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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엘리트 정권의 실패
2025년 1월 12일
아랫글은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를 떠나서 정권 탈취를 생각하였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늦은 밤에 대통령이 갑자기 계엄을 선포하여 대다수 국민은 놀랐습니다.
국회에서 곧바로 계엄 해제를 통과시켜 새벽에는 계엄 해제를 발표하였고 국민은 천만다행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곧이어 며칠 동안 국회에서 장관들과 군대 장성들을 불러놓고 조사하면서 많은 내용이 공개되었습니다.
중계방송을 보는 대다수 국민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장관과 장성 가운데 누구도 정직(正直, honesty)하게 말하지 않고 얼버무렸고 용감하게 정치적 책임(political responsibility)을 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고분고분 윗사람 말을 잘 들으면서 큰 사고 없이 출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2월 14일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통과시켰고 대다수 국민은 환호하였습니다.
탄핵한 뒤로 벌써 한 달이 지나 새해를 맞았으나 범죄 우두머리 윤석열을 체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수처 처장은 법과 원칙을 말하는데 얼굴은 어리석은 척하고 말은 어리바리 더듬듯이 말하여 정말로 체포하려는지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국무총리는 핑계를 대다가 탄핵당하자 잘되었다는 듯이 내려왔습니다.
심지어 몇십 명 국회의원들은 한남동에 모여 범죄자를 지키겠다고 나섰습니다.
2015년 1월 9일 저녁에는 국회에서 어떤 국회의원이 백골단 기자회견을 열어주었고
이를 보는 대다수 국민은 옛날 응어리들이 갑자기 다시 떠올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습니다.
요즘 야당과 여당 정당정치의 정쟁(政爭)을 보면 1백년 전까지도 일어났던 붕당정치의 당쟁(黨爭)을 보는 것 같습니다.
윤석열 개인과 몇몇 종범들은 정권을 탈취하여 독재국가를 만들고
죽을 때까지 권력을 휘두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한국 국민 누구도 정권 탈취를 용서하지 않고 독재국가를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저 역시 어려서부터 독재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폭력적인 광경들을 보았고
1980년대에는 복학하여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살아있는데 누가 독재정권을 찬성하겠습니까?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전국적인 운동의 정치적 목표는
조선 왕조의 왕권 독재체제를 버리고 민주공화국의 대한민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표와 희망을 품었기에 일본 식민통치를 벗어났고 한국전쟁을 치렀고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문민정부를 세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권 탈취 실패에서 커다란 비밀이 들통났습니다. 바로 엘리트 정권이 점점 독재화되어 민주정치의 상호협조와 상호견제 과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치적 가치 지향이 없거나 부족하고(無志), 정책 결정에서 합법 과정이 빠졌고(無法), 국가기관의 상호협조 또는 상호견제가 없다(無協助)는 세 가지입니다.
옛날 붕당정치에서 핵심 수익자는 황제이며 황제는 붕당의 투쟁(黨爭)을 이용하여 황제권을 강화합니다. 개혁파와 보수파는 유위(有爲)와 안정(安靜)이라는 이념 투쟁을 벌입니다. 개혁파는 황제권을 강화하고 왕조를 연명하려고 재정 흑자와 국방력 강화를 주장하면서 백성에게서 세금을 더 걷고 병력을 더 뽑는 방법을 개혁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위기의식을 퍼뜨리고 무엇이든지 하여야 한다는 뜻에서 유위(有爲)를 주장합니다. 그런데 보수파는 개혁과정에서 자신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경제적 이익을 빼앗기니까 겉으로는 백성들이 곤궁하다는 핑계를 달아 조세 확대와 인력 징발을 확대하지 말고 또는 조세와 병력 징발을 축소하거나 감면하는 인정(仁政)을 주장하며 현상을 유지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하늘이 내리는 좋은 시기를 가만히 기다리자는 뜻에서 안정(安靜)을 주장하였습니다.
북송시기 인종 신종 철종 3대의 당쟁을 보면 징세와 병력 징발을 확대하려고 유위(有爲)를 주장한 개혁세력에는 범중암, 구양수, 왕안석, 채경(蔡京), 장돈(章惇) 등이 있습니다. 또 지배층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고 현상유지를 내세워 안정(安靜)을 주장한 보수세력에는 여이간(呂夷簡), 사마광, 소식, 정이천 등이 있고 정이천이 소식과 다투면서 주장한 학술이 성리학입니다. 정이천을 계승한 주희 모두 보수세력이며 백성들에게 자선(慈善)을 베푸는 인정(仁政)을 주장하였습니다.
