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나무의 농사/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두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시 읽기 > 산수유나무의 농사/문태준
문태준 시인이 2005년 유심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만해 한용운이 1910년대 후반에 창간했던 《유심唯心》지의 정신을 이어, 몇 해 전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 의하여 복간된 계간지가 《유심》이고 거기서 시행하는 상이 바로 유심문학상입니다. 시라든가, 불교라든가 하는 것의 본질에 비추어본다면, 상을 준다느니 그것을 받는다느니, 그것을 위해 시상식을 한다느니 하는 세속적 형식놀이는 조금 어색하고 멋쩍고 민망하기까지 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심문학상을 받고 문태준 시인이 쓴 수상소감은 이런 어색하고 멋쩍은 형식놀이의 작위성과 방편성을 잊게 하며, 시외 시인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데 충분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문태준 시인이 유심문학상을 받고 쓴 수상소감은 자기반성과 자기겸허를 고요히 저변에 깔고 있었으며, 그 바탕 위에서 그가 전하는 말은 시와 시인됨의 진정성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은 “화택火宅의 세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북향집을 짓고 그곳을 시의 거처로 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북향집 같은 시를 써보겠다”고 다짐하고 자신의 시가 한 생명에게라도 밑돌처럼 괼 만한 것이 되어야 할 터인데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언제나 불난 집과 같고 그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우리들은 밑돌 하나 괴지 못한 부평초같이 살 때가 허다합니다. 화택 속의 우리들은 향일성이 촉수를 뜨겁게 뻗으며 이글거리는 태양의 둘레를 탐욕스럽게 돌고, 그런 습성은 과열과 메마른 영혼 속에서 우리의 몸이 신열과 허열을 앓으면서 고통스러워하게 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문태준이 들려주는 ‘북향집’을 상상하는 것은 신선하고 그것을 삶의 거처와 시의 거처 그리고 마음의 거처로 삼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우리의 과열된 체온을 낮춰주기에 충분합니다.
일제시대, 성북동에 살던 만해가 현재의 광화문 부근에 있던 조선 총독부 건물이 보기 싫다고 하여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이름의 자기 집을 북향으로 짓고 산 것은 정치적 사건입니다. 그에 비하면 문태준이 북향집을 집겠다고 하는ㄴ 것으느 존재론적이고, 유심론적이며, 정서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만해의 그것도 문태준의 그것도, 모두 외암에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중심과 지성소를 지키고 싶다는 결의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위 시는 문태준이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맨발』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시집과 같은 제목의 <맨발>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사람을 받아 일반인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위 시 또한 이에 못지 않은 울림을 안겨주며 문태준 시인다운 소재와 서정과 인식의 깊이를 맛보게 합니다.
위의 시 제목은 아시다시피 ‘산수유나무의 농사’입니다. 이 제목을 여기서 반복하는 까닭은 그 제목 속에 농사는 사람들만 짓는 것인 줄 알았던 우리들이 좁은 편견을 깨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벗어나 살펴본다며 산수유나무 역시 그 나름의 농법으로 사계절을 견디며, 그의 전 생애를 다 바쳐 농사를 짓는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농사가 우리의 농사보다 오히려 더 무해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농사란 상징적 표현입니다. 생명을 믿고, 생명을 키우고, 생명을 열매 맺고, 생명을 이어가고, 생명을 베푸는 일이 농사입니다. 그 과정에서 생명은 성장하고 그 성장은 차고 넘쳐서 다른 생명을 키웁니다. 그런 점에서 농사는 자신을 키우는 일이면서 다른 생명을 키우는 일입니다.
위의 산수유 나무는 봄이 되어 노랗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봄이 되면 가장 먼저 피어나는 꽃 가운데 하나가 산수유 꽃입니다. 산수유나무는 자신의 농사를 이렇듯 이른 봄부터 부지런하게 시작합니다. 속이 좁은 사람들은 이런 산수유나무를 보며 그 꽃의 화사함에만 정신을 팔기 쉽습니다. 꽃의 개화와 만개에 푹 빠져드는 것이지요. 그것을 몰입이기도 하지만, 편견이자 단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북향집을 시의 거처로 삼겠다는 문태준의 눈에는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는 산수유 꽃의 두터운 그늘이 아래쪽에 보입니다. 그늘이란 한 존재가 만들어낸 덕의 넓이입니다. 문태준 시인은 산수유나무의 꽃에서 이런 그늘을 본 것입니다. 하늘에 노랗게 핀 상향의 산수유꽃도 아름답지만 땅 위에 넓게 드리운 하향의 꽃그늘도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문태준 시인은 이런 산수유의 꽃그늘을 노란색으로 읽었습니다. 그늘이 어디 노랗겠습니까마는 워낙 노란색이 강렬한 산수유 꽃의 만개를 본 사람이라면 그 꽃그늘도 노란색일 것만 같은 상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노란 꽃그늘은 여기서 그대로 땅 위에 핀 또 하나의 꽃이 됩니다.
