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ve you come to believe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have believed.”
말씀의 초대
사도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가운데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늘어 간다(제1독서). 박해를 받고 있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파트모스의 요한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세상의 권력보다도 당신의 주권이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알려 주신다(제2독서).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동료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당신을 직접 보고 믿게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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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 사도의 말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들었지만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며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상처에서 그분의 부활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지선’이라는 젊은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예쁘고 공부도 잘하던 대학생이었는데,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던 길에 한 음주 운전자가 낸 추돌 사고로 온몸에 크나큰 화상을 입었습니다. 가까스로 생명은 건졌으나 건강도, 미모도, 희망찬 미래도 다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십여 차례의 힘든 수술을 견디어 내고 자활에 성공하였고, 현재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의 자서전 『지선아 사랑해』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면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고통을 이겨 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감히 내 작은 고통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백만분의 일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고, 너무나 비천한 사람으로, 때로는 죄인으로, 얼굴도 이름도 없는 초라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그 기분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고통마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가슴이 없었을 테니까요.”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상처에서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이지선 씨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통하여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부활은 바로 예수님의 고통을 깊이 헤아리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신대원신부-
부활 제2주일이자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다.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사백주일'(卸白主日)이라고 했다. 부활대축일에 세례받은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깨끗해졌다'는 표시로 흰옷을 입고 있다가 오늘 벗었기 때문이다.
그 후 교회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 구원을 위해 오시고 사셨으며, 돌아가시고 묻히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자고 당부한 데 따라 2001년부터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낸다.
우리를 내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림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요 도리다. 죽음의 세력을 꺾어버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숨어 지내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첫 마디로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말씀하셨다.
무서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새로운 희망이 아닐 수 없다. 평화(平和)란 다툼이나 갈등 없이 평온하고 서로 화목한 상태를 말하며 '화평(和平)'과도 통한다. 사실 인생살이에서 아무런 다툼도 없고 갈등도 없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믿음이 살아나고 사랑이 움터 부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 모두 손을 맞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남음도 모자람도 없는 대동(大同)의 사회가 아니겠는가? 대동사회는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 서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평화를 원한다. 하지만 평화를 해석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서민,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평화는 곧 부자와 권력자, 강대국의 생각이다.
세상은 평화라는 참으로 소중한 언어를 갖고 있고, 또 그것을 원하면서도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무기를 만들고, 평화를 운운하면서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내리누르려는 왜곡된 평화관(平和觀)을 갖고 있다. 결국 세상이 주는 평화는 그 의미와는 다르게 심각하게 훼손돼 힘의 균형이 깨지면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어 위험천만하다.
이러한 평화는 무늬만 평화이지 실제로는 사람에게 참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핵무기를 만들고 상대방을 단숨에 무너뜨릴 정도로 절대적 힘의 우위에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는 우리 시대의 '평화 논리'는 거짓되고 허황한 주장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 오르시어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라고 전제하신 뒤, 당신이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이별의 만찬을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지극히 간절한 어조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란 어떤 평화일까? 또 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란 누구일까? 예수님께서는 평화와 평화를 일구는 일꾼으로서 제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돼야 할 조건을 갖추기를 요구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참된 평화는 하느님으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평화의 일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누구의 죄든 용서하기 시작한다면, 거기서부터 평화가 시작되고 믿음과 사랑이 되살아나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실까?
예수님은 평화이시다. 평화이신 분이 평화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며 잘 일궈나가라고 하신다. 평화의 절대 규칙은 '믿음'이다. 믿음이 전제되면 사랑이 싹트고, 사랑이 싹트면 정의가 꽃피우게 된다. 사도 토마스도 결국 잃어버렸던 믿음을 평화이신 분으로 말미암아 되찾았고, 비로소 평화이신 그 분이 곧 부활이신 분임을 고백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사도 토마스는 이제부터 평화를 일구는 일꾼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땅의 극변까지 가서 부활을 선포하는 증인으로 살게 될 것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부활이신 아드님 안에서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와 믿음을 주시어 부활의 삶으로 부르신다.
한국 사회에서 정의와 평화는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가. 우리가 부활하시고 평화를 주신 분과 함께하는 일은 그분 부르심에 어떠한 태도로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다.
보지 않고도 믿게 하소서
-손희송신부-
예루살렘의 초대 신자 공동체에서 사도들은 ‘많은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면서 주님을 전합니다.(제1독서) 이는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났기에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새로운 삶으로, ‘부활’로 이어진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직후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 가운데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하고 인사하시자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크게 기뻐합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아서 동료들과 함께 있는 것조차도 마다했던 것 같습니다. 적대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려고 유다 땅으로 가시려 할 때, 스승을 기꺼이 따라나 섰던 제자가 바로 토마스였습니다. 그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말하면서 머뭇거리던 다른 제자들을 독려했습니다. 이렇게 토마스는 스승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충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스승의 비참한 죽음에 더 크게 상심하여 두문불출했던 것 같습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스승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고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남다른 충정 때문에 크게 상심한 제자를 남다른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은 토마스가 원하던 대로 해 주십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믿음의 걸림돌을 치워주십니다. 동시에 그의 믿음이 한층 더 굳건하게 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의심을 극복한 토마스는 주님을 증거하는 데에 일생을 바칩니다.
우리 역시 토마스처럼 하느님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혹은 너무 원통한 일을 당하게 되면 ‘하느님이 정말 계신가?’하고 의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을 풀어줄 수 있는 증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명한 징표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징표가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이 정말 존재하시는지, 존재 하신다면 과연 선하고 전능하신 분인지 의심이 들 때마다 부활하신 주님께, ‘죽었었지만,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신 분’(제2독서)께 간절히 청하면 좋겠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태양이 비치지 않을 적에도 태양을 믿게 하소서.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적에도 사랑을 믿게 하소서.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 적에도 하느님을 믿게 하소서.”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김태훈 수사-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누리를 새롭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주간 첫날 저녁에 예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문을 잠가 놓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수난 때 그들이 보여준 자기 보호의 상징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 약한 제자들에게 오시어 그들 한가운데에 곧, 그들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으시면서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들을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시며 평화를 약속하신 예수께서는(14,18.27; 16,33)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시 볼 때 그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할 기쁨을 누릴 것이라는 그분 말씀(16,22)의 성취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평화의 선물을 주시고,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그들이 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죽으셨던 예수님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실 예수님을 확인하는 데에는 얼굴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복음사가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그분이 부활하신 분과 동일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선포 내용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평화를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선교 사명을 맡기십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선교 사명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그 사명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마치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신뢰하시면서 당신 것을 모두 맡겨주셨듯이, 예수님도 똑같은 사랑과 신뢰로 바로 이 나약한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명을 계속해 나가도록 맡기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명을 받는 이의 부족함을 초월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이렇게 성령을 주실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 ’고 합니다.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는 구절(창세 2,7)과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명에 따라 예언하자 마른 뼈에 살이 붙고 숨이 들어가 살아나게 되었다는 장면(에제 37,9)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창조하시고 부활의 영으로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2코린 5,17) 더욱이 성령과 연결된 죄의 용서는 이 새로운 창조의 면모를 더 확실히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자비로 죄의 용서와 그 표징인 평화를 체험하고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비로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오직 하느님과 예수님만이 지닌 고유한 권한인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을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것은 단지 그분 사명을 계속하는 것을 넘어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일치, 나아가 하느님과 일치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토마스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에게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우리는 그분을 뵈었소.”라고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의 불신을 토로합니다. 이는 의지적 측면보다 무능의 측면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다시금 예수님이 오셔서 그를 만납니다. 이 만남 이전에 토마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모두들 예수님의 부활 얘기로 떠들썩했을 그런 분위기는 아직 예수님의 수난을 살고 있었을 그의 슬픔을 더욱 짙게 하고 큰 외로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제자들의 공동체에 머물렀고 바로 이 제자들이 모인 곳에 예수님은 다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고 곧바로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토마스한테 다가가서 그가 한 말 그대로 말씀하시며 믿음을 갖도록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전능은 제자가 있는 자리로 내려가서 그를 끌어올리기 위한 사랑의 봉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 앞에서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참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의심 많은 토마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처음으로 고백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 무엇보다도 그분 사랑의 권능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사실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손을 넣어보라 하신 초대는 제자가 당신의 수난에 참여하면서 입었을 그 마음의 상처인 좌절, 실패, 회의감, 허무감, 신앙의 위기 등에 당신의 상처를 맞대는 행동이셨습니다. 이 상처의 맞댐으로 제자의 마음의 상처는 나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상처를 지닌 영광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상처와 인격에 직접 응답해 주시는 하느님을 예수님 안에서 만난 토마스는 “저의”라는 말을 연거푸 쓰고 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관념이나 집단의 하느님이 아니라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주시는 그의 하느님인 것입니다.
묵상(Meditatio)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질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상처를 지니신 영광스런 모습으로 내게 오셔서 당신의 상처와 내 상처가 닮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나를 당신 부활의 행복에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기도(Oratio) 주님, 제 믿음을 더해 주소서. 믿음 안에서 당신을 뵙게 하소서
평화와 용서로 감싸주시는 주님
-홍승모신부-
쌍둥이라고도 불리는 토마스 사도에 관한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묵상하게 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뵈었다고 기뻐하는 모습 속에서, 토마스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토마스는 부활의 신비 앞에 자신의 마음을 굳게 닫고 있는 전형적 인물로 나타납니다. 토마스는 열두 사도 중 하나였습니다. 주님을 곁에서 직접 체험했던 이른바 직제자였습니다. 주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신비 앞에선 굳게 닫혀있습니다. 어쩌면 이 모습은 우리 안에 내재돼 있는 닫히고 고집스런 마음일 수 있습니다. 닫히고 고집스런 마음으로는 주님의 신비를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믿음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알면 알수록 점점 커져만 가는 신비 속으로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폐쇄적인 마음 안에 주님을 가둬 놓곤 합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자신의 사고 틀에 주님을 가둬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이제는 더 많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이제는 더 많이 묵상하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이제는 더 많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심지어는 주님을 자신의 잣대로 재보기도 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유로우신 주님은 이미 우리 생각 틀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살아계신 주님 현존을 느끼고 체험하는 모습을 보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토마스처럼, 우리의 보다 큰 문제는 주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아주 잘 아는 듯이 생활하는 믿음의 우월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토마스는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호언한대로 못자국과 상처를 찾기 위해 주님 몸을 당연히 살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시선을 돌려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고 말씀하신 후에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요한 20,27-28). 우리 신앙은 주님 현존에 대한 외관상 증거나 목격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 체험과 믿음을 근거로 삼을 때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토마스는 주님 사랑의 시선을 누구보다 더 받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우월감이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뵈었을 때에 자신만 빠졌다는 서운하고 미운 마음으로 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토마스가 공동체 안에서 자신에게 너무나도 높은 가치를 매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토마스를 질책하기 보다는 당신을 만져봐야만 믿겠다는 요청을 들어주시며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보고도 믿지 않던 이들에게도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주님은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우리를 성령이 주시는 평화와 용서로 감싸주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주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도들에게 성령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은 우리 믿음을 일깨워 용서와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함께 하거나 사랑을 나눈 체험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뿌리가 됩니다. 사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이런 소중한 체험들을 서로 나누고 믿음이 부족한 형제들을 격려했습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배려해주는 평화의 삶 속에서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부활이다
-손요환신부-
토마스의 불신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는 17세기 회화세계에 혁신을 일으킨 화가입니다. 그는 바로크시대의 대표적 화가로서 빛을 그림에 접목한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적인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성화의 소재를 대부분 거리의 서민들에게서 취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화는 늘 친숙합니다.
