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여호와닛시♥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1. 말은바람
    2. 도우미28
    3. 스마일천사
    4. 사랑함으로
    5. 밝음이
    1. 하천사
    2. 현영길작가
    3. 방화순
    4. moon
    5. 오갑수
  • 가입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이천형
    2. 단동
    3. wingwing
    4. 사랑과평화
    5. 화이팅합시다
    1. emali09
    2. 청소부
    3. 멋장이
    4. 나나야88
    5. 암미al610220
 
카페 게시글
새벽설교 스크랩 새벽설교 종합편2
주님의숲 추천 0 조회 179 16.11.22 18: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하나님의 말씀, 성경  요한복음 20장 30 ~ 31절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벧후 1:20~21).

성경이란 어떤 책인가? 베드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으로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자체 이시고(요1:1), 그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요1:3),

그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히6:3).


말씀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구속사역을 말씀으로 언약하심으로서 인간에게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크게 보아서 구약은 율법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약은 복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성경을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의 중심체로 말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신 “십자가의 은혜를 복음”이라고 통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으로서의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우고, 바로 알고, 배로 믿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Ⅰ. 만물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창세기 35장 7절에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고 하셨습니다.

“나타나셨다”란 말이 히브리어로 “깔라(הꗚꔷ)”인데 이 말은 “벗어던지다, 나타내 보이다”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 광야에서 잠자던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타나시고” -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나타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숨어 계시던 하나님이 인간 앞에 나타내시되 말씀으로, 당신의 뜻을 알리시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열계, “啓” 보일시, “示” 열어 보이는 것이 계시입니다.

계시는 숨어계셔서 보이지 아니하시던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통하여,

혹은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뜻과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고 했습니다(롬1:20).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창조하신 창조물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모든 예술작품에 작가의 의지와 정신이 드러나 있듯이, 하나님의 창조 작품 가운데도,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 만물과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시는 계시를 자연계시, 혹은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연 만물은 간접적으로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인간의 역사 또한 하나님의 활동의 흔적이요, 하나님의 계시의 한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역사의 방향과 궁극적인 목적도 하나님의 의의 실현에 있는 것입니다.


Ⅱ.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반 계시로서 자연과 역사와 양심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은 이러한 자연 계시로서는 하나님을 알 수 가

없습니다(롬1:21).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몇몇 사람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뜻을 직접 말씀으로

전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은 사람들은, 그 자신이 이 말씀을 순종하거나, 거역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그 받은 말씀을 영감에 의하여 책에 기록하기도 하고, 입으로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일반게시에 대칭하여 특별계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특별계시인 성경은 두 가지 양태로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1. 기적입니다.

기적은 자연법칙을 강화하거나 증폭시키는 것으로서, 노아의 홍수, 출애굽시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그리고 여리고 성의 함락과 같은 것들입니다.

또한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있습니다.

홍해의 물이 갈라져 쌓이는 것,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아론의 싹난지팡이,

오병이어의 사건,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베드로, 물고기 뱃속의 은화,

병든 자의 치유, 죽은 자의 소생 등이 초자연 적인기적입니다.


2.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주신 특별계시의 대표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입니다.

이는 인간의 종교적, 도덕적 계율로서 인간의 삶을 통하여 준행해야할 법칙들입니다.

신약에서는 천사를 통하여(마1:20), 선지자를 통하여(벧전1:1), 믿음을 통하여(롬1:17),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엡1:17)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B.C1500년경 모세를 통하여 기록된 이래 A.D96년경 마지막 요한 사도를 통하여 기록한 1600여년의 기간동안, 구약 31명, 신약 9명, 총 40여명의 기자가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이 성경을 기록 했더라도, 성경의 중심주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였고, 성경의 기록목적은 인간구원이었습니다.

이는 곧,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같이 성경은 모든 시대 모든 죄인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장입니다.


Ⅲ.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입니다.

본문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개념은 어떤 것인가?

1. 인생의 모든 위험과 파멸에서 구원받는 것을 뜻합니다.

구약 성경은 메시야로 말미암은 “세상 심판으로부터 구원”이라고 했습니다(요엘2:32)

신약 성경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혜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마19:25, 요3:16), 엡2:8) 로

마서 5장 9절과 야고보서 5장 20절엔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죄악으로부터 보호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2. 성경이 말하는 구체적인 구원의 방법은 무엇인가?

