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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멍 쉬멍 제주여행기
여행 첫날 <대정으로 가다
제주허씨의 일원이 되어 제주 여행을 하고자 한다.
지도와 허씨 성을 가진 자동차, 책 한권으로 제주 여행을 시작!!!
숙소예약 이런 건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여건 되는 대로 묵으면 되는 것이다.
제주엔 점심 무렵 도착했다.
첫날 갈 곳은 대정이다.
가는 길에 애월읍에 있는 빌레못동굴을 보고, 대정 추사 적거지를 돌아본 후 송악산 쪽으로 이동하여 오늘 일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제주라는 용어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 언제부터 한반도 역사에 들어와 있었는지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고대 탐라가 찾은 생존방식은 조공외교였다. 조공은 결코 복속이 아니다. 이것은 강대국 주변국들의 생존 방식이다.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던 탐라는 고대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백제에 조공을 받쳤고, 신라가 통일한 후엔 통일신라에 조공을 받쳤다. 완전한 한반도 역사에 편입된 것은 고려 숙종 때이다. 이때 탐라국은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의 하나인 탐라군으로 바뀌면서 독립적인 지위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다시 고종 원년(1214)에 탐라군을 제주군이라고 고쳐 부르면서 탐라는 제주를 일컫는 옛 지명이 되었다.
빌레못굴은 구석기시대를 연구하는데 소중한 가치가 있고, 또한 4.3사건과 관련이 있는 유적지라고 한다. 1949년 토벌대와 민보단이 합동으로 대대적인 수색작전에 의해 동굴이 발각되면서 이 속에 숨어 있던 주민 29명이 집단 학살당하였던 장소다. 작년에 보았던 영화 ‘지슬’의 장면이 떠오르면서 굴 앞에 서니 서늘한 기운이 나와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굴은 철조망으로 막혀있다. 이곳은 아주 한적한 곳에 있어 네비양이 없었으면 찾아오기도 힘들었을 것 같다. 지나는 사람도 없어 발품 팔아 다니는 여행객에게는 힘든 곳이겠다. 다시 한 번 제주 허씨에게 감사를!!
조선시대 제주의 세 고을은 제주목과 동북쪽의 정의현, 남서쪽의 대정현이었다. 정의현은 성읍 민속마을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될 정도로 옛 모습이 남아있다. 그러나 대정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또한 옆으로 중문이 들어서면서 차츰 대정은 잊혀져갔다. 얼마 전에 다녀온 선산과 같다. 선산도 옛 도시로 큰 곳이었으나 구미가 발전면서 서서히 잊혀 진 동네가 되어버린 것과 흠사하다.
대정은 추사적거지로 유명한 곳이다. 주변에 대정읍성벽이 조금 남아있고 추사관이 있다.
추사선생이 9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세한도가 그려진 곳, 또한 유명한 추사체가 완성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유배는 학문과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한다.
추사는 가시울타리 안에서만 생활을 하는 위리안치 유배인 것이었다.
추사가 대정으로 와서 집을 잡고 가시울타리를 두른 첫 유배처는 대정읍성 송계순의 집이었다. 그 후 같은 동네 강도순의 집으로 옮기고 식수의 불편으로 유배가 끝나갈 무렵에 안덕 계곡 쪽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지금 추사유배지는 강도순의 집터에 복원한 것이다.
추사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끊임없이 아프다고 엄살을 늘어 놓는다. 하긴 귀공자로 태어나 어디 이런 고생을 해 보았어야지.
유배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학문과 예술을 함께 이야기 할 상대가 없어 외로웠다는 것이다. 그 외로움을 편지로 달랬다고 한다.
추사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유배생활 중에 친구 초의선사와 제자 소치 허련, 역관 이상적 등 많은 인물들이 찾아와 벗이 되어주었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준 것이다.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스승이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었다. 그 보답으로 세한도를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이 그림을 연경에 갈 때 가지고 가 청나라 학자 16명의 시와 글을 받았다.
작년 초 예산에 있는 추사 고택에 다녀왔고 연말쯤 선생님들과 함께 과천과지초당에 있는 추사박물관을 다녀왔다.