그가 그린 <토마스의 불신>도 우리의 의문을 친숙하게 대변해 줍니다. 이 성화의 배경은 요한복음 20장 19~31절입니다.
토마스는 그날 저녁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 중요한 저녁, 예수님께서 성령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시던 그 저녁에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토마스는 왜 거기에 없었을까요? 그는 더 이상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희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실망해버렸습니다. 그는 그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았던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뵈었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우리도 토마스처럼 행동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속에 감추어진 그 너머의 것을 보지 못한 채, 자기 시야를 좁혀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도 토마스의 세계에 빠져 그저 먹고, 즐기고, 짝 짓고, 의미 없는 잡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토마스와 같은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이 성화에는 등장인물이 네 명 나옵니다. 예수님은 황금분할선상에 자리 잡고 있고, 세 제자들이 오른쪽에서 예수님을 향해 다가섭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토마스의 머리와 다른 제자들의 머리가 정확히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토마스의 손가락에 모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두 손 사이에 토마스의 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으로 옷자락을 걷고, 다른 한 손으로는 토마스의 손목을 붙잡아 상처의 갈라진 부분으로 당기고 있습니다. 그 손등에는 못 자국도 또렷하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토마스는 자기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헤집는 동안 다른 제자들도 눈으로 상처를 더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촉각과 느낌으로 그분의 상처를 더듬고 있습니다.
토마스는 그분을 보았고, 그분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는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자기 주위를 둘러쳤던 불신의 테두리를 무너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보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인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은 가능성까지 믿어 주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보지 않고도 믿어줄 때 부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야 믿겠다고 할 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의심만 남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부활이라는 말씀이 뇌리에 머무는 오늘입니다.
독서 오늘 복음에서는 세 장면이 겹쳐지는 듯합니다. 세 무리의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먼저는 문을 닫아 걸고 있던 제자들이, 그다음에는 그날 함께 있지 않던 토마스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만남은 이렇게 시간상으로 연속되고, 그 폭은 점점 더 확장되어 갑니다.
지난 주 복음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때는 ‘주간 첫날’?입니다. 주님 부활의 날, 살아 계신 그분의 현존을 다시 체험하는 날입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한테서 주님을 뵈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아걸고 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 주님의 오심을 맞아들이기 위하여 문을 열지 못하는 약함과 부족한 믿음, 이 모든 것도 제자들 가운데 오시어 현존하시는 주님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그분은 문이 잠겨 있어도 집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은 ‘평화’?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평화를 약속하셨습니다. 14장에서는 오늘의 복음에서와 같이 평화와 성령이 함께 언급됩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리라는 말씀과 함께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하시며?(27절),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지 말라고 하시고는 수난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또한 16장에서도 수난의 때가 가까웠음을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3절)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앞의 두 본문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그분의 평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그 평화는 수난이 없는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다음에도 주님의 성령 안에서 이 세상을 이기는 평화입니다.(16,?33 참조)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에페소서에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2,?14)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에페 2,?16) 제자들이 가야 할 평화의 길은 어쩌면 바로 그런 길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가신 그 평화의 길을 가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는 사명은, 현재 문맥에는 무엇인가 맞지 않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 있는 이들에게,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니 어쩌면 제자들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이들, 그들을 박해할 수 있는 이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 이야기는,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건너가는 중간 단계가 됩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실 때 그분을 따랐던 제자였고, 직접 그분을 만났고 그분을 알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앞 장면에 나온 제자들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나타나신 그 주일 저녁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고, 그래서 오늘 우리처럼 직접 눈으로 주님을 뵙지는 못한 이들과 같은 선상에 자리하게 됩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예수님께 대한 직접 체험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의 증언이었습니다. 우리의 상황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이로써 그는 예수님을 눈으로 뵙지 못했고 믿기 어려워하는 후대 사람들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의심하던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다른 제자들의 말을 확인해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토마스는 다시 ‘보고서 믿는’ 이들의 무리에 속하게 됩니다.
결정적인 것은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이것은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보다도, 토마스 사도보다도 우리가 더 복되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목격 증인이었던 사도들한테서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의 증언으로 이어진 고리를 통해 오늘 나한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들의 증언에 힘입어 부활하신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때?(28절),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너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찰 보이지 않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분께서 언제나 살아 계시며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성령의 힘으로 이 세상 어둠 속에서도 두려움을 이기는 평화를 지닐 것입니다. 그런 평화를 지닌 이는 복됩니다.
기도 행복합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을 생각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시편 84,?6)
“평화가 너희와 함께!”
-양승국신부-
<3초에 한번 씩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다른 아이들에 비해 체중이 현저하게 미달되는 아이, 늘 이런저런 잔병에 시달리는 병약한 아이가 한 소아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소아과 전문의는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아이의 입원기록부에 크고 뚜렷한 글씨로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이 아이는 세 시간마다 한 번씩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한번은 ‘비행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부모님들과의 관계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폭언, 무시, 구타, 음주, 무능력, 무관심, 애정결핍...
많은 가슴 아픈 내용들이 적혀있었습니다.
결국 요약해서 결론을 내려 보니 ‘성실성의 부족’이었습니다. ‘지속성의 결핍’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부모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란 것이 한 두 번 하고 끝내는 것이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진정한 사랑은 머나먼 여행길을 걷는 것입니다. 오래 오래 두고두고 쌓아나가는 것입니다. ‘문제 부모님’들이 지닌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사랑의 연속성 부족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는 철저하게도 다르십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자비는 한결같으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떠났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자비심을 거두어들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몹쓸 죄를 지었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당신 자비의 손길을 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저 늘 한결같으십니다. 미우나 고우나,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끊임없이 당신 자비의 마음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께 지은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느님 당신의 자비 앞에서는 ‘쨉’도 안 됩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짓는 죄가 태산같이 높다 해도 하느님 당신 자비의 뜨거운 불 앞에 눈처럼 녹아버립니다.
세 시간마다가 아니라 3초에 한 번씩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일 년에 한번 우리의 축일이나 생일에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매순간 지속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우리에게 크나큰 자비를 지속적으로 보내신다는 가장 뚜렷한 표시입니다.
저는 족발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상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글쎄 족발은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앞발과 뒷발에 가격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앞발이 뒷발보다 더 비싼 것입니다.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똑같은 발인데 왜 앞발과 뒷발에 차이가 있을까요? 실제로 앞발에 고기가 더 많고 또 맛도 훨씬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앞발에는 무거운 머리가 있고, 뒷발에는 가벼운 꼬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시네요. 즉, 앞발은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면서 뒷발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 어렵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순간을 이겨내는 사람이 더 값어치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사람을 주님께서는 더 인정하실 것입니다.
만약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이 힘들고 어렵다고 쉽게 포기해 버린다면 어떨까요? 아마 자신의 값어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고, 주님의 인정도 받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렇게 값어치 떨어지는 행동을 했었지요. 즉,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 벌벌 떨기만 했습니다. 이 모습을 도저히 못 보시겠는지 직접 나타나셨고, 그제야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부활을 목격했다는 제자들을 향해 값어치 떨어지는 말을 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 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힘이 빠지셨을까요? 마리아 막달레나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도 믿지 않고, 그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믿지 않고 실망스러운 말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화를 내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사랑 가득한 자비로 다가오시며 말씀하시지요.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을 직접 뵌 토마스가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감동을 했을까요? 그렇게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자비의 예수님을 목격하는 순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자비와 사랑 가득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 모두 간직하고 있는 각자 각자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 말하면서 주님께 철저히 의지해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잘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물론 동시에 나의 값어치가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곱고 가는 말이 나쁘면 오는 말이 나쁘다(열자).
의심 뒤에 온 고백
-오민환-
주님께서 부활하신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주님을 만나셨는지요. 부활하신 주님 소식을 접한 제자들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의심’이었습니다 (루카 24,36-43; 마태 28,17 참조).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은 사도들과는 달리,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사도들’에게 전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루카 24,11).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의심을 생략합니다. 대신에 오직 한 사람 토마스 사도의 의심에 집중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토마스는 갈릴래아 어부 출신으로 열정과 이성을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찾아가자고 하시자, 그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라고 의리 있는 선언을 합니다. 그만큼 스승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이 너무나도 처참히 돌아가셨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움에 떠는 동료들과 함께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 컸습니다. “주간 첫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는 동료들의 말을 토마스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여드레 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로 오십니다. 드디어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요한 복음서의 첫 고백과 같습니다. 토마스의 스승님은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한 하느님’이신 주님이었습니다. 토마스의 입에서 예수님의 신성이 처음으로 고백됩니다.
부활, 용서의 행복을 사는 것!
-김찬선신부-
불행한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죽은 사람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명을 구가하는 행복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
저는 오늘 딱 이 말 한 마디만 하고 싶습니다. 다른 얘기를 더 하면 구질구질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 마디 더 하라고 하면 행복해져보면 알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용서의 반대말이 앙갚음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앙갚음은 누구의 무엇 때문에 자기 인생이 불행해졌다고 생각하기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지만 누구의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죽지 못해 사는 것이라면 그 불행감으로 인해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앙갚음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와 상관없이 행복하게 되면 앙갚음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내가 그에게서 해방되면서 나도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부활의 삶은 주님의 당부대로 용서를 할 때 완성될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한 사람만이 부활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교회에 순종하신다
-전삼용신부-
예수님의 생애에서 순종을 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순종이란 자신을 버려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순종의 가장 절정을 나타내는 모습이 바로 아버지와 백성들의 뜻대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 이전 모습에 있어서도 성경은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다고 쓰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 분은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순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을 넘어서서 성모님께, 또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결정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온전히 버린 빵의 모습으로 사제에 의해 축성되고 그들의 손에 의해서 나누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을 버리기 위해 매일 십자가를 지는 노력’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매일 노력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부수어 빵의 형상이 되신 ‘면형무아’ (麵形無我)의 모습은 우리 영성의 전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버린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엇에 순종해야 할까요?
