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녹의 믿음의 발걸음(히 11:5-6).
에녹의 믿음은,,,,”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5-6).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에녹의 믿음의 생활에는 다섯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로,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다.
둘째로, 하나님의 상 주심을 소망하였다.
세째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네째로,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을 전파하였다.
다섯째로, 이 모든 것의 결과로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 서게 되었다.
이제 이 특성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1. 믿음의 출발점
어디에서 믿음이 시작되는가? ”... 그(하나님)가 계신 것을 믿어야...” 시작된다. 이 말씀은,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의 길 외에는 없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보아서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 18 상반절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본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때였다. 요한복음 14장 9 중반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다.
욥기 38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선 욥에게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았었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고 물으신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께선 ”욥아 너는 믿음으로 아는 것 말고는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내가 너에게 주는 대답들 외에 어떠한 대답들도 가지지 못하며, 너는 단지 그것들을 믿거나 혹은 믿지 않거나 하는 것 뿐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5절은 에녹에 관하여 ”저는 옮기우기 전에 ... 증거를 받았느니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당신은 ”어디에 그가 그 증거를 지니고 있었는가?”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그의 마음 속이다.
로마서 8장 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올 때 갑자기 진실이 드러난다.
나는 그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그분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으로 시작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상주심을 소망함
”...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믿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이것 외에도 우리는 하나님은 도덕적인 하나님이시므로 자신에게로 오는 신실한자들에게 상주신다는 사실을 또한 믿어야 한다.
에녹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삼백 년 동안이나 교제하셨던 인격적이시며, 관심이 깊으시며,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분에게로 나오는 자들에게 상주심으로써 응답하시는, 인격적이시며 사랑이 충만하시며, 관심이 깊으시고, 도덕적인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만 한다.
1. 역대상 28장 9 하반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2. 시편 58편 11 상반절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3. 시편 119편 10 상반절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4. 잠언 8장 17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5. 잠언 11장 18 하반절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6. 예레미야서 29장 13절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Ⅱ. 상 주심의 의미
당신은 ”그렇다면 그분을 찾는 자들을 위한 상은 무엇인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마태복음 6장 33절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한다.
당신은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상이라는 말이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1.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 사도행전 4장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3. 요한일서 2장 23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4. 요한이서 9절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에녹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상을 소망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하나님께선 어떤 표준을 세우셨고,
에녹은 ”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표준을 토대로 하나님께 나아가겠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용서와 평강과 기쁨, 하늘나라와 영생 ...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신다.
만일 당신이 전심(全心)으로 그분을 찾으면 당신은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세번째 이유를 살펴보자.
하나님과 동행함
창세기 1장에는 두 번이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22, 24절)고 말한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구절은 70인역(septuagint)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구절과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되어 진다.
신약에서 ”걷다”(동행하다)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매일매일의 행위를 표현한다.
예를 들면, 불신자는 세상 것을 따라 걸으며
신자는 성령을 따라 걷는다.
즉, 에녹은 매일 계속하여 하나님 앞에서 행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에녹의 발걸음에는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Ⅰ. 화해
아모스서 3장 3절의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할 수 있는가?”란 질문의 답은 ”못한다”이다.
두 사람이 깊은 친교로 조화를 이루며 함께 동행하기 위해서는 화목과 의합을 전제로 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때,
그 말에는 반역이 끝났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공공연히 반역을 저지른다. 로마서 5장 10절은 우리가 그분의 ”원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전쟁은 끝나게 되고,
하나님의 표준들이 충족되어지며, 화해가 이루어진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성은, 바울이 우리 인간의 옛 행위를 보여 주는 에베소서 4장 17-19절에 예시되어진다.
- 자기 중심 - ”그 마음의 허망한 것.\- 무지 -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음 -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뻔뻔스러움 - ”저희가 감각없는 자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그러나, 20절에서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지도, 죄와 더러움 가운데에 살고 있지도 않다. 우리는 변하여져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시작하려면 화해가 전제로 되어야 한다. 즉, 우리가 십자가 아래에 와서 우리 죄가 용서되고, 반역이 끝나고, 우리가 하나님 편으로 갈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다.
Ⅱ. 상호 교류하는 본성
당신은 물고기와 친구가 된 사람을 알고 있는가?
나는 그러한 사람을 알고 있지 못하다.
. 당신이 어떻게 물고기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변에 연못이라도 파려고 하십니까?
당신은 물고기와 교제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당신은 이것 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는가?
그것은 죄인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선 죄인들과는 사귈 수 없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죄악된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하여 있다. 따라서 죄인에게는 하나님과 상호 교류가 가능한 수단이 없는 것이다.
당신은 물고기와는 산책할 수도, 혹은 거실에 앉아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물고기와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며,
서로간에 교통할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과 물고기가 각각의 영역에서 함께 동행할 수도 없다.
즉, 당신이 어항에 들어가 물고기와 말할 수 없으며, 물고기가 거실로 나와서 당신과 대화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이와 동일한 것이 죄인과 하나님 간에도 적용된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근거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일상 생활이 그와 같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가 전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영역에 들어가도록 허용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야만 한다.
에베소서에 의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우리가 구원받게 될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 일이 한 번 일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물고기였으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 즉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는 본성을 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본성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의 의미이다(고후 5:17).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새로운 본성을 소유해야만 한다.
Ⅲ. 도덕적 건전성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지 못한 길로는 행하지 않으신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장막을 지나가실 때에는 항상 그들에게 모든 더러운 것들을 제하여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길로나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길로만 행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에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거스리는 모든 세력들은 반드시 제거될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정결치 못한 것과는 함께 하지 못하신다(합 1:13 참조).
요약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생활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1장 5-10절에 의하면 거룩한 생활에는 회개와 자복이 포함된다. 지금까지 하나님과 동행해 온 이들은 자신들의 죄가 씻겨졌으며 계속하여 자복함으로써 깨끗하게 되어지는 자들 뿐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도덕적 건전성이나 거룩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Ⅳ. 하나님의 뜻에 항복함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아무에게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자신을 나타내실 따름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때 그는 자신이 오고 싶기에 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오라”(마 11:28)고 말씀하셨다.
또한 요한계시록의 끝에서도 ”오라”(계 22:1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는 이사야도 ”오라”(사 1:18)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슬픔에 싸여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오게 되면 그분은 자신에게 속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의지에 철저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사랑에의 항복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그것은 불쾌한 굴종이 아닌 사랑에의 항복인 것이다.
요한이서 6 상반절에는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것은 사랑이지 굴레가 아닌 것이다.
Ⅴ. 영적 교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은 서로가 견고하여 깨지지 않는 유대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는지 아는가?
무려 300년이다!
에녹과 하나님은 300년 간이나 계속적이며 견고하며 달콤한 결속을 다져 왔다. 어느 날엔가는 산보하던 중 곧장 하늘나라에까지 갔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