성경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우쳐줍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하여 죄 된 자신의 실존을 깨닫게 되고, 선과 의와 진리에 대하여 전혀 무능한 존재이며, 사망과 심판과 절망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해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화해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성경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배우는 것은 우리들의 구원을 성취하는 가장

올바른 길입니다.

















여리고 성의 메시지  여호수아 6장 15 ~ 21절



노아의 홍수심판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이는 하늘까지 닿는 성을 쌓아, 인간 스스로 이름을 내고, 자신의 힘으로 생존과

단합을 유지하고자 하였던 인간의 교만과 반역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의 교만을 낮추시고, 인간들을 흩으시기 위해서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바벨탑을 쌓는 일을 중단 시키셨습니다(창11:9).

이 사건은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간의 교만을 낮추시는 하나님의 개입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인간의 역사에는 쌓고 무너뜨리는 일들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산에다 아파트를 짓고, 아파트가 무너지고, 한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가 무너지고, 뉴욕의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먼지처럼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무너지고, 이태리의 파시즘이 무너지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국의 청조가 무너지고, 이씨 조선 왕조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근세사에서 지구가 기우뚱하는 큰 무너짐을 보았습니다.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입니다.

동, 서 양 진영으로 갈라져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며 공존해 오던 한편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힘의 균형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세상에는 힘이 모든 것의 선이 되는 힘의 전횡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성경에서 또 하나의 붕괴를 봅니다.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20절) - 난공불락의 철옹성! 여리고 성의 무너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하고 있는가?

이 시간에 여리고 성의 메시지를 듣길 원합니다.


Ⅰ. 강하고 교만한 것은 무너진다는 메시지입니다.

본문 6장 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고 하셨습니다.

여리고는 요단 대평원의 중요 성읍으로 B.C 1800년경에 당시에 애굽을 침략했던 2500~3000명의 힉소스 족속들이 견고한 성곽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1929년 고고학자 가르스탕이 여리고 성의 발굴 작업에 착수하고 7년에 걸친 탐사연구 끝에 발표한 바에 의하면 B.C 1400~1338년경에 지진으로 인한 큰 불로

여리고 성은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여리고 성은 가파른 바위위에 2중의 성곽을 쌓았는데 외벽의 높이는 3.5M 정도이고, 내벽의 폭이 5M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중석기 시대에 이만한 규모의 성곽을 쌓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또한 여리고성에는 철병거가 있었고, 철로 만든 칼과 창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에 들어올 때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이스라엘의 통과를 거부했습니다. 이는 강자의 오만입니다.

맨손 들고 떼 지어 몰려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사람들에 있어서는

싸움의 상대가 되지 않는,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상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 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했습니다(시127:1).

세상에는 영원한 승자도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는 것입니다.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도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전9:11).

높은 자는 낮아지고 강한 것은 부러집니다.

“교만한자는 하나님께서 나추신다”고 했습니다(삼하22:28).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대하20:15).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린지라” - 여리고 백성들은 성을 의지하고, 철병거를 의지하고, 철병기를 의지했지만, 여리고 성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인간이 의지하는 세상의 모든 것 - 그것이 물질이었던지, 건강이었던지, 명예이었던지, 힘이었던지, 능력이었던지, 그것들은 모두 무너져 내릴 사상누각인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 영원한 도성이 있겠습니까?(히13:14)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Ⅱ. 세상의 모든 난관은 신앙 앞에서 무녀진다는 메시지입니다.

본문 15절에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서 여전한 방법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일곱 번 돌기는 그 날 뿐이더라”고 했습니다.


“여전한 방법”이란 무엇인가? 기상천외한 방법입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백성들은 외치지 않고, 음성을 들래지 않고, 말도하지 아니하며, 조용히 따르는 것입니다(수6:10).

