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자의 자세(시122:1-9)-2021.8.8
우리 시대에 오늘날처럼 예배에 대한 논쟁이 많은 시대도 없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로 인하여 1년 반 이상을 예배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태로 큰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진통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코로나는 한국 교회를 끔찍할 수준으로 후퇴시킨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의 몸 된 교회를 양극단으로 분열시키는 더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배논쟁입니다. 평소 들어보지도 못한 비대면 예배라는 신조어를 등장시켜 교회들마다 젖어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한마디로 국가 공권력에 의해 예배가 심각히 훼손된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누가 팬데믹 상태에 빠져 있는 코로나에 대한 방역을 거역하겠습니까? 너와 나 할 것 없이 전 국민이 힘을 합쳐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야겠지요. 그것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당연히 교회도 정부 방역방침에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지상에 세워진 교회는 세상을 무시하고 존재하는 기관은 아니거든요. 교회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썩어져가는 세상을 정화시키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그러나 코로나로 인한 정부의 교회간섭은 도를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교회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해 버렸습니다. 대표적으로 예배의 간섭입니다.
교회의 예배권은 세상 어떤 정부나 권력으로부터 간섭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는 심각한 코로나를 극복하기 위한 방역지침을 솔선수범하여 지켜야 하지요. 그것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전염병을 이겨내기 위한 방역지침까지 거역하고 저항하는 것은 교회의 지나친 고집입니다. 교회는 정부의 방역지침을 준수하고 따라야 하지요. 그것은 교인들의 건강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부가 전염병을 빌미로 해서 지나치게 교회 예배를 간섭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월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정부는 예배에 대한 지나친 간섭을 해 왔습니다.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이나 적당한 거리두기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가대를 하지 말라, 통성기도를 하지 말라, 암송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등 고유한 예배권까지 간섭하는 것은 도를 넘어 버린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개념도 모르는 자들에 의한 예배간섭은 교회 길들이기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교회가 스스로 형편에 따라 판단해야 할 자율권을 정부가 물리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교회간섭이 아니라 교회를 통제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지요. 종교의 자유를 찬탈하려는 무서운 음모가 숨겨 있는 거예요. 일각에서는 교회의 민감한 반응이라고 말하지만 결코 교회의 민감한 반응이 아닙니다.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에 따른 교회의 합법적인 주장입니다. 요즘 정부가 교회를 자기들의 수중에 넣고 길들이기를 시도해 보려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마치 세상 정부가 교회의 존재마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시험해 보는 것은 아닌지 개탄스럽다는 말이에요. 물론 기독교 일각에서는 코로나를 핑계 삼아 교회가 세상정부에 무조건 협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비대면 예배가 교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이제는 비대면 예배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비대면 예배의 방법들을 고안하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것들이 인본주의 신앙을 절대화시키는 못된 바이러스가 아닌지 무서운 생각까지 듭니다.
사실 큰 교회들은 비대면으로도 충분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시도하고 있다합니다. 물론 그렇게나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힘쓰는 교회들의 진정성까지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진정되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기발한 방식의 온라인 예배를 고안할지라도 얼굴을 마주 대하여 드리는 예배와는 비교가 안됩니다. 예배의 내용이나 수준이나 방식에 있어 대면예배보다 더 좋은 예배가 있을까요? 솔직히 어찌할 수 없어서 비대면 예배를 드리지만 솔직히 드려본 사람들은 고백합니다. 대면으로 드리는 현장예배가 얼마나 존귀한 예배인지를 말입니다. 현장 예배가 얼마나 인격적인 예배인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주장하는 예배의 회복은 예배권의 회복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지금 교회의 재량권에 의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대다수의 교회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정부방침에 따라가는 식이지요. 물론 우리가 인간의 도성에 세워진 교회의 한계를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는 정부의 일방적인 방침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억지 순종을 해온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입은 상처는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코로라 등에 올라탄 종교적인 쓰나미가 한국 교회를 강타해서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입힌 것이지요.
