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 – 교리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J. I. 패커, 로저 니콜, 싱클레어 퍼거슨 등에게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이다. 패커는 “청교도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였고, 로저 니콜(고든 콘웰 신학교)은 영어로 글을 쓴 신학자들 가운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고 하면서 “심지어 위대한 조나단 웨드워즈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한다.
[1] 존 오웬의 생애
① 1616년. 잉글랜드 출생. 청교도의 세기(약 1560-1660년)의 중간쯤. 그의 아버지는 옥스퍼드에서 북쪽으로 5마일 떨어진 스태덤 지역의 목사였다. 평생 비국교도였다.
② 10살. 옥스퍼드 문법학교에 보내져 대학 입학 준비 ⇒ 12살.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에 입학 ⇒ 16살. 학사학위 받음 ⇒ 19살. 석사학위 받음.
“그는 매일 밤 4시간밖에 자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것이 그의 건강에 영향을 미쳤다.
③ 신학사 학위를 위한 공부 시작. 옥스퍼드 고교회적인 아르미니우스주의와 형식주의를 견딜 수 없어 학교를 중퇴. 런던 부근에 사는 몇몇 부유한 가정의 개인 가정교사 및 기관 목사가 된다.
④ 오웬의 일생을 결정지은 다섯 가지 사건
- 그의 회심. 26살 때. 사촌과 함께 장로교인 에드먼드 캘러미의 설교를 들으러 올더먼베리의 세인트 메리 교회에 갔는데, 캘러미가 아닌 다른 한 시골 목사가 대신 마태복음 8장 26절을 본문으로 설교(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는 것 듣고 의심과 두려움과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 메리 루크와 결혼. 1644-1675년, 31년 결혼생활. 11자녀를 낳았는데, 1명만 제외하고 모두 어린 시절에 숨을 거둔다. 그 남은 딸도 젊은 나이에 삶을 마친다.
- 그의 첫 번째 저서 출간. 오웬은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항변파와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독서한 적이 있었다. 1618년의 도르트회의였다. 그는 영국 고교회와 네덜란드 항변파 모두 예정설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회심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다. 그의 첫 저서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의 정체: 옛 펠라기우스주의의 우상인 자유의지가 우연성이라는 새로운 여신과 함께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및 인류에 대한 최고 주권을 침해하고 있음을 발견함』이다.
- 1643년 7월 16일. 에식스 주 포덤에 있는 한 작은 교구의 목사가 된다. 목회자로서의 오웬의 삶의 진로를 결정한 사건이다. 오웬의 모든 저술 활동은 목회자로서의 의무에 쫓기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 1646년. 의회에서 초청 설교를 한 일. 이 설교를 계기로 그는 그 이후 14년 동안 정사에 뛰어들게 된다. 크롬웰은 1651년에 오웬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 대학 학장으로 임명하고 그 이듬해에 부총장으로 임명한다. 존 오웬은 끊임없이 잠을 아껴가며 밤늦은 시간까지 연구하고 글을 썼다.
⑤ 1657년 부총장 자리를 내려놓고, 1660년 학장직을 사임한다. 크롬웰은 1658년 세상을 떠나고 찰스2세의 왕정이 복고된다. 2천 명에 이르는 청교도들을 강단에서 쫓아낸다. 오웬은 1660년부터 1683년에 눈을 감을 때까지 런던에서 일종의 순회 목회자로 산다. 이 기간에 그는 독립 교회파의 거인이자 원조가 된다. 그는 회중주의적인 교회 체제가 더 성경적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목사의 첫 번째 주된 사명은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 양떼를 먹이는 일”이라고 믿고 가르쳤다.
⑥ 1683년 8월 24일. 숨을 거둔다. 그는 20년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살았다.
[2] 오웬의 삶
① 그의 삶의 총체적인 목표는 “성화”였다. 그의 삶의 핵심이자 목표를 가징 정확하게 제시해주는 책은 『신자들의 죄 죽임에 대하여』이다. “죄 죽임”은 죄를 죽일 목적으로 우리 자신의 죄와 싸우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3절(“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에 대한 한편의 강해 설교다. “죄를 죽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피터 툰은 “오웬의 특별한 강조점은 대학의 교과과정 전체가 설교와 교리문답과 기도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고 말한다.
② 오웬의 반복된 주제는 “개인적 경건”이다.
[3] 경건의 추구 – 거룩함의 추구
① 하나님의 권능의 손아래 자신을 낮췄다.
② 지식은 아는 것에 순종함으로써 자라갔다. 그에게 거룩함은 모든 참된 지식의 목표였고, 더 많은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한 하나의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거룩함은 그의 삶의 목표이었다. “거룩한 복음적 진리에 대한 참된 개념은, 그 진리가 거룩한 삶과 분리된 곳에서는 살아남지 못하거나 적어도 융성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우리는 실천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배우는 것처럼 실천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하였다.
③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위한 가장 진지한 사고. 그는 주변 상황에 대한 간구나 심지어 자신의 여러 어려움에서 해방도기 위한 간구만 가지고 나간 것이 아니라 영광스런 주님을 보고 그분의 위대하심을 묵상하기 위해 나아갔다. 그가 쓴 마지막 책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묵상』이다.
④ 부지런한 묵상과 끊임없는 기도.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일곱 권짜리 히브리서 주석이다. 그는 서문에 “나는 이제 나의 모든 연구와 독서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부지런한 묵상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방편이자 지금까지 가장 유용한 영감과 도움의 수단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진지한 성경연구는 ‘은혜의 보좌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일’과 더불어 거듭 권장했다. 기도와 연구와 묵상은 언제나 병행되어야 한다.
⑤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만을 사람들에게 추천했다. 말씀 사역자들이 거룩함에 이르는 데 방해가 되는 하나의 큰 걸림돌은, 우리가 말하는 내용 속에 깊이 들어가 그것을 우리 자신의 영혼에 실제적으로 경험해보지 않은 채 설교하고 글을 쓰기 쉽다는 점이다. 슬픔 없이도 죄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열렬한 사모함이 없이도 천국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먼저 설교하고 나서 자신의 회중에게 설교했다.
⑥ 교리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 오웬은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기 전에 자신의 영혼에 먼저 설교해야만 좋은 설교가 나올 수 있다. 스스로 먹고 소화시켜 보지 않은 음식을 남들에게 내놓는 사람은 남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내놓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지키기 위해 싸우는 교리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때, 그 때 우리는 사람들의 온갖 공격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받을 것이다.”고 하였다.
⑦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 그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마음을 청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우리의 눈을 열어 그리스도의 영광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맛보게 한다. 그 결과 이 영적인 빛은 우리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