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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Gilles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 첫 문장: "반복은 일반성이 아니다"(25). 차이와 반복들뢰즈는 반복과 일반성를 구별짓는다. 그는 이렇게 구별짓는다. [...] 그렇지만 이런 논평에서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듯 보인다. 첫 문단을 거듭해서 읽은 후에 나는 들뢰즈가 자신의 첫 문장을 얻거나 다듬고자 작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까닭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왜 이렇게 시작하는가? 어느 누구가 실제로 반복과 일반성을 동일시하는가? 나는 진정으로 묻고 있다. 여기서 들뢰즈가 참고하고 있는 철학적 전통이 존재하는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 내 방식으로, 나는 들뢰즈가 반복에 관한 그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자명한 이치와 대조시키고 있다고 추정한다. A 일반에 관해 말할 수 있도록 항 A가 다른 한 A와 식별 가능한 특징들을 공유하는 한에 있어서만 항 A가 반복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단풍나무 일반에 관해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단풍나무가 그것이 여타의 단풍나무와 공유하는 일반성 또는 특성들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특수한 사물들이 공유 특성들을 반복하게 되는 조건으로서의 일반성에 관한 이런 의미는 그가 반복을 이해하고 싶은 방식이 전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단순한 내 사례를 사용하면, 들뢰즈는 특수한 단풍나무들이 잎 모양과 색깔, 성장 속도, 껍질 조직, 목재 경도, 나뭇결 등을 반복하기 때문에 우리가 단풍나무 "일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반복은 이런 특징들과 아무 관계도 없다! 들뢰즈는 첫 단락을 첫 문장의 약간 바꾼 유용한 재서술로 끝을 맺는다. "반복과 유사성 사이에는 본성상의 차이가 있다. 그 유사성이 지극히 큰 경우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 여기서 일반성과 유사성의 대등성을 감안하면, 단풍나무 사례를 다음과 같이 정교화할 수 있다. 일반성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특수한 단풍나무들은 서로 유사하지만, 서로를 반복하지는 않는다. 좋다. 둘째 단락에서 들뢰즈는 이런 처음의 구별짓기에 어떤 개념적 내용을 부여한다. 반복과 일반성은 각각의 "행동[들]"에 상응하는 별개의 "관점[들]"을 표현한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일반성은 "두 가지 커다란 질서를 거느린다. 그것은 유사성들이라는 질적 질서와 등가성들이라는 양적 질서이다."(25) 이런 두 질서는 독자적으로 두 가지 "각각의 상징들", 즉 순환 주기와 동등성들에 상응한다. 하나의 관점으로서의 일반성에 상응하는 행동은 (일반성의 질서와 상징들을 감안하면) "특수한 것들 사이의 교환과 대체"이다.(25) 양적 질서: 나는 25달러 일반을 이해하는데, 왜냐하면 각각이 애초의 일반 가치를 상실하지 않은 채 서로 대체되거나 교환될 수 있는, 25달러를 구성할 수 있는 특수한 동등한 것들이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25개의 1달러 지폐, 5개의 1달러 지폐와 4개의 5달러 지폐, 1개의 10달러 지폐와 3개의 5달러 지폐 등). 질적 질서: 나는 단풍나무 일반을 이해하는데, 각각의 특수한 단풍나무가 다양한 발달 순환 주기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런 순환 주기들을 이해함으로써 나는 특수한 단풍나무들 사이의 유사성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들이 이런 순환 주기에서 별개의 단계들에 처해 있을지라도(그래서 서로 전혀 닮지 않은 듯 보일지라도) 말이다. 예를 들면, 어느 단풍나무가 훼손되었다면, 나는 그것을 파낸 다음에 일반성이라는 관점을 저버리 지 않은 채 대체 묘목을 심을 수 있다. 그 묘목은 동일한 순환 주기를 따를 것이다. 