해 온 주제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바울의 글을 보면, ‘사는 것은 그리스도, 죽는 것이 유익’이라는 두 가지 문제가 대조 비교되고 있습니다. 나란히 나왔는데, 죽는 게 유익이라 했으니, 사는 건 손해라 하는 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사는 건 그리스도라 했으니, 죽는 건 무엇 즉, ‘죽는 건 나’라든가 이래야 서로 댓구가 되어 문장이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러나 ‘사는 건 그리스도, 죽는 건 유익’이라고 말하여 손해와 득실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사는 것은 득이냐, 손이냐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사는 건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사는 건 그리스도이다’라는 속뜻은 무엇일까?
첫째로 ‘사는 힘은 그리스도이다.’ 이 말도 가능합니다. 자신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육체의 생명, 마음의 생명 이런 것들은 다 연약합니다. 실제로 육체는 금방 지칩니다, 병에 쓰러지기도 하고, 끝내 죽음에 이릅니다. 육신과 마음, 그것들은 참 생명이라 이름 붙일 수 없습니다. 마음은 어떤가? 마음도 역시 의지할 바가 못 되지요. 어느 순간 마음은 한껏 고양되고 희망으로 부풀지만, 다음 순간 저기압이 되어 힘이 빠지고 마는 등 마음도 부침이 큰 게 사실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함께 움직입니다. 그래서 좋을 때도 있지만, 마음이 욕망에 사로잡히거나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추함을 보게 되고 괴로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라는 존재가 생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진 생명, 그리스도를 믿는 생명이라는 것은 변치 않아요. 감정의 부침이나 신체의 강약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생명은 끊임없이 생생하게 공급됩니다. 샘이 솟는 모양을 보노라면, 아래서부터 퐁퐁 솟아올라 넘치게 됩니다. 손으로 물이 나오는 그곳을 눌러도 솟아오릅니다. 샘물에 나뭇잎이 흩어져 떠다닙니다. 이 떠 있는 낙엽이나 쓰레기 같은 것은 결국 바람에 날려가거나 물에 흘러가 버리는데, 바닥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쉼 없이 퐁퐁 올라옵니다.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는 다함이 없습니다. 결국 생명의 샘 스스로 살아가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이나 노력이 그 샘을 살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 솟아나 넘쳐오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신앙의 힘, 우리의 신앙을 키우는 힘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기르는 힘은 성서 연구가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종교 행사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약간 도움은 되겠지만 그런 지식과 감정은 한계가 있고, 또 그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아서 우리 생명의 기쁨을 거기서 얻지 못합니다. ‘사는 건 그리스도’라는 말은 사는 힘이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목적은 무엇일까.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하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절대적으로 가치 있으며, 진실로 사람을 구하는 구원,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근본적 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높여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함 받도록 자신의 생애를 쓰는 것입니다. 생의 목적이 그리스도라는 또 하나의 해석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사는 모습이랄까 생활 태도가 그리스도이다, 무엇이냐 하면, 앞에서 말씀했는데, 사는 것이 득일지 손일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게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즐거운가, 괴로운가 하는 것도 분명하지 않아서 즐겁다고 생각하는 때도 있고, 괴로운 때도 있지요. 그런데 자신의 삶의 모델이 그리스도여서, 그리스도처럼 사는 게 자신의 사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뒤의 29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오직 그를 믿는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특권을 주셨다. 너희가 만난 전투는…’에서 그리스도는 어떻게 사셨던가.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이 우리의 생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고독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나 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명의 기쁨도 체험하셨고, 사랑의 생애를 보내셨지요. 한편, 비애의 사람으로 고뇌도 있었으며, 결국 십자가에 달려 부당한 재판을 받은 후, 치욕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그분의 삶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행복한가 하면, 이 세상의 의미로는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이 종교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 가정이 평안하다, 장사가 번창한다, 출세한다 하며, 세상의 행복을 약속하는 종교는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그런 것을 약속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꼭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아니고, 건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약속받은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몸이 부활하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약속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어떤 사람은 가정의 행복을 받으나, 다른 사람은 가정의 행복을 빼앗깁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주시지만, 또 다른 사람은 건강을 잃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버릴 수 없는 집착, 육체에 대한 집착이나 물질에 대한 집착 그런 것들을 하나님은 남김없이 쓸어가 버리기도 하십니다. 그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은혜를 주시기도 합니다.