문태준 시인은 이런 산수유나무의 꽃과 그 풍성한 그늘을 자꾸만 마음의 그늘이 좁아지고 말려드는 인간들의 실상과 대비시킵니다. 우리의 마음이란 인색하고 뾰족하고 냉담하고 표독스럽기까지 하여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힘들지만 부드러운 그늘을 만들기란 더욱 더 어렵습니다. 이런 우리가 겨우 피운 빈약한 꽃과 그늘 속으로는 찾아들려고 하는 존재가 그리 많지 많습니다. 사람을 보면 모든 존재들이 긴장하고 피하기 일쑤니까요.
그에 반해 문태준 시인이 발견한 산수유나무는 마음의 농사에 성공하여 꽃과 그늘을 모두 흡족하게 피우고 맏는 존재입니다. 그는 이런 산수유나무를 비롯한 나무 일반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꽃과 그늘은 한 해 농사를 열심히 지은 결과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꽃이 나무가 지은 농사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데, 그 그늘에 주목하면서 이 그늘이야말로 힘겨운 농사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소하기도 하고 신성하기도 합니다. 꽃만 피우는 농사가 일차원적이라면 그늘가지 창조하는 농사는 그 이상이 차원에 속합니다. 그늘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나무의 크나큰 미덕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그가 피우는 꽃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지에 드리우는 그늘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꽃으로는 벌과 나비가 찾아들지만, 그 그늘로는 사람과 개미와 강아지와 여름날에 지친 작은 벌레들이 찾아듭니다. 그뿐인가요. 나무가 만든 품속으로는 짝을 찾고 새끼를 부화시킬 새들이 마음 놓고 찾아듭니다.
나무의 그늘 아래서 우리는 한없이 편안하고 평화로워집니다. 그늘은 나무가 만든 우주의 집이자 쉼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만을 위한 지이 아니라 다른 생명들이 휴식을 허락하는 집입니다. 시골마을을 들어설 때, 마을의 오래된 느티나무를 마주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편안한 느낌을 받곤 하던가요. 그리고 그늘의 바다를 이루는 산속을 오르면서 우리 몸은 얼마나 맑고 순해지던가요.
문태준 시인은 산수유나무가 만든 꽃그늘을 두고 “노란 좁쌀 다섯 되의 무게”가 나간다고 말하였습니다. 노란 좁쌀은 노란 산수유 꽃을 연상시키고, 그 작은 좁쌀들이 모여서 이룬 다섯 되의 무게는 그리 엄청나지는 않지만 그늘의 밀도를 짐작하게 합니다.
두터운 그늘, 푸근한 그늘, 아늑한 그늘, 잔잔한 그늘, 깊은 그늘, 넓은 그늘, 부드러운 그늘, 이런 다양한 그늘이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무가 지은 그늘농사의 결실은 이렇듯 다채롭습니다. 언제쯤 우리는 겉으로의 멋진 화장 못지않게 매력적인 마음과 영혼의 그늘농사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늘을 찾으려고만 했지 만들어내는 데는 무심하거나 무력한 것이 대부분의 우리들이니 여기까지 이르려면 꽤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위 시의 산수유나무처럼 그 그늘이 무게가 좁쌀 다섯 되 정도만 되더라도 우리의 삶은 성공적인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그늘 하나 없이 뾰족한 침엽수로 철사처럼 서 있는 저 자신을 자꾸만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윽한 그늘농사를 짓는 데까지 나아가야 나이를 먹었다고 할 수 있고, 시를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잘 들지 않아 괴롭습니다. 그만큼 저의 삶이 팍팍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의 농사도 해마다 형편없었던 것입니다. 문태준 시인이 말하는 마음의 북향집에 거처를 정하고 그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늘농사를 잘 지은 사람의 모습에는 ‘허虛’가 많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무위無爲의 터라고, 자연自然의 뜨락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양陽의 세계와 대비하여 음陰의 세계라 할 수 있고, 그것의 덕을 ‘음덕陰德’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문태준 시인의 위 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음덕의 세계를 새로이 발견하고 창조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