알려진 범주들에 따라서 그것은 훼손된 나무와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같은 것이다. 일반성은 어느 특정한 방식(교환 또는 대체)으로의 행동에 상응하는 두 개의 질서(질적 질서와 양적 질서) 와 두 개의 상징(순환 주기와 동등성)을 갖추고 있는 관점에 관련된다. 들뢰즈는 반복의 질서들이나 상응하는 상징들을 아직 묘사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에게 명확하게도, 반복은 하나의 관점인 동시에 하나의 행동, "대체할 수 없는 것과 관련해서만 [...] 필연적이고 정당화된" 행동, 즉 "교환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독특성과 관계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일반성의 사례들을 제시하지 않는 반면에, 어떤 흥미로운 반복의 사례들은 제시한다. "반영, 반향, 분신, 영혼들 등은 유사성이나 등가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진짜 쌍둥이 사이에 대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하물며 영혼의 교환이라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26) 제임스 윌리엄스(James Williams)는 각각의 "반복의 경험은 반복의 지속과 연계된 강렬한 반응들을 수반한다"고 설명한다. 나는 윌리엄스가 약간 성급히 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들뢰즈의 요지의 엄격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주목하는 대신에 안달하는 독자를 진정시키고자 한다. 들뢰즈의 사례들은 흥미로운데, 그것들이 기묘하거나 강렬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평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 자신과 거울 속의 내 반영 사이에 맺어진 관계와 이 단풍나무와 저 단풍나무 사이에 맺어진 관계의 차이를 감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풍나무들은 서로 유사하다. 내 반영은 나를 반복한다(그러나 나와 유사하지 않다). 반영, 반향, 분신 그리고 영혼들을, 마치 그것들이 자체가 반영하고, 반향하고, 배가하거나 영혼을 불어 넣는 것과 일반성들을 공유하는 것처럼, 유사성에 의거하여 언급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라고 들뢰즈는 주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나의 반영, 반향, 분신 그리고 영혼은 범주적인 그 어떤 것(양적 또는 질적)도 나와 공유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나를 대체할 수 없다. 누구도 내 우정을 내 반영 또는 내 반향의 우정으로 대체할 수 없다. 내 쌍둥이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상이한 우정을 개시하는 것이다("일반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우정은 우리 자신의 우정과 유사할 것이지만). 이런 반복들은 "원본"이라고 잠정적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을 그것의 가치, 강도 또는 반응성과 무관하게 표현한다. 여기서 나는 윌리엄스와 의견이 일치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내 반복들은 (이 논증에 따르면) " [어떤] 차이의 지속"을 표현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나를 하나의 독특한 것으로 표현하고, 그것들은 내("내"가 무엇이든 간에)가 만들어 내는 차이를 표현한다. 들뢰즈는 개념적 구별짓기의 최초의 단계를 이렇게 종결한다. "만일 교환[또는 대체]이 일반성의 기준이라면, 절도와 증여는 반복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양자 사이에는 어떤 경제학적 차이가 있다."(26) 여기서 윌리엄스의 서술("반복의 경험은 강렬한 반응들을 수반한다"는 서술)에 대한 어떤 증거를 볼 것 이다. 나와 내 반영의 문제에서 절도나 증여의 경제를 정위하는 것은 어렵다(거울이 나 또는 내 영혼을 절도한 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미지의 생산―거울, 사진 또는 비디오에서―이 내 영혼의 절도를 구성 한다는 여러 문화적 전통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분신" 서사들은 확실히 경제와 강도에 있어서의 이런 변화를 예증한다. 