문제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아픈 현실을 대변해 줄만한 교회나 기관이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소수 교회와 목회자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이상한 교회, 혹은 이상한 목회자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고 말았지요. 교계의 일치된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에 마치 그들의 목소리를 반동분자의 불평하는 소리처럼 치부해 버린 것이지요. 사실 그분들의 소리가 용기 있는 선지자의 소리가 아니었을까요? 앞에서 행동하는 사람보다 뒤에서 침묵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건강한 것일까요? 사실 앞에서 싸우는 사람보다 뒤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훨씬 말이 많고 잘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는지요? 물론 큰 규모의 교회들은 교회의 유불리를 따지면서 침묵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한국교회가 이렇게 분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정부방침에 따라 비대면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교회들과 절대 현장예배는 양보할 수 없다고 강행하는 교회들이 서로를 향해 은근히 비난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정부의 일방적 비대면 예배를 수용하지 않고 끝까지 현장예배를 강행하던 몇몇 교회들은 정부로부터 교회 폐쇄명령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어찌하여 교회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다들 들어보면 일리는 있습니다. 비대면 예배를 수용하는 측이나 현장예배를 강행하는 측 모두다 말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교회들끼리, 혹은 목사들끼리 편 가르기 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지요. 서로를 비난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목회자들끼리 나름대로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물고 물리는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서로 물고 뜯고 물리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한들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앙 양심을 따라 특정 교회나 목회자를 비난하는 원색적인 언동은 삼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차라리 주님의 뜻을 구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어떨까요?
솔직히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받으십니다.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날에 특정한 방식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를 받으신다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에 집중해야 하지요. 솔직히 예배자의 마음가짐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는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만 아프게 할뿐이지요. 그것은 구약 성전시대 성도들이나 신약 교회시대 성도들이나 다 마찬가지에요. 구약 성도들이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얼마나 아파하셨는지 아십니까? 오죽하면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말1:10)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말세에 주의 몸 된 교회가 하나 되어 한 목소리를 내고 원수마귀 악한 것들과 싸워도 시원찮을 판에 교회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 예배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제한을 받거나 통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대한민국의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가 아닐지라도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세상 정부나 공권력으로부터 훼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고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성전에 올라가는 자의 자세에 관한 내용입니다. 부제를 보면 다윗 왕이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로 지은 시입니다. 오늘날 교회시대로 말씀드리면 예배드리러 올라가는 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지요. 예배자의 자세에요. 다윗은 누구보다 성전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어서 몸부림을 쳤던 왕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건축을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하였고, 자기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본 시편은 순례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찾아가는 기쁨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사용하도록 지은 시입니다. 본문에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의 마음의 상태와 자세, 그리고 목적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본문을 통해 예배자의 자세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배는 예배자가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를 받으십니다. 물론 그것은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되겠지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자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치 못한 자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예배하는 자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예배의 장소나 시간, 방법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을 통해 예배하는 자의 자세를 고찰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최소한 우리 안에 세 가지가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안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소원이 있는가를 말입니다.
(1) 기쁨이 있는가?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누군가로부터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윗은 기뻤다고 고백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기쁨을 갖고 있었던 것이지요. 때문에 여호와의 집이 있는 예루살렘을 생각만해도 기뻤던 것입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뻤던 것이지요(2절). 그래서 예루살렘을 찬양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요 교회와 천국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잘 짜여진 도시라고 말합니다(3절). 그 말씀은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성이라는 말이요, 오늘 우리식으로 말씀드리면 예배를 드리기에 가장 합당하게 지어진 성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사랑하라고 외칩니다(사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을 안고 있는 하나님의 도성이거든요.
우리는 예루살렘을 통하여 위로를 받습니다(사66:13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기쁨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즉, 기쁨으로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에요. 기쁨으로 성전에 올라가듯이 예배당을 출입하는 자가 기쁨으로 출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배당을 출입하는 나는 과연 기쁨이 있는지 말입니다. 혹시 누군가로부터 교회가자는 권유를 받았을 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물론 어떤 이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고 말할 것이나, 어떤 이는 기쁨은커녕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짜증을 부리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믿는 자는 대부분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배는 기쁨 그 이상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러 오신 여러분의 마음을 한번 점검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과연 내안에 기쁨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정말 예배에 대한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예배의 기쁨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혹은 예배의 감격을 아는 사람이라면 예배의 기쁨을 누구보다 더 잘 알 것입니다.
예배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있고,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솔직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린다고 말하면서 예배자의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그 예배는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닌 것이지요.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예배자 안에 기쁨이 없는 예배가 하나님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 것인지 알 것입니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상의 행위거든요. 결국 예배자가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인 것이지요.