40년 동안 광야를 통과하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첫발을 딛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난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거대한 성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철옹성은 그들이 극복할 수 없는 큰 난관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출애굽 초기에 이러한 난관을 만났다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망하고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광야에서 신앙의 훈련을 받은 출애굽 2세들은 그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난관 앞에서 좌절하기 보다는 법궤를 앞세우고 나팔을 불면서 행진했습니다. 백성들은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돌았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단조로운, 지루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어찌 할 말이 없겠습니까? 그들에게 어찌 더 좋다고 생각되는 지략과 모략이 없겠는가? 그런데 잠잠했습니다. 네 음성을 들래지 말라 했기 때문입니다. 매일 한 바퀴씩 돌았습니다.

일곱째 날은 일곱 번을 돌았습니다. 순종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30절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 앞에서 그들의 최대의 난관은 정복되었습니다.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 믿음 앞에서 철옹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Ⅲ. 하나님 앞에서 사탄의 권세는 반드시 무너진다는 메시지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3절에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앞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 그건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돌고 있는 모습 앞에서 십자가의 능욕을 지시고 영문 밖으로 나가시는 예수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관원과 제사장들로부터 조롱을 당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높은 성루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비웃는 여리고성의 백성들의 조롱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고전1:25).

예수님께서 약하셔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지만, 하나님 아들의 권능으로 부활하심으로 마귀 사탄의 권세를 타파하셨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고 최후의 승리를 선포하실 때 지진이 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렸던 골고다의 그 날처럼, 수십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렐루야 !를

왜칠 때 여리고의 철옹성이 무너지고, 바위산이 지진으로 갈라졌음을 고고학자 들은 증언합니다.

“성이 무너져 내린지라” - 하나님의 권능 앞에 사탄의 권세가 무너져 내린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땅을 받은 자   신명기 8장 1 ~ 10절


수 세기 동안 여름에 몰아치는 엄청난 비바람과 겨울의 맹렬한 북풍에도 꿋꿋하게 견뎌왔던 아름다운 느릅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고요한 아침에 갑자기 그 커다란 느릅나무의 큰 가지가 ‘우지직’ 하는 큰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전혀 바람이 없는 잔잔한 날이었고,

나무 가지는 매우 튼튼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습을 직접 본 정원사의 설명에 의하면 그렇게 튼튼하던 느릅나무

가지가 부러진 건 바로 고요함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고요한 지난밤 내내 오목하게 생긴 잎사귀 위에 많은 이슬이 내렸고,

그 이슬들이 가지에 상당한 압박을 가했기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가지가 부러져 버린 것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약간의 미풍이라도 불어 그 이슬방울들을 잎에서 떨어뜨렸더라면

가지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누구나 인생의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고난과 역경의 쓴 뿌리를 먹음으로 더욱더 아름답게 성숙해 감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요 섭리인 것 같습니다.


신명기는 모세오경(모세가 기록한 성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왕관 보석과도 같은 책입니다.

신명기의 내용은 구속받은 백성에게서 하나님이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일으켜 자기 백성을 고역의 땅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한 역할이요, 일이었습니다. 이제 120세가 된 모세는 약속의 땅

근처 비스가 산록에 서 있습니다.

모세는 신광야 가데스에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민20:8)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는 달리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0~11)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모세는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난 40년간 참으로 충성스럽게 인도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본향으로 데려가시기 전에 그가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실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아가는 방법을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번째 고별설교를 통하여 간절한 맘으로 약속의 땅을 받는 자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약속의 땅을 받은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에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하였습니다.


약속의 땅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야 할 땅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를 당신의 선민, 즉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신 후에 그에게 주신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그 땅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땅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모하고, 소망해야할 천국을 예표 하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은! 천국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가는 아브람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 아브람을 인도하여 들이실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순종하는 이들이 취하는 땅입니다.


본문에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고하였습니다.

여기에 “모든 명령(콜 함미추와, לכ הןצמה)”은 단지 오늘 이 시점에 주어진 명령만이 아니라 오늘까지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명령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하나의 명입니다.

그 명령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지켜 행하라”는 말의 원어 성경의 기록은 개역성경에 “지키라”와 “행하라”는 두개의 명령으로 번역하는 것과는 달리 “너는 행하기를 지키라”,

또는 “너는 행하기를 살피라”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지켜 행하라”는 말은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기의 삶을 끊임없이 돌아보아서 말씀에서 벗어난 모습이 없는지 ‘성찰’의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이는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행하기를 지키라는 한 가지의 명령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킬 여건이 될 때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지켜나갈 것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하였습니다.