당연히 성경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이 쓰여지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로 성경의 정경이 정해졌다면 교회는 성경이 포함하는 진리를 판별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듯,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셨듯이 (에페 5,21-33) 신앙인은 교회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항상 교회의 권위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마귀의 책략입니다. 사탄이 하느님의 권위에 저항하였듯이 인간들도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자 한 몸인 교회에 저항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사람들이 있는데 미리내의 황 데레사와 나주 율리아 자매입니다. 교회는 그들의 증언은 거짓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을 따르는 신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교회가 하느님께서 직접 계시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다고 항의하고 있고 지금도 나름대로 그 증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작은 불순종들이 교회를 분열시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시며 베드로라는 한 사람 밑에, 그에게 준 단 하나의 하늘나라 열쇠를 중심으로 모이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바로 이 하나 되는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나라의 열쇠”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의 열쇠는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처음에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하느님나라에 인간에 왜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나라의 열쇠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열쇠는 나중에 사도들 전체에게 주십니다. 즉,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땅에서 사도들이 어떤 결정을 하던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존중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모든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시겠다는 뜻이고 먼저 그 권한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그 곳에 없었던 사도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토마였습니다. 토마만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신 죄를 용서하는 성령의 권능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토마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토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기 위해서는 일주일을 또 기다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토마에게 나타나시기 위해서 ‘사도단’에게 발현하십니다. 만약 그 때도 토마가 자존심이 상해서 나머지 사도들로부터 멀어져 있었다면 예수님은 토마에게 따로 발현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이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교회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밀링고 대주교는 우리나라 성 마리아와 혼인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서품을 준다고 합니다. 물론 주교님 이상만 되면 사제를 서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서품은 무효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혼자 동떨어져있는 토마 사도와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면 사도단과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과도 함께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지금 교회 밖에 있는 것이고 교회 밖에 있다면 사제건 주교건 예수님께서 주시는 권한을 받지 못합니다. 마치 토마 혼자 예수님을 뵙지 못하고 파견 받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하나이고 그 하나는 베드로, 즉 교황에게 있고 교황과 일치하지 않는 성직자는 주교든, 추기경이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니지 못합니다.
비오성인은 오상을 받았지만 그 사실을 모함하는 교회 성직자들에 의해 사람들 앞에서 미사와 고해를 드릴 수 없게 되었었습니다. 사실 사제가 이 두 가지 성사를 줄 수 없다고 한다면 사제로서의 생명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 어떤 교회 주교들도 비오 사제만큼 거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성 비오는 단 한마디 불평 없이 교회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수많은 기적을 행한 것보다 그를 더 성인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당시의 부패해 있던 교회를 비웃기나 하듯 거지 수도회를 만든답시고 교황님을 찾아왔습니다. 교황님은 그런 수도회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밤에 어떤 거지가 기울어져가는 교회를 어깨로 바치고 있는 꿈을 꾸고 그 수도회를 인준해 주었습니다. 만약 교황님께 인준을 받지 않았다면 프란치스코 성인이 아무리 성인이라도 지금의 프란치스코 회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혼자서도 교회의 허락 없이 거룩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기어이 교회의 허락을 받아내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거룩하더라도 예수님만큼 거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순종하지 않은 성인들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성인이라면 교회가 그리스도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어떻게 내려주셨습니까? 교회가 모여 있을 때 내려주셨습니다. 그 곳에는 베드로와 사도들이 있었는데 루카는 사도행전을 쓰면서 그 사도들의 이름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적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사도단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단이 모여서 하나로 기도할 때 성령님이 임하셨고 교회가 그렇게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복음으로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십니까? 바로 교회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구원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성모님의 태중에 잉태되셨습니다. 그 때부터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었고 다만 모든 아이가 그렇듯이 성모님이 움직이는 대로 자신을 내맡겨야 하셨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 당신을 내맡기시게 될 신비로운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와 한 몸이 되셨기에 교회의 권위에 당신도 순종하십니다. 즉,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주신 권위에 당신도 거부하지 않고 ‘하늘에서도 따라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즉, 당신이 주신 교회의 권위에 당신도 순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도 순종하시는 교회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임을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새벽을 열며
저는 우리 본당 신자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정말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 모습에 늘 감사할 뿐입니다. 성당 옆에 있는 종교미술학부 부지 구입을 위해서 우리 성당은 계속해서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15억. 말이 15억이지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신자들이 하나가 되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매주 구역별로 돌아가면서 음식 판매를 하고, 각 단체도 허리띠를 졸라서 건축금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려고 합니다. 또한 성당에서 일할 것이 있으면 자신의 특기를 최대한 발휘하여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강당 및 성당 전체의 리모델링, 그리고 장애인 램프도 신자들의 힘으로 이루어졌으며, 얼마 전에 만든 성체조배실도 신자들이 함께 해주셨기에 쉽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가 소홀한 것도 아니지요. 많은 분들의 기도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곳이 바로 우리 간석4동 성당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의심을 많이 가지고 성당에 왔었습니다. 처음으로 본당신부를 맡은 저로써는 너무나 큰 성당이었거든요. 따라서 성당 옆에 있는 종교미술학부 건물을 과연 살 수가 있을까? 15억이라는 돈을 모을 수가 있을까? 오래된 성당은 신자들이 드세다고 하던데, 내년이면 본당 설립 30주년을 맞이하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이곳에서 휘둘림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쓸데없는 걱정과 의심이었습니다. 신자들의 열심에 벌써 목표액의 1/3을 채웠고, 얼마 전에는 교구에 그 액수를 미리 지불함으로써 우리 본당이 충분히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었던 걱정과 의심들은 모두 쓸데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심과 걱정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나만을 생각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를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처럼 말이지요.
예수님을 본 다른 제자들은 토마스 사도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토마스 사도는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과학적인 원리를 설명해가면서 제자들이 허깨비를 본 것이라고 설득을 합니다. 이런 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시지요.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특히 토마스 사도처럼 공동체를 벗어나 나만의 신앙생활을 하고자 할 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 동료들의 소중한 체험을 비웃을 때, 우리들은 의심과 걱정의 굴레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푸시는 ‘평화’마저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은 나만의 신앙 안에서 부활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빌어주면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공동체 안에 계신 주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를 사랑하고 함께하는 사람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와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을 합시다.
빠다킹신부
믿음
-김유철 신부-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하신 첫 인사말입니다. ‘평화’라는 단어를 마음속에 품기 위해서는 선행되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비(非)평화적 요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비평화적 요소는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20,19). 이 두려움을 예수님은 단숨에 깨뜨려버리십니다. 잠긴 문을 열지도 않고 통과하고 두려움에 굳은 마음을 평화로 풀어주며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당신의 건재함을 드러냅니다. 못으로 구멍 뚫린 두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줌으로써 의심 없이 믿도록 제자들을 인도합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제 두려움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평화가 기쁨을 타고 다가옵니다. 문제는 그때에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였습니다. 그는 다른 동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분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20,25)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동료들을 신뢰하지 못함과, 부활에 대한 불신이 손가락을 상처에 넣어보아야겠다는 끔찍한 말까지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1,29).
예수님, 하느님
- 백남용 신부-
외모로 볼 때 한 평범한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일까 추측과 억측들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살아 돌아왔다고도 하고 엘리아라고도 하고 혹은 예레미아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지만 베드로를 필두로 한 사도들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 정도면 되었을까요?
요한 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 생애의 거의 끝에서 예수님 정체에 대한 유다인들의 실언 하나가 언뜻 스쳐갑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다고 해서, 유다인들은 신성모독의 죄명으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항변하십니다. 그 때 그들은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10,33) 하고 얼떨결에 말합니다. 그들은 무의식중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정도가 아니고 바로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으면서, 자기 내면의 소리에 반항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미사의 복음 말씀은 같은 요한 복음의 20장에서 발췌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당일, 토마스를 뺀 나머지 사도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토마스는 자기가 직접 보지 않았으니 부활을 믿을 수 없노라고 버텼습니다. 그 다음 주일인 바로 오늘, 토마스도 같이 있는 자리에 예수님께서 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토마스에게 당신의 심장을 찔렀던 창구멍과 손발에 있던 못 자국을 만져 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또 한 번의 역전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이 의심 많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위대한 진리 하나를 계시하시니, 토마스는 만져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18)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셨습니다. 증거를 보지 않고도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만, 주님은 사람들의 의심을 통해서도 위대한 진리를 알려 주시는 참으로 자비한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이 진리는 얼마나 고마운 것입니까! 우선,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어내시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사합니다. 마치 부모님이 우리를 낳아 주신 것을 큰사랑으로 알고 고마워해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생명까지 바치셨다는 구원의 사랑은 창조의 사랑보다 더 큽니다. 이 사실에 우리는 더욱 크게 감사합니다. 마치도 부모님께서 우리의 불치병을 고쳐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장기를 떼어 주시고 당신은 돌아가셨다는 것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 황송한 진리가 오늘 토마스 사도의 고백으로써 밝혀진 셈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까지 바치신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오상선신부-
불교 용어로 돈오와 점수라는 말이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의 두 방법론을 일컫는다. 돈오란 직관적인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점수란 체험적인 깨달음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크리스천 체험 안에서도 믿음에 이르는 길, 구원에 이르는 길, 부활 체험에 이르는 길을 돈오와 점수의 관점에서도 설명할 수 있겠다.
어제부터 줄곧 복음은 목격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과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의 말을 듣고도 제자들은 그 말도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예수께서 살아나신 것을 분명히 본 사람들의 말도 믿지 않았던 그들을 호되고 나무라신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어서 제자들 무리에도 함께 있지 않아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토마스의 불신앙이야기가 나온다. 직접 보고 만져보고 체험함을 통해서 합리적으로 깨달음과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바로 <점수>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어쩌면 당연한 구도의 길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불신앙과 믿지 못함의 태도를 나무라시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불신앙과 믿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친히 당신을 직접 체험토록 이끌어 주신다.
이러한 구체적, 실천적 깨달음의 길에는 두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즉, 우리 측에서의 깨달음을 향한 진지한 구도적 자세와 주님 측에서의 은총과 안배가 그것이다. 이 두가지 요소가 있어야만 <점수>적 방법은 그 목적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토마스는 결국에는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것이 <돈오>의 방법이다. 직접적인 체험 없이도 간접적인 증인들을 통해서 직관적으로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길이 진정한 믿음의 길이요 깨달음의 길, 진복의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가끔 확실한 것을 잡으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야, 데레사야, 너 이렇게 하여라> 하고 직접 말씀해 주시기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성모님께서 나에게도 직접 발현하셔서 이러저러한 말씀을 내려 주시기를 은근히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다면 정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열심히 따를텐데...
그러나 이에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필요하다. 그러한 경우에만 이 <점수>적 깨달음이 성취될 수 있을 뿐이다. 이 길은 우리의 기대의 결과이기보다 하느님 은총의 결과이다. 하느님께서 꼭 필요한 때에 이러한 은총을 내려 주실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대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돈오>적 깨달음의 길로 가야한다. 2000년의 역사 안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전승을 토대로 우리에게 전수되어온 체험들을 비록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목격한 체험은 아니지만 직관적으로 바로 그것이 우리가 찾던 것임을 깨달아야만 우리는 참으로 신앙인이 되고,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다.