현재 민주사회에서 정당정치의 핵심 수익자는 국민입니다. 요즘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선거공약을 보면 거의 비슷합니다. 국민은 어느 정당이 국민의 삶과 안전을 개선하느냐에 따라 정권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선거를 마친 뒤에 정치인들은 국민을 버리고 오직 개인의 정치적 이익을 지키려고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이며 권력투쟁을 벌입니다. 그래서 국민만 바라보겠다는 정치인들의 구호는 거짓말이 되었습니다. 정당정치의 권력투쟁을 보면 옛날 붕당정치의 당쟁보다 나아진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상적이고 현실성 없는 말이지만 정당정치는 상대방을 일망타진하겠다는 붕당정치의 투쟁보다는 서로 경쟁하고 협조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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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권은 엘리트 정권의 시작입니다.
엘리트는 상위 계층에서 태어나서 학벌 좋고 경력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엘리트 윤석열은 정직하지(honesty) 않고 공정하지도(justice) 않고 실무능력(practical competence)도 부족하고 정치적 책임감(political responsibility)도 부족하였습니다.
군사독재 정권 시기에는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독재정부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문민정부 이후에는 민주화운동 출신 몇몇 대통령이 민주제도를 뿌리내렸습니다.
뒤에는 경제발전과 남북관계 개선 두 가지 목표를 이루라고 몇몇 대통령을 선출하였으나
두 사람은 무능과 부패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다가 사면받고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공정한(justice) 사회를 만들어 부패를 씻어내려고 법률을 잘 아는 법관 출신 윤석열, 이재명 후보 가운데 학벌 좋은 윤석열을 대통령에 선출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엘리트 정권의 못난 모습들을 모두 보여주었습니다.
첫째, 윤석열 본인이 게으르고(怠慢) 수시로 술을 마시고(飮酒) 항상 들떠서 교만하여(志驕) 우쭐하고 큰소리치며 사람을 무시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감정도 충동적이었습니다. 또 선거에서 약속한 큰 공약을 치밀하게 실행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 실제 사정을 듣고 여론을 수렴하거나 또 실행하면서 실무적 어려움을 찾아내서 수정하고 개선하는 것도 몰랐습니다. 모든 것이 실패하자 결국에는 사람들이 왜 내 말을 듣지 않느냐고 외치며 황제가 되려고 계엄을 꺼내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마음공부가 덜 되어 줏대가 없습니다. 자신이 무슨 사람인지, 나의 책임이 무엇인지, 많은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옛날부터 지적해온 지도자의 나쁜 습관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옛날 군주 평가에서 보면 게으르고 어리석고 마음속 판단이 흐리고 실행방법도 모르는 혼주(昏住)입니다.
둘째, 사교(邪敎)를 믿고 손바닥에 왕(王) 글자를 쓰고 나오고, 부인과 함께 사교에 출입하며 비선 인물들을 만나고 다니며 미신을 믿었습니다. 또 거짓으로 성당에 또 교회에 나갔습니다. 현재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미신을 믿고 판단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종교의 신념보다는 과학의 사실을 믿습니다. 또 조선시대에도 대다수 임금은 미신을 믿지 않고 성리학의 정치적 가치와 나름대로 합리적인 사회과학에 따라 국가정책을 판단하고 실행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번 대통령은 조선시대 임금보다 못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셋째, 인사 임용이 엉성하였습니다. 정치 입문이 얼마 되지 않기에 아는 사람들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와 법대 동창들, 법원에서 만난 선후배와 부하들, 선거에서 만난 비선 인물들 가운데 골라서 고위 관료들을 임용하였습니다. 대통령 본인은 이들의 속마음이 어떤지 실제 능력이 어떤지를 모릅니다.
옛날에도 군주가 인사권을 고위 관원에게 맡기면 고위 관원은 친척과 가까운 집안의 친구(親戚故舊), 사귄 친구(交游執友), 관원생활과 학교생활의 동료(宦學相同), 관원생활에서 만난 인턴과 부하(門生故吏) 가운데 관원들을 등용하여 문제가 많았습니다.