여기에 ‘살고’라는 말은 “생명과 존재를 지켜가다”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목적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으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적 생명을 상실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육적 생명도 보장받지 못하게 됨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제 1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함으로 가나안땅, 즉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그 생명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번성하고’라는 말은 “많아지고”라는 뜻으로, 특히 수적인 증가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것으로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재 선언하는 것입니다(창12:2).


그리하면 산다고 합니다. 그리하면 번성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하면 열조에게 맹세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것을 취한다고 말씀합니다.

앞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모든 요구, 모든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면 ‘살리라’ 하였습니다. 번성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이 모든 것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행하기를 지켜야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맹목적으로 율법을 행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시고 율법 준수 명령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심으로써 진심으로 그 목적을 깨닫고 순종하도록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얻으리라’는 말은 “소유하다”는 뜻도 있지만 “남의 것을 빼앗다”는 뜻도 있음을 볼 때, 이는 이스라엘의 기업으로 얻을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기에 그곳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땅으로 빼앗아 얻어야 하는 기업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그 기업을 얻기 위해 땀과 피를 흘리는 수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보다 훨씬 강한 가나안 거주민들이 살고 있는 그 땅을 약속의 땅으로 받아 들어가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전략을 짜고 전쟁 기술을 익히며, 무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나님이시며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이 이 땅에서와 저 천국에서의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보전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번성케 하시는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Ⅱ.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본문 2절에『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는 말의 뜻은 너로 광야의

모든 길을 걷게 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신 것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가 광야에서 너를 이끄신 그 모든 길을 너는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요, 은혜 가운데

시작되고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약속의 땅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40년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인하여 가능한 여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진행된 광야 40년의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지

광야 길을 고통스럽게 걷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들을 훈련하고 양육하심에 더 큰 이유와 목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뿐만 아니라 그 걸음을 걷는 동안 하나님이 연단하시고 섭리하시며 은혜를 베푸신 모든 과정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의 여정의 목적과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의 40년 광야 길을 걷게 하신 이유가 그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시기 위함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더하기 위해 광야 40년의 여정을 준비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자녀로 양육하기 위해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진행하시는 시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는 낮추심,

겸손을 모법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아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리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하심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의복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를지 아니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가 끊임없이 계속됨으로 의복이 오래 되어 닳아 떨어질 때까지 입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늘 새 옷을 공급받는 은혜를 받아 누렸습니다.


또 늘 고된 광야의 길을 걸음에도 불구하고 발에 물집이 잡히지 않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험한 광야의 여정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건강을 지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무리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적당한 휴식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옛말에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이뿐 자식 매한대 더 댄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 5절에는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같은 사랑과 은혜를 더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고 하였습니다.

고난의 은혜, 여러 가지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는 은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는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유는 고난의 과정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있는 사람, 이 은혜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야 말로 약속의 땅을 받은

자녀로서 손색이 없는 성도입니다.


Ⅲ. 받은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본문 10절에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찬송하리라”는 말을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축복하라”는 말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마음껏 찬양함으로 그 영광을 선포하고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속의 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은혜는 아픔과 고통이 있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보호하심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의 자녀로 양육하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 은혜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맘으로

그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본문 말씀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신 8:6, 7).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며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땅은 !아름다운 땅입니다.

그 땅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 땅은 여호와가 주신 옥토입니다. 밀과 보리의 소산지입니다.

포도와 무화과의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입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받은 사람은 먹어 배부를 것이므로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입에서 감사와 찬양이 흘러 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열명의 문둥병자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예수님이 한 마을에 들어 가셨을 때에 열명의 문둥병자가 멀리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다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 가든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사례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며,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육체의 질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엎드려 사례하며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는 구원의 은혜까지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약속의 땅을 받은 복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받은 약속의 땅은, 이 땅에 사람들이 그 경계를 정하고 만들어 놓은 그런 땅이 아닙니다.

그 땅은 장차 우리가 갈 영원한 삶을 누릴 저 천국입니다.