사실 <돈오>적 깨달음은 대부분의 우리에게 요청되고 또 열려있는 길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이가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대에는 예수의 부활을 토마스처럼 직접 체험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포기하십시오. 그러한 체험은 토마스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일 뿐입니다.
정작 우리가 해야할 길은 이러한 부활 체험들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직관적으로 그 깨달음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다 못한 체험이 아니라 결국 똑같은 체험입니다. 그분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부활 체험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분이 살아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내 안에서, 우리 가운데서 살아계십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이고 신앙이며 진복입니다. 이를 깨달야만이 우리는 참으로 알렐루야를 노래하게 됩니다.
아직도 그대 참으로 알렐루야를 노래할 수 없다면 저의 증언을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그분이 살아계심을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한번 마음 깊숙이 알렐루야를 노래하십시오.
부활 8일 축제를 마감하며...
새 출발과 평화는 용서로
-김찬선신부-
우리는 Utopia를 꿈꿉니다. 어느 한 사람 불행한 사람이 없이 모두가 잘 사는 나라말입니다. 성 토마스 모어는 이런 꿈을 펼친 “Utopia”라는 책을 썼고 홍 길동은 부조리와 서얼차별이 없는 이상 국가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상적인 나라를 모두 꿈꾸지만 이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이 쉽지 이상적인 국가나 공동체는 어찌 보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모든 것이 다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같은 선거철에는 정치가들이 모든 것 다 바꾸겠다고 공약을 내거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公約이 公的인 約束이 아니라 빌 空자 空約이 되고 맙니다. 칼 막스가 노동자의 천국을 만들겠다고 사회주의를 들고 나오고 그래서 공산주의 세상이 등장했지만 공산주의도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칼 막스가 이루고자 했던 그 아름다운 공동체, 유토피아가 바로 오늘 제 1독서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합니다.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어 가난한 사람도 없고 부유한 사람도 없습니다.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모입니다.
저의 가족 자랑이 되는 것 같아서 좀 쑥스럽지만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생활 성서”에서 저희 집을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의 형제들이 매일 같이 만나서 기도하고, 그리고 같이 식당을 운영하고 식당 이익금으로 좋은 일을 좀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활성서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좋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같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같이 하고, 일을 같이 하는 것, 이것이 보기에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이렇게 지내는 것 당연한 것인데 이것을 특별히 소개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상 마음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한 사람도 같이 기도하지 않고 혼자 기도하고 아무리 착한 사람도 같이 지낼 수 없고, 같이 일할 수 없고, 같이 좋은 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도행전이 전하는 한 마음 한정신이 된다는 것, 아무도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부활체험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다.”고 얘기합니다. 부활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도 있지만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시고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고 이어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잃은 슬픔 때문에 주님을 배반한 죄책감 때문에 주님을 잃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절망감 때문에 평화로울 수 없는 제자들을 먼저 용서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이 용서가 제자들을 새 사람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 쏙 빠지게 혼을 내주어야 정신 차리고 새 사람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진심 어린 사랑의 질책도 새 사람 되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용서가 새 사람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란 과거를 풀어주고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든, 아니면 남을 용서하든 용서하는 사람도 용서 받는 사람도 과거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사람이라야 새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용서로 나를 채우고 있던 지난날의 미움들을 모두 비워내고 용서로 표현되는 사랑으로 나를 채울 때, 미움으로 분열되고 갈등하던 것이 이제는 사랑으로 화합하고 일치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내 것을 다 주어도 충만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용서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한 사람은 이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공유합니다.
이성(理性)을 초월한 신앙
- 정진성 신부-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직접 만져보고 눈으로 보아서 이해가 되어야만 믿는 존재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이성적인 인물인 토마 사도를 만나볼 수 있다. 3년간 굳게 믿고 따랐던 분, 영원한 구원과 자비하신 하느님을 전해주셨던 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기적들을 행하신 분이 돌아가신 것도 믿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라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더 이상 희망도, 용기도 없었던 토마 사도의 마음을 우리도 너무나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토마 사도의 모습을 ‘불신앙의 대표’로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 모두는 불신앙인 아닌가?
인간적인, 그리고 이성적인 시각에서 토마 사도를 살펴보면 그의 행동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는 부활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신비’는 ‘상식’이 되기 때문이다. 토마 사도는 인간 이성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신비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아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토마 사도는 직접 주님을 뵙고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면 어찌하겠는가? 혹시 다른 제자들을 미쳤다고 비웃지는 않을까?
여기서 우리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토마 사도의 이러한 언행 때문에 그의 이성이 신앙 안에서 붕괴되어졌다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한 그의 언행이 주님을 뵌 뒤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확신에 찬 신앙 고백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의 어리석음이 깨어지면서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신앙으로 변화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고 또한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확실하고 충격적인 체험을 통한 신앙, 우리가 간절히 바라던 기적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들. 하지만 주님은 항상 우리를 초월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성과 체험을 통한 신앙 보다는 보지 않고서도 믿을 수 있는 행복을 원하고 계시다. 보고 믿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 보고 믿는 것도 좋지만 주님을 직접 보지 않고서도 “저의 하느님” 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즉 우리의 이성을 주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성의 공백이 아닌 신앙 안에 이성적 삶의 변화이다. 주님의 말씀과 애덕의 삶에 우리의 이성이 전적인 동의를 한다면 우리 삶 속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확실한 충격을 주실 것이다. 그 충격은 말로 할 수 없는 행복이다.
지상에서 부활을 살자
-배광하신부-
▶ 인간의 한계
과학자들은 우주를 ‘소우주’와 ‘대우주’로 나눈다고 합니다. 소우주에 관하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모든 물질의 기본 단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한 이래 현대의 과학자들이 분자, 원자, 소립자를 비롯하여 ‘쿼크’와 ‘렙톤’ 까지를 발견합니다.
이 렙톤을 1mm 세우기 위해서는 1초에 10개씩 하루 종일 세운다 하더라도 무려 317만 년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때문에 소우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어떻게 이 작은 것들이 생겨났으며, 이것들이 어떻게 적당히 어우러져 이 세상을 이루는지 경이로움을 넘어 두려움마저 든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몸도 풀 수 없는 신비 덩어리입니다.
대우주인 은하계 역시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신비입니다. 현재까지 천문학이 발견한 우주의 범위를 ‘초초 은하단’이라고 천문학에서는 부릅니다.
그런데 이 초초 은하단 안에 있는 별의 숫자를 다 헤아리자면 1초에 100개씩 셀 수 있는 컴퓨터로 24시간 쉬지 않고 세어도 약 2조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생존하고 있는 모든 인류가 저마다 별을 수십 억 개씩 갖는다 하여도 다 가질 수 없으며, 또 얼마나 세어야 하는 숫자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대우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가장 위대한 존재이지만, 또한 가장 미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만드신 조물주 하느님께서 계시는 한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무엇을 보거나 만져봐서 알 수 있는 우주의 신비는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경우처럼 보고 만져지는 하느님이 아니시라, 우리는 분명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 모든 형체와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은 시작부터 순수한 믿음,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며 투신하는 믿음에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부터가 인간의 오만이며 교만인 것입니다. 때문에 ‘봄’과 ‘만짐’이 아닌, 그분 말씀에 온전한 믿음을 두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 의심을 버리고
대화를 나눌 때마다 신비롭고 놀라운 사실은, 그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쌍둥이마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이 다릅니다. 손가락 지문을 보면, 그 작은 면적의 문양이 모두 다르다는 모습에 우리는 분명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믿게 되며,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부활 하셔야만 하고, 분명 부활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역사이래 가슴 아프게 숨져간 모든 의인의 죽음은 죽음 자체로 끝나기 때문에 더욱 비참하게 됩니다. 나아가 이유도 영문도 모르고 역사의 희생양으로 죽어간 모든 이들의 죽음 역시 헛된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죽음을 극복하시고 부활 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역사 이래 인간이 흘렸던 모든 눈물과 통곡의 절규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음을 희망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은 진정 새 창조이며, 하느님 권능의 모습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존재해 주어야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지상에서 흘리게 될 땀과 눈물의 희생이 의미 있게 됩니다. 부활은 참으로 우리 인간을 위한 가장 큰 선물이며, 이 질곡의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인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토마스 사도에게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모든 인간에게 끝까지 들려주고자 하는 당신 사랑의 말씀인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부활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부활에 대한 의심을 떨쳐 버리고, 이 지상에서부터 부활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은 논쟁의 대상이 아닌 믿음의 대상입니다.
한계성을 지닌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다 깨우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문화가 넘실대는 세상을 생명이 약동하는 부활의 세상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이 더 시급합니다.
나의 이기심과 아집의 닫힌 무덤을 열고 주님과 함께 생명의 부활로 걸어 나와야 하고 서로에게도 그 생명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평화의 손길을 뻗을 때, 상처로 얼룩져 죽어있는 형제를 용서의 부활로 일으켜 세울 때, 논리적인 부활의 설명보다 더 큰 부활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참 부활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
-조욱현 신부- 오늘은 부활8부가 끝나는 날로 부활의 기쁨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날이었다. 부활은 이제 단순히 지내는 어떤 기념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고 연장되며 새로운 의미를 주고 선포되는 그런 날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제1독서: 사도 5,12-16: 주님을 믿는 남녀의 수효가 날로 늘어났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신자들 가운데 활동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나로 결속하시어 더욱 커지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 “모든 신도는 한 덩어리가 되어 솔로몬 행각에 모여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신도들의 모임에 끼여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 사람들은 심지어 병자들을 길거리에 메고 나가 들것이나 요에 눕혀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행여나 그 그림자만이라도 그 몇 사람에게 스쳐갔으면 했다”(사도 5,12-15).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를 통하여 ‘많은 기적들과 놀라운 일들을’(12절) 이루심으로써 그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고 계심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부활로써 영원한 ‘주님’이 되셨다(사도 2,36 참조).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이끌어주시는 분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분을 맞아들이고 현존하시게끔 하여야 하는 삶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 때에 주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실 수 있을 것이다.
제2독서: 묵시 1,9-13.17-19: 나는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있다
묵시록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곱 등경 가운데 서 계신 분’(13절)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기 때문에 ‘영원무궁토록 사시며 죽음의 열쇠를 손에 쥐고 계시다’(18절). 그분은 이제 ‘살아있는 존재’로서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의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시다. 부활이 그분에게 모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다. “그분은 ‘처음과 마지막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그분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사명을 실행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그 분을 증거하여야 한다. 부활한 자들이 없이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고서 어떻게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복음: 요한 20,19-31: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복음은 두 장면으로 되어있다. 첫째는 ‘선교사명’에 관한 것으로 성령의 선물을 통해 ‘사죄권’이 부여되는 장면과(19-23절), 둘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토마의 불신앙이다(24-29절). 여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현재에도 영원히 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 부활은 항상 계속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생명을 얻게됨을 알려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모두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표징과 증거로 가득 차있다. 예수께서는 잠겨있는데도 드나드심으로써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임을 확인시키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새로운 창조적 세계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 통치에 대한 것은 우선 제자들에게 주시는 ‘평화’, 그들에게 맡기시는 ‘선교사명’, 그리고 ‘사죄권’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19.21.26절)이라는 표현은 고별사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한 14,27). 이 평화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두려움에서, 그리고 생명과 죽음의 모든 두려움에서의 해방이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온갖 불안에 대한 절대적 보증이 된다.