말하자면 추사와 관련되어진 곳은 두루두루 많이 다녔지만 추사에 대해 잘 모른다. 추사와 관련되어진 웃지 못한 해프닝인 해남 대흥사 현판이 기억에 남는다. 또한 죽기 3일전에 썼다는 봉은사 판전이란 현판을 보고 싶다. 탁본으로만 보았을 뿐 실물은 아직 보지 못했다.
위리안치이지만 대정 현감의 배려로 대정향교에 ‘의문당’이란 현판을 써주고 유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추사를 존경하던 장인식이 제주 목사로 부임하면서 추사 유배 말년은 조금은 자유로운 듯하다.
제주목사 장인식의 배려로 제주까지 다녀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추사관은 세한도 속의 집 모습이다. 추사관을 나와 인성리 방사탑을 찾았다. 인성리는 단산가는 길, 대정향교로 가는 길에 있다. 교사스터디 시간 책에서만 보았던 방사탑을 이번 기회에 찾아보리라. 방사탑은 풍수지리적으로 마을 어느 한 방위에 불길한 징조가 보이거나 지형이 허한 곳을 비보한 탑이다. 인성리 탑은 둥그런 모습으로 탑 꼭대기에 돌하르방이 올려져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방사탑 중 원형이 잘 보존 된 것이 인성리 방사탑이라고 한다.
초록들판에 우뚝 솟아있는 방사탑을 보고, 해안도로로 향했다.
<인성리 방사탑> 제주 추사관에서 대정향교로 가기위해 인성리 들판길로 들어서면 멀리 박쥐 같기도 한 단산 아래로 긴 밭담과 방사탑이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송악산으로 간다. 송악산은 올레 길 중에서 볼 것이 많은 10코스이다.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 일제 강점기 아픔이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 일본군의 군사시설인 크고 작은 진지동굴이 많이 보인다. 이 동굴은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이라고 불린 2차대전 때 일제가 만든 군사시설이다. 전쟁 막바지에 일본은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삼았고 관동군 등 정예병력을 제주도에 주둔시켰다.
또한 군사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제주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했고 무리한 식량지원을 요구했다.
송악산 해안 절벽에 15개의 인공동굴을 뚫어 어뢰정을 숨겨 놓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다행히도 연합군은 제주가 아닌 오끼나와에 상륙하여 제주의 피해는 조금 줄어들었다.
저녁바람을 맞으며 송악산 꼭대기에 올랐다. 움푹 페인 분화구속으로 바람에 자칫 빨려 들어가지 않을까 무서웠다.
<송악산 절벽 아래에 일제가 파 놓은 진지동굴들>
오며가며 다리쉼도 하고 사람구경 하고, 멋진 카페가 나오면 우린 닁큼 들어간다.
송악산 가는 길 해안도로에 10피자집이 있다.
처음엔 해가 뉘엿뉘엿 저녁때임을 알려 줘 테이크아웃하려 했지만 분위기도 좋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야외 테이블에선 벌써 맥주병이 여럿이다.
으~나도 마시고 싶다. 이럴 땐 제주 허씨를 버리고 싶다.
첫날 제주여행기를 마감한다.
여행 2일째 <신령이 머무는 곳 영실
아침이 밝았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중문근처 재즈마을이다. 샤갈에 집에서 눈을 뜨니 밤샘을 한 수학여행 단체객들이 소란스러웠다.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는 빗나갔다. 너무나 맑고 눈부신 아침햇살에 방에서 뭉기적 거 릴 수가 없었다. 빠른 시간 안에 아침끼니를 해결하고 맑은 제주를 즐기겠다는 마음만 앞선다.
어제저녁 아침에 간단하게 먹을 라면을 사왔다. 사발면을 먹고 출발 할 때까지도 생각을 못했다. 우리가 갈 곳이 한라산 등반 중 제일 힘든 코스라는 것을! 어째서 한치 앞을 내다 볼 줄 모르는지...
한라산을 가는 사람마다 그런다. 도시락을 챙겨가야 되고 비상식량을 챙겨야 된다고...
우린 산에 오르면서 알았다. 가장 힘든 코스 영실을 오르면서 먹을 것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쩌겠는가 하늘은 맑고 바람은 살랑살랑, 1280고지까지 차로 왔으니 올라가 보는 거지.