그러나 저 천국에서 사는 삶을 지금 이곳에서도 누리며 살수 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약속의 땅의 삶을 위해 광야 40년의 여정을 통과한 것 같이 우리도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훈련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앞에 마음을 열고 그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삶이 약속의 땅을 받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나의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 같이 자고하지 아니하는 삶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만나를 먹으며, 옷이 해이지 아니하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게 하도록 도우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모든 은혜를 공급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고백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리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약속의 땅을 받은 자입니다.

이 삶이 나의 것이 되고, 하늘문 교회의 것이 되게 함으로 계속되는 하나님의 축복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로마서 8장 31 ~ 39절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죠는 “인간의 최대의 행복, 최대의 은사는, 오직 한 분이참된 하나님과 그 보내신바 그리스도를 아는 것 -, 이것이 영생이고 최대의 행복이고, 최대의 은사”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동안 성경어디에도 성도에게는 “고난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의로운 자의 밭에나, 불의한자의 밭에 함께 내리는 것 같이 성도에게도 때로는 고통이 있고, 실패가 있고, 아픔이 있고, 질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한 환경 때문에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18편 6, 7절의 말씀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시18:35~36).

그리스도인의 자유! 자유란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어떤 속박에서 자유 할 수 있는가?

이 시간 이 말씀을 붙들고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 성도는 패배로부터 자유합니다.

본문 31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이 일”이란 어떤 일인가?

먼저 우리는 철저히 정죄 받아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이었다는 시실입니다.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신 사실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성령에 의하여 거듭남을 받았고,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실입니다.

마침내 보증으로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내편이 되심으로 우리는 결코 패할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신가? 창조주 이십니다.

만물을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존 자, 스스로 계신 자, 여호와 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3:14).


그분은 세상 만물의 근원 자 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께 대적할 피조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무소부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소불능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내편이 되시고,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다면,

세상에 무엇이 두렵겠는가?


때로는 사탄의 세력이 강해보이고, 대단하게 보여도, 사탄은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의 능력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피조물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담대히 왜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어떠한 재난과, 어떠한 질병과, 어떠한 대적이 몰려온다 해도 결코 우리는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실패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합한 성도는 결코 실패할 수 없는 것입니다.


Ⅱ. 성도는 모든 궁핍으로부터 자유합니다.

본문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성부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도들을 영원한 신부로 삼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성도를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한 성도는, 신랑을 따라서 그의 집에서 살 것입니다. 말세의 성도는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교회와 좋은 목자를 만나는 것이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신부의 축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신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좋은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이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지 아니하시겠는가?”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신랑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겉옷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속옷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피를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모두 주신 그분께서 어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그분은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 저 천국의 모든 것이 모두 그분의 것입니다. 이렇게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신 그분께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은사”란 가장 값있고, 귀한 선물을 말합니다.

“모든 것”이란 영적인 것, 육적인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은사로 받은 성도는, 영적인 결핍을 느낄 수 없습니다. 육적인 결핍을 느낄 수없습니다. 영육간에 풍성한 충만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Ⅲ. 성도는 정죄로부터 자유합니다.

본문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씀입니다(롬1:17).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칭의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송사를 당할 죄를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성도를 송사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성도를 참소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으로, 죄 값을 지불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성도는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심판할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므로, 성도를 심판할 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있음으로, 우리를 심판할 재판석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정죄에서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우리가 미처 기도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히4:16)


성도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패배에서, 모든 궁핍에서,

모든 정죄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사죄 선언  누가복음 23장 33 ~ 38절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의 현장, 골고다 십자가 곁에서 있습니다.

소리와 소리가 뒤엉켜 함성처럼 들려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들의 아우성이 들려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군중들의 야유가 있습니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2)는 조롱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가운데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날 누가 그 십자가 밑에서 사죄의 은총을 입었는가?


Ⅰ. 대 제사장 안나스가 입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24절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라고 했습니다.

안나스는 누구인가? 그는 당대의 제일의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제사장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주범은 누구인가? 비라도 총독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은 빌라도 총독이 아니라 바로 대 제사장 안나스입니다.

제일먼저 예수님‘께 돌을 던진 사람은, 거룩한 큰 종 안나스였습니다.

누가 은 30냥을 주고 가롯유다를 매수했는가? 안나스입니다.

누가 군중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게 했는가?