여러분은 수없이 많은 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마음으로 드리십니까? 혹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기쁨 없는 예배를 드려 보신 적은 없으셨나요? 아마도 대부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한순간 기쁨 없는 예배로 시작했을지라도 예배 중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기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로 인도함을 받은 경험은 다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으로 충만한 예배라면 더욱 좋았겠지요.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공격하지요. 예배를 공격하는 대표적인 유형은 예배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예배에 기쁨이 없다면 얼마나 무의미할까요? 기쁨이 없는 예배가 예배일까요? 예배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선물입니다. 예배에 기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배 자체가 기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예배의 기쁨을 빼앗기면 안됩니다. 기쁨은 예배하는 자의 영적건강을 체크하는 온도계와 같습니다. 예배자의 마음의 상태거든요. 예배자의 마음의 상태가 건강하면 절대 하나님의 기쁨을 빼앗길 수 없지요. 그러나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쉽게 빼앗기고 맙니다. 순간의 기분이나 감정이 내 안에 있는 기쁨을 빼앗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자는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냥 성전이 있는 방향만 쳐다봐도 기쁘고 즐겁습니다. 하물며 성전으로 올라가는 기쁨은 오죽하겠습니까? 고라자손은 시편 84편10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입니다. 고라 자손은 주의 궁전에서 거하는 한 날이 세상 장막에서 사는 천 날 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전의 문지기만 해도 기쁘고 즐겁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만일 믿음이 없으면 예배드리는 시간이 얼마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울까요? 얼마나 지겹고 괴로울까요? 불과 한 시간 예배를 드리는데도 몸이 빌빌 꼬이고 잡념으로 착념하고 눈이 감기고 귀가 닫힐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쁨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미안하지만 예배를 통해 고통의 짐만 가득 진채 떠나갈지 모릅니다. 오늘 저는 이 시간 여러분 안에 예배의 기쁨이 회복되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쁨이 없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과연 우리는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예배라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거든요.
오늘 이 시간 예배를 통한 기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말만 들어도 기뻐하시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자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며, 성전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말이지요. 성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으며,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하나님의 눈동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한 때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법궤가 석 달 동안 있었습니다. 그 법궤를 다윗이 자기 성으로 모셔올 때였습니다(삼하6:12-17).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춤을 추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뛰놀면서 말입니다. 법궤 앞에서 다윗왕은 어린아이였습니다. 왕의 체면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 몸을 드러내고 춤을 춘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으면 그렇게 춤을 출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요? 대부분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혹은 쓸데없는 체통 때문에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는지요?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체면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좋았던 것이지요. 그런 사람은 예배드릴 때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좋으니 예배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기쁨은 예배자의 생명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기쁨을 주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기쁨은 우리의 기쁨과는 질이 다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30편11절에서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고 고백합니다. 예배와 기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2) 감사가 있는가?
예배드리는 우리 안에 감사가 있는지요? 감사는 예배하는 자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갑니다(시100:4절상). 그리고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합니다(시100:4절하). 감사는 예배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는 예배는 예배일 수 없는 것이지요. 다윗은 성전에 올라가는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올라가는 것이랍니다(4절).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절대적인 이유입니다. 본문 4절에서 다윗은 성전에 올라가는 이유에 대해 밝힙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는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지파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의미합니다. 열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명의 아들들이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성전에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온 지파가 연합하여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린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는 혼자 드리는 것보다 더불어서 함께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두말 할 것 없이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것이 좋고, 온 족속이 함께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예배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을 구성하고 있는 열두 지파는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로 연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야곱의 열두 명의 아들들은 4명의 여인들로부터 얻은 아들들이거든요. 아버지는 한 사람이지만 어머니가 네 사람이에요. 그래서 하나로 결속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요. 각자 다른 소리를 낼 수 있고, 파당도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하나로 연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한분 하나님을 섬기므로 마음이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열두 지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영적인 공동체거든요.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온 지파가 성전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목적은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말입니다. 다윗은 시편30편4절에서 고백하기를,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전에 올라가는 것도 아무렇게나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규례대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규례가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전례대로 성전에 올라야 했던 것입니다(4절하). 그 전례는 이스라엘 성인 남자가 일 년에 세 번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지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 예배자들에게 주어지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이 관례는 오늘날 예배당에서 드려지는 공적 예배를 의미할 수도 있거든요. 물론 성전 된 우리가 때와 장소, 시간에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내가 소속된 성전의 관례를 따라 공적인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올라가는 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른바 내가 소속된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공적인 예배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참여해야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에요.
예배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예배의 가장 모범적인 유형은 초대교회일 것입니다. 사도행전2장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는 가장 모범적이고 건강한 모델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는 교회였습니다(행2:44-45절). 또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교회였습니다(행2:46-47). 그 교회는 더불어 함께하는 교회였지요. 마치 전통에 가득한 화살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와 감사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3) 간구가 있는가?