바울이 각지로 전도를 나갔을 때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베드로처럼 자매와 함께 동행할 수 없는가 말합니다. 베드로의 자매란, 아내인지 아닌지 많은 연구자들이 문제삼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베드로는 결혼한 사람으로 아내가 있었다고 봅니다. 아내가 베드로를 도와 여행도 같이 했던 적도 있습니다. 바울은 독신이어서 가정의 행복을 느낄 수 없었어요.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삶을 주셨고, 바울에게는 바울의 생을 주셨지요. 어떤 사람은 화목한 결혼 생활로 은혜를 주시나, 어떤 사람은 악처를 맞이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나쁜 남편을 맞기도 해요. 또 어떤 사람은 끔찍이 사랑한 아내를 일찍 잃기도 하는, 인생이란 아주 제각각이어서 은혜가 임한 사람, 아닌 사람도 있어요. 그 받는 은혜가 다 다릅니다.
그러나 이 모두의 공통점은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여지고, 성서의 진리가 더 확실히 사람들에게 증거가 됩니다. 신앙에 들어와서도 어떤 사람은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나, 다른 이는 오히려 고난을 받습니다. 또 같은 사람의 생에서도 때에 따라 괴롭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며, 적절한 때에 은혜를 맛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 사는 건 그리스도’라 하는 것입니다.
생은 즐거운가 하면 괴롭고, 손해인가 하면 득인 그런 일은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가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살아가는 첫 번째 힘입니다. 나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이것이 바로 인생 제2의 문제이며, 그리스도가 사신 것처럼 우리도 살아가고 있지요. 이 ‘사는 건 그리스도’라는 말씀은 함축하는 바가 너무 많아서 해석도 아주 다양합니다.
‘죽는 것도 유익’이라는 말은 비교적 의미가 간단해요. ‘죽는 것은 그리스도다’라 해야 할 것 같은데, 바울은 말을 바꾸어 죽는 것도 유익이라 하였습니다. 왜 죽는 게 유익인가? 바울은 부활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생은 육체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때부터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영생은 우리가 죽고나서 비로소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육체 안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제약과 제한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제약이지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육신이 피로하다는 것은 참으로 우습게 볼 일이 아니어서, 마음이 앞서지만 몸이 지쳐서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너무 피곤하면 실수를 하게 마련이므로, 피로는 의사만 경계할 문제이 아니라 모두가 경계해야 합니다.
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외의 여러 가지 본능적 욕구가 있어, 하나님을 축복을 얻지 못하는 일도 있고, 무서운 재앙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육신이라도 완전하다면, 타인을 더 사랑할 수 있고, 더 선을 행할 수도 있으며, 공부도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한탄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죄는 육체를 거점으로 사람을 포로로 만듭니다. 사탄이 사람을 공격할 때, 족쇄를 어디에 거느냐면 바로 육체입니다. 지치기 쉬운 연약한 육체, 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정욕이 있습니다. 정욕 그 자체는 전혀 나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염세적이고 소극적 인생관은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생명을 끊는 건 참 비겁한 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임무를 다하지 않는 일이므로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버리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길이 아닙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일은 안 됩니다. 자살이 그리스도 신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이유입니다. 죽으면 편해지는가? 과연 편해질지 어떨지 알 수 없습니다. 죽은 후에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사는 것 이상의 고통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신앙 없이 이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피한다는 의미로 ‘죽는 것이 유익’이라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죽는 게 유익’이라는 건, 지금 말씀드린 대로 참으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책임을 잘 완수하기 위해, 좀 더 잘 활동하기 위해, 좀 더 선을 행하기 위해, 좀 더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이 불완전한 육체를 버리고 완전한 육체를 받고 싶다는, 즉 부활체를 받고 싶다는, 참으로 적극적인 의욕을 표현한 말입니다. 지금의 불완전한 몸으로 이 세상을 살기보다 죽는 편이 유익이라고 바울이 말한 의미를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는데, ‘사는 것도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그리스도’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사는 것도 유익이요, 죽는 것도 유익이라 말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빌립보서의 마지막에 ‘나는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큰 행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더 세상에 머무르는 것이 여러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므로 내가 살아있다고 확신한다. 즉 지금 나를 기다리는 판결은 무죄석방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빌립보에 가서 사랑하는 여러분을 만날 것이다. 떨어져 있는 지금도, 만날 때도, 여러분이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확고부동한 신앙을 잘 지키기를 바란다. 수많은 유혹을 만나고 위협을 당하고, 혹은 여러 사정으로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릴 수 있겠으나, 동요하지 말기를. 동요하지 않는 건 유혹하는 자, 위협하는 자에게는 패배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승리의 표시이다. 움직이거나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격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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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이 길지만, 오래전부터 소개하고 싶었던 글입니다. 길어서 2편으로 나누었으니, 번거롭더라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