넷째, 야당 또는 반대파 인사들과 정치적 대화를 단절하고 상대방을 완전히 무너뜨리려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정권 실패의 가장 큰 실제 원인이라고 봅니다. 더구나 국회의 여소야대 상황에서 어떤 선거공약도 실행하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야당도 정책 실행에 참여하지 못하자 결국에는 대통령 개인과 가족의 비리를 파헤쳐 여론을 바꾸려고 힘썼습니다. 의료개혁에서도 대화와 설득을 끊고 전제 군주처럼 지시하였기에 실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어떤 개혁도 군주 또는 개혁가 혼자 할 수 없기에 항상 반대파 또는 중도 인사들과 많은 대화하고 설득하고 또 스스로 정책을 조정하고 실행하면서도 수정하였습니다. 심지어 지지세력과 반대파 인사들에게 관직과 뇌물을 주며 회유하였습니다. 따라서 대화와 설득을 단절하는 태도는 정당정치를 파괴하기에 상당히 위험합니다. 정치지도자는 이런 태도를 버리고 조심하여야 합니다.
다섯째,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지지 않습니다. 사실을 숨기고 덮거나 회피하는 거짓말이 많았고 상황이 바뀌면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었습니다. 또 자신의 무능함을 남 탓으로 돌렸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행동 습관이 어떤 일을 깊이 멀리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말하고 행실이 천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풍조를 고치려면 사회 전체가 도덕성을 향상시키고 칭찬과 처벌의 윤리를 잘 운용하여야 합니다. 또 학생 교육과 성인의 사회교육에서 도덕 가치와 보상을 잘 알려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는 우리 사회가 부국강병을 넘어 더 높은 가치와 목표를 다시 세우고 서로 공감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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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정치에서 가장 큰 문제는 당쟁과 정치인의 부박(浮薄)입니다.
옛날 조선이나 중국 송나라의 붕당(朋黨)정치 투쟁을 보면 자신이 군자(君子)이고 상대방을 소인(小人)이라고 비난하였고 특히 엘리트 붕당정치의 투쟁에서는 나는 옳고(正) 상대방은 삐뚤어졌다(邪)고 비난하고 몰아내려고 싸웠습니다. 붕당 투쟁에서 자신(君子)이 소수이며 항상 소인들이 군자를 이긴다고 피해자 모습을 나타내며 군주가 나서서 자신들을 보호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붕당 투쟁에서 나온 말들을 보면 상대방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망타진(一網打盡)을 외치며 싸웠기 때문에 미움과 원한이 깊어지고(喜怒愛憎) 원한이 뼛속까지 맺히고(怨入骨髓) 심지어 부관참시(斵棺暴尸)를 하려고 들었습니다. 구양수 말처럼 당쟁의 끝은 조정에 올바른 관원이 없이 텅 빈 국가를 되었고 올바른 사람 아무도 정치에 나서지 않아(空國而無君子) 결국에는 국가가 멸망하였습니다.
옛날 엘리트 통치에서도 높고 좋은 가문에 태어나서 공부 잘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국가의 핵심 기관에서 근무하는 관원들이 가장 많이 들었던 비난은 부박(浮薄 : 浮薄輩, 浮薄之黨, 衣冠浮薄之徒, 浮薄新進喜事之人)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박의 글자 뜻은 견해가 이리저리 들떠 바꾸고 행실이 신중하지 못하다는 평론이며 정치적인 뜻은 높고 좋은 가문의 출신이라는 혐오입니다.
조선에서는 이준경 선생이 당쟁 조짐을 알리면서 부박한 사람들의 태도를 지적하였는데 잘났거나 못났거나 “국가 대사를 함부로 떠들며 몰려다니면서 높고 우아한 척하는 거짓(高談大言,結爲朋比者,以爲高致,遂成虛僞之風)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이율곡 선생이 이준경 선생의 글을 낱낱이 비판하고 비난한 것을 보면 서로 원한이 많이 쌓였다는 것이 보입니다. 이건창 선생은 『당의통략』에서 조선 멸망 원인이 심각한 당쟁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아무튼지 조선 임금들은 당쟁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왕조를 연명하다가 멸망하였습니다. 물론 당쟁이 성리학 연구를 촉진하였고 성리학 해석권을 쥔 당파가 권력을 잡았답니다.