그리고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는 ‘선교사명’이다. 이 파견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과 같이 제자들이 파견되어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을 세상에 전할 것이며 구원의 행위를 채워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선교사명’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없이 교회 안에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와 구원에 대한 권한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다음의 증거는 성령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는 권한을 통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22-23절). ‘숨을 내쉬는’ 행위는 창조적이고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힘(창세 2,7; 에제 37,9 참조)을 의미한다. 생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충만케 된다. 이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을 통해 새로이 창조되었고, 죄를 사하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죄를 정복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죄가 정복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토마 사도가 고백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28절)은 토마 개인의 신앙고백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을 개별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개개인의 주님이시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개개인의 마음과 생명의 ‘주님’이 되시지 못하면 결코 교회의 ‘주님’이 되지 못하실 것이다. 그분은 신앙 안에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 그리고 ‘보지 않고 믿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 이루어주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께서는 토마의 정신자세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주신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면에서 우리의 생명의 절대적 ‘주님’이 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때에 진정 그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부활신앙을 사는 공동체
- 유영봉 신부-
묵상길잡이 : 부활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라도 있다면, 부활을 믿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죽음과 부활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이들에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부활은 이미 신앙의 대상이지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1. 부활장면 찍어 둔 비디오는 없나?
중. 고등부 학생들에게 부활교리를 하던 중이었다. 신부님의 교리를 열심히 듣고 있던 한 중학생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는 "신부님, 부활 장면 찍어둔 동영상 같은 것은 없습니까? "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라도 있으면 좀 쉽게 믿을 수 있겠다는 태도였다. 그러자 "임마, 그 때 비디오가 어디 있었겠어!" 하면서 다른 학생들이 점잖게 나무랐다.
오늘 복음의 토마 사도뿐 아니라, 현대 자연과학적인 교육을 받아온 우리들에겐 "예수님은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부활교리를 믿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 부활의 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 테입이 있다면 누구나 예수 부활을 믿을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부활이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참으로 죽었다면 절대로 살아날 수 없다."는 자연과학적인 상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있는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이 없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복음서에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히셨다고 예수님을 완전히 '죽어버린 자'로 여긴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자만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이미 믿음의 대상이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2. 부활을 증거하는 삶
예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단순한 지적(知的)인 동의인가? 이것으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부활신앙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것이며, 죽음 후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나는 처음이고 마지막이고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있다." (묵시1,17-18)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부활신앙은 또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하신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때 그분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부활신앙은 이 지상의 삶이 끝나는 그 연장선상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눈에 보이는 이 현상적인 삶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을 향해 열린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를 체험한 사도들은 현실의 욕심을 뛰어넘어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대로 나누어주곤 하였다."(사도 2,44-45) 사도들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었기에,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완전한 자기 비움과 철저한 나눔의 공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우리의 삶을 철저히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우리의 삶이 지독히 자기중심적이며, 이 세상이 전부인양 집착하는 것은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3. 설익은 신앙인?
우리 주변엔 "나는 죽고 난 후의 영원한 생명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세상에 살면서 좀더 인간답게, 멋있게 살려는 것뿐이지!"하며 신(新) 세대다운 신앙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수도자도 가끔 만난다. 이는 '무신론적인 휴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게 보면 사춘기적인 순수함이고, 신앙인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멋있어 보이려고 진한 유혹을 이길 수 있고,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 할 수 있을까? 멋있어 보이려고 순교를 할 수 있을까? 부활에 대한 확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는 신앙은 성숙한 참 신앙이라 할 수 없다.
복음은 토마 사도의 불신앙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토마 사도가 특별히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토마 사도가 예수의 부활을 처음부터 믿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처음 발현했을 때, 사도들의 무리 안에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이다. 우리는 주일미사에 참례하면서 말씀과 성체 안에서, 그리고 믿음이 두터운 형제들 안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교회를 떠날 때, 그리스도를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성사이다.]고 하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님은 믿음공동체 안에서 만날 수 있다. 교회를 떠날 때 믿음도 시든다. 주님 당신 성령을 통해 저희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믿음을 주소서. 아멘.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이기양 신부-
어느 날 부자 한 사람이 대서양을 횡단하는 대형 유람선을 타고 유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승객이 많아 그는 누군가와 함께 방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지내게 된 사람이 도둑 같아 보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어요. 부자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귀중품을 챙겨 들고 아래 선실로 내려가서 그 배의 사무장을 만났습니다.
"이것을 좀 맡기고 싶습니다."
"손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함께 방을 쓰는 사람이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맡아드리지요. 그 분도 벌써 맡기고 갔는걸요."
그런 사람들을 한 방에 묶어 놓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불신이 깊을수록 불행도 깊습니다. 의처증, 의부증 환자들은 끊임없이 아내를 의심하고 남편을 의심해 별의별 트집을 잡아 닦달하는가 하면 정도가 심하면 외출도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믿음이 없다면 그것이 지옥이지요.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도 똑같습니다. 사람은 믿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는 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으로 자꾸 따지고 들면 의심이 커지고, 반대로 믿으려고 노력하면 믿음이 커지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는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불신이 확신으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시고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오늘 가장 행복한 사람은 토마스 사도일 것입니다. 사실 토마스가 의심의 사도로 알려져 있지만 토마스 사도는 의심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토마스의 의도는 믿음에 있었지요. 예수님 부활을 확신하고 싶었기에 의심했던 것입니다. 토마스의 의심은 의심하고 싶어서의 의심이 아니라 확신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면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믿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믿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굳게 믿으며 확신에 차서 믿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어느 병원 부원장으로 계시는 의사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 병원에서는 마취과 의사인 이 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유명 인사라고 합니다. 이 분은 마취에 들어가기 전에 환자에게 꼭 이렇게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혹시 신앙이 있으십니까?"
환자가 특별한 신앙이 없다고 대답하면 그는 정중하고도 친근하게 다시 물어 봅니다.
"제가 천주교 신자인데 기도해 드려도 좋겠습니까?"
사실 마취를 한다는 것은 환자들에게 있어서 여간 불안하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럴 때 더구나 의사인 그가 기도를 해 준다고 하니 환자들로서는 참으로 위안이 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환자가 이렇게 인사를 하면 그는 환자 손을 잡고 진심에 찬 기도를 하느님께 바칩니다. 그의 손길과 기도로 환자의 마음에는 평화가 깃들고 불안과 두려움은 슬며시 가라앉게 되지요. 이렇게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회복이 되면 제일 먼저 이 분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재능을 환자의 치유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쓰는 이 분은 믿는 바를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 더 행복합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해 초조하고 불안했을 토마스 사도는 오늘 복음에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서 두려움과 고통은 사라지고 온전한 믿음과 사랑의 울림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토마스 사도의 행복한 고백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 윤영길 신부-
오늘 복음은 크게 세 만남을 이야기 합니다. 먼저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의 만남과 부활하신 주님과 토마의 만남, 그리고 생명을 얻게 하는 성경과 우리들의 만남입니다.
첫 번째 만남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먼저 찾아간 골방에서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잡아 처형할까봐 두려워, 문을 모두 닫아걸고 두려움과 비탄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토록 믿었던 분이 무력하게 세상을 뜨셨기에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앞뒤가 캄캄한 골방에서 거의 절망적인 그들에게 주님은 평화를 빌어줍니다.
두 번째 만남은 주님의 부활을 극구 부인하는 토마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에게 즉시 전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그러나 토마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분명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분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토마의 생각은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토마는 한 가지만 생각한 나머지 주님께서 수난 전에 하신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루가 9,22).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는 솔직히 자신의 허물과 단점을 동료들에게 드러내었습니다.
우리는 내 자신이 절망과 비탄에 빠져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순간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비록 믿음이 부족하지만 솔직히 이를 인정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주님, 도와주십시오!” “당신을 뵙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할 때, 그 순간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는 은혜와 기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부활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합니다. 부활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처럼, 지금 골방 안에서 감방이나 병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 암환자, 절망과 비탄에 빠져 내일의 희망이란 도대체 없는 이들을 먼저 찾아가게 합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은 부족하지만 토마와 같이 솔직하고 거짓이 없는 이들, 비록 신앙은 없지만 나름대로 마음속에 깊은 ‘못 자국’ 상처를 지닌 채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만나 치유하는 길을 모색하게 합니다.
