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비 오는 밤
이 원 수
늦은 가을, 길가의 가로수 잎들이 낙엽져 떨어지기 시작하던 10월 그믐께였읍니다.
나는 학교에서 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데 사환아이가 와서 ‘양 은이라는 학생이 선생님을 뵙겠다고 하는데 들어오게 할까요? 하고 물었읍니다.
양 은이라니까 내 ¼ 아이는 아니구나 하고 들어오게 하라고 했읍니다:.
내 앞에 나타난 아이는 학교 학생이 아니었읍니다. 열서너 살의 소녀.
“선생 님.”
반가움과 부끄러움이 겹쳐친 얼굴에 한숨 같은 소리로 나를 부르며 바라보았읍니다.
나는 의아하여,
“가만 있자·…· 누구였지·…·?”
하고 나는 얼른 생각이 안 나는 것을 미안해 하였읍니다.
“양 은이예요. 선생님이 대전 학교 계실 때·….”
“오! 은이, 원 내 눈 좀 보게. 그래 서울 와 있었니?”
은이는 내가 대전 학교에 있을 때 5학년 한 해 동안 담임 한 반의 아이였다는 걸 생각해냈읍니다. 그러니 국민학교는 지난봄에 이미 졸업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 올라왔어요.”
은이는 웬일인지 수줍어하며 말했읍니다.
“학교는?”
대전서 여중에 다녔어요.”
“그래 ? ”
은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선생 님 미안해요.”
하고 슬픈 얼굴을 지었읍니다.
“미안하다니? 무엇이 미안하다는 거냐?”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2년 전에 한 해 동안 선생이었던 나로서 그때 제자가 찾아와준 건 반가운 일이고 고마울 뿐이지마는, 은이의 말투에서 나는 무언지 은이가 내게 단순한 문
안으로 온 것이 아님을 짐작했읍니다.
“서울엔 누가 있나? 친척 이라도·…·?”
“네·… 그런데 그 집을 못 찾아 여태 헤매다녔어요.”
“그래? 주소는 가지고 있나?”
“네. 파출소 순경 아저씨한테 물어봐도, 동회에 가서 알아봐도 그런 번지는 없다고 해요.”
“그거 안됐구나. 아뭏든 우리집으로 가자. 주소 가지고 설마 못 찾겠느냐.”
나는 은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읍니다. 하룻밤 재워주고 친척이라는 이의 집을
찾아주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집에 와서 은이는 내게 제 사정 얘기를 했읍니다.
은이는 지난 여름방학 이후로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했읍니다. 집안 사정이 학교 다닐 형편이 못된다고 했읍니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어른이 은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은이 어머니까지 어떻게나 구박을 하는지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붓아버진가 했으나 그렇지도 않다고 했읍니다. 한 10년 전에 사업에 실패한 후로 술로만 살아온 것과, 술만 먹고 오면 어머니를 때리고 집안을 벌컥 뒤집어놓는다는 것이었읍니다.
은이는 집에 붙어 있기가 싫어 어디든지 달아나고만 싶었다는 얘기며, 서울에
는 먼 친척되는 이가 살고 있어서 그분을 찾아가서 어디 식모살이라도 하도록 주신해달래려고 온 것이라 했읍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버리고 뛰쳐나와 서울서 식모살이를 하겠다는 은이를 나는 가만가만 달랬읍니다.
“그래도 내 부모가 제일이니라. 님의 집 살이란 게 얼마니 고되고 어려운 일인지 아느냐? 아버지가 그렇더라도 어머니를 위해서 곁에 있어드리는 게 좋지 않겠느냐?”
하고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말로 타일러 보았움니다.
은이는 손수건에 싼 지갑에서 친척뻘 된다는 이의 주소 적은 종이쪽지를 꺼내서는 혼자 들여다보더니 도로 집어넣었읍니다.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집에서 쉬고 내일 아침에 같이 나기 찾아보자. 내일은
마침 일요일이니까 잘 됐다.”
은이는 적이 안심이 되는지,
“선생 님이 찾아주시 면·….”