예를 들면,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윌리엄 윌슨(William Wilson)>이라는 단편 소설에서 주인공의 불안은 교환이나 대체의 문제와 아무 관련도 없지만, 윌슨의 감각 탓으로 그의 독특함이 절도 당한다(이른바 정체성 절도에 대한 우리 자신의 현대적 불안을 예시한다). 내 우정 속에서 나는 독특한 것(나)을 증여한다. 친구(또한 특이한 것[그]을 증여하거나 억누른다)와의 관계에서 나는 대체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출현하는데, 나의 독특함이 증여되거나 절도당할 때 실제로 내가 통제하고 있는가? 분신의 경우이든 우정의 경우이든 간에, 행위 주체성의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내가 우정을 계발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나의 독특함은 나의 의식적인 동의가 없다면 증여되거나 절도당할 수 없다. 내가 앞서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독특한 것으로서의 나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 개체로서의 나에 관해 말하는 것과 같은가? 다른 기회에 검토할 문제이다. 요약하면, 한편으로 사물들이 특수한 양 그리고/또는 질을 공유한다면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서로 유사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서로 대체되거나 교환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물들은 서로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들 각각의 "교환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독특 함이, 예를 들면, 반영 또는 분신 또는 반향 또는 영혼에 의해 표현되게(증여되게, 절도당하게) 될 때에만 사물들은 반복을 경험한다. 다음 글에서 나는 들뢰즈의 세번째 단락에서 거론되는 몇 가지 더 흥미로운 반복 사례들, 축제, 혁명 그리고 예술 작품을 살펴볼 것이다. 이것들은 어떤 식으로 반복 일반이 될 것인가? 그리고 왜 들뢰즈는 네번째 단락에서 "법칙들의 질서"를 제기하는가? 상황이 빠르게 복잡해지고 있다... [...] 앞에서 들뢰즈가 반복을 하나의 "관점"과 "행동"으로 지정한 것을 다시 강조하자. 들뢰즈는 계속해서 적는다. "반복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사한 것도 등가적인 것도 갖지 않는 어떤 유일 무이하고 독특한 것과 관계하면서 행동한다는 것이다."(26) 앞 문단에서 이루어진 반복과 일반성 사이의 개념적 구별짓기를 감안하면, 이 주장은 내게 명료하지만, 여전히 두 가지 문제가 나를 약간 괴롭힌다. 첫째, 나는 무엇보다도 무언가가 어떻게 유일무이하고 독특할 수 있는지 아직 모르겠다(나중에 들뢰즈가 이것을 다룰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둘째, 어떤 종류의 행동이나 행태가 반복에 관한 그의 사례들, 즉 "반영, 반향, 분신 [또는] 영혼들" (26)에 연관될(또는 할당될) 수 있는지 결코 명료하지 않다. 내가 어떤 종류의 행태를 할당할 수 있는 이 사례들 가운데 유일한 것은 분신일 것이다. 천천히 읽기(1.1)에서 거론된 에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이라는 사례를 떠올리자. 미스터 윌슨의 분신은 확실히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 행동한다. 나를 화나게 하기 위해 그 아이가 한 일은 나를 완벽하게 흉내 내는 것이었다. 말과 행동 둘 다 말이다. 그리고 그 아이의 흉내 내기는 정말 감탄할 만했다. 내 옷차림을 따라하기는 아주 쉬웠다. 내 걸음걸이나 일반적인 행동도 큰 어려움 없이 모방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내 목소리까지 따라했다. 물론 감히 내 목소리의 크기까지 흉내 낼 수는 없었지만, 음색 자체는 똑같았다. 그리하여 그 아이 특유의 속삭임, 그 속삭임은 다름 아닌 내 목소리의 메아리가 되었다. 몇 단락 뒤에, 그의 분신이 잠자고 있는 동안 그의 침실로 소리 없이 들어간 독특한 미스터 윌슨은 이렇게 감탄한다. 이것이, 바로 이것들이 윌리엄 윌슨 얼굴의 면면이었던가? 