이러한 두 만남은 성경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극대화됩니다. 우리 남동공동체는 “말씀 안에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성경을 읽고, 쓰고, 공부하고, 또 거룩한 독서를 일상화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부활을 믿고 체험토록 우리를 이끌며 또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를 일러줍니다. 이만큼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생명을 주는 말씀을 살아갈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반복하며 기원하신 소망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주고 그들을 파견하셨습니다. 복음서는 그것이 안식일 다음 날 저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오늘의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제자들은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가르치신 것과 하신 일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과 함께 나누신 이별의 식사를 기억하고 성찬을 거행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실천을 말씀의 전례에서 만나고, 그 말씀과 실천이 우리 안에도 살아 있게 하려고 그분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그분의 피라는 포도주를 마십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같은 장소에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 후면 일주일 후를 뜻합니다. 두 번째의 발현도 주일의 같은 집회에서 있었다는 말입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에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는 사람은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본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은 발현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면서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뜻에 맡겨진 용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불어넣고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면서 성령을 주신 것으로 복음이 말하는 것은 창세기 2장(7절)에서 얻은 발상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진흙을 빚어 사람의 모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으셔서 제자들이 새로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다는 말이고,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 않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용서를 믿고 선포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요한묵시록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말합니다.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예수님에게서 삶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옛날 유럽 중세 교회가 과제로 안고 있던 문제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중세 초기에 유럽으로 유입되어 정착한 게르만족은 난폭하고 그들의 부족 수령에게만 무조건 순종하는 종족이었습니다. 그들 각자는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줄도 모르거니와 죄의식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부족의 수령이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교회가 도입한 것이 개인고백을 동반하는 고해성사 제도였습니다. 신앙인은 각자 자기의 잘못을 성찰하여 죄를 찾아내고, 본당 신부에게 와서 그 죄를 고백하는 제도입니다. 고백한 사람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신부의 선포를 듣고, 보속을 받아 행합니다. 보속을 주는 것은 죄인이라고 깨달은 사람이 용서를 얻기 위해 난폭하게 과도한 보속을 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성사가 오늘도 존속하기에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죄를 용서해주지 않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고해를 듣는 신부의 임의에 맡겨진 용서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시대적 여건에서 발생한 개인고백 고해성사를 아직도 강요하는 데서 오는 부작용입니다. 한 시대에 필요하였던 법을 다른 시대에도 강요하면 엉뚱한 해석이 나타납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하는 고해성사가 하느님이 용서하시지 않기에 궁여지책으로 교회가 마련한 고해성사인 양 오늘은 엉뚱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죄인을 버린다고 주장하는 유대교 앞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의 자비를 은폐한다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고해소에 앉은 신부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비하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은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후 100 년경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세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믿고 그분의 삶을 실천하는 당시의 신앙인들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였어도,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그분에 대해 가르치고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지키신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자녀 되어 살고 싶은 사람은 그분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는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통달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에 대해 배워서 하느님의 일인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이신 성령을 받아 이웃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마르 10,43)는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공동체입니다. 자비와 용서와 사랑은 인류 역사 안에 항상 있었습니다.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 하느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 그 일을 실천하다가 당신 아버지에게로 가셨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오늘 복음은 다채로운 주제들이 한데 어울려 있습니다. 평화·파견·성령·용서 그리고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다.”(20,19) 제자들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도 마음도 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빛이신 주님께서는 오시어 그들 어둠의 한가운데 서십니다. 부활하신 그분에게는 아무런 장벽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란 첫 메시지를 두 번이나 선사하십니다. 제자들은 몹시 기뻐합니다. 평화와 기쁨은 부활하신 주님이 현존하시는 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셨던 사명을 전수하십니다. 사명의 내용은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한 회개와 세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님이 무고하게 처형당하신 비통한 사실과 3년 동안 우쭐대며 제자로서 따라다녔던 자신들이 스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수치, 자신들에게도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미래에 대한 어둠 등 감정의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이 사명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지도 못하고 또 용서받지도 못한다고 느끼는 한 평화를 얻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사실 가장 분노해야 하고 용서하기 힘든 상황에 있었던 분은 예수님이셨지요. 그러나 그분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와 비겁한 행동을 용서한다는 직접적인 말씀을 하시지 않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하기에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성령을 받아라.”고 하십니다. 모든 만물과 인간을 지어내신 하느님 창조의 숨결이 새롭게 주어집니다. 이 힘으로 제자들은 재창조되고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체험한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온 세상에 선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0,25ㄴ) 토마스에게 예수님 부활의 증거는 직접 보는 것, 손을 넣어보는 확인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러 가시려 할 때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11,16ㄴ)라고 한 사람입니다. 죽음은 알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는 사실은 알아듣지 못한 사람으로서, 또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싶은 갈망을 가진 우리의 대변인입니다. 여드레 뒤, 주간 첫날에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십니다. 첫날은 부활하신 주님의 날로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그분의 현존은 이제 우리와 함께 어디서나 계시기에 우리의 날들은 늘 주간 첫날로서 그분 현존을 보는 나날이어야 합니다. 토마스가 예수님을 뵙게 된 것은 다른 동료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는 다른 사도들이 주님을 뵈었다고 하자 그 말을 믿지 못하면서도 공동체와 함께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사랑은 있지만 둔감한 사람에게도, 토마스처럼 실질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토마스에게도 ‘평화’를 주십니다. 상처 자국을 확인하게 해주십니다. 그는 공동체의 체험을 믿지 않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습니다. 한편으로 이 의심은 자신도 직접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의 표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의심을 지닌 한 평화는 없고 사명 수행 또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갈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 맞는 방법과 때에 당신의 현존을 깨닫게 해주시고 당신 사명을 전할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복음은 이 신앙고백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분이 바로 하느님과 같은 분임을 토마스의 입을 통해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토마스에게, 아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토마스의 경험을 통해 이제 우리의 신앙은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했습니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주님을 인정한 증거는 못자국, 곧 상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돌려 사랑받지 못한 그분의 상처를 이웃 안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사랑의 상처도 보아야 합니다. 그분은 당신 상처로 우리 상처를 낫게 해주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상처 또한 다른 이의 상처를 낫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그네로, 헐벗은 사람으로, 목마른 사람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우리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상처를 보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용서로써, 때로는 나의 것을 나눔으로써 새롭게 되고 삶의 힘을 찾게 하는 것이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사명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강선남-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모르는 제자들은 두려움과 실의에 빠져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습니다(20,19). 요한은 그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하며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력들이 언제 어느 때고 자신들도 잡아갈 수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따라왔던 스승의 맥없는 죽음에 대한 절망감과 그분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에 더하여 자신들의 미래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자괴감과 울분이 만들어 낸 두려움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로와 평화를 얻기에 동료들의 체온으로는 부족합니다. 마음이 하나로 모이기에는 너무 지쳐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고 닫혀 있는 이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닫혀 있는 그들의 집과 마음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스승이 돌아오시리라는 기대는 손톱만큼도 하지 못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 쪽에서가 아니라 온전히 예수님 당신의 뜻에 의해 그 집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잃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고통을 통해 얻으신 평화이며, 죽음을 통해 이루어 낸 평화입니다. 당신의 희생으로부터 온 평화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로마 4,25)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하실 때, 거기에는 당신이 고통을 통해 성취한 화해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자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합니다(요한 20,20). 당신 죽음의 승리 표시인 상흔을 보여주자 비로소 제자들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16,20) 그들은 이제 열린 눈으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다시 평화를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시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다시 살게 하신 것처럼, 당신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권한과 사명을 부여하시어 사람들한테 파견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와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22절) 우리를 살게 하시는 주님의 숨결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제자들은 회의와 갈등과 두려움을 떨쳐냅니다. 이제 닫아건 문을 활짝 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할 힘을 얻고, 스승이 걸어가신 것처럼 벗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버릴 준비를 합니다. 이들 제자들의 파견은 죄의 용서로 이어집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을 것이다.”(요한 20,23) ‘죄의 용서’는 삶을 정화시키고 새로운 출발을 가져오며, ‘나’를 해방시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토마스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24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하자,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절) 하고 말합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을 여러 가지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 루카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타난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루카 24,11) 아레오파고에서 한 바오로의 연설에서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청중의 비판의 초점이 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사도 17,32)
요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 토마스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곧 다른 제자들의 이야기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토마스에게는 자신의 경험에 의한 증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일주일 뒤에 다시 모여 있을 때 토마스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뒤 처음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와 같은 일이 이번에도 일어납니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예수님은 그 곳으로 들어오셔서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요한 20,26). 그리고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예수님은 토마스가 원하는 경험에 의한 증거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시면서도, 의심을 버리고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은 만지거나 손을 넣어보는 일을 포기하게 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토마스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믿음의 고백으로 표현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그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최고의 호칭인 ‘하느님 그리고 주님’을 사용하여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주님, 경험에 의한 증거를 필요로 하는 저희 모두에게 오늘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간구합니다.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 믿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 당신께서 주신 평화를 전하고 싶습니다.
새벽을 열며
얼마 전 신부님들이 제 방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청소 좀 하고 살아라. 이게 뭐니?”
하긴 제가 봐도 조금 지저분하기는 합니다. 책상 위에는 저도 모르게 먼지가 소복하게 쌓였고, 책장이 없다보니 한쪽 벽 구석에 대충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면서 누가 깨끗하다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저분하다고 뭐라고 하시는 그 신부님들이 저보다도 더 많이 어지럽혀놓고 또한 정리도 안하시고 그냥 가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래도 네 방에 오면 그냥 편해. 아무데다 뭘 버려도 티가 나지 않아서 그런가?”
워낙 지저분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방의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려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으니 조금 부끄럽기는 하더군요. 그래서 큰 맘 먹고 방 정리를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정리를 해도 일주일을 채 못 넘기고 또 지저분해지겠지만 저는 청소도구를 잡고서 방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방이 이렇게 지저분하고 정신없어 보이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 거야.’ 라는 생각 때문에 구석에 쌓아두고 있는 많은 잡동사니들. 그래서 방은 점점 더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도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정말로 깨끗한 마음,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나의 마음일까요? 혹시 지저분한 제 방처럼, 세상의 온갖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있어서 너무나도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죽음 이후 이렇게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락방 문을 닫아걸고는 두려워 떨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이 그렇게 정신없고 지저분한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깨끗하게 잘 정리된 마음을 원하시지요. 그래서 나타나시자마자 첫 마디가 이렇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방을 깨끗이 정리하기 위해서는 내 방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들을 치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마음 안에 필요 없는 것들이 치워져야만 했습니다. 즉, 두려움과 의심. 이것들이 있는 한 제자들은 더욱 더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과 의심을 없앨 수 있는 평화를 가장 먼저 주셨던 것이지요.
바로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들고서 우리들 마음의 청소를 위해서 오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선택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평화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께 대한 증거를 세상에 펼쳤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떤가요? 주님께서 내게 필요한 것을 들고서 옆에 서 계신데 그것은 전혀 잡으려고 하지 않고, 내 마음을 더욱 더 어수선하게 만들 엉뚱한 것만을 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의 몫을 이미 다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선택만 남아있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통해서 누구보다도 행복한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방 청소를 깨끗이 해봅시다.
-빠다킹신부-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以 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김영수 신부-
보아야만 믿겠다는 토마스의 말처럼 사람은 백번 듣는 것보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인정하고 믿게 됩니다. 하느님을 뵈옵는다는 것은 성서에 나타나 있는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욥기 19, 27)
인생의 의문과 고통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뵙고자 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맞대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고, 삶 속에 드리워진 어둠과 혼돈을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참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뵙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창조물을 통해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업적을 보아야 합니다. 보는 것이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준다 하더라도, 믿음 그 자체가 보는 것을 통해 깨닫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을 뵙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로 마음을 향해야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보고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 것이고, 바로 그런 하느님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의 눈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육안(肉眼)이고, 그것보다 발전된 것이 뇌안(腦眼)이며, 그것보다 깊은 것은 심안(心眼)이고, 가장 심오한 것은 영안(靈眼)입니다.
우리가 지닌 네 개의 눈 중에서 어떤 눈으로 사물과 현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볼 수 있는 내용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육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욕망의 수단으로 바라볼 것이고, 뇌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생각하고 따지는데 필요한 내용을 생각하게 될 것이며. 심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바라보는 현실의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참된 진리를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진리를 보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눈은 모든 사물 안에 담긴 본질인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 뵙기를 청하는 이들에게 “와서 보아라”(요한 1, 39)고 하신 것은 보아야만 믿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며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그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신앙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 현존하셨던 그 분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토마스와 똑 같은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짊어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수 많은 사랑의 기적들을 통해서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토마스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은 그의 불신을 드러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자체로는 토마스를 탓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일입니다.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보고서도 믿지 않는 것보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몇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그 중 하나는 ‘무엇이든지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 못해서 항상 그보다 덜 중요한 것만을 찾아내기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고 그 앞에 덜 중요한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뵙는 일은 감정이나 이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있으며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하는 일, 사랑을 위하여 견디어 내는 십자가만이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양승국 신부-
이제 막 흙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 같은 '초보 수사님'들, 저와는 달리 피부가 '탱탱한' 형제들, 오직 희망으로 가득 찬 수련자 형제들과 한적한 바닷가로 연피정을 다녀왔습니다.