하고 근심 스러워 보이던 얼굴에 가늘게 웃음을 띠었읍니다.
이때 안방에서 내 딸아이가 제 어머니에게 하는 말소리가 들렸읍니다.
“어머니, 틀림없어. 식모로 있으려고 온 아이야.”
그러자 아내의 말소리도 들렸읍니다.
“설마 우리집에 있으려는 건 아니겠지. 저런 애를 재우다 무슨 사고가 안 날는지------너의 아버진 참 뭐라고 저런 앨 데리고 오실까------”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읍니다. 그런 소리를 은이가 들었으면 어쩌나 싶어 일부러 큰소리로 얘기를 했읍니다.
“공부를 계속해야 할 텐데, 그거 야단났구나. 아버지는 벌이를 통 못하시는가?”
“예, 어머니가 바느질을 해서 살아요.”
나는 어떤 친구와의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 외야 하겠기에 은이를 안방으로 데려가서 아내에게 말했읍니다.
“시골서 온 아인데 오늘은 우리집에서 재워야겠으니 그렇게 해주시오.”
이 말에 아내는 못마땅한 얼굴로 잠자코 있었읍니다. 왜 그럴까? 적이 불안하고 섭섭했지만 그냥 나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읍니다.
친구와 만나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빗방울이 듣는 걸 알았읍니다.
“비가 오는군!”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걸음을 빨리했읍니다.
골목에 들어서자 가겟집에서 과자 한 근을 샀읍니다. 시골서 온 어린 제자를 위해서였읍니다. 운동화도 한 켤레 사고 싶었읍니다. 아까 은이의 신발이 너무도 낡은 것이었음을 보았고, 그런 신발로 서울 거리를 다나기에 부끄러운 생각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러나 신발을 산다는 생각은 이내 그만두었읍니다. 신은 몇 문을 신는지도 모르고서야 어떻게 맞는 걸 사겠는가, 차라리 내일 아침에 데리고 나와서 사야
겠다고 생각했읍니다.
집에 들어오자 나는 내 방의 불을 켰을니다. 안방에서 내 딸아이의 얘기소리가 들려왔읍니다.
“시골 도깨비야, 그렇지?”
“시굴 도깨비? 호호호------”
아내의 웃는 소리도 났읍니다. 은이가 시골 얘기를 했나보다. 도깨비 얘기는 웬 얘길까? 나는 과자봉지를 들고 안방 문을 열었옵니다. 은이가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어떤 표정으로 놀고 있나 그것이 궁금했읍니다.
“아버지 이거 웬일야?”
딸아이가 반가운 듯, 그러면서도 비꼬는 듯한 말투로 내 손의 과자봉지를 받았습니다.
아내가 말했음니 다.
“그 학생 갔어요.”
“어디로?”
갈 곳이 없는 아이인 줄 아는 나였으므로 어디로 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누가 알아요? 친구 집에 간다면서 조금 전에 나갔어요.”
“친구 집에·…·?”
딸 아이가 내 말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그애 좀 이상해요. 중학교에 다닌댔다가, 식모로 들어간댔다가…… 정체 불명이야.”
“그럴 사정이 있는 아이야, 그런데 나중에 다시 온다고 했니?”
“다시 올 걸 밤중에 왜 나가요?”
나는 아차! 했읍니다.
놓쳐서는 안 될 것을 놓쳤다는 생각ㅡ 이럴 줄 알았으면 집안사람에게 잘 부탁을 해둘 것을 그랬다는 생각ㅡ내가 밖에 나가지만 않았더라도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
“나간 지 얼마나 됐니?”
나는 딸아이에게 물었음니다.
“한 10분.”
그러자 아내가 딸에게 눈을 흘기며,
“10분이 뭐야? 20분도 더 됐을걸……”
나는 안방에서 나왔읍니다.
“아버지, 이 과자 우리가 먹어도 괜찮아요?”
“먹으렴!”
