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 삼거리를 지나 진동면 교동마을 입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든다. 음식점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교동다리를 건너면 들판사이 작은 언덕에 아람드리 나무사이로 마산향교가 보인다. 향교(鄕校)는 고려시대 지방의 관립교육 기관으로 유학(儒學)의 전파와 지방민의 교화에 목적을 두고 설립되었다. 조선시대의 향교는 중앙의 성균관을 축소하여 지방의 각 행정단위에 설치한 중등교육기관으로 유학을 중심적인 교육 내용으로 하였다.
향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첫째는 통치체제에 필요한 관 료자원의 확보를 위해서였고, 둘째는 새로운 통치체제의 정치이념에 입각, 백성을 교화(敎化)시키는데 있었다.
마산향교는 조선 태종 13년(서기 1413년) 진해현과 함께 설치된 `진해향 교`로부터 출발한다. 향교에는 훈도가 1명 배치되어 있었고, 임진왜란때 왜구의 침략으로 소실된 것을 조선 영조때 재건하였다. 구한말 순종(서기 1909년)때 현을 폐함에 따라 폐지되었다가 그후 `창원군향교`로 개칭되어 1993년 10월2일 진동면 교리에 복원되었다. 1996년 진동면이 마산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마산향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문 입구에 들어서면 하마비(下馬碑)가 있고 왼쪽에는 옛 `진해향교` 표지석이 남아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분별없이 차를 타고 들어가거나 말(馬)에서 내리지 않고 출입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마비를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정문인 풍화루(風化樓)는 삼문(三門)의 솟을대문 맞배식 지붕이다. 강학 공간(講學空間)인 명륜당(明倫堂)은 정면 5칸의 팔작지붕이다. 성현(聖賢) 들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한 대성전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건물의 배치는 풍화루-명륜당-대성전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각 건물은 대지가 한층씩 상승하도록 기획하여 문묘(文廟)를 중시한 배려가 엿보인다.
삼진면(진북, 진동, 진전) 지역은 마산에서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가장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진동면의 대표적 선사시대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고인돌)들이다. 고인돌(dolmen)은 크게 나누어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북방식 고인돌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남방식 고인돌로 구분된다. 북방식 고인돌은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남방식 고인돌은 중부 이남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밖에도 지하에 묘실을 만들었으나 남방식 고인돌과는 달리 돌을 괴지 않고 묘실(墓室)위에 상석(上石)을 바로 올린 고인돌도 있다. 이러한 형식을 개석식 혹은 변형 고인돌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황해도, 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한 곳에 수백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어 분포한 경우도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전북 고창에서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지방에 밀집 분포하며, 경상도와 충청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도 많이 보인다. 한편,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우리나라 고창 고인돌과 화순 고인돌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진동리에는 1호 지석묘와 2호 지석묘가 국도 14호선을 사이에 두고 있 다. 1호 지석묘는 상석은 북쪽이 배부른 장방형이며 성혈과 지석은 없고 하부는 매몰되어 있다. 길이 185cm, 너비 190cm, 두께 54cm로 진동초등학교 동편 관사 앞 급식소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2호 지석묘는 길이 380cm, 너비 206cm로 교동리와 진동리 사이 도로변 야촌마을 들판에 있다. 성혈과 지석은 없으며 상석의 형태는 사다리꼴을 띠는 장방형이다. 두 기의 지석묘 는 모두 개석식이다.
진동리 일대의 지석묘를 팔암(八岩)이라 불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최소 8 기 이상의 지석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지석묘는 도로공사, 농경지 확보, 주택지 등으로 훼손되어 확인할 수 없다. 현재 남아있는 지석묘도 안내판이나 보호시설이 없이 방치되고 있어 관심의 손길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