바닷가 날씨는 때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도 잔잔하던 바다, 그래서 호수 같은 바다였는데, 순식간에 세찬 바람과 함께 높은 파도가 몰려옵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인자한 노인 같던 바다는 어느새 화가 잔뜩 난 난폭한 젊은이로 바뀌고 맙니다.
그런 성난 바다, 갯바위 위에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뺨에 와 닿은 바람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몸에 느껴지는 바람의 강도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먹장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속히 구름이 걷히면서 하늘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특별한 감정이 밀물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내 인생에 드리웠던 먹구름들도 언젠가 활짝 걷힐 날이 있을 거야, 하느님 은총으로 내 신앙여정에도 저리 고운 옥색하늘이 반드시 열릴 거야' 하는 충만한 희망이 솟구쳐 올라오더군요. 잠시 동안이었지만 너무나 은혜로운 체험이었습니다. 피정의 결실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도자로 살면서도 삶이 왜 이다지도 허황된가, 왜 이다지도 인생이 허전한가, 생각해봤더니 문제 원인은 한 가지더군요. 하느님 체험의 결핍. 그분과 1대1의 긴밀하고도 인격적 만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보니 그리도 삶이 '팍팍'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그분은 내 인생의 둘도 없는 동반자이기에, 내 앞길을 환히 밝혀주는 등대이기에,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죽고 못 사는' 연인이기에, 그분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행복에 겨운 날이 되길 다시 한번 꿈꿔봅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 신앙이 이토록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희망하길 바랍니다. 언젠가 반드시 어두웠던 하늘이 걷히고 활짝 갠 날이 다가오리라 확신합니다.
신앙 부족으로 방황을 거듭하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한명이며 오랜 기간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토마스 사도 역시 예수님 부활 사건을 의혹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예수님 발현을 직접 목격한 다른 사도들 증언에도 그는 끝까지 의심합니다.
"나는 그분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 사도는 우리 내면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의 하소연은 우리들의 부족한 신앙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그는 짧은 과정을 통해 불신과 방황의 신앙여정을 끝맺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을 향해 던진 이 한마디 말은 간단한 말처럼 보이지만 오랜 방황 끝에 이뤄진 장엄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 발현을 직접 목격한 그는 이제 예수님을 마치 극진히 사랑하는 연인처럼 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에게 있어서 한 인격체, 주인이자 연인, 삶의 의미요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지난 판공성사 때, 고해소 앞에 줄지어 선 수많은 형제자매님들 얼굴에서 다시 한번 따뜻한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갈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많은 신자 분들의 내적 방황도 손에 잡힐 듯 다가와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제대로 된 하느님을 체험을 한번 해보고 싶지만, 그게 정말 여의치 않습니다. 마음은 하느님에 대한 굶주림으로, 하느님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갈증을 채울 길 없어 아쉬워하십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정체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신앙생활은 대체로 순식간에 위기를 체험하더군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체험하는 나날, 그래서 그분과 은혜로운 인격적 만남이 이뤄지도록 노력하는 나날 되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해 지속적으로 '저의 주님'이라고 외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친밀한 인격적 사랑을 나누고 있는 신앙인들 얼굴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거듭되는 시련에서도 그들 모습은 의연합니다. 극심한 고통에서도 담담합니다. 참된 영적 예배, 제대로 된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그들의 순수한 봉사활동은 빛을 발합니다. 주님과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과 승리를 믿습니다” -허성신부-
안식일 다음날 저녁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시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그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토마에게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자 토마는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는데 문이 잠겨 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신 다음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고 말씀하시니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평화란? 인간은 평화를 진심으로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애타게 바라는 평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며, 또한 이 평화를 얻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 언제나 하느님의 의향과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모름지기 진정한 평화의 탐구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1.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 성서의 역사는 그 서막부터 기드온이 「평화의 야훼께」 제단을 바치는 것을 보여준다(판관 6, 24). 하늘의 지배권을 행사하시는 하느님(욥 25, 2)께서는 「평화를 창조」(이사 45, 7)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그분에게 매달려 평화라는 선물을 내려주실 것을 기대한다. 『당신의 종을 평안하게 돌보시는 주께서는 크게 드러나셔지이다』(시편 35, 27). 유배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나 야훼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바라』(예레 29, 11). 『보라! 나는 너에게 평화를 강물처럼, 이교 백성들의 영화를 넘쳐 흐르는 개울처럼 들이 밀겠노라』(이사 66, 12). 『의인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나니…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 같아도… 그들은 평화속에 있도다』(지혜 3, 1~3). 2. 그리스도의 평화 예언자들과 현자들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화된다. 온갖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죄악이 모든 사람에게 소멸되지 않는한, 그리고 마지막 날이 되어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 한, 평화는 오직 미래의 선으로서만 남게 된다. 루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평화를 가져다 주는 왕을 묘사한다. 그 왕이 탄생할 때 천사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음을 선포한다(루가 2, 14).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최후의 승리를 따르는 부활의 평화다(루가 24, 26). 『나는 당신들에게 평화를 두고 간다. 내가 평화를 당신들에게 주는 것이다』(요한 14, 27). 신앙이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서 계시를 통해서 알려주신 모든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될 사람들에게 내려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은총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의 내용들을 조목조목 다 믿는다는 신앙고백 후에 비로소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신앙은 지식이 아니다. 그렇기에 신학자들 중에도 냉담자가 있는가 하면 사도신경 하나도 제대로 못외우는 이들중에도 순교자가 있다. 신앙은 머리의 대상이 아니라 가슴이 대상이기 때문이다. 힘들고 희망조차 보이지 않을 때라도 『하느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드러난 당신의 사랑과 승리를 나는 믿습니다. 오늘도 저에게 십자가를 지워주시겠지만 그 십자가를 지고 갈 힘도 함께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부활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이다.
평생의 과제, 하느님 체험
-양승국 신부-
수도자로 살아가면서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수도자라면 당연히 신분에 걸맞게 언제나 하느님을 눈 앞에 뵙는 듯이 살아가야 하는데,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조심조심 살아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 앉아서 곰곰이 그 원인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너무도 당연하더군요. '하느님 체험'의 부족이었습니다. 소홀했던 영적 생활의 결과였습니다. 사는 데 바빴던 나머지 하느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너무 많이 줄여버린 결과였습니다.
가끔씩 만나는 신자들이 자신들이 경험했던 하느님 체험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할 때마다 저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하다는 진리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수도자에 대한 '특별우대'가 없습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얻게 되는 프리미엄도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육적 삶만 고집한다면, 영성생활에 우선권을 두지 않는다면 누구나 하느님 현존을 의심하는 비신자나 냉담자로 전락하게 됨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역시 3년여 세월을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사람이었지만 정면으로 예수님 부활을 거부합니다.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분의 생생한 가르침을 귀담아 들어왔던 제자였지만 그분의 현존을 의심합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토마스는 예수님 발현 현장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난 후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거의 제 정신들이 아니었습니다. 뒤늦게 만난 토마스를 향해 제자들은 감격에 찬 어조로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토마스는 그들이 헛것을 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이것들이 다들 짜고 날 놀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어이! 자네들, 지금 날 놀려먹으려고 작정들 했지? 그게 말이 되나?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죽어도 난 못 믿겠네! 그게 사실이라면 내 손에 장이라도 지지겠네!"
토마스는 예수님 부활을 극구 부인합니다. 목숨 걸고 예수님 부활을 불신하는 토마스 사도 앞에 보란 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토마스의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죽어도 못 믿겠다'는 의혹은 어쩌면 바로 오늘 우리의 의혹입니다. 토마스의 불신은 바로 오늘 우리의 부족한 신앙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 신앙인들에게 있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현존 체험은 거저 주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을 위한 속성 과정은 따로 없습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을 위한 족집게 과외 역시 없습니다. 오직 간절한 기도,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 수용, 하느님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순간을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심만이 하느님 현존 체험의 열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함 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인생 여정에 함께하시고 우리 인간 역사에 활기차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개인의 행복과 불행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심을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우리 눈을 밝혀주시길 기원합니다. 누가 우리를 이 죽음의 계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구원의 주님이신지를 알게 하는 혜안을 청합니다. 누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부활의 주님이신지를 알게 하는 지혜를 청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 인간적 눈을 감고 영적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괴롭다, 괴롭다' 하며 보낸 지난 세월은 지옥 같은 고통의 세월이 아니라 주님께서 늘 뒤에서 지켜주셨던 은총의 세월이었음을 인정할 줄 아는 영적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루하루 모든 순간들은 그저 허송세월하면서 흘려보내야 할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금쪽 같이 소중한 순간, 부활의 기쁨을 힘차게 노래해야 하는 구원의 순간임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가장 가까이 지내기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는 이웃들은 나를 성장케 하고 죽음을 넘어 부활의 기쁨으로 인도하는 가장 감사해야 할 존재임을 알게 하여주십시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김웅태신부-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고 말씀하셨다.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0, 26-29).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 외침은 처음에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토마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을 목격하고 말한 신앙고백입니다.
복음에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평화와 위로와 굳센 신앙을 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참조 요한 20, 24-29) 예수님을 굳게 믿고 따라다녔던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어처구니없게도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되자,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도 흔들리고 또한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굳게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문이 잠겨 있는데도 들어오셔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 19)하고 인사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진정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인사를 받고, 이제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지 않고 오직 영광의 주님만을 믿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요한 20, 25)는 데에서, 제자들은 힘을 얻고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 25)하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도 불구하고 도마 사도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 25)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서는 예수 부활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도마 사도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가끔 도마 사도의 불신앙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사실 도마 사도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확신하고 우리 크리스찬 신앙의 핵심을 고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도마 사도의 신앙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도마 사도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던 베타니아로 가자고 했을 때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요한 11, 16)고 까지 말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망서리고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선생님과 함께 죽으려고 생각할 만큼 예수를 사랑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을 때 도마 사도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도마 사도가 자리에 없던 차에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다는 말을 했을 때 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뒤 다시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때엔 도마도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 사도의 마음을 아시고 그에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손으로 만져 확인한 후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외침으로서 그것은 대대로 유명한 신앙고백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인 도마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인도지방에 가서 열심히 전교했다고 합니다.