나는 실제로 그 면면을 보면서도, 그것이 그의 것이 아니라는 착각 속에서 학질 병자처럼 오한으로 덜덜 떨었다. 그의 얼굴 중 어떤 면이 이렇게 나를 혼란에 빠지게 한 것일까? 나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고, 그러는 동안 여러 가지 모순된 생각으로 머리가 팽팽 도는 느낌이었다. 깨어 활동하는 동안의 그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결단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이름도 똑같았다! 몸집도 똑같았다! 학교에 도착한 날까지 똑같았다! 그리고 그는 내 걸음걸이와 목소리와 버릇과 태도마저 끈덕지고도 무의미하게 모방했다! 과연 지금 내가 목격하고 있는 이 모습을 단순히 그가 나를 습관적이고 조소적으로 모방한 결과 라고만 볼 수 있는 것일까? 사실상 미스터 윌슨의 분신은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결코 행동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가 행 하는 모든 것과 그의 모든 모습―그의 이름에서 그의 목소리, 태도와 속삭임과 걸음걸이와 옷차림과 키와 나이까지―이 미스터 윌슨의 독특함을 향해 정향되기 때문이다(마치 미스터 윌슨이, 이른바, 그의 분신의 모든 행위와 활동의 영원한 간접적 대상인 것처럼). 이것은 환상적인 행동의 반복이다. 내게는 들뢰즈가 개념화하고 있는 행동―그리고 포 소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어느 고차원 활동, 즉 다른 활동들―반영, 시연, 분신, 반향, 낭송, 속삭임 등―을 특징 짓거나 굴절시킬 수 있는 활동으로서의 반복인 듯 보인다. 요약하면, 반복은 교환 불가능한 독특함의 간접적 대상으로 인해 두드러지는 활동이다. 이런 문법적 은유는 들뢰즈가 바로 앞의 문장에서 제시하는 반복의 경제적 모형, 즉 절도와 증여의 경제를 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분신의 모든 활동은, 그것이 은밀하게 미스터 윌슨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절도 행위처럼 작동하는데, 미스터 윌슨의 고유성을 자기 현존의 구석구석에 슬며시 집어넣는다(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한 일―그의 독특함을 없애 버리는 것, 그를 반복하는 것―을 할 조짐이 있다). 이런 조짐이 화자의 두려움과 불안의 진정한 원천을 구성할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든 불분명한 점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사과한다. 나는 들뢰즈의 논리에 들어가려고 노력 하고 있다. 내가 어딘가에 도착하고 있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그는 이렇게 적는다. "그리고 외적인 행동에 해당하는 이 반복은 그 자체로 아마 더욱 비밀스러운 어떤 떨림의 반향일 것이다. 그것은 더욱 심층적이고 내면적인 어떤 반복의 반향, 다시 말해서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단독자 안에서 일어나는 반복의 반향이다."(26) "아마"라는 낱말이 들뢰즈의 입문의 어조를 확신과 확실성("반복은 일반성이 아니다")에서 불확실성으로, 또는 더 정확하게 명제에서 암시로 변화시킨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서 들뢰즈는 우리를 유혹하려고, 우리의 내면에 분석과 도발적인 논증이 여전히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뿐 아니라 직관적 동의도 촉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간략히 서술하면, 분신의 행동은 원본 또는, 그의 낱말을 사용하면, 독특한 것이나 단독자의 더 근본적인 조작의 결과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반복의 원천은 거울 속에 또는 분신 속에 또는 반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반복하는 대상의 "더 비밀스러운 어떤 떨림" 속에 있다. 들뢰즈는 놀랍도록 구체적인 일례를 제시한다. "축제에는 바로 그런 역설, 즉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반복한다는 명백한 역설이 놓여 있다. 첫 번째 것에 두 번째, 세 번째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첫 번째 것을 'n승'의 역량으로 고양시 키는 것."