중국 역사를 예로 들면 당나라 말기에 황소(黃巢)와 주전충(朱全忠) 모두 사족(士族) 엘리트 정치의 불공정한 피해를 겪으며 원한이 쌓여 결국 반란을 일으켜서 당나라 290년 왕조를 무너뜨렸습니다. 이들은 엘리트 관원들이 당쟁을 일삼고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을 생각지도 않는 사족(士族)사회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전충은 이진(李振)의 말을 듣고 905년 6월에 당쟁을 일삼던 소위 깨끗하다는 엘리트 관원(衣冠淸流) 30여 명을 백마역(白馬驛)에 불러 모은 뒤에 죽여서 혼탁한 황하에 던져버렸습니다. 결국에 주전충은 당나라 엘리트 정권을 무너뜨렸고 후량(後梁)을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양수는 백마역 사건을 가장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주전충과 이진(李振) 등의 비난을 보면 높고 좋은 집안에 태어나 똑똑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핵심 관청에 근무하면서 행실을 조심하고 평판이 좋았던 사람들을 부박(浮薄)하다고 비판하였다.“(『資治通鑒』, 卷265, 唐紀81:“門胄高華,或科第自進,居三省台閣,以名檢自處,聲跡稍著者,皆指以爲浮薄。”)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이들은 군자이지만 속마음을 보면 자신들의 계층 이익을 굳건히 지키려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당나라 말기와 오대(五代)를 거쳐 북송과 남송 시기에는 과거시험을 확대하여 평민에서도 엘리트를 뽑는 사대부(士大夫) 사회가 형성되었고 엘리트 정치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송대에는 당쟁이 아주 치열하였고 관원들의 부박한 현상도 심각하였습니다. 송대 인물들의 전기를 보면 대체로 부박하다 경박하다고 욕하는 평론이 많고 중후(重厚)하다는 평론은 아주 적습니다. 명나라 시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왕양명은 지식인과 관원이 좀 더 충신(忠信)하기를 바라며 가르쳤는데 명나라 말기에는 오히려 왕양명 후학들이 부박하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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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정권에서 정치인의 부박(浮薄)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쉽지 않습니다만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국민은 엘리트 인물을 무조건 추앙하거나 숭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트는 그냥 학교 공부를 잘하였던 학생이며 절대로 구세주가 아닙니다.
둘째는 하층에서도 상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잘 놓고 끊어지지 않도록 성과 분배에서 공정함(justice)을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양한 분야에서 정치지도자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셋째는 엘리트를 20대 대학 학벌에 고정하지 말고 늙어서까지도 공개 경쟁시켜 실무능력을 검증하여야 합니다. 기업이 돈을 벌려면 시장 동향을 잘 알고 기술을 혁신하여 경쟁하듯이 엘리트 정치인들도 국민의 생활과 미래에 대한 여론을 잘 알고 정책을 개발하여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국민은 좋은 여론을 만들고 평가하여야 합니다.
넷째는 엘리트 본인들도 국내 경쟁에서 벗어나서 가정과 사회 나아가 인류에 공헌할 다양한 분야를 찾아야 합니다. 권력과 돈을 쥐는 법관과 의사를 최고 직업을 선택하지 말고 개인이 올바른 자기 기쁨을 찾고 또 최고 경지에 올라가 사회에 널리 봉사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야 합니다.
다섯째, 엘리트 정치인들은 먼저 개인과 사회에 대하여 다양하고 깊이 이해하고 본인 나름대로 정치사회에 대한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정치에서 봉사하겠다고 결심하였다면 서로 경쟁하면서 협조하는 것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래서 조선 성리학에서도 정치 가치가 인정(仁政) 또는 대인(大人) 정치라고 가르치거나 신라와 고려 또 당나라와 원나라의 불교에서도 항상 지혜와 자비(慈悲)를 말하여 보살 정치를 외쳤답니다.
첫댓글 옳은신 말씀입니다.
나라의 미래가 걱정입니다.
엘리트 정권의 시작 이란 말씀이 맘에 강하게 다가 왔습니다.
새로운 형태 권력 유형이 추가된 걸로 이해하면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