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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Asian Center for Theological Studies and Mission), 약칭 ACTS를 모체로 하여 태어난 신학대학교다. 교회지도자들이 결의함으로서 한국에 세운 국제적이고 복음주의적이며 교회연합적인 신학대학교다. | |
시작은 이랬다. 반세기를 바라보는 지금은 어떤가.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 산151번지 1, 한강변에 수도원처럼 자리잡고 있는 이 학교가 초심을 잃지 않고 있는지 후원자들의 면면을 보면 확인할 수 있겠다. |
야평군 양서면 신원1리 월계마을(月溪)은 옛 평해대로의 월계역이 있던 곳이다.
다소 썰렁은 하나 가례 초야에 방귀뀌고 유배당한 왕비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부용산에는
신라때 축성했다는 신원리성터(城址)가 있단다.(아래 그림1, 2)
임금의 권위가 아무리 지엄하다 해도 단지 생리현상일 뿐인 방귀 한 번에 왕비를 귀양보내는
왕이라면 행복하기는 애당초 틀린 것 아닌가.
뷰용산 유배중 태어난 왕자가 사연을 알고는 도성에 가서 황당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저녁에 심고 아침에 따먹을 수 있는 오이씨를 사라"고.
의도한 대로 왕에게 불려간 소년의 "다만 저녁에 방귀를 뀌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에 비로소
깨달은 왕이라면 자격미달 아닌가.
문득, 한 때 회자되어 실소를 불금케 한 다른 방귀 실화가 떠오른다.
이승만 대통령 때의 일이다.
장관들이 들을 수 있을 만큼 대통령이 뀐 방귀소리가 컸던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L 모 장관의 알랑방귀 였다나.
금도가 있는 왕이라면 민망해 하는 왕비에게 이 정도는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두물머리'는 양수리(兩水里:경기도 양평군 양서면)다.
북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회양(淮陽)을 거쳐 남류, 춘천(春川)을 지나 양수리까지 온다.
남한강은 태백시 금대봉 기슭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 370km가 넘는 먼 여행 끝에 양수리에 당도한다.
그리고 한 지점에서 합수한다.
이 지점을 두물머리 또는 양수리라 일컫는다.(아래 그림)
평창군에서는 진부면 오대산 우통수(于筒水)가 남한강의 발원지라고 우긴다는데 전혀 근거 없이 주장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교롭게도 평창은 건건사사 일방적이어서 고백컨대 내게 평창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남양주시 와도읍 도곡리 6번국도변 레스토랑 '푸른꽃' 옆에서 맞은 일몰 장면이다.(아래 그림1, 2, 3)
굳이 부산을 떨며 멀리 갈 것 없지 않은가.
덕소의 신앙촌은 기독교 열광주의자들의 집단중 하나다.
소위, 박태선 장로의 '천부교'(天父敎)는 1950년대 중엽에 경기도 소사에서'전도관'으로 시작했다.
덕소와 부산 기장 등지에 차례로 확장하면서 '신앙촌'이라는 특수공동체로 발전하더니 그는 마침내
천부교 교주가 되었다.
그런데, 신앙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신앙촌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도가 높다.
어떤(사회학적인)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남양주시 삼패동 평구마을은 옛 평구역이 있던 곳이다.
향토사의 보고(寶庫)인 삼패2동(三牌) 평구마을 경로당을 찾아갔으나 실패했다.(아래 그림1)
한양길 40리를 남겨둔 평구역터를 확인해 보려고 그랬는데 토박이 꼬부랑 노옹이 모른다니.
전남산(産)으로 이 마을 27년째라는 67세 영감의 구전(口傳) 내용은 별로였다.
평구마을을 지나는 옛길이 덕소삼패IC때문에 지리멸렬됐다는 정도뿐.
한데, 이조17대 효종때의 상신(相臣)인 청풍인(淸風人) 잠곡 김육(潛谷金堉)의 묘가 왜 여기에?
그는 대동법과 시헌력(時憲曆)의 시행을 비롯하여 양수용 수차제작, 상평통보 주조 유통시도 등
혁혁한 족적을 남긴 명신이다.
그럼에도 그는 두 아들의 과공으로 유사 이래 최초의 호화분묘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쟁을 더욱 격화시킨 '김육 묘수도사건'(墓隨道事件)이다.(아래 그림2)
김육의 두 아들(佐明과 祐명)이 부친의 묘소를 만들 때 광중(壙中)을 굴(窟)처럼 만들어 굉장히
크게 하고 옛 왕후의 능같이 했다.
효종 10년(1659년)에 민유중(閔維重:훗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부친)이 이를 문제 삼아 결국
개장했는데 지금의 묘소가 그 때 개장한 묘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여기 삼패동이 청풍김씨의 집성촌으로 역대 선조들의 묘소가 있는 곳이란다.
청풍김씨는 3대정승(三代政丞)과 부자영상(父子領相), 4대6상(四代六相)을 배출한 이름있는 성씨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에 선산(善山)에 유배되었던 김식(金湜)은 다시 절도(絶島)로 이배된다는 소식에
경남 거창(居昌)으로 피해 그곳에서 자결했다.
그의 관을 청풍(淸風)의 선산에 모시기 위해 남한강을 거슬러 오르던 중 바람에 붉은 명정이 떨어진 곳이
바로 삼패리 김식의 묘 자리였단다.
선조의 묘소를 따라 자연스럽게 삼패리(三牌里)가 청풍김씨의 집성촌이 되었다는 것.
이조 중종때의 성리학자이며 조광조파(趙光祖)의 일원으로 이른바 기묘팔현(八賢)의 한 사람인 사서 김식
(沙西金湜 1482~1520)은 청풍김씨 문의공파(文毅公:그의 시호)의 시조이며 김육은 그의 후손이다.
왕숙천(아래 그림1~4) : 토평교에서 6번국도의 왕숙교까지.
망우리고개의 옛날(중년)과 현재(아래 그림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