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서머싯 몸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이만하면 예술이다. 바람둥이 찰스와 외도(外道)한 사실이 들통 나자 키티는 오히려 남편 월터를 윽박지른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 우리는 공통점아 하나도 없잖아, 난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당신이 관심을 갖는 것들은 죄다 지루하기만 해.”
키티의 말은 반이 진실이고 나머지 절반은 거짓이다. 키티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 바람둥이를 만난 것이 아니니까. 사실 그녀는 바람둥이를 만나 쾌락에 빠져서 순간적이나마 남편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육체적 욕망 때문에 망가지는 여자가 아니라는 자존심 때문일까? 키티는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라고 강변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말에 무게감을 주기 위해 키티는 지금까지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도리어 역정을 내고 있다.
지금 키티의 모든 말은 비수처럼 월터의 가슴에 하나하나 제대로 꽂혔다, 칼은 칼로 상대하는 법, 자신의 사랑이 조롱당하자, 그토록 배려심 깊었던 월터도 지금까지 키티에게 하지 않았던 말들. 아내에게 한 번도 감히 하지 못했던 잔인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기뻐하는 것에 나도 기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남의 험담을 일삼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멍청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우리는 지금 서머싯 몸의 소설 『인생의 베일(The Painted Veil)』에서 가장 서글픈 대목을 읽어 보았다. 아마 이 소설을 영화한 『페인티드 베일』을 감상한 독자라면 이 대목을 가장 불똥 튀기는 장면으로 아프게 기억할 것이다. 『인생의 베일』이 세 번이나 영화화된 이유는 분명하다.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사랑의 짙은 그림자를 이 소설만큼 제대로 잘 묘사한 작품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졌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애인에게 얼마나 헌신적일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놀라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이기적이었던 사람도 거의 성인처럼 이타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만이 해낼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이니까, 그렇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사랑에 빠졌던 사람은 애인에게 자신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경악하는 순간도 분명 경험했을 것이다. 괴물과도 같은 잔혹함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우리는 독해질 수도 있다.
미성숙한 사람만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가람에게 잔인할 수 있다는 거야?’ ‘사랑은 애인을 행복하게 해 주는 감정 아닌가?’ 그렇지만 사랑 때문에 더 아프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잔인해질 수 있다. 애인에 대한 잔인함이 그나마 자신에 대한 잔인함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 있는데도 그것을 잔인하게 잘라내는 장면만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도 없다. 한때는 사랑했지만 무슨 이유에서든 헤어지게 되는 커플이 서로에게 잔인한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물론 헤어지는 모든 커플들이 키티나 월터처럼 서로에게 잔인해지지는 않는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는 경우라면, 아예 잔인해질 이유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서로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구는 건, 아직 애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에, 우리는 잔인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스피노자도 잔학함과 잔인함 속에는 사랑의 감정이 깔려 있다는 것에 주목했을 것이다.
잔혹함(crudelitas)이나 자인함(soeviltia)이란 우리가 사랑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자에게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미워하거나 경멸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래야 나를 슬픔에 빠뜨린 그 사람을 내 삶에서 쫓아낼 수 있으니까. 마조히스트가 아니라면 학대를 견디면서까지 내 곁에 계속 머물려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사랑하거나 가엾게 여기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나의 기쁨을 제거하거나 포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감정으로 작용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함께 있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그는 되도록 나와 함께 있으려고 할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의 곁을 떠날 수 있겠는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이유는 나의 존재가 그 사람에게 행복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황지우 시인의 말처럼 이타심은 늘 결국에는 이기심이라는 지적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지. 그렇기 때문에 잔인함은 기묘하고, 심지어는 괴이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감정이다.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 나쁘게, 심지어는 분노하게 만드는 감정이니까, 결국 이런 잔인함은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곁에서 떠나도록 만들게 된다. 잔인한 말과 행동을 통해 우기가 원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으로부터 떠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 그래서 둘 사이를 끈끈히 연결시켜 주고 있던 사랑의 끈을 자르고 싶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상처를 주어서 쫓아낸다면, 더 이상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은 남지 않게 된다. 당연히 우울함과 슬픔이 기쁨 대신 나 자신을 뜯어먹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잔인함으로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러니 잔인함에 ‘사랑의 자살’이라는 별칭을 붙여 줘도 되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 대가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서글픈 공멸이 잔인함의 최종 목표일 테니까 말이다. 칼자루가 없는 칼, 그러니까 양쪽 모두 날이 퍼렇게 선 칼을 잡고 서로를 찌르니, 상대방도 피를 흘리고 칼날을 잡고 있는 나의 손에도 피가 흐르는 모양새다.