‘한라산의 영실을 안 본 사람은 제주도를 안 본 거나 마찬 가지다.’ 라는 말만 믿고 올라갔다.
한라산 백록담까지 등반은 8,9시간 걸리는 관음사 코스, 성판악 코스, 돈내코스가 있고, 우리가 올라간 영실코스로 1700고지인 윗세오름까지만 가는 거다.
윗세오름은 한라산 위에 있는 세 개의 오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에 오르려면 선작지왓 너머로 백록담 봉우리의 절벽이 통째로 보인다. 영실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영실 병풍바위는 신령이 머무는 곳이라 한다. 살랑살랑 불던 봄바람이 병풍바위부터는 그 유명한 제주바람을 맛보게 했다. 모자가 없었으면 바람에 맞은 머리가 아팠을 것 같다.
가파른 능선에 수백 개의 기암들이 수직으로 치솟아있다. 오백장군봉, 오백나한봉은 설문대할망 전설이 있다. 설문대할망은 제주의 창조신이다. 할망은 키가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다리는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쳐진다고 한다. 이 할망에게는 50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흉년이 들어 먹을게 없자 아들들을 위해 큰 솥에 죽을 끓이다 미끄러져 할망이 솥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아들들은 죽을 맛있게 먹었다. 늦게 온 막내아들이 죽을 푸다 사람 뼈를 발견하자 비로소 어머니 설문대할망이 빠져 죽은 걸 알고 서쪽 바다로 가 차귀도 바위가 되었고 형제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목숨을 끊어 오백장군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절벽 사이사이에 봄이 되면 털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난다고 한다. 조금 이른 시기에 왔기에 이 멋진 광경을 보지 못해 못내 아쉽다.
병풍바위를 지나면 이제 구상나무 자생지에 도착하게 된다.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마치 마법세계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다.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더욱 신비롭다. 구상나무를 지나니 평평한 넓은 분지가 하얀 눈밭채로 아직은 겨울모습을 하고 있다. 제주 조릿대가 떼를 이루며 널려있다. 구상나무는 일명 크리스마스트리라고도 한다.
길가엔 한라산 노루가 찾아온다는 노루샘도 있지만 지금은 눈에 덮여 있어 표지판만 보인다. 드디어 1700고지인 윗세오름에 도착한 것이다. 대피소에서 라면을 판다. 커피 한잔 500원, 사발면 1500원 이다.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왔는데 가격이 너무 착하다. 이곳에선 쓰레기통이 없다. 대신 봉투를 하나씩 나눠주고 자기가 먹은 쓰레기는 들고 내려가 영실 휴게소 청소차에 직접 버리는 거다.
아침에 라면 먹고 기어이 올라온 한라산, 또 라면 먹기가 싫어 커피한잔 마시고 내려왔다. 올라갈 때는 맑은 하늘과 여기저기 볼거리가 너무 많아 황홀경에 빠져 사진을 찍으며 오르니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내려오는 길, 아주 빠르게 직진하여 2시간 만에 주차장에 도착했다.
배가 너무 고프지만 휴게소에서 먹고 싶지 않아 참고 내려왔다. 배고픔을 참고 겨우 도착한 곳이 햄버거 가게이다. 이중섭 미술관 주변에 오니 예전에 왔을 때와 많이 달라졌다. 주변을 정비하여 이중섭 거리를 만들었다.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을 것 같다.
어이없다. 아침에 사발면 먹고 한라산 등반하고 늦은 점심으로 햄버거라니,
이중섭이 1년간 피난생활을 한 서귀포에 이중섭 미술관과 그가 살았던 작은 집이 있다. 서귀포시절은 아주 궁핍했지만 마음은 행복하고 안정되었다고 한다.
오늘의 여정도 마무리 되어간다. 숙소에서 마시는 맥주 한 캔으로 내일을 기대해본다.
첫댓글 간접여행으로 설레임을 담아보네요~~
역시! 교감쌤이 이야기를 풀어 내셨군요~
한라산 영실을 안 본 1인
글 보며 다시가고 싶네요.
샘~순수한 여행이아닌 공부(?)하러 다녀오신거 아니예요? 따님과 여행 부러워요^^
세월을 팔고 있는 중섭식당 간판이 멋지네요.
샘따라 쭉~한바퀴 돈 기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