또한 예배자는 내 안에 간구하는 소원이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전에 올라가는 또 다른 이유는 기도의 소원을 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간구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지요.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림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 항목입니다. 기도 없는 예배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기도는 예배의 필수요소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본문 6절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자들은 예루살렘의 평안을 간구하라고 주문합니다. 당연히 예루살렘은 성전을 의미하지요. 그러므로 성전에 올라가는 자는 간구하는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올라가라는 말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전에 올라가는 목적도 하나님과 교제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일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갈 때 간구하는 소원을 잊지 말라는 것이요, 그중에서도 가장 우선적인 간구는 예루살렘의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안에는 평강이 있고 형통이 있기 때문입니다(7절). 한마디로 다윗은 평강과 형통이 있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우리로 하여금 간구할 소원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는 것입니다(6절). 예루살렘은 오늘날 우리식으로 말씀드리면 교회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는 말은 먼저 교회의 평안을 간구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른바 교회의 안녕과 번영과 평안을 간구하라는 것이지요.
사실 교회는 기도가 가장 많이 필요한 곳입니다. 사람마다 자기를 위해 기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말처럼 자기가 몸담고 있는 교회를 위한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성숙하지 못하면 할 수 없지요. 물론 대부분의 성도가 한두 번 생각날 때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혹은 최우선적으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하면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노골적으로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고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몸 된 성전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것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형통의 복을 허락하십니다. 때문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주님의 명령처럼 예루살렘의 평안을 간구해야 합니다. 교회에 출입하는 자가 자기가 속한 교회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동체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의식이 없는 자는 소아적인 수준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위한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른바 예루살렘을 위한 간구를 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물론 자기가 속한 교회의 차원을 벗어나서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수준을 훨씬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주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사실 믿는 자의 영적 수준은 기도하는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성숙한 성도는 대부분 자기중심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구요. 항상 자기를 위한 기도, 혹은 자기 가정이나 자기 교회를 위한 기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숙한 성도는 믿음의 바운더리(boundary)가 무척 넓고 크고 높습니다. 믿음의 지경이 넓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최소한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교회를 위한 기도를 어느 정도 하십니까? 정기적으로 기도하십니까? 혹은 비정기적으로 하십니까? 혹은 가장 먼저 하십니까? 아니면 시간이 나거나 생각이 날 때 기도하십니까?
어쩌면 기도는 우리 믿음의 수준을 측정해 볼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 쉬운 방법일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각자의 기도에 대한 점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위한 기도를 우리가 먼저 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른바 예루살렘을 위해 우리가 간구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 말입니다. 교회가 평안해야 성도의 삶이 평안하고, 교회가 형통해야 성도의 삶이 형통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교회가 평안해야 성도의 가정이 평안하고, 교회가 형통해야 성도의 가정이 형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교회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의 평안과 형통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위한 평화의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른바 교회를 위한 평안을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예루살렘이 존속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중단 될 수밖에 없거든요. 사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그것을 눈물로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후 최소 70년간 예루살렘에서 성전제사가 중단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중단된 것은 최고로 비참한 일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믿는 자에게 예배가 중단되는 것은 가장 큰 비극적인 일인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의 중심지, 제사의 중심지, 영적으로는 예배의 중심지가 되는 예루살렘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나 깨나 예루살렘을 위한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이른바 교회를 위한 기도를 쉬지 말라는 것이에요. 왜냐면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우리의 가장 많은 기도가 심어져야 할 곳이기 때문이지요. 가장 많은 기도가 필요한 곳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도 우리에게 예루살렘을 위한 기도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29장7절을 보면,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형제와 붕우를 위한 기도를 심어야 합니다(8절). 이른바 형제를 위한 평강을 간구하라는 것이지요. 형제를 위한 중보기도 역시 우리가 마땅히 심어야 할 우선적인 기도입니다. 성숙한 예배자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자가 되어야 하거든요. 그것이 성숙한 예배자요, 건강한 예배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실 때 성숙하고 건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보는 건강한 예배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성숙한 예배자, 건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런 예배자는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권면하는 대로 행하는 예배자입니다. 물론 본문에서 다윗이 강조하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을 올라가는 자의 자세, 혹은 성전을 출입하는 자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지만, 오늘 우리의 시선으로 볼 때는 예배자들에게 권면하는 가장 유익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예배자의 바른 자세를 권면하는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때문에 본문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예배자로서의 나의 모습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안에 예배의 기쁨이 있는가? 그리고 예배의 감사가 있는가? 예배의 간구가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없는 것이 있다면 채우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보충하여 건강한 예배자, 하나님이 찾으시는 성숙한 예배자로 거듭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주님이 내안에 나를 성전 삼고 계심으로 인하여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 때 주님이 찾으시는 건강한 예배자로, 성숙한 예배자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되십시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