『인생의 베일』에서 세균학자인 월터는 키티를 전염병이 창궐하는 중국으로 데려가 일종의 유배 생활에 들어간다. 둘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한때의 열정에 휩싸여 남편에게 잔인하게 굴었던 아내나 자인함을 잔인함으로 받아쳤던 남편이나 모두 사랑의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콜레라에 걸린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았던 월터의 행동은 헌신적인 인류애와는 거리가 먼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중국 내륙의 메이탄푸로행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잔인한 칼날을 들이댔던 죄를 갚으려는 속죄 의식이었으니까. 그는 합법적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 장소를 몰색했다고나 할까? 자신이 바라던 대로(?) 월터는 그곳에서 콜레라에 걸리고 만다. 흔히 콜레라를 천형(天刑)이라고 동양에서 부른 것처럼, 월터는 제대로 벌을 받은 셈이다.
이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던 키티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월터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한다. 그러고는 남편에게 아직도 자신을 경멸하느냐고 묻는다. 죽어 가면서도 월터는 키티에게 잔인하게 군다.
“아니, 나 자신을 경멸해,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마침내 월터는 “죽은 건 개였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월터의 마지막 말은 18세기 영국 시인 올리버 골드 스미스의 시 한 구절인데, 개가 사람을 물었지만 죽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는 내용이다. 그렇다,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감정이다. 서머싯 몸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었던 교훈은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서머싯 몸 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 |
『인간의 굴레』,『달과 6펜스』,『수레바퀴 밑에서』 등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은 소설이란 무엇보다도 ‘재미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에는 윌리엄 포크너,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 쟁쟁한 모더니스트들이 활동하던 시절이라서 비평가들은 서머싯 몸을 대중소설가라고 깎아내렸다. 하지만 그의 소설들은 간결하고 쉬운 문체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면서 뛰어난 심리묘사를 모아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고 있다.
『인생의 베일(1950)』은 삼각관계를 다룬 연애소설이면서 동시에 여성의 성장소설이다. 동생보다 먼저 결혼하여 노처녀 신세를 면하려고 했던 키티는 ‘정부 세균학자의 아내라는 자신의 위치가 특별히 주목 받는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살짝 경박한 키티에게는 지적이고 품위 있는 월터와의 결혼 생활이 따분하다. 이때 찰스라는 멋쟁이 바람둥이가 나타나 키티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찰스가 허풍쟁이라는 걸 잘 아는 월터는 그런 남자에게 반한 아내를 경멸하기에 이른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여자는 새끼 암컷 사자보다 더 지독하게 복수심을 불태우는 법이다, 늘 각진 느낌을 주었던 키티의 턱은 원숭이처럼 볼썽사납게 앞으로 툭 뛰어나왔고 그녀의 아름다운 눈은 악의로 잔뜩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흥분을 다스렸다. “남자가,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에요. 여자 탓이 아니라” 침착성을 유지해야 월터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직감했다.
겉만 화려한 찰스에게 반해 남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키티, 그리고 그녀의 허위의식을 알면서도 아내를 사랑한 월터 두 사람의 애증을 통해 작가는 사랑의 가치와 성숙의 의미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