(26) 들뢰즈가 '다시 시작할 수 없는(irrecommencable)'이라는 낱말을 사용한 점이 중요한데, 그것의 어근은 "반복"이라는 낱말과 동의어면서 "다시 시작하기"라는 추가적인 의미도 품고 있다. [...] 반복한다는 것은 이전에 개시된 것의 독특한 조건을 다시 한 번 생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런 애초의 교환 불가능한 조건을 향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반복한다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축제이다. 미스터 윌슨이 스토리를 전개하는 한에 있어서 여기서 포는 또 다시 꽤 유용하다. 모든 외적인 행동은 그(그의 분신이 아니라)에 의해 문자 그대로 활성화된다. 이 사례와 들뢰즈 자신의 사례 사이의 유사성을 끌어내면, 미스터 윌슨의 분신이 펼치는 각 행위는 "첫 번째 것"에 대한 일종의 축제 또는 행사이다. 그것 자체로 분신은 아무 내용도 없는데, 그것은 단지 "첫 번째 것"(미스터 윌슨의 독특함)을 더 높은 역량으로 "고양시키"는 형식 또는 용기이다. 들뢰즈는 계속해서 이렇게 적는다 "이런 역량의 관계 안에서 반복은 어떤 내면성을 획득하는 가운데 전도된다."[26-7] 뭐라고? 들뢰즈는 오로지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독특함의 떨림(이것이 무엇이든 간에)은 그 자체로 외재적 반복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것인데, 반복의 내면화가 일어날 어떤 반영, 기념, 행사, 반향 또는 축제에 근거를 제공한다. 나는 들뢰즈의 이원적인 내재적/외재적이라는 술어의 사용에 있어서 약간의 서투름을 감지하기 시작하고 있다. 또한 독특한 것의 "내재적" 작동도 "반복"으로 불려야 하는 까닭이 전적으로 명료하지는 않다. 하나의 과정 또는 기념으로서의 반복은 독특함과 반향 둘 다(외재적이지도 않고 내재적이지도 않는; 두 개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의 복합 반복)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 문단의 나머지 부분은 꽤 놀랍다. "축제"의 더 구체적인 예를 감안하면서 들뢰즈는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프랑스 철학자들이 사건 또는 역사적 특이점에 대한 그들의 감각을 구체화하려고 시도할 때의 한 가지 일반적인 사례)뿐 아니라 "모네의 첫 번째 수련"도 거론한다. 그래서 우리는 쌍둥이와 반영과 반향이라는 평범한 사례들(그리고 분신과 영혼이라는 환상적인 사례들) 에서 혁명과 회화의 사례들로 이동했다. 나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페기(Peguy)의 말을 인용하면서 들뢰즈는 몇 문장 앞에서 "그리고 외적인 [...]"으로 시작한 활동의 전도를 완결한다.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반복은 독특함 자체의 결과일 뿐(필연적이지만)이다. 독특한 것은 반복한다. 그것이 바로 독특한 것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들뢰즈에 따르면, 독특한 것이 반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데, "특수자의 일반성이라는 의미의 일반성은 독특한 것의 보편성이라는 의미의 반복에 대립한다."(27)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을 기념하고 반복하는 "7월 14일 축제"는 "모든 축제일들을 미리 앞서서 기념하고 반복하는"(27) 최초의 사건의 결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모네의 수련은 미리 앞서서 "다른 모든 수련들을 반복한다".(27) 반복에 대한 이런 재규정은 문법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독특한 것을 "간접적 대상" (앞의 포 사례를 보라)에서 "주체"의 그것으로 이동시키기 때문이다. 뒤에 이어지는 모든 반복을 실행하는 것은 독특한 것(첫 번째 윌리엄 윌슨, 바스티유 감옥의 우발적인 점령, 최초의 수련의 출현)이다. 들뢰즈는 이런 문법적 변화의 개념적 의의와 결과를 알아낼 것이라고 추정된다. 여기서 모네의 사례는 들뢰즈의 사유 열차의 철로를 완전히 벗어난다(또는 최소한 이 서론에서 준비한 것을 재정향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예술작품은 개념 없는 독특성의 자격에서 반복된다."