도마 사도에 대한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도마 행전"이라는 외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도마 사도의 성격과 태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온 세상 곳곳으로 나가 복음을 전파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전교지방을 정하려고 제비를 뽑아보니, 도마는 인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처음부터 인도에 가기를 거절합니다. 즉 자기는 긴 여행을 할만큼 굳세거나 강건하지도 못하고 또 히브리 사람으로서 어떻게 인도사람들 가운데 들어가서 설교를 할 수 있는가 하고 인도에 가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밤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도마야, 인도로 가서 거기에서 말씀을 전하라, 나의 은총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래도 완강히 거절하면서 "당신께서 보내주시는 곳이라면 어디에라도 보내주소서. 그러나 인도에만은 가지 않겠습니다."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아바네스(Abbanes)라고 하는 인도의 상인이 왕의 명령을 받고 예루살렘에 와서 숙련된 목수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목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아바네스에게 와서 "나에게는 목수인 노예가 있는데 그를 팔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윽고 계약이 성립되고 도마는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계약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목수 요셉의 아들인 나 예수는 이름을 도마라고 하는 나의 노예를 인도의 군다포로스 왕의 상인인 아바네스에게 팔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함". 이 증서를 작성한 후에 예수님은 도마를 찾아서 아바네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바네스가 도마에게 "이 분이 너의 주인인가"하고 묻자 도마는 "예, 그렇습니다." 아바네스는 "내가 이분으로부터 너를 샀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도마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도마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를 드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이신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에든지 가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그후 도마는 인도에 가서 군다포러스 왕의 궁전을 세우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여 인도에 그리스도교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상이 도마 행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도마사도의 성격과 신앙의 태도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마 사도의 성격은 확신하는데 더디고 순종하는데도 더딥니다. 그러나 한번 확신하고 나면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용기 있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도마 사도와 같은 신앙은 말뿐만의 신앙고백보다도 훨씬 더 믿음직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마 사도가 고백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 28)이란 바로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로마서에서 이렇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예수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로마 10, 9). 그리고 예수가 주님이심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과 지배권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도마 사도의 신앙고백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여러 모로 신앙에 대해 생각해 주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어떻게 갖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분을 진정으로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지? 바로 '주님'이란 히브리말로 '아도나이'(나의 주님)라고 하는데 종이 주인 앞에 나아가 부르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는 나의 주인으로서 나의 생사권을 쥐고 계시고 나를 그분 마음대로 그분 뜻대로 내 맡기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도마 사도는 처음엔 인도로 가기 싫어했지만 주인인 예수님이 그를 종으로서 인도 상인에게 팔았을 때 주인인 예수님께 순종하고 인도로 갔듯이, 우리도 일상생활 중에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듯이, 하느님께 순종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고 하면서도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나 시련이 닥쳐올 때엔 하느님께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무당을 찾아가 굿을 하고 점을 보러 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것도 중요한 사건 때마다 그렇게 한다면, 즉 대학입시, 혼배, 궁합 등등... 그리고 우리는 이웃 사람이 교회에 나가니까 아무 뜻도 없이 덩달아서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가는 것은 아닌지요. 과연 우리는 도마 사도처럼 예수님께 대해서 자세히 알려고 노력했는지 우리 신자들 중에는 세례받고 얼마안가서 냉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냉담의 이유는 여러 가지로 많겠지만 그 중에서 하나는 영세 이후에 교리에 대해서 더 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저 미사참례만 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는 더 이상 기도도 안드리고 교회서적도 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출판되는 신심서적은 고사하고 정기간행물도 읽지 않고 가톨릭 신문조차 읽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세 받은 후에 신심단체나 교회활동도 안하고 신자로서의 도리도 안하면서 신앙이 굳세지 못하다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굳세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열심히 자신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마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확신하기까지엔 신앙의 시련을 겪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분이 부활하셨는가',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자'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는 없지만, 그분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아멘.
토마의 노래
-류해욱신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큰소리 쳤건만 막상 그분이 붙잡히는 모습 보고 줄행랑을 놓았던 자신이 미워 견딜 수 없었지.
어머니 마리아를 뵈올 면목도 없어 혼자 조용히 베다니아를 다녀왔다네. 마르타, 마리아 자매와 슬픔을 함께 나누었지.
돌아오니 동료들이 믿을 수 없는 말을 하였지. 주님을 뵈었다니, 정녕 믿을 수 없었다네. 은근히 바보가 되기를 바라며 강경하게 말했지.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못 박히실 때 튀던 핏방울, 창에 찔리실 때 흐르던 물과 피 그분의 죽음을 두 눈으로 본 나는 믿을 수가 없었지.
그분이 홀연 방 한 가운데 오셨네. “그대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 음성 들으며 나는 꿈을 꾸는 듯 했지.
“토마, 그대의 손으로 내 손을 만져 보시오. 그대의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시오.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시오.”
나는 부끄러움으로 그분 앞에 부복하여 고백했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질책이 아닌 다정한 음성으로 그분이 말씀하셨네. “그대는 나를 보고야 믿는가? 복되어라,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
이 달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요한 20, 19-29로 기도하면서 우리도 토마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기로 해요.
배경이 되는 장소는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이층 다락방입니다. 성전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잡히실 때 줄행랑을 친 이후에 이층 다락방에 함께 모여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 참으로 약한 존재이지요.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이 공포에 떨면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촉각을 곧추세우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이때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시지요. 문이 잠겨 있었지만 아무 거침없이 그 방에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인사하십니다. “그대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여러분들도 거기 제자들과 함께 있다고 상상하시면서 예수께서 들려주시는 ‘평화’라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는 모습을 상상 안에서 그려 보면서 당신이 바로 못 박히시고 창으로 찔렸던 예수시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그 자상하심을 느껴보십시오. 주님을 다시 뵌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여러분도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이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도록 청하십시오.
그런데 토마는 처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지요. 나중에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는 말을 듣고는 믿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말하는 토마의 얼굴 표정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에게 어떤 느낌이 오는지를 솔직하게 바라보십시오.
어쩌면 토마의 모습이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눈으로 확인하거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결코 믿을 수 없다는 현대의 우리들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토마의 모습을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느껴보십시오. 우리는 성서의 다른 대목을 통해 토마가 용기와 열정을 지닌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까운 친구였던 라자로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자, 그에게로 갑시다”라고 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이 머뭇거렸지만 토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지녔던 토마가 처음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은 이유를 잠시 헤아려 보십시오. 그는 막상 정말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처형을 당하시자 슬픔으로 미어지는 가슴을 추수를 수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큰소리쳤지만 그도 다른 제자들처럼 줄행랑을 놓았지요. 다른 제자들에게 면목도 없고 하여 슬픔을 혼자 감내하리라고 생각하며 혼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더 이상 두렵고 외로워 혼자 있을 수 없었기에 제자들에게 돌아왔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제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대가 말한 대로 해보시오. 그리고 믿으시오.” 주님을 뵌 토마는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 감동 안에 머물면서 토마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느껴지는 느낌들을 바라보십시오.
토마가 회의론자였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적어도 정직한 사람이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란 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지니게 된 믿음을 예외로 한다면, 아마도 그런 믿음은 거짓 포장된 믿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는 회의하면서 받아들이고 믿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믿음을 지니게 되고 그 믿음이 깊어가는 것이지요. 어쩌면 정직하게 의심하는 과정을 거쳐 참으로 믿게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거치지 않은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할 수 있음을 생각하며 토마가 지녔던 정직함을 지닐 수 있도록 청하십시오.
또한 우리가 토마에게 감탄하게 되는 것은 자기가 눈으로 보고 믿게 된 다음에 철저하게 투신하는 자세입니다. 그는 주님을 뵙자 그분께 다가가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실로 온 몸과 마음으로 주님, 당신은 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저의 모든 것이라는 전적인 신뢰로 드린 투신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느껴지는 감동 안에 오래 머물러 보십시오. 여러분들도 토마처럼 그렇게 투신하고자 하는 원의가 생겨나면 그 원의를 고백하십시오.
우리도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숱한 의심과 회의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은총을 체험할 때 우리도 그분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 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런 은총을 주시도록 청하면서 기도를 마치십시오
토마스는 ’미꾸라지’인가?
-박상대신부-
요한복음은 예수부활 사건과 부활예수 발현사화를 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20장과 21장에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21장이 초대교회 안에서 제고되는 베드로의 역할을 교회론적이고 사목적인 측면에서 강조하기 위하여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학자들의 통설을 따르면, 오늘 복음(20,19-31)이 요한복음의 종결부분이다. 20장은 다섯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단락(1-10절): 빈무덤 사화를 통한 예수부활사건. ②단락(11-18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예수의 발현. ③단락(19-23절): 부활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첫 번째 발현. ④단락(24-29절): 부활예수의 첫 발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제자 토마스의 불신앙과 이에 대한 두 번째 발현을 통한 부활확인. ⑤단락(30-31절): 맺음말. 오늘 복음은 ③,④,⑤단락을 한데 묶어 놓았다. 각 단락이 보도하는 내용의 형식을 분석하여 본다면 ①,②,③.④단락은 직접화법을 사용한 상황보도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⑤단락은 단순설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승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①과 ②단락이 같은 전승에 속하고, ③과 ④단락은 앞선 부분(빈무덤 사화, 부활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독자적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에 요한복음의 저자가 의도하는 복음저술의 결론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著者)는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30절)이 복음서 저술의 목적임을 밝히면서, 이 목적을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이 신앙에로 전환되는 사건에 연결시키고 있다. 복음서 저자는 결국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 앞에 토로(吐露)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라는 신앙고백이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도 복음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는 모든 참 행복자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의 생각과 말은 2000년 세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되었다. 토마스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기 전에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믿겠다고 생떼를 쓰고 있다. 이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이 가지는 불신(不信)의 한 유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신성? 성서가 보도하는 기적들? 동정녀의 잉태? 죽음후의 영생? 육신의 부활? 등등에 대하여 믿음보다는 의심을 가진 신자가 적지 않다는 말이다. 개개의 신자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믿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에 대하여는 말하기를 꺼려하고 심지어는 거절하고 불신한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믿음의 조목(條目)이 문제시된 것이 아니라 믿음 전체가 거꾸로 선 것이다. 즉, 예수 전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예수가 살아 있느냐, 죽고 없느냐?" 에 토마스 자신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말이다.
우리 눈에 토마스는 우선 제자들 가운데 한 마리의 ’미꾸라지’로 보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제자단에 미꾸라지는 더 많다. 다른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확인함’ 없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졌는가?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말씀이다. 예수부활에 관한 신약성서의 증언들은 한결같이 부활에 대한 의심을 믿음의 동기로 제시하고 있다. 불신과 포기와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은 거의 모든 경우,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만남 없이는 3년 동안이나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들까지도 믿는데 어려움을 가진다. 토마스 사도의 생각이 옳았다. 과연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의 부활에 달려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모두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 바울로 사도의 신앙고백이지 않는가?(1고린 15,17)
오늘 복음이 전해주듯이 부활한 자는 불신자의 의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토마스 사도는 ’자신의 눈으로 예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자기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자기의 손을 예수의 옆구리에 넣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토마스는 부활예수를 자신의 손으로 확인하기 전에 ’만남’ 그 자체로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고백한다. 사실(事實)을 보는 것이 믿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직접 보았지만 모두 그분을 믿지는 않았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마치 수학공식이나 과학적 공리같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확실한 증거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공식이나 공리 따위에는 인간의 자유가 차지할 공간은 없다. 우리의 믿음은 오히려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유와 신뢰와 희망으로 살았던 신앙의 증인들 위에 서있다. 그 증인들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마태 28,20)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이다. 한때 불신의 ’미꾸라지’였던 토마스나 다른 사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듯이, 우리도 믿음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류를 위해 바쳐진 몸으로 계신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과 성사(聖事)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신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