안나스입니다. 예수님께서 폭도들에게 끌려가 제일먼저 신문 받은 곳이 바로

안나스의 집입니다.


그는 종교를 빙자하여 권력을 잡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부를 축적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딤전6:5). 그는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종교인입니다.

유능한 정치가입니다. 뛰어난 처세가입니다.

그는 로마의 미움을 받아 대 제사장직에서 물러났으나, 그의 아들 다섯을

그의 후임으로 대 제사장이 되게 하고, 아들의 임기가 끝나자 사위인 가야바를

대 제사장으로 세운, 막후 실력자입니다.


그러면 그가 왜 그토록 예수님을 미워했는가?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위치에 도전하는 도전자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항상 수많은 백성들이 다라 다녔습니다.

벳새다 광야에 장정만 5천명이 모이고, 또 7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기적의 떡을 먹고, 기적의 고기를 먹고는,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세우려 하여 예수님께서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안나스가 자기의 위치에 대하여 불안감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이유는 자기의 경제적인 이권이 침해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 안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면서,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했거늘 너희가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도다”고 대노하시면서 그들을 모두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 강도의 굴혈의 주인이 누구인가? 안나스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이 무엇인가? 타락한 종교입니다.

타락한 종교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Ⅱ. 헤롯 안티파스 왕입니다.

그는 B.C.4년에서 A.D.39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한 분봉왕입니다.

그의 아버지 헤롯은 B.C.37년에서 A.D.4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하면문입니다.

그는 세레 요환이 그의 계수와의 불륜을 질책할 때 크게 번민하면서도,

요한의 충고를 달게 받았으나(막6:20), 끝내는 요한의 목을 쳐서 은쟁반에 담아서 그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생일 선물로 준 사람입니다.


Ⅲ. 본디오 빌라도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방면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있었습니다(마27:18).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을 사실해보니 이 사람에겐 죽을 만한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요19:5).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절충안을 내어 놓았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때려서 내 놓겠다”(눅23:22). 군중들은 더욱더 소리 질렀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왕이라 하는 자를 살려두면 가이사 황제에게 불충한 자라,

우리의 왕은 가이사 뿐이라” - 다시 절충안을 내어 놓았습니다.

“유월절에는 죄인하나를 사면하는 전례가 있으니, 바라바라하는 도적과 예수중에 내가 누구를 놓아주랴” 군중들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라바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군중들의 소리가 이겼습니다.


제대로 악하지도 못한 빌리도는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세상 권세에 대한 미련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Ⅳ. 가롯 유다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5절에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판 이유가 돈 때문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구원관의 차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현세적 구원을 생각했습니다.

다윗 왕국의 재현을 꿈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요18:36).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일하실 환경으로 예수님을 몰아갔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걸어 내려오면서 깜짝놀랄 일을 하시기를

가장 바랐던 사람이 가롯 유다가 아니였겠는가?

그는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서,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시게 하려했던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주의 일을 하되 세상 방식으로,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Ⅴ. 베드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8절에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 제사장의 집뜰에 와서”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두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장담하던 주님의 제자입니다(마26:3).

그는 용기도 있었고, 열심도 있었고, 완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말고의 귀를 날렸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실력 때문에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위기가 닥쳤을 때, 멀찍이 물러서서 예수를 따랐습니다.

우리가 주를 따르되 바짝 따라야합니다.

사탄은 한치의 사이에도 수천, 수만의 마귀들을 주둔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도 앞서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커트라인 훨씬 앞에 있는 자를 커트시키는 법은 없습니다.

멀리 뒤따르는 사람의 몫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는 예수님에게 못질하고, 창으로 찌르는 로마 군병들이 있었습니다(요19:32).

십자가에 못 박기를 재촉하는 군중들이 있었습니다(눅23:23).

되어지는 일들을 재미삼아 구경하는 구경꾼들이 있었습니다.

이 수 많은 죄인들을 향하여 성경은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같이 희어 질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십니다(사1:18).

저희들의 죄를 인하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간구하는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상에서의 주님의 기도는 저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 출생당시,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는 베드로를 투옥시킨 사람이고, 그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바울을 목벤 사람입니다.

헤롯 왕가는4대에 걸쳐서 기독교를 박해한 가정입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