그러자 방안에서 호호호 웃는 소리가 났읍니다.:
나는 어쩐지 놀림을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언짢았읍니다. :
바바리를 내려 입고 우산을 꺼내들고 나는 가만히 방을 나왔읍니다.
비가 줄줄 오고 있었읍니다.
은이가 어디서 비를 맞고 있을 것만 같았읍니다.
나는 우산을 받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었읍니다. 큰 길에 나서서도 무턱대고 걸었읍니다.
어느 가게 앞에서, 어느 추녀밑에서 은이가 비를 피하고 있지나 않을까?
갈 곳도 없다던 은이가 밤중에 어디로 갔을 것인가? 그리고 왜 갔을까?
필시 내 집이 하룻밤을 자고 갈˙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나간 것일까?
내 아내, 딸이 그 애를 맘 편히 쉬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시골 도깨비라고 하고 웃던 것도 은이를 두고 한 말일까?
그렇다면 내 아내, 내 딸은 내가 데려온 손님에게 너무한 것이 아닌가.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의 구박에 못 견디어 집을 뛰쳐나왔다는 은이는 지금 어디서 비를 맞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딸과 아내의 하는 짓에 불만을 느끼며 비오는 거리를 헤매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은이가 가없어 못 견딜 것 같고, 한편 나 자신도 어쩐지 슬픈 생각이 들었읍니다.
비는 잠시도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읍니다. 양복 바지는 비에 젖어 다리에 감기고, 우산을 받았건만 양쪽 소매도 온통 비에 젖었읍니다.
나는 버스정류장을 유심히 보며 걸었읍니다. 비에 젖은 수은등이 싸늘한 불빛
을 빗줄기에다 쏟고 있었읍니다.
한참 걷다가 발길을 돌렸읍니다. 이 비오는 거리를 아무리 걸어본댔자 은이는 만나질 것 같지는 않았읍니다.
집에 들어가 기다려 보자. 얼마 내게 아무 말도 없이 아주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어두운 대문 앞 길을 유심히 살펴보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읍니다.
물론 은이가 와 있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비까지 오니, 도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에 드러누워 대문간에 인기척이 나지나 않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읍니다.
열시가 되고 열한시가 지나도 은이는 돌아오지 않았읍니다.
찬비는 밤중에도 여전히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읍니다.
나는 잠이 들었다가도 깨곤 했읍니다.
그럴 때마다 빗속으로 가버린 은이 생각이 났읍니다.
---이 비오는 밤에 어디로 갔을까? 나를 원망하며 비에 젖으며 자지나 않을까?
이런 생각뿐이었읍니다. 어디서 나쁜 사람의 꼬임에 넘어가지나 않았으면 다
행이련만------.
사실 시골서 오는 어린 소녀들을 꾀어가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나는
들어서 알고 있읍니다.
은이가 혹시라도-------
다음날 아침, 날씨는 아주 맑았읍니다. 어젯밤 비에 낙엽들이 다 져버린 가로
수에 아침 햇살이 싸늘하게 비췄읍니다.
나는 학교에 나가면서 어제 만난 은이의 일이 꼭 꿈 같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정말 은이가 나를 찾아왔다가 밤에 획 가버린 것이 아니라, 그런 꿈을 꾼 것만 갈았읍니다.
---도깨비 같다. 도깨비에 흘린 것 같다.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나는 어젯밤 아내와 딸아이가 ‘시골 도깨비야.’ 하고 웃
던 걸 생각하고는 다시 가슴이 쓰리도록 후회를 했읍니다.
그 다음날, 은이의 편지가 왔읍니다.
〈선생님, 죄송해요. 폐를 끼치는 게 죄스러워 그날 밤 바로 밤차를 타고 내려왔어요. 오면서 차에서 내내 울었어요. 무서운 아버지를 위하고, 가없은 어머니를 위해 집에서 일하겠어요. 선생님, 죄송해요.〉
아! 은이! 언제고 만나면 내 딸처럼 꼬옥 안고 등을 어루만지며,
‘고맙다.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 일하는 네게는 반드시 복이 올 거다.’ 하고 위
로해주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