(27) 이것은 칸트(Kant)의 제3 비판(아름다움은 "개념 없는", 즉 효용이나 이해관계 없는 쾌락의 "보편적"인 경험이다라고 주장하는)의 반향인가?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맡길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 나중에 들뢰즈는 제3 비판을 거론할 것이기 때문에 그럴 법하다. 계속 나아가면, 들뢰즈는 놀랍도록 소박한 진술을 제시하는데, 우리는 시를 "가슴에" 새겨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머리는 교환의 기관이지만 심장은 반복을 사랑하는 기관이다."(27) 들뢰즈는 이성과 오성이라는 마음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반성의 활동과 훨씬 더 본능적이고 정동적이고 육체적이고 감각적이며 (주장을 감상화하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반복의 활동을 구별짓고 있는 듯 보일 것이다. 확실히 반복 또한 머리에 의해 감지될 수 있지만, 들뢰즈는 머리가 반복을 "공포스러운 것 또는 역설"로 경험한다고 부수적으로 진술한다. 반복은 일반성에 대한 인식론적 파악을 넘어서기 때문에 "나의" 독특 함의 반복에 대한 어떤 관찰도 일종의 공포로 대면하게 될 것이라고 짐작될 것이다. 또 다시, "윌리엄 윌슨"이라는 환상적인 사례(일반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것이지만)가 언제든지 쓸 수 있는 멋진 사례이다. 자신의 분신을 만나게 되는 것은 "머리"의 경우에 고민거리를 의미하겠지만, 시를 낭송하거나 사건의 독특함을 기념하는 것은 독특한 것에 대한 "가슴에 의한" 일종의 느낌 또는 사랑을 필요로 한다. 들뢰즈는 일반성과 반복을 구별짓는 다른 한 사례―피우스 세르비엔(Pius Servien)에 의한 "과학의 언어" 와 "서정적 언어" 사이의 구별짓기―를 제시하지만, 나는 이것에 관해 성찰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여기서 과학과 예술 사이의 대립을 인식하고 들뢰즈가 이 두 영역(각각 일반성과 반복과 결부되는)과 관련하여 철학을 어디에 정위시킬 것인지 궁금해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철학은 그것들 둘 다의 불가사의한 반복일 것이다. 세 번째 단락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를 첫 번째 단락의 마지막 문장(둘 다 반복과 구별되는 일반성과 유사 성을 등치시킨)으로 돌아가게 한다. "반복은 항상 어떤 극단적 유사성이나 완벽한 등가성으로[즉, 질적 으로 또는 양적으로] '재현'될 수 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즉, 수량적으로 또는 진화적으로 또는 표면 적으로] 한 사태에서 다른 한 사태로 이행할 수 있다고 해서 두 사태 간의 본성상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27) 이 진술이 아직 대단히 중요한 듯 보이지 않을지라도, 흥미롭게도 들뢰즈는 "일반성"이라는 개념과 "반복" 이라는 개념 사이에 "차이"라는 술어를 분할한다. 첫 번째 유형은 "정도(degree)"(질적 및 양적)의 차이와 관련되어 있고, 두 번째 유형은 더 본원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 추정되는 무언가, 즉 "종류(kind)"의 차이와 관련되어 있다. 이런 후자의 차이는 반복의 과정에 엄격히 결부되어 있고, 그래서 들뢰즈가 차이 자체를 어떻게 재개념 화할 것인지에 대한 어떤 암시를 제공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그것이 최소한 어떤 일반성들을 공유하게 되는 다른 무언가"와 차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들뢰즈는 독특한 것(그리고 오로지 독특한 것)에 속하는 차이에 관한 관념에 개념적 내용―"유사한 것도 등가적인 것도 갖지 않는 어떤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것"(26)―을 부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로부터의 차이"가 아니라 "...의 차이". 차이 그 자체.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 차이와 반복. 종류(본성)에 있어서의 차이와 독특하고 교환 불가능한 것의 반복. 차이 그 자체와 대자적 반복(그래서 1장과 2장의 각각의 제목).' 벤자민 